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42화 〉042. 3막 2장 - 달려가는 길 (3) / Isaac
하아. 지금 몇 분째지? 한 30분은 된 거 같다. 곰이라는 동물이 이렇게 지구력이 좋았던가.
곰은 끈질기게 마차를 뒤따라온다. 지치지 않고, 느려지지 않고. 덤으로 마차를 끄는 두 마리의 말도 지치지 않는다. 이래서 마법이 좋은 거지.
[아직도 쫓아오나요?]
[네. 어찌 된 영문인지 모르겠네요.]
글린다의 한숨이 전해진다. 그래. 지금은 한숨이 절로 나오는 상황이지. 나도 슬슬 지쳐가고 있어서 처리할 방법을 떠올리는 중이다. 저 정도 덩치면 평범한 마법으로는 안 죽겠지.
마부석에서 일어나 마차의 지붕 위로 올라간다. 마차가 심각하게 흔들리긴 하지만 어떻게 균형을 잘 잡고 있다. 바람이 매섭게 불어온다. 뒤에서는 곰이 무섭게 쫓아오고. 흡사 공포 영화의 한 장면. 그리고 내가 주인공 역할이겠지.
"좋아. 한 번 붙어보자 곰탱아."
내가 붙여준 별명이 마음에 들지 않았는지 곰이 울부짖는다. 목청 한 번 좋네. 그 울음소리에 마차가 덜컹거린다. 위험할 정도로 흔들린다. 발밑이 불안정하니 불안하기 짝이 없다. 일단 이것부터 처리하자.
"거미의 발."
발바닥과 마차의 천장이 딱 달라붙는다. 내가 원하기 전까지는 때어지지 않을 거다. 발밑의 안전은 확보했다. 이제 정면에서 달려오는 저 곰탱이만 어떻게 하면 되겠다. 아니지. 곰탱이의 뒤에서 따라오는 빨간 점들도 있다. 처음부터 시작한 추적은 아직도 끝나지 않는다. 속도가 변하지 않는 걸 보면, 저쪽도 마법사가 있는 모양.
그런 건 나중에 신경 쓰자. 일단 당장 앞에 놓인 일부터. 사람의 뇌는 용량이 작아서 미래의 일을 걱정하면 일찍 죽는다. 의학적인 부분으로 따지고 들지는 말자. 그냥 말이 그렇다는 거니까.
[마법사님. 그 생각이 다 제 머릿속으로 들어왔거든요?]
쿨럭. 글린다의 황당함이 묻어나는 목소리. 부끄러워서 죽어버릴 거 같아. 어쩌다가 생각이 세어나간 거지?
[정신 차리시고 상황이나 해결하세요.]
그래야겠다. 뺨을 한 번 때려 정신을 붙잡는다. 곰은 마차를 끈질기게 쫓아온다.
"화염구."
만들어진 불덩어리를 곰탱이에게 던진다. 곰은 달려오는 그대로 앞발을 휘둘러 화염구를 쳐낸다. 발과 화염구가 부딪히는 순간 폭발한다. 곰은 화염을 뚫고 그대로 달려든다. 털에는 그슬린 자국조차 없다. 화염 내성이 좋은 것인지, 그냥 몸뚱어리가 단단한 것인지 모르겠군. 두들겨 보면 알겠지.
손을 뻗는다. 목표에 집중한다. 지금 쓰려는 것은 평범한 마법이 아니다. 마법에 평범함이 어디 있냐고 물으면 대답할 방법은 없지만.
"칼날의 폭풍."
내 몸을 중심으로 칼바람이 생겨난다. 문자 그대로의 칼바람. 공기라는 것을 날카롭게 빚어진 형태. 보이지도 않는 칼날은 강철 따위는 손쉽게 썰어버린다. 그런 칼바람이 수십 개, 수백 개, 수천 개 생겨난다.
날카로운 칼바람이 공간을 가득히 채운다. 곰은 그런 것에 개의치 않고 달리는 것을 멈추지 않는다. 이걸로 끝나면 좋겠다.
"발사."
주먹을 움켜쥔다. 칼날의 폭풍이 몰아친다. 수천 개의 칼바람이 폭풍이 된다. 휘몰아치고, 휩쓸며 지나간다. 곰의 가죽이 잘려나간다. 피가 터져나간다. 비린내가 코를 자극한다. 약간의 구역질.
곰은 자신의 몸 상태에 아랑곳하지 않고 달리는 것을 멈추지 않는다. 점점 상처가 벌어진다. 용케도 급소는 피해내고 있다. 원래 이 마법이 한 명을 대상으로 쓰는 마법은 아니라지만, 너무한 명중률이다.
바람이 가라앉는다. 지속 시간도 너무하군. 온몸에서 피를 흘리는 곰 한 마리는 속도가 변하지 않는다. 계속 마차를 쫓아온다.
자세히 보면 곰의 몸 상태가 정상이 아니다. 맞바람에 실려 피가 사방으로 흩날린다. 떨어져 나가기 직전의 살점이 보인다. 그런데도 용케 쫓아오네.
"에휴. 넌 언제까지 따라올 거니?"
당연히 대답을 들려오지 않는다. 슬슬 많이 귀찮아졌다. 이 곰 말고도 뒤에서 따라오는 저 자식들도 처리해야 한다. 정리하자. 지치는 것도 지치는 거고, 이제 재미가 없다. 쫓기는 처지를 즐기는 것은 여기서 끝.
"진정."
사실 처음부터 이 마법을 썼으면 이런 추격전도 없었지. 하지만 재미없는 건 재미 없잖아?
마법의 영향에 노출된 곰의 발걸음이 느려진다. 붉게 빛나던 눈동자가 갈색으로 변해간다. 이제 곰탱이와의 추격전은 끝이다. 저렇게 피나는 상태로 두는 건 불쌍하니 치료 정도는 해주자.
곰과의 거리가 멀어진다. 곰이 서서히 멈춰 선다. 완전히 멈춰선 곰탱이는 멀뚱히 나를 바라본다. 그리고 눈동자가 붉게 빛난다.
한순간 되게 불길한 생각이 머릿속을 스치고 지나갔다.
"크와와와!!!"
내가 만들었던 칼날의 폭풍보다 더 폭풍과도 같은 고함. 곰이 다시 달려온다. 이전보다 빠르게.
"아아! 진짜!"
머리를 쥐어뜯는다. 끝내려고 했는데 끝나지 않는 건 재미 없는 일이다. 일단 상황을 분석해보자. 평범한 곰이 진정 마법에 저항할 수 있을 리가 없다. 지치지 않는 체력이나, 저 이상할 정도의 흉포함. 곰은 지금 마법에 걸려있는 거다.
어떤 마법이 걸려있는지 조금은 알겠다. 광폭화 마법으로 이성을 잃게 하였다. 덤으로 정신계 마법 저항. 목표 지정으로 나를 적으로 인식시키고, 강철의 체력 같은 마법으로 지치지 않고 달리게 하였고. 마법 저항을 올려주는 마법도 걸었을 거다. 누가 했는지 몰라도 정성 들여서 만든 곰이다. 이제 내가 부숴버릴 거지만.
"천상의 쇠사슬."
마차에 앞발이 닿기 직전의 곰이 하늘에서 내려온 쇠사슬에 묶여 올라간다. 곰이 미친 듯이 발버둥을 치지만, 저건 실체가 없는 빛으로 만들어진 쇠사슬. 쉽게 끊어지지 않으리라.
곰이 마법에 묶여 있는 동안 마차는 내달린다. 곰과의 거리가 벌어진다. 천상의 쇠사슬이 튼튼하긴 하지만, 이런저런 마법을 덮어쓰고 있는 곰을 오래 붙잡지는 못한다. 봐라. 벌써 부서지지 않았는가.
곰은 다시 달려든다. 거리가 멀어졌으니 잠깐 시간이 생겼다. 처분할 방법을 생각해 보자.
[마법사님. 저 슬슬 지루해요.]
글린다는 이런 순간에도 자기가 지루하다고 말한다. 아무리 자기가 직접 상대하진 않더라도, 조금 긴장해 줬으면 좋겠다.
[금방 끝날 겁니다.]
[아. 네.]
믿지 못하네. 믿음을 받지 못한 건 슬픈 일이다. 어쩔 수 없지. 믿음을 주지 못한 내 잘못이다. 이번 건으로 믿음을 회복해 보자고.
곰의 발은 땅을 때린다. 땅은 고통에 울부짖으며 곰을 밀어낸다. 고통과 분노에 찬 울부짖음. 나무가 몸을 덜덜 떤다. 온몸에 소름이 돋지만, 마법은 이미 준비되었다.
"천벌."
하늘에서. 말라 비틀어질 것 같은 하늘에서. 벼락이 떨어진다.
눈이 멀어버릴 것 같은 섬광. 하늘을 찢어버리는 굉음. 대지를 뒤흔드는 충격. 잔뜩 달아오른 열기가 열기를 타고 전달된다.
[으아아! 뭔데요! 뭐가 이렇게 뜨거운 거에요!]
마차의 얇은 나무판 따위는 뚫고 전해지는 열기. 말들도 놀았는지 마차가 크게 덜컹거리며 멈추어 선다. 새하얀 시야가 원상태로 돌아간다.
벼락이 떨어진 주변의 흙은 새까맣게 타버렸다. 흙과 돌을 녹여버릴 정도의 벼락을 맞은 곰은 재가 되어 부서져 간다. 역겨운 냄새가 퍼져간다.
"우욱."
구역질이 날 정도의 냄새. 머리가 어지럽다. 여기 오래 못 있겠다. 겁먹은 말들을 어르고 달래 마차를 출발시킨다. 벼락이 떨어진 자리에는 아직도 연기가 피어오른다.
미니 맵의 빨간 점들이 움직인다. 뒤따라 오던 놈들이 다시 움직인다. 저것들만 처리하면 이제 끝나겠지. 제발 끝이어라.
말들이 최고 속도로 마차를 끌고 있지만, 뒤에서 오는 놈들이 더 빠르다. 뭘 타고 오고 있는 걸까. 점점 거리가 가까워진다. 거리를 유지할 생각을 안 하고 있다. 정말 끝장을 보려는 듯이 미친 듯이 달려온다. 금방 얼굴을 볼 수 있겠네.
"철벽의 가호."
마차와 말들이 회색으로 변한다. 물론 나의 몸도. 쫓아오는 녀석들이 어떤 방법을 쓸지는 모르지만, 미리 대비해 두는 것은 좋은 거지.
말발굽 소리가 들려온다. 나뭇가지들이 시야를 방해한다. 미니 맵에 나타나는 숫자는 넷. 마차 지붕 위에 앉아 놈들을 기다린다.
모습이 보인다. 갑옷을 입은 기사 같은 사람 셋. 한 사람은 망토를 걸치고 지팡이를 들고 있다. 저 인간이 마법사다. 곰한테 마법도 걸고, 여러 가지로 나를 귀찮게 한 놈.
"귀찮으니까 빨리 끝내자. 서리 바람."
차디찬 바람이 몰아친다. 모든 것을 얼려버릴 바람. 나무를 얼리고 땅을 얼리며 몰아친다.
다가오는 마법사가 뭐라고 소리친다. 잘 들리지는 않지만, 마법을 쓰는 건 확실하군. 달려오는 놈들의 앞에 반투명하고 붉은색으로 빛나는 막이 펼쳐진다. 서리 바람은 그 막을 통과하며 냉기를 잃는다. 간단한 마법인 화염 보호막. 서리 바람도 간단한 마법이긴 하지만, 정확히 상성인 마법을 사용하는 것은 능력이다. 저 마법사는 제대로 된 마법사다.
"늪지 생성."
마차가 지나가는 길이 끈적끈적한 늪으로 변한다. 자신의 위를 걸어가는 자들을 집어삼키는 깊고 깊은 늪. 평범한 말은 다리가 박혀버릴 늪. 그런 늪이 계속해서 넓어지고 있다.
늪 가장자리에서 놈들의 말이 멈춰 선다. 뭔가를 하려는 듯 보이지만, 거리가 멀어지고 있어서 잘 보이지 않는다. 확실한 건 이걸로는 끝이 아니라는 것.
미니맵의 빨간 점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방법을 찾았구나. 어떤 방법으로 늪을 빠져나왔을지 궁금하다. 평탄화로 늪을 땅으로 만들었나? 아니면 비행이나 수면 보행? 어떤 마법을 쓰느냐에 따라 상대 마법사의 실력이 드러날 거다.
마차 지붕 위에서 놈들이 다가오는 방향을 바라본다. 약간의 흥분감이 느껴진다. 모습이 보인다. 하늘을 나는 네 마리의 말. 비행 마법인가 싶어서 자세히 바라본다.
"미친."
저 인간들이 타고 있는 건 말이 아니다. 아니지. 말이긴 한데 해골 말인 거지. 눈에서 붉은빛을 내뿜는 해골 말. 하늘을 마음대로 날아다니며, 사신이 타고 다닌다고 전해지는 해골 말. 영어로는 팬텀 스티드(Phantom steed)지만, UMO 번역으로는 그냥 해골 말이다.
이름 때문에 강해 보이지는 않지만, 7등급의 소환 마법이다. 네 마리를 만들어서 부릴 정도면 레벨이 750이 넘어간다는 것. 생각보다 강한 녀석이군. 일단 가볍게 인사나 하자.
하늘을 날고 있는 해골 말을 향해 손을 들어 올린다. 적의 능력을 알았으니 그에 걸맞은 인사를 보여줘야지.
"하늘을 꿰뚫는 화살."
UMO의 심각한 문제점 하나. 마법이 일만 개가 넘어가다 보니 강한 마법일수록 이름이 길어지는 경향이 있다. 비슷한 이름도 많고.
어찌 되었든 검은색으로 빛나는 무형의 화살이 놈들을 향해 쏘아져 나아간다. 해골 말들이 사방으로 흩어진다. 놈들이 있었던 공간으로 화살이 지나간다.
"목표 고정."
소환물이나 이성을 잃은 존재에게 적을 인식시키는 데 사용하는 목표 지정과는 다르다. 영어로 쓰면 더 달라지지. 그건 중요한 게 아니니 지나가자.
목표가 고정된 하늘을 꿰뚫는 화살이 회전한다. 해골 말을 타고 있는 기사를 향해 날아간다. 급작스러운 회전에 아무도 반응을 못 했다. 갑옷과 기사의 몸과 해골 말을 꿰뚫는 화살. 해골 말은 푸른 불꽃이 되어 사라진다. 기사의 육신은 땅에 떨어진다.
듣기 거북한 소리가 울려 퍼진다. 한 사람을 잃은 추적자들이 더 빠르게 움직인다. 다음 공격은 허용하지 않겠다는 듯이. 그래 봐야 금방 끝나겠지만. 제발 금방 끝나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