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41화 〉041. 3막 2장 - 달려가는 길 (2) / Isaac
[지금 어떤 상황이에요?]
바깥의 상황을 알 수 없는 글린다의 질문이 머릿속으로 들려온다. 궁금하긴 하겠지. 자신의 목숨이 노려지는데 안쪽에서 얌전히 기다리기는 힘들지. 그런 것 치고는 아까 잘 잔 것 같지만.
[별로 좋은 상황은 아니군요.]
앞에는 늑대 기병들. 뒤에는 정체를 알 수 없는 추적자들. 덤으로 양옆에는 마차가 들어가 힘든 숲. 덤으로 미니 맵 한구석에 오십은 족히 넘어 보이는 빨간 점이 나타나 있다. 사면초가 진퇴양난의 순간이라 할 만한 때. 솔직히, 위험은 느껴지지 않는다. 장창진을 만들었던 보병들이나 늑대 기병들의 상태를 보면 마법사를 완벽히 제압하긴 힘들다. 아직도 철벽의 가호는 적용되어있고.
나와 글린다를 쫓고 있는 놈들은 똑똑한 놈들이다. 아마 그럴 것이다. 그런 놈들이 마법사 하나 처리 못 하는 놈들로 추적부대를 구성하지는 않았겠지. 이놈들의 목적은 시간 끌기. 미니 맵에 보이는 오십 개의 빨간 점이 주력부대일 가능성이 크다.
[설명해 주실 수 있나요?]
보자. 이 상황을 어떻게 설명해야 하나.
[포위당했다고 보시면 될 것 같습니다.]
[움직이고 있지 않나요?]
움직이고는 있지. 그 움직임이란 게 너무 제한되어 있다는 게 문제다. 쉰 개의 빨간 점은 빠른 속도로 움직인다. 방향은 우리의 앞쪽. 늑대 기병들과 추적자들이 우리를 그 방향으로 몰고 가고 있다.
현재 우리가 겪고 있는 상황에 대한 설명을 듣자 글린다는 잠시 침묵한다. 뭔가 방법을 생각했으면 좋겠는데.
[늑대에 타고 있는 사람들은 어떻게 생겼나요?]
중요한 질문인가? 왜 물어보는지는 모르겠지만, 이런 순간에 쓸데없는 질문은 하지 않겠지. 늑대를 타고 있는 난쟁이들을 바라본다. 가끔 뒤를 돌아보는 놈들.
[키는 허리 정도. 피부색은 붉은 기운이 도는 갈색. 찢어진 눈. 머리는 상당히 이상하네요. 들고 있는 칼은 곡도라고 부르나? 그런 거요.]
설명을 들은 글린다는 다시 침묵. 그동안 붉은 점의 무리는 더 가까이 다가왔다.
[늑대들은 회색이죠?]
[네. 말 정도 크기에요.]
[칫. 남부의 늑대 기병이네요.]
그렇구나. 그게 뭔지 모르는 나에게는 그냥 그 정도 감상.
[저희를 노리는 게 테페리만은 아닌가 보네요.]
[다시 충돌할 겁니다. 준비하세요.]
늑대 기병들이 앞으로 뛰쳐나가더니 방향을 돌린다. 붉은 점들은 우리의 앞길을 정확히 막고 있다. 적의 아가리로 밀고 들어간다.
"키효효효!"
알아들을 수 없는 소리를 지르며 나에게 달려드는 늑대 기병들. 모든 언어를 이해할 수 있는 내가 못 알아듣는 걸 보면, 단순한 함성일 뿐이다.
커다란 칼을 휘두르며 달려온다. 말의 목을 노리고 휘두르지만, 철벽의 가호는 말의 몸을 웬만한 쇳덩이보다 단단하게 만들어준다. 기병들이 휘두르는 곡도는 말의 피부에 튕겨 나간다. 그대로 양옆으로 지나쳐 가는 놈들에게 화염구를 하나씩 선물해준다.
앞서 나에게 오던 녀석들의 말로를 보았으면서도, 소리를 높이며 나에게 달려온다. 죽음에 대한 공포가 없구나. 나는 죽음이 그렇게나 무서운데.
맞아주는 것도 귀찮다. 바로 처리하자. 화염구가 달려오던 늑대들을 특대 통구이로 바꾸어 놓는다. 매캐한 탄 냄새가 피어오른다. 별로 좋은 냄새는 아니다.
[으엑. 무슨 냄새에요?]
[늑대가 타들어 가는 냄새요.]
대답을 들은 글린다는 입을 다물어버린다. 일단 앞쪽은 비었다. 비었다기에는 저 멀리서 마차를 기다리고 있지만. 뒤쪽에서는 누군가 쫓고 있고.
말들은 그런 상황에 개의치 않고 달려나간다. 자신의 피부가 강철로 변해도, 옆에서 화염이 폭발해도, 웬 늑대들이 달려들어도, 마차를 끄는 말은 멈추지 않는다.
강철의 발굽이 땅을 부수며 나아간다. 강철의 바퀴가 흙을 헤집는다. 멀리 사람들의 모습이 보인다. 미친. 저 인간들 뭘 만드는 거지?
나무와 돌로 쌓아올린 벽. 기둥과 지지대도 완벽하게 설치되어 있다. 쉰 명은 병사가 아니었다. 병사는 맞지. 공병이라는 게 문제지. 쌓아올려진 바리케이드에는 창대도 꽂혀있다. 저건 못 부수고 지나간다. 속도가 분명 줄어든다.
바리케이드 뒤쪽에 사람들의 모습이 보인다. 전부 석궁으로 무장하고 있군. 맞는다고 아프지는 않겠지만, 따끔 정도는 하겠지.
화살이 날아든다. 일반 화살보다는 짧은 석궁용 화살. 말과 마차와 내 몸에 부딪히지만, 철벽의 가호는 그런 화살 정도는 튕겨낸다. 문제는 저 바리케이드지.
"강철의 빗줄기."
마법이나 쓰자. 화살 세례를 무시하며 마법을 사용한다. 하늘에서 빗줄기가 떨어진다. 물이 아닌 강철의 빗줄기가.
쇳덩어리들이 떨어진다. 하늘 높은 곳에서. 주먹 크기의 쇠구슬이 모든 것을 부수기 시작한다. 저들이 쌓아올린 바리케이드나, 저들의 육체 그 자체도.
"가속."
말들의 걸음이 빨라진다. 반쯤 무너져 내린 바리케이드를 부수고 지나갈 정도의 속도. 두 마리의 말은 강철의 빗줄기로 파인 땅을 힘차게 딛고 달린다.
[으악!]
마차가 크게 흔들리며 글린다의 비명이 머릿속에 들려온다. 땅 상태가 많이 안 좋다. 바리케이드는 말과 부딪혀 완전히 부서졌다. 남아있던 사람들도 혼비백산 달아난다. 아직도 뒤에서는 적들이 쫓아온다.
시간이 지나며 적용되었던 마법이 사라진다. 말과 마차는 원래의 모습으로 돌아온다. 이제 강철과도 같은 방어력은 사라졌다. 다시 바리케이드라도 치면 속수무책. 은 아니지만, 좀 더 귀찮은 방법을 써야 하지.
[끝난 거에요?]
글린다의 목소리가 들려온다.
[아니요. 쉽게 끝날 것 같지는 않습니다.]
미니 맵에 또 빨간 점이 떠오른다. 망할 자식들. 도대체 어디까지 준비를 해둔 거지? 이러다가 온종일 이렇게 달리는 거 아니야?
정면에서 다가오는 빨간 점. 숫자는 하나. 이쯤 되니 어떤 방식을 사용할지 기대가 되는 정도다.
도로가 우측으로 꺾여진다. 말들은 스스로 속도를 줄이고 회전을 준비한다. 그런데 빨간 점은 정면에 있네? 그럼 숲 속에서 달려온다는 이야기인데?
등줄기가 찌르르 울린다. 불길한 기분이 엄습한다. 항상 그러하듯 불길한 기분은 언제나 들어맞는 법.
"크와와!"
귀가 떨어져 나갈 정도의 소리. 고삐를 놓치고 귀를 막았다. 말들도 놀랐는지 순간적으로 발을 비틀거리고 마차는 덜컹거린다. 나름대로 훈련받은 말은 금방 달리기 시작한다.
[무슨 소리에요!]
괴성 때문에 머리가 아픈데 글린다의 목소리까지 들려온다. 두 배로 아프다. 정신 대화에는 이런 부작용도 있구나.
[별로 좋은 소리는 아니죠.]
빨간 점이 점차 다가온다. 도로를 따라 크게 회전하는 마차의 옆을 노리고. 나무들이 부서지는 소리가 들려온다. 우지끈 이라던가, 뚜득 같은 소리 말이다.
"크와와와!"
와. 진짜 시끄럽다. 겁에 질린 말이 걸음을 멈추었다. 마차도 자연스럽게 멈춘다. 한숨이 절로 나오는 상황. 어쩔 수 없다. 빨리 처리하고 이동해야지.
뒤따라오던 빨간 점들이 멈추어선다. 저쪽도 우리를 감시할 방법이 있나 보군. 마부석에서 일어나 마차 지붕 위로 올라간다. 발로 몇 번 차 보아 안정성을 확인한다.
[방금 그건 뭐에요! 마차도 멈췄고!]
아. 안에 글린다 있었지. 괴성의 존재 때문에 잊고 있었다.
[별거 아닙니다. 말들이 너무 놀라서 마차를 끌지 못하고 있을 뿐이에요. 금방 끝날 겁니다.]
아마도. 양손에 화염구를 만들어내며 눈으로 미니 맵을 확인한다. 빨간 점이 코앞.
"크와와!"
소리가 들려오는 방향으로 화염구를 던진다. 빽빽하게 자라있는 나무들 사이로 불덩어리가 날아간다. 폭음이 들려온다. 명중은 한 것 같은데.
미니 맵의 빨간 점이 멈춰 선다. 치명상은 아니었을 텐데. 도대체 뭘 하려고 하는 거지?
긴장감과 약간의 흥분이 섞인 바람이 불어온다. 심호흡으로 폐에 가득히 공기를 채운다. 내쉰다. 혈액이 산소를 옮기고 온몸 구석구석으로 배달한다. 준비는 되었다. 언제든 와라.
"크와와와와!"
소리는 안 지르고 오면 안 되겠냐? 나무가 잔뜩 부러지는 소리가 들려온다. 빨간 점이 빠른 속도로 다가온다. 내가 있는 곳까지 10m. 달려오는 소리가 들리지 않는다. 앞으로 5m. 뭘 하고 있길래 소리가 없지? 3m 남았다. 뭐지? 의문을 가질 때 남은 거리 1m.
모습이 보이지 않는다. 빨간 점은 나와 같은 위치에 있다. 어디 있는 거지?
길에 내리쬐던 태양이 가려진다. 자연스럽게 고개가 위로 올라간다. 미친. 하늘에는 좀만 과장해서 집채만 한 무언가가 태양을 가리고 있다.
쾅! 폭음이라고 해도 믿을 정도의 소리. 진짜 뭔가 터진 것 같이 흙먼지가 치솟는다. 팔로 먼지 폭풍을 막아낸다.
[뭐에요! 무슨 일이에요!]
미안. 대답해줄 겨를이 없네. 정신 대화를 취소한다. 싸우는 도중에 목소리가 들려오면 방해될 테니.
먼지가 서서히 가라앉는다. 옅게 깔린 먼지 구름 너머로 그림자가 보인다. 크다. 지금 내가 밟고 서 있는 마차보다 크다. 정말 웬만한 초가집 정도는 되어 보이는 크기.
"크와와와!!!"
공기를 찢으며 전해지는 괴성. 귀를 막을 여유는 없다. 공기가 가라앉는다. 먼지가 완전히 내려앉는다. 눈에 보이는 것은 거대한 곰. 음······. 많이 크네.
"크와와와!!!"
단검처럼 날카로운 이빨이 보인다. 크기도 엄청나게 크다. 사람 머리 정도는 그냥 씹어먹을 것 같은 이빨들. 침이 사방으로 튀어 나간다. 우와. 이건 좀 무리인 거 같은데.
곰이 앞발로 땅을 긁는다. 기다란 발톱이 대지를 헤집는다. 금방 달려들 거 같은 모습.
"어. 안녕하세요?"
내가 뭘 하는지 잘 모르겠다. 곰한테 손을 흔들며 인사하는 꼴이라니. 내가 봐도 한심하다. 글린다가 봤으면 놀릴 게 분명한 상황. 곰은 그저 노란 눈동자로 나를 빤히 바라본다.
"음. 인사를 받아주시지 않겠다면 저는 이만 떠나볼게요."
조심스럽게 마차 지붕에서 마부석으로 걸어간다. 아무 일도 없었다. 아무 일도 없었다. 고삐를 붇잡고 말들에게 명령을 내린다. 말은 두려움에 떨면서도 걸어가기 시작한다.
"크와와와!!!"
"제기랄! 진정!"
겁에 질린 말들에게 마법을 사용한다. 공포를 잊은 말들이 달려나가기 시작한다. 말발굽 소리와 마차의 바퀴가 굴러가는 소리. 맞바람이 불어와 귓가에 메아리치는 소리. 그것만 있으면 참 좋을 텐데 말이야. 뒤쪽에서 거대한 발소리가 들려온다. 쾅쾅 정도로 표현할법한 소리. 덩치에 걸맞게 발소리도 엄청나군.
뒤를 살짝 바라본다. 거대한 곰이 엄청난 속도로 따라온다. 땅이 울릴 정도. 나무가 흔들리고 새들이 놀라 달아난다. 입이 바짝바짝 마른다. 싸워서 못 이길 거 같지는 않지만, 나는 인간이므로 생리적인 공포 앞에서는 무력하다.
"아 진짜! 무슨 일이에요!"
글린다가 문을 열고 고개를 내민다. 안쪽에서 답답하긴 했을 거다. 정신 대화도 안 되고, 바깥에서는 이상한 소리도 나고, 마차는 갑자기 출발하지. 이해한다.
손가락을 들어 올려 뒤를 가리킨다. 글린다는 화난 표정으로 뒤를 돌아본다. 창백하게 질리는 모습이 안 봐도 눈에 선하다. 글린다는 아무 말도 없이 문을 닫는다. 좋은 선택이군.
두 마리의 말은 마차를 끌고 달려나간다. 그 뒤에는 집채만 한 곰이 따라오고. 이건 또 어떻게 한다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