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 37화 〉037. 3막 1장 - Hangover (1) / Isaac? (37/65)



〈 37화 〉037. 3막 1장 - Hangover (1) / Isaac?

속이 쓰리다
머리가 아프다
힘이 없다
그저 멍하니
천장을 바라본다


- 시, `숙취` 中 발췌 -




"으엑."

내가 다시는 술을 마시나 봐라. 지끈거리는 머리를 부여잡고 몸을 일으킨다. 주변을 둘러본다. 여긴 어디지? 처음 보는 곳. 여관 같은 곳으로 추정된다. 내가 왜 여기 있지. 생각을 정리해보자.

"으어어."


머리가 너무 아프다. 깨질 듯이 아프다. 다른 생각은 아무것도 못 하겠다. 일단 두통을 어떻게 해보자.


"회복."


마법이 작동하고 고통은 사라진다. 역시 마법은 사기야.

주변을 둘러볼 여유가 생겼다. 침대, 옷장, 탁자와 의자, 탁자 위에 올려져 있는 주저자와 컵. 그리고 정체를 알  없는 물건 하나. 금속으로 된 관과 수정구가 연결되어 있다. 저것의 정체는 뭐냐.

창문 너머로는 별빛이 쏟아진다. 내가 술을 마셨던 게 점심 즈음이었으니 못해도 여덟 시간은 지났다는 거다. 그래서 나는  여기 있지? 이게 제일 중요한 질문인데.

기억을 떠올려 보자. 글린다가 건네준 술을 마시고 몸에 열이 올랐다. 그다음부터는 기억이 잘 나지 않는다. 술 한 잔으로 필름이 끊긴 거야? 아무리 마셔본 적이 없기는 해도 너무 약한  아닌가.


"미친."


식당에서 기억이 끊긴 내가 여기 있다는 것은 중간에 뭔가 일어났다는 것. 글린다가 날 여기까지 데리고 왔겠지. 그래서 글린다는 지금 어디 있는 거지? 뭐. 이 여관 어딘가에 있겠지. 시간이 시간이니 자고 있을 수도 있고.

침대에서 나온다. 뭔가 개운한 기분이 든다. 그것과 별개로 얼굴이 끈끈하다. 좀 씻어야겠다.


마법으로 물을 만들어내 얼굴을 닦는다. 다시 마법을 사용해 얼굴을 말린다. 좋아. 깔끔해졌군. 그나저나 요즘 잠드는 일이 많아졌네. 수면 독에 중독되고, 술에도 취하고. 정신을  차리고 살아야지.


"이제 뭘 하지?"


할 게 없다. 창문으로 밖을 바라본다. 가로등만이 밝게 빛난다. 거리에는 사람들의 모습이 보이지 않는다. 생각보다 깊은 밤이로군.  정도면 날아다녀도 눈치 못 채겠지?


"공간 이동."

마법으로 건물 밖으로 이동한다. 원래 창문을 이용해 나가려 했지만, 열리는 구조가 아니더라. 그냥 벽에 붙어 있어서 공간 이동을 썼다.


"비행."

몸을 공중으로 띄어 올린다. 차가운 밤바람이 불어온다. 별이 마치 어딘가의 조명처럼 반짝인다. 내가 태어났던 곳에서는  수 없는 광경. 공해도 공해지만, 내가 밤바람을 맞을 정도로 건강하지 않았다는 게 더 먼저지. 볼  없었던 별을 바라보며 하늘을 난다.


슬슬 건물들의 옥상과 비슷한 높이까지 올라왔다. 별은 가까워지지 않는다. 손을 뻗어도 닿지 않는다. 나 왜 이리 감성적이게 된 거지. 달은 보이지 않는다. 구름이 없는 것을 보면 그믐날이라도 되었나 보다.


날아오른다. 저 하늘에 닿을 때까지. 바람과 별이 나를 감싼다.


"후 하."

크게 숨을 둘이 쉬고, 크게 내쉰다. 찬 공기가 폐로 들어갔다 나온다. 나는 이곳에 있다. 죽지 않고. 죽었다가 되살아났다가 더 정확한가? 그건 중요하지 않지. 내가 병실이 아닌 여기에 있다는  중요하다. 나는 지금 살아있다.


발밑의 도시가 작게 보인다. 너무나 작아 손바닥으로 가려질 정도. 가로등의 불빛은 마치 별처럼 멀리 보인다. 나는 하늘의 별과 땅의 별 그사이에 끼어있다. 비행기를 타면 이런 기분일까.  본 적이 없으니 모르겠다.

몸을 바람에 맡기고 하늘에 떠 있는다. 흘러가는 데로 내버려둔다. 바람은 나를 데리고 어딘가로 흘러간다. 어차피 공간 이동으로 돌아가면 되는 거니.


땅의 풍경이 바뀐다. 숲과 도로가 보인다. 나와 글린다가 마차를 타고 지나간 길이. 저쪽에서는 습격을 당했었지. 저 모든 길에는 기억이 담겨 있다.


하늘을 보고 땅을 보는 동안 시간은 흐른다.  시간 정도 흘렀을 거다. 별이 회전한다. 이제 시간이 되었다. 돌아가자.


공간 이동으로 가는 것은 좋은 선택이 아니다. 미니 맵으로 밀란의 위치를 확인하고 그 방향으로 날아간다.


맞바람이 강하다. 얼굴을 때린다. 그래도 기분이 좋다. 나는 지금 모든 것에서 벗어난다.

멀리 여관이 보인다. 천천히 땅으로 내려간다.


"마법사님?"

"글린다 양?"


여관의 옥상에는 글린다가 있다. 나를 보고 놀랐는지 입을 다물지 못한다. 나도 마찬가지. 자고 있을 줄 알았는데.


"뭐하고 계세요?"


"별구경?"

내 대답에는 확신이 없다. 일단 조심스레 날아가 글린다의 옆에 내려앉는다. 글린다는 몸을 움찔 이더니 몇 걸음 뒤로 물러선다. 다가가려고 발을 떼면 글린다가 그만큼 물러선다. 글린다의 눈이 마치 저 바람처럼 흔들린다. 저 하늘의 별처럼 깜빡인다.

"글린다 양?"


"어. 저기. 저는 아무것도 기억하지 못합니다."

알아들을  없는 말을 한다. 무슨 소리를 하는 거야. 글린다는 명백히 나를 피하고 있다. 눈도 제대로 마주치지 못한다. 짐작 가는 건 딱 하나. 내가 술에 취해서 무언가 사고를 친 거다. 제기랄.


"마법사님? 설마 아무것도 기억나지 않으세요?"

글린다의 질문에 고개를 끄덕인다. 뭔가 단편적으로 떠오를 것 같기도 하지만, 기억하지 않겠다. 기억하면 안 될 거 같다. 원래 흑역사는 깊숙이 묻어두는 게 좋은 법.


"무슨 일이 있었나요?"

그리고 다른 사람에게 듣는 것이  효과적이다. 술 취한 인간의 기억을 어떻게 믿겠는가. 당시에 제정신이었던 사람의 기억을 믿어야지. 글린다는 대답을 피한다. 눈을 돌리고 말을 정제한다.


"아무 일도 없었습니다."

많은 일이 있었군요. 말하지 않아도 알겠다. 글린다의 저 알 듯  듯한 표정. 도대체 난 무슨 일을 한 거지?

"글린다 양. 설명해주셔야 제가 다음부터 조심합니다."


난 알아야겠다. 도대체 어떤 일이 일어났는지. 글린다는 한참을 머뭇거리다 입을 열었다.


"술을 마시고 우셨어요."


"네?"

글린다가 무슨 말을 한 거지?


"어린애처럼 엉엉 울었어요."


"제가요?"


글린다는 고개를 끄덕인다. 내가? 정말로? 울었다고? 내가 마지막에 울었던 게 언제지? 내 기억이 정확하다면, 나는 스무 살 생일이 지난 후로 울지 않았다. 사실 그때도 슬픈 영화를 보고 운 거였지.


그 뒤로 눈물을 흘린 적이 없다. 언제나 웃었다. 내가 울면 따라  사람이 좀 많아서 말이지.


"미워하지 말아 달라고 하면서 울었어요."

"제가요?"

글린다는 다시 고개를 끄덕인다. 미워하지 말아 달라고? 어째서  그런 말을 한 거지? 내가 이해하지 못할 일을 내가 했다니. 원래 사람이란 게 자신을 이해할  없는 존재라지만, 이건 좀 너무한데.


"제가 마법사님을 데리고 여관으로 가는 동안은 웃고 있었어요."


와. 감정 기복 엄청 심했구나. 술은 진짜 안 되겠다.


"여관에 들어와서는 울었어요. 엉엉."


거기서 또 울었다고? 나란 놈은 정말 대단하구나.

"방에 들어와서는 침대에 올라갔어요. 창문으로 밖을 내다보면서 태양을 보고 감탄하고, 하늘을 보고 감탄하고  그랬어요."

이건  그랬는지  거 같다. 10년 정도 병실에 박혀있었으니. 술을 마시고 감정이 일부 해방된 거다. 솔직히 지금도 사람들이나 하늘 같은 걸 보면 감탄이 나온다. 내가 볼 수 없었던 것을 보는 것은 즐거운 일이니.


"그리고 어···."

글린다가 말을 멈춘다.  직감이 말한다. 이게 가장 중요한 거라고.


"계속 말해 주세요."


"음···. 점원이 물을 가지고 방으로 들어왔는데 갑자기 마법사님은 아무 말도 안 했어요."


뭔가 기억이   같다.

"그저 멍하니 침대에 누워서 있었어요."

과거의 나처럼. 아무것도 하지 않고 숨만 쉬던 나처럼.


"물을 한잔 마시고 돌아섰는데, 마법사님은 죽은 눈을 하고 침대에 앉아있었어요."

죽은 눈?

"마치 죽음을 앞둔 사람처럼."


기억이 떠오른다. 술이 나에게 무슨 짓을 했는지 생각난다. 나는 도대체  하고 있었던 거지?

"제 팔을 붙잡고 살려달라고, 죽고 싶지 않다고 말했어요."

나는 죽기 싫었다. 살고 싶었다. 그런데 세상은 나를 죽이려 들었다. 심지어 자비를 모른다는 듯이 천천히 조금씩 그러나 확실하게 나를 죽여갔다.

너무 아팠다. 너무 고통스러웠고. 때로는 자살을 생각해 본 적이 있을 정도.

"무슨 일이 있으셨나요?"

글린다가 걱정스러운 말투로 질문한다. 나는 말 없이 글린다를 바라본다. 글린다가 어깨를 움찔거리며 뒤로 물러선다. 내 얼굴은 지금 정상이 아닐 거다.

"글린다 양. 전부 잊으세요. 저는 아무 일도 없었습니다. 앞으로도 없을 거고요."


최대한, 있는 힘껏 웃는다. 일단 나는 살아있으니까. 지금은 죽음을 두려워할 필요 없으니까. 그저 웃어넘긴다.


글린다는 침을 삼키고 고개를 끄덕인다. 그리고 옥상 문을 통해 건물 안으로 들어간다.

"하하하하."


크게 웃는다. 눈물을 흘리며, 또는 눈물을 삼키며.  한잔 때문에 죽음을 무서워하는 나약한 내가 드러났다. 그것도 내가 보호해야 하는 사람에게. 너무나 웃기는 일이다.

나는 죽음이 두려웠다. 너무나 무서웠다. 내가 죽음을 얌전히 기다려야 한다는 것이 너무나 무서웠다. 정정하자. 지금도 무섭다. 죽음은 너무나 무섭다. 아직도 내가 살아있다는 것에 감사한다. 죽음을 기다리지 않아도 된다는 것은 얼마나 축복인가.


죽음이 너무나 무서운 소년, 이유진은 자신을 가두었다. 아주 깊숙한 곳에. 무서워하지 않으면 죽음이 다가오지 않는다고 믿으며. 그리고 그 앞에는 다른 존재가 나타났지. 재미를 추구하며 사는 존재가.


모든 것에서 재미를 추구하며, 재미없는 일을 만나면 죽는 줄 아는 존재. 그게 나다. 그게 나 아이작이다. 나는 나를 안에 가두고 밖으로 뛰쳐나온 존재다.


그런데 술이 감옥을 깨트렸다. 아이작이 술에 취한 동안, 이유진이 뛰쳐나왔다. 죽음을 두려워하는 어린아이. 두려움에 휩싸여 성장하지 못한 존재. 글린다는 이유진을 봤다. 울고 웃고 두려워하는 이유진을.

"으하하하!"

웃음소리가 밤하늘을 가득 채운다. 자조의 웃음. 분노의 웃음. 슬픔의 웃음.

이제 어떻게 하지? 어떻게 글린다를 보지? 죽음을 두려워하는 소년의 모습으로 어떻게 글린다를 마주하지?


 전에. 나는 누구지? 지금의 나는 누구지? 이전까지의 나는 아이작이었다. 마법사 아이작. 퍼펙트 메이지 아이작. 재미를 추구하는 사람.


그럼 지금은? 지금의 나는 누구지? 내가 숨겨두었던 나의 모습이 깨어났다. 이제 나는 누구지? 죽음을 두려워하는 이유진? 아니면 재미를 추구하는 아이작?

쉽게 답을 내릴 수 없다. 처음 여기 왔을 때부터 품었던 의문은 아직 해답이 나오지 않았다.

별은 반짝인다. 검은 하늘 속에서. 홀로 빛을 내며. 나는 이곳에 서서 내가 누구인지도 모르는 채로 별을 바라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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