〈 47화 〉047. 3막 3장 - 티파나에서 휴식을 (4) / Isaac
저녁 식사 시간. 저택의 식당에 나와 글린다, 마르코스가 모여있다. 기다란 식탁에 모여 앉은 우리. 약간 어색하긴 하지만, 견딜 수 있을 거 같다. 식탁 중앙에 놓여있는 의미를 알 수 없는 초가 타오른다.
"식사가 준비되었습니다."
식당의 문을 열고 시종들이 들어온다. 그들이 끌고 오는 수레에는 접시가 가득히 담겨 있다. 시종들이 식탁으로 접시를 하나씩 옮긴다. 횅하던 식탁이 서서히 채워진다.
말 그대로 화려한 식탁. 형형색색의 음식들이 가득하다. 여태까지 본 적이 없는 종류도 한가득. 글린다는 기대된다는 듯이 양 손바닥을 문지른다.
"그럼 식사를 시작하기 전에 기도부터 하세나."
기도? 마르코스는 오른손을 가슴에 올리고 고개를 숙인다. 글린다도 마르코스와 똑같은 행동을 취한다. 일단 따라 해야겠지? 나도 오른손을 가슴에 올리고 고개를 숙인다.
"천지를 지으시고 우리를 사랑하사 오늘의 식사를 내려주신 신이시여. 언제나 당신에게 감사를 드립니다."
식사에 대한 감사기도인가? 글린다가 하는 건 한 번도 못 봤는데.
"또한, 이 식사가 우리에게 올 수 있도록 도와주신 몰론님께도 감사를 드립니다."
잠시의 침묵이 흐른다.
"그럼 식사를 시작하도록 하지."
마르코스가 식기를 집어 드는 소리가 들려온다. 숙였던 고개를 들어 올린다. 글린다도 어느샌가 포크와 나이프를 들고 있다.
두 사람은 앞에 놓인 음식들을 조금씩 자신의 앞 접시로 옮긴다. 원래는 저런 식으로 먹는 거로군. 나도 양념에 절여져 있는 고기를 몇 조각 집어 가져온다.
포크로 찍을 때부터 부드러운 감촉이 전해진다. 생각만으로도 입안에 침이 고인다. 포크를 들어 고기를 입에 집어넣는다. 씹는다. 부드러운 감촉과 알싸한 향. 눈이 번쩍 뜨이게 맛있다.
"으하하. 어떤가? 맛있지? 티파나의 전통요리인 닭 조림이지."
전통 요리치고는 매우 평범한 이름이군요. 그래도 맛이 있으니 됐지 뭐. 맛을 제대로 느끼는 것은 너무나 행복한 일이다.
식사는 오랜 시간 동안 진행되었다. 주로 글린다의 식욕 덕분에. 나와 마르코스가 식사를 끝냈지만, 글린다는 계속해서 포크와 나이프를 놀린다. 멈추지 않고. 계속해서. 정말 놀라운 식욕.
"흐아아. 잘 먹었다."
글린다는 행복한 미소를 지으며 의자에 늘어진다. 결국, 식탁 위에 놓여있던 모든 음식이 깨끗이 비워졌다. 딱 봐도 10인분 정도는 되어 보였는데.
"디저트는 없나요?"
그렇게 먹어놓고 또? 마르코스는 그저 하하 웃는다. 식당 문을 열고 시종들이 들어온다. 식탁 위에 놓여 있던 접시들을 가져간다. 식탁을 깨끗하게 치운다.
"디저트로는 케이크를 준비했습니다."
그렇게 말하며 각자의 앞에 케이크가 놓인다. 케이크? 이게? 내가 알고 있는 케이크와는 다르다. 그냥 노릇노릇 잘 구워진 동그란 빵 정도. 위에 생크림도 초콜릿도 없는 그냥 빵. 뭔가 건포도 같은 게 올라가 있긴 하지만, 나라면 이걸 케이크라고 부르지 않겠다.
"맛있겠네요. 위에 올라간 건 건포도인가요?"
"재작년 겨울에 딴 걸 말린 거지. 아주 달고 맛있을걸세."
아. 그렇군요. 마르코스 씨가 생각하는 것과 제가 생각하는 단 것에 대한 정의가 다른 것 같네요. 그런 걸 신경 쓸 시간은 없다. 일단 먹고 평가하자.
포크로 케이크라 불리는 것을 찔러본다. 확실하다. 이건 케이크가 아니다. 최소한 내가 알고 있던 케이크는 아니다. 포크에 부드럽게 잘리지 않는다. 손가락 끝에 딱딱함이 느껴진다.
두 사람을 살짝 바라본다. 둘 다 아무 말도 없이 잘도 먹는다. 나는 입에 댈 엄두도 나지 않는데. 인제 보니 글린다 앞의 케이크가 나와 마르코스의 것보다 세배 정도 크다. 일단 두 사람 다 먹고 있으니 나도 먹어보자. 도전은 언제나 아름다운 법.
케이크를 포크로 부순다. 한입 정도 크기로. 입에 넣어본다. 음. 이빨을 움직여 케이크를 씹는다. 생각보다 괜찮은 맛. 케이크의 맛은 아니지만, 씹히는 식감이 마음에 든다.
"맛있네요. 이 케이크."
"으하하. 내 집의 요리사는 정말 실력이 좋지!"
그렇게 마르코스의 요리사 자랑이 시작되었다.
"으아. 좋다."
나도 모르게 입에서 아저씨 같은 소리가 튀어나왔다. 온몸이 따뜻한 물에 푹 잠긴다. 숨이 폐를 빠져나와 기도를 타고 공기 중으로 방출된다. 너무 좋다. 휴식이란 참 좋은 거구나. 아무것도 하지 않고 그냥 이대로 이러고 있으면 좋겠다.
마르코스의 저택에는 욕탕이 있다. 그것도 남탕 여탕을 구분해서 두 개나. 네다섯 명이 들어오면 가득 찰 것 같은 욕탕은 시종들에게도 개방되어있다고 한다. 마르코스란 사람은 상당히 좋은 사람 같다.
"아이작 님. 몸을 닦을 천은 밖에 두겠습니다."
"감사합니다."
인기척이 멀어진다. 사실 수건은 필요 없는데 말이야. 그냥 마법으로 말리는 게 빠르지. 그래도 준비해준 거니까 오늘은 수건으로 말리자. 안될 것도 없는 거니까.
몸을 물 안에 푹 담근다. 머리까지 푹. 한참 있어도 숨이 모자라지 않는다. 나는 호흡조차 필요 없는 몸. 내가 평소에 하는 호흡은 그저 습관에 불과하겠지.
물 안은 고요하다. 아무런 소리도 들리지 않는 고요. 너무나 평화로운 고요. 이 세계에 나 혼자 있는 듯한 착각마저 든다. 이런 고요함이 좋다. 나 혼자 생각에 깊게 잠길 수 있는 시간이 좋다.
나는 누구인가. 임시로 내가 아이작이라는 결론을 내렸다. 그럼 이유진은? 언제나 죽음을 두려워하는 이유진은? 나는 죽는 것이 두렵다. 너무나 무섭다. 그 무서움을 아이작이라는 가면으로 덮는다. 쇠사슬로 꽁꽁 묶어 보이지 않게 한다. 이미 드러나 버렸고, 사슬은 끊어져 버렸지만.
깊게 생각하지 말자. 이런 생각에 사로잡히면 진짜 자살을 시도할 거 같다. 글린다가 안전해질 때까지 나에 대한 질문은 금지.
"푸하!"
물 위로 올라와서 필요도 없는 숨을 몰아쉰다. 체감시간으로 한 시간 정도 욕탕에 있었다. 슬슬 나갈 시간이다.
몸을 일으켜 욕탕 밖으로 빠져나간다. 살짝 몸을 내려다본다. 아무런 노력도 하지 않고 얻은 근육들. 이유진이라면 죽어도 얻지 못할 것들. 아. 죽어서 얻은 상태구나.
한숨을 푹 내쉬고 욕탕의 문을 열어 밖으로 나선다. 눈에 보인 것은 내 발치에 놓은 천. 기다란 천을 몇 번 접었는지 두께가 좀 있어 보인다. 설마 이게 수건 대용?
주변을 둘러봐도 수건으로 보이는 다른 건 보이지 않는다. 그럼 이게 수건이 맞겠네. 케이크도 그렇고 수건도 그렇고 내가 알고 있는 것과 많이 다르다.
그냥 마법으로 몸을 말릴까 싶었지만, 준비해둔 사람의 정성을 생각하자. 잘 개어져 있는 천을 들어 올린다. 내 키보다 세 배 정도의 길이. 왜 이렇게 긴 거지?
금방 알 수 있었다. 수건 대용으로 준비된 천의 흡수력이 최악이다. 물기를 제대로 머금지 못한다. 결국, 몸을 다 닦았을 때는 기다란 천은 홀딱 젖어버렸다.
잔뜩 젖어있는 천을 빨래바구니로 보이는 곳에 집어넣는다. 손가락을 튕겨 장비를 전부 착용한다. 벗을 때도 손가락만 튕겼지.
옷매무새를 다듬고 탈의실 문을 연다. 기다란 복도와 그 앞에 서 있는 시종의 모습이 보인다.
"다 씻으신 겁니까?"
"아. 네."
"그럼 오늘 묵으실 방까지 안내해 드리겠습니다."
복도에 나 있는 창 너머로 달빛이 들어온다. 별들은 구름에 가려 잘 보이지 않는다. 앞서 걷는 시종의 손에는 기름으로 타는 것 같은 초가 들려있다. 초가 그리 밝지는 않지만, 달이 밝게 떠올라 어둠을 몰아낸다.
이름 모를 시종을 따라 2층으로 올라간다. 1층이랑 그리 다르지 않은 구조를 가졌다. 한쪽 벽에 주르르 놓인 문과 반대쪽에는 큼지막한 창문.
"아이작 님이 머무실 방은 이곳입니다."
시종이 문을 열고 방 안을 보여준다. 화려하지는 않지만, 나름대로 꾸며진 방. 혼자서 자기에 적당한 크기인 침대. 탁자와 의자가 놓여 있다. 시종은 들고 있는 등잔의 불을 탁자 위의 초에 옮긴다. 방안에 은은한 빛이 가득 찬다.
"그럼. 안녕히 주무시죠. 내일 아침 식사가 준비되면 깨우러 오겠습니다."
잠들지 못하기 때문에 깨울 필요는 없겠지만. 알았다는 의미로 고개를 끄덕이자, 시종은 방을 떠난다. 이제 초가 타오르는 방에 나 홀로 남아있다.
옷을 입은 채로 침대에 드러눕는다. 여태까지 누웠던 침대들과는 질이 다르다. 정말 최고다. 늘어지게 하품을 하며 침대에서 이리저리 뒹군다. 팔다리를 대자로 뻗는다. 크게 숨을 들이쉬고 내뱉는다.
할 게 없다. 너무 할 게 없다. 너무 지루하고 재미없고 심심하다. 원래부터 지루함이 쥐약이었지만, 최근 며칠간 너무 바쁘게 지냈더니 반동이 더 크게 온다. 마차를 타고 다닐 때는 제대로 쉴 시간도 없었지. 계속 습격을 받고, 배고프다는 글린다의 밥을 챙겨주고. 정말 바빴다.
달을 한번 보고 싶은데, 이 방에는 창문이 없다. 하지만 방법은 언제나 있는 법.
"비행. 공간 이동. 목표 지점. 저택 지붕."
침대에서 몸이 둥실 떠오르며, 주변의 풍경이 바뀐다. 흰색 벽돌로 만들어진 지붕 위에 살짝 떠 있다. 구름이 많은 말이지만, 달의 모습이 보인다. 달의 빛이 보인다. 달이 나를 감싼다.
나는 달이 좋다. 내가 볼 수 있던 유일한 천체였으니. 태양은 나의 눈을 멀게 하기 충분하다. 나의 피부를 태우고 나를 죽음으로 끌고 가는 빛이었다. 별은 보이지 않았다. 광공해라는 말이 괜히 있는 것은 아니다. 나는 태어나서 한 번도 실물의 별을 본 적이 없다.
달만이 하늘에 더 있었다. 내가 볼 수 있는 하늘에는 오직 달만이 있었다. 밝게 빛나는 달만이. 푸르게 빛나는 달만이. 나와 함께 밤을 보냈다.
바람이 불어온다. 찬 바람이 불어와 나를 덮는다. 달빛이 나를 덮는다. 반짝이는 별들과 달이 나를 덮는다. 하늘에 조금씩 구름이 많아진다. 조금씩 보이던 별마저 사라진다. 밝게 빛나던 달이 흐려진다. 하늘에는 구름이 한가득.
비가 조금씩 떨어진다. 곧 폭우가 되어 땅을 적신다. 옷도 얼굴도 조금씩 젖어간다. 어차피 마법으로 말리면 되지. 조금만 더 이렇게 있어 보자.
빗물은 얼굴과 옷을 타고 흘러내린다. 아무것도 없는 밤하늘을 바라보며 비와 함께 여기 머물러 있다.
돌아가자. 일단 침대에 누워서 날을 지새우자. 정 뭣하면 공방이나 좀 들어가지.
"건조. 공간 이동. 목표 지점. 침실. 비행 해제."
뚝 떨어지는 느낌. 나를 받아주는 건 딱딱한 지붕이 아닌 폭신한 침대. 옷은 이미 다 말랐다. 이제 남은 것은 뜬눈으로 밤을 지새우는 것.
어디서 들려오는 건지는 몰라도 빗소리가 들려온다. 차분하게 나를 감싼다. 후드득후드득 아름다운 반주. 나는 이 소리를 듣고도 잠을 이루지 못한다. 그래도 이렇게 휴식을 취하는 건 나쁘지는 않을지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