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 40화 〉040. 3막 2장 - 달려가는 길 (1) / Isaac (40/65)



〈 40화 〉040. 3막 2장 - 달려가는 길 (1) / Isaac

내게 허락된  힘겹기만 한 거친 미래라 해도
나를 깨운 꿈에 모든 걸 걸고 달려갈 거야

- `투지`, 버즈 -




하루가 지나고 나니 기분이 많이 좋아졌다. 생각도 조금 정리했고. 일단 나는 아이작이다. 지금은 말이다. 죽음은 아직도 두렵지만, 당장 몸을 벌벌 떨지는 않을 정도로 진전되었다. 당장은 말이다.


사실 상황은 지구에서와 비슷하다. 언제 터질지 모르는 것에 대한 막연한 불안감. 그것이 나를 붙잡고 있다. 목을 조르고 있지는 않다. 그저 발목을 붙잡고 질척질척하게 달라붙을 뿐.


"으아. 지루하다!"


뒤쪽의 마차에서 글린다의 목소리가 들려온다. 지금 우리는 마차를 타고 이동하는 중. 목적지인 오스왈츠 백작의 직할령인 티파나까지는 3일 정도 걸린다고 했다.

밀란에서 티파나까지의 길은 흙으로 덮여 있다. 제대로 정비되지 않아 울퉁불퉁한 길. 길 양옆에는 나뭇가지가 삐죽이 튀어나와있다. 마차를 운전하는  방해될 정도로.


"바람 칼날."

손을 뻗어 마법을 사용한다. 바람은 날카로운 칼날이 되어 방해되는 나뭇가지들을 쳐낸다. 조금 시야가 확보되었다. 그래도 불편하긴 하지만.

"마법사님!"


뒤를 돌아보자 글린다가 문을 열고 머리를 내밀고 있다. 저러면 안 위험한가? 글린다는 밝게 웃으며 손을 흔든다. 적당히 손을 흔들어 대답해준다. 뭐가 저리 좋은 걸까.

"점심 먹어요! 점심!"


"벌써 그럴 시간이군요."

말에게 명령을 내려 길가에 마차를 멈추어 세운다. 말들에게 얹혀져 있는 마구를 풀어준다. 물품창에서 건초를 꺼내 말들의 앞에 내려놓는다. 알아서 먹겠지.


 사이 마차에서 내린 글린다는 양팔을 벌리고 자연의 공기를 만끽한다. 숨을 들이쉬고 내쉬는 모습이 보인다.


물품창에서 돗자리를 꺼낸다. 땅이 평평하지 않다. 돌도 곳곳에 튀어나온 곳이 보인다. 여기에 편안히 앉기는 글렀군. 그리고 마법은 이럴 때 쓰라고 있는 거지.

"평탄화."


땅을 발로 가볍게 찬다. 그에 맞추어 땅이 흔들린다. 집중하지 않으면 느껴지지 않을 정도로. 흔들리는 땅은 튀어나온 돌부리를 집어삼킨다. 솟아오른 부분은 내려가고 패인 부분은 차오른다. 원래는 늪지나 설원, 화산지대의 지형을 변형시키는 마법이지만, 이런 응용도 가능하다.

고르게 펼쳐진 땅에 돗자리를 깐다. 밀란에서 받아온 음식들을 돗자리 위에 깔아놓는다. 그래 봐야 샌드위치지만.

"맛있겠다!"

간단한 스트레칭을 마친 글린다가 돗자리에 올라와 앉는다. 샌드위치를 들고 입에 집어넣는다. 우물우물 입이 움직인다. 입에 집어넣은 한 입을 삼킨 글린다가 나를 바라본다.


"마법사님은  드세요?"

먹어야지. 먹는 척이라도 해야지. 그러고 보니 어느샌가 글린다가 나를 부르는 말이 마법사님으로 돌아왔다. 어제는 나를 아이작이라 불렀으면서.

샌드위치를 집어 올린다. 입에 집어넣고 씹는다. 아무 맛도 느껴지지 않는다. 언제나 그랬듯이. 앞으로도 그럴 듯이.


무향무취의 빵과 채소를 꼭꼭 씹어 목으로 넘긴다. 글린다가 나를 바라본다. 저 빛나는 눈동자에는 질문이 담겨 있다. 맛이 어때요?


"맛있네요."

거짓말은 상당히 중요하다. 봐라. 이 한마디 말로 글린다가 웃지 않는가. 아무 맛도 느껴지지 않아도 거짓말 하나로 타인에게 미소를 선사해준다. 거짓말은 상당히 중요하다. 그래야 가족들이 웃었으니까.

식사는 금방 끝이 났다. 간단한 식사였으니 당연한 일이었지. 말들도 충분한 휴식을 취했고, 다시 움직일 시간이다.

글린다는 가볍게 기지개를 켜고 마차에 올라탄다. 돗자리를 물품창에 집어넣는다. 말들을 한 번 쓰다듬어주고 마구를 채운다.

"출발하겠습니다."


내 신호에 맞추어 말들이 걸어가기 시작한다. 다시 지루하고, 재미없는 여행이 시작된다. 생각에 잠기기에는 좋지만.


아직도 결론을 내리지 못한 질문. 나는 누구인가. 글린다는 나를 아이작이라고 했다. 마법사라고 했다. 다른 사람이 보기에 나는 마법사다. 내가 생각하는 나는 이유진에 가깝지. 솔직히 내가 누군지는 나도 잘 모르겠다.

마차는 달그락거리며 도로를 지나간다. 바람 소리와 새들의 노랫소리가 백색소음이 되어 생각에 잠기게 한다. 나는 누구인가. 계속해서 던지는 질문. 대기록원의 사서들도 모르는 질문. 또한, 그들은 원하는 대로 살라고 했다. 그럼 내가 원하는 건 뭐지?


이 질문에 대답하지 못한다. 내가 누군지도 모르는데 어떻게 뭘 바라는지 알겠어. 그냥 흘러가는 대로 살아보자. 어떻게든 되겠지. 사실 여태까지 그렇게 살아왔잖아?

미래가 보장되지 않은 사람은 그저 흐름에 따라 살아가는 수밖에. 순간순간에 최선을 다하면서. 최선을 다할 마음은 들지 않지만. 그냥 이대로 죽어버리고 싶지만.


생각해보니까 웃기네. 죽음이 두려워서 죽고 싶다니. 정말 끝내주는 모순이다.

뭔가가 나를 생각 속에서 끄집어낸다. 늪에서 나를 끌어낸다. 왼손을 바라본다. 반지가 경고한다. 주변에 적이 있다고.


"글린다 양!"

마차 안에 있는 글린다를 부른다. 곧 마차의 문이 열리고 글린다의 얼굴이 보인다.

"누군가 우리를 노리고 있습니다."

"또요?"


그러게 말입니다. 또 오네요. 슬슬 너무 귀찮다.  그래도 내가 누군지 몰라서 짜증 났는데, 잘 걸렸다 자식들아.

"일단 마차에 들어가서 나오지 마세요. 필요한 말은 정신 대화로 하겠습니다."


글린다의 표정이 굳어진다. 정신 대화를 안 좋아하나? 글린다는 한숨을 쉬고 마차 안으로 들어간다.

"강철의 방패."


만약을 대비해 마차에 마법을 사용한다. 눈먼 화살에 뚫리지는 않겠지. 걷고 있는 말의 속도를 올린다. 아직 어디 있는지 확신은 없기에 달리지 않는다. 그저 평소보다 빠른 속도로 이동한다.

악의와 살기 말고는 느껴지는 것이 없다. 새의 지저귐도 멈춘 숲에는 바람 소리만이 남아있다. 뭐 말들의 발굽 소리와 마차 바퀴가 굴러가는 소리도 있긴 하지.


약간의 긴장과 흥분감을 안고 마부석에서 주변을 둘러본다. 알 수 없는 고양감. 왜 기분이 좋지? 왜 이 상황이 재밌게 느껴질까. 내가 아이작이라서? 이유진이 아닌 아이작이라서?


모르겠다. 지금은 깊게 생각할 시간이 아니다. 슬슬 마법을 써볼까.


"천 개의 눈동자. 벗어날  없는 눈동자."


주변의 미니 맵이 전부 밝혀진다. 붉은 점은 떠오르지 않는다. 근처에는 없는 건가? 근처에 적이 없으면 반지가 반응하지는 않을 텐데. 뭐. 기다리면 나오겠지.


계속 미니 맵을 주시한다. 빨간 점이 보이면 언제든 말을 달리게 할 수 있도록. 그나저나 글린다는 뭘 하고 있나. 궁금하면 물어봐야지.

"정신 대화."


마법으로 글린다와 정신을 연결한다.

[글린다 양. 뭐하고 계시나요?]


대답이 들려오지 않는다. 뭐 하고 있는 거지? 정신에 직접 이야기 하는 거라  들을 리는 없다. 예전에   했기에 활용을 모르는 것도 아닐 테고.


[글린다 양!]

소리를 지른다. 갑자기 마차가 덜컹거린다.

[잠들지 않았습니다!]


잠들었었네. 정말 대단하다. 누군가 습격을 한다고 경고를 해줬는데도 잠이 들다니. 마차로 다닐 때도 거의 온종일 잠들어 있었지.

[무슨 일 있나요?]

[아뇨. 그냥  하고 계신가 궁금해서요. 궁금증은 이미 풀렸지만요.]

[잠든 적 없습니다.]

[아. 예]


어색한 침묵이 지나간다.

[뭐 아직은 공격이 시작되지는 않았습니다. 금방 시작될 것 같지만.]


미니 맵에 빨간 점들이 나타나기 시작한다. 사방에서 몰려오고 있다. 뒤쪽에서 쫓아오는 녀석들은 말을 타고 있는지 빠른 속도로 움직인다. 앞의 녀석들은 바리케이드라도 만든 것인지 움직임을 보이지 않는다. 마른 입술을 혀로 핥는다.


"가자!"


말들이 발을 움직이기 시작한다. 글린다와 내가 타고 있는 마차를 끌고 달리는 두 마리의 말. 양옆의 숲에서 발소리가 들리기 시작한다. 속도를 보아하니 평범하게 달려오는 건 아니다. 발굽 소리가 안 들리는 걸 보니 말은 아닌 듯하다.

마차가 크게 흔들린다. 덜그럭거리는 소리가 울려 퍼진다. 긴장감이 나를 덮는다. 그리고 흥분감도.

"화염구."


언제든 던질 수 있게 마법을 준비한다. 어차피 고삐는 잡을 필요 없다. 양손에 불덩이가 이글거리며 타오른다.


놈들이 나와 속도를 맞춰주고 있다. 같은 속도로 도로를 내달린다. 뒤쪽에서 쫓아오는 녀석들도 눈에 보이지 않는 위치에서 쫓아오고 있다. 마차를  방향으로 몰아가고 있다. 지금 내달리는 정면 방향으로. 확실히 뭔가 있군.

정면에 뭔가 보이기 시작한다.   남짓한 사람들이 갑옷을 입고 있다. 손에는 몸을 가릴 정도의 방패와 기다란 창. 미친. 바리케이드가 아니라 장창진을 만들었구만.


[글린다 양. 충돌 준비하세요.]


[무슨 일인데요?]


글린다의 의문에 대답해 줄 시간은 없다. 들고 있는 방패에 마법진이 그려져 있다. 딱 봐도 마법 방어지 뭐. 화염구를 취소한다. 어차피 소용없을 거다.

사람으로 이루어진 바리케이드와 더 가까워졌다. 그냥 충돌하는 건 자살 행위이므로 방법을 떠올리자. 내가 가지고 있는 마법 중에 뭐가 있더라.


"철벽의 가호."


마차와 마차를 끄는 두 마리의 말이 반짝이며 회색빛으로 변해간다. 마차에 타고 있는 나도 마찬가지.

[으아아! 마차가 변했어요!]

시끄러운 글린다와는 달리 말들은 침착하게 자신의 할 일을 다 하고 있다. 말발굽이 땅을 박찬다. 앞을 막고 있는 병사들에게 돌진한다. 말들의 공포가 느껴지지만, 내 마법이 공포보다 강력하다.


병사들의 진형이 들썩인다. 하긴 금속질로 빛나는 말과 마차가 자기에게 달려들면 당황스럽지. 그런데도 저들은 움직이지 않고 자신의 자리를 지킨다. 아주 훌륭한 병사의 표본이지만. 동시에 무모한 행동을 하는 자의 표본이지.


쾅하는 충돌음과 함께 창을 든 사람들이 튕겨 나간다. 찔러 넣은 창대는 부러지고, 방패는 우그러진다. 마차와 말까지 합하면 1t 정도 나오려나? 그 정도 무게의 쇳덩어리와 부딪히는 당연한 결과지.


마차가 흔들린다. 충돌이 그대로 전해진다. 마부석에서 떨어질 뻔할 정도의 흔들림. 다행히 고삐를 꽉 잡아 그런 불상사는 피했다.

[글린다 양. 괜찮으세요?]

[안 괜찮아요. 천장에 머리도 박았어요.]

매우 괜찮군. 뒤를 돌아보자 튕겨 나가 넘어진 사림들이 일어서고 있다. 갑옷에도 마법이 걸려있군. 미니 맵 상에 빨간 점들이 움직인다. 양옆에서 속도를 맞추며 달리던 적들이 앞으로 치고 나간다. 뒤쪽 녀석들은 계속 시야 밖에서 쫓아오고 있다.

앞쪽의 수풀에서 무언가 튀어나온다. 말보다 조금 작은 정도의 늑대. 그 위에는 커다란 칼을 들고 있는 난쟁이. 늑대 기병이야? 이 세계에는 저런 것도 있어? 이러다가 엘프라던가 드워프라던가 튀어나오는 건가.

늑대 기병들은 양옆으로 일정한 거리를 두고 달려나간다. 거리는 좁혀지지도, 늘어나지도 않는다. 왼쪽의 난쟁이가 오른쪽에게 밧줄을 던진다. 두 기병이 밧줄을 잡고 잡아당긴다. 놈들의 늑대가 멈춰 선다. 팽팽해진 밧줄은 말의 다리 위치에 놓여 있다.

생각보다 똑똑한 방법이다. 지금 이 마차를 끌고 있는 말이 정상적인 상태라면. 밧줄은 말의 다리에 걸린다. 평범한 말이었다면 다리가 부러졌겠지. 철벽의 가호를 받은 말들은 그대로 밧줄을 끌고 달려나간다.

밧줄을 잡고 있던 난쟁이들이 늑대에서 떨어진다. 곧바로 밧줄을 손에서 놓아 끌려오지는 않는다.


수풀을 가르고 늑대들이 뛰쳐나온다. 앞에서 우리와 속도를 맞추며 달려나간다. 숫자는 다섯.

[글린다 양. 조금 흔들려도 참으세요.  씹을지 모르니까 입은 꼭 다물고요. 지금부터 돌파하겠습니다.]

양손에 화염구를 만들어낸다. 한번 해 보자 자식들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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