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9화 〉029. 2막 4장 - 검은 날개 (1) / Glinda
어두운 골목은 언제나 조심해라. 검은 날개는 모든 그림자 속에 숨어 있으니.
항상 뒤를 조심해라. 발밑을 조심해라. 머리 위를 조심해라. 눈이 닿지 않는 곳에는 그들이 있다.
- 부자와 귀족들에게 내려오는 격언 -
으아. 으아어으. 으어어.
어젯밤에는 축제의 감각이 남아있어서 잠드는데 고생했다. 흥분을 가라앉히는 동안 침대만 뒹굴뒹굴. 그리고 정신을 차려보니 창밖으로는 태양이 떠올라 있다. 꽤나 높이 말이다.
눈을 비비고 기지개를 켠다. 마법사는 아직 안 일어났나? 아니지. 마법사는 잠을 자지 않는다고 했지. 침대의 감촉을 조금 더 즐기다 바닥에 내려온다. 집에 있었을 때라면 이런 침대에는 눕지도 않았을 거다. 그런데 지금은 저 싸구려 침대를 편하다고 느낀다. 역시 사람은 적응의 동물.
간단한 스트레칭으로 몸을 푼다. 우선 마법사를 깨우자. 마차가 수리될 때까지는 아직 사흘 남았다. 그 시간 동안 뭘 하면서 보내느냐가 중요한 거지.
문을 나서 복도로 나선다. 마법사의 방은 4호실. 숫자가 쓰여 있는 문 앞에 서서 작게 노크한다.
"마법사님. 안에 계시죠?"
"금방 나가겠습니다."
안쪽에서 마법사의 목소리가 들려온다. 금세 문이 열리고 마법사의 모습이 나타난다. 어제 보았던 모습 그대로. 변함없이 그대로.
"오늘은 뭘 할까요?"
대뜸 마법사가 질문한다. 이 인간에 대해 관찰한 결과 마법사는 지루한 것을 참지 못한다. 거의 병적으로 뭔가를 해야만 하는 그런 인간.
"따로 할 만한 건 없는데···."
이 밀란이라는 도시에 대해 아는 것도 거의 없고. 마법사의 표정에 실망이 떠오른다.
"일단 상점가 구경이라도?"
당장 떠오르는 건 이런 것밖에 없다. 마법사의 표정이 밝아진다. 너무 쉬운 거 아닌가. 내가 다른 사람을 걱정할 처지는 아니지만.
"좋은 생각입니다. 얼른 움직이죠."
마법사는 바로 방문을 잠근다. 가벼운 걸음으로 계단을 내려간다. 아버지가 말했었지. 남자는 크나 작으나 다 애라고. 왠지 그 말이 가슴에 와 닿는다.
"같이 가요."
우선 마법사를 따라가자. 빠르게 계단을 내려간 마법사는 여관 문을 박차고 나선다. 실제로 차지는 않았지만, 그런 분위기로 문을 열었다.
"상점가는 어느 쪽이죠?"
마법사의 눈이 무시무시하게 반짝인다. 왠지 모르지만 흥분한 상태. 원래 제정신으로 보이던 사람은 아니었지만, 오늘은 특히 심하다. 한숨이 절로 나온다. 이 사람을 데리고 상점가를 돌아다녀도 되나? 약간 걱정된다.
"저쪽이에요."
가볍다 못해 날아갈 듯한 발걸음의 마법사와 거리를 걸어간다. 시선이 몰리는 것 같다. 안다. 당연히 착각이다. 저 사람들도 일이 다 있는데 조금 특이한 사람에 집중하지는 않겠지. 그냥 내 얼굴이 조금 화끈거릴 뿐이다.
"뭐가 그렇게 좋으세요?"
이건 물어봐야겠다. 어떻게 사람이 하룻밤 만에 성격이 변하는지. 내 질문에 마법사는 환하게 웃으며 대답한다.
"그야 세상은 즐거우니까요."
그 과장된 말투. 과장된 표현. 제기랄. 인제야 눈치채다니. 마법사는 자신을 열심히 포장 중이다. 즐겁다는 포장지와 행복하다는 리본으로. 축제가 끝나고 분명 무슨 일이 있었다. 나는 모르는 일이. 마법사가 알리고 싶지 않은 일이.
이를 절로 물게 된다. 짜증이 확 치밀어 오른다. 이 인간은 나랑 며칠을 같이 다녔는데 뭘 숨기고 다니는 거지? 저 웃는 낯짝을 한대 후려갈기고 싶다.
"뭐가 잘못됐나요?"
마법사는 웃으며 물어본다. 간신히 주먹을 휘두르는 걸 참았다.
"됐어요. 얼른 갈 길이나 가죠."
등을 돌려 길을 걸어간다. 뒤에서 마법사가 따라오는 발소리가 들린다. 아. 자꾸 짜증 내면 피부가 상하는데. 나도 조금 진정할 필요가 있다.
여관과 상점가는 거리가 멀지 않다. 낮에도 사람이 바글거린다. 당연한 거지. 이 밀란은 농업이 아닌 수공업으로 먹고사는 도시. 상점가의 옆에는 공방거리가 죽 늘어져 있다. 손님들의 대부분은 그 공방거리에서 온 사람들일 테고.
"처음 보는 물건들이 많네요. 사람도 많고요."
정말 신기한지 두리번거리는 마법사. 눈에는 놀라움이 가득하다. 이런 걸 보면 정말 어떻게 마법사가 되었는지 의문이 든다.
"가고 싶은 곳 있어요?"
"마법 물품점 있을까요? 약초상이랑 광물상도 좀 가보고 싶고. 무기점도 덤으로."
가고 싶은 곳도 참 많다. 다른 건 그렇다 쳐도 무기점은 왜 가는 거지? 약간 궁금증이 생긴다.
"돌아다니다 찾으면 들어가요. 저도 지리를 다 아는 건 아니라서."
그렇군요. 마법사는 작게 중얼거리고 걸음을 옮긴다. 길게 늘어선 가게들에는 간판과 어떤 종류의 가게인지를 말해주는 그림이 그려져 있다. 마법사는 그 그림 하나하나에 반응을 보인다.
"저건 무슨 가게인가요?"
나한테 일일이 물어보면서. 웃으면서 물어보는 마법사의 속내에는 어떤 감정이 있을까.
"양장점이네요."
모든 질문에 하나하나 대답하는 나도 대단하다. 마법사는 대답을 들을 때마다 감탄사를 내뱉는다. 정말 한 대 치고 싶다. 나를 놀리는 것으로 느껴진다. 그럴 의도는 없겠지만. 그냥 저 자신을 숨기며 웃는 모습이 너무 싫다.
"저 그림은 마법 물품점!"
"정답입니다."
마법 물품점에 그려진 그림은 지팡이 하나. 마법사를 상징하는 도구지. 그러고 보니 나랑 다니는 마법사는 지팡이를 안 쓰네. 물어봐야지.
"그런데 마법사님은 왜 지팡이를 쓰지 않으세요?"
내 질문에 마법사는 턱을 괴고 생각에 잠긴다. 입 밖에 내놓을 말을 고르는 중이렷다.
"귀찮아서?"
왜 대답이 의문문일까. 그전에 귀찮아서라니. 그게 대답이 된다고 생각하는 건가. 마법사는 자기가 말하고서도 의문이 가득한 눈으로 고개를 갸웃거린다. 한숨이 나온다.
"아니다. 필요 없어서예요."
생각이 번뜩인 듯 손뼉을 치며 말한다. 그나저나 필요 없어서라니. 확실히 저번에 길에서 공격해 온 마법사도 지팡이는 없었다. 원래 안 들고 다니는 건가? 마법 지팡이는 그저 잘 모르는 사람들이 만들어낸 이미지? 이것도 엄청 궁금해지네.
"들어가도 되죠?"
마법사의 목소리에 정신을 차린다. 너무 쓸데없는 생각에 집중하고 있었다. 마법사는 가게에 들어가고 싶다는 눈빛을 보내고 싶다. 오늘 하루 본 얼굴 중 처음으로 진실한 감정을 꺼냈다.
"시간도 남아도니 구경이나 하다 가죠."
말이 끝나기도 전에 문이 열린다. 마법사는 열린 문 사이로 발을 집어넣는다. 살짝 가게 안쪽을 바라본다. 생각한 것과는 다른 모습.
"와."
나도 모르게 감탄사가 흘러나온다. 마법 물품점 생각하면 어두운 가게, 이상한 도구들, 반짝거리는 수정 구슬을 떠올리기 마련. 하지만 내가 직접 보는 마법 물품점은 다르다.
상당히 세련되고 깔끔한 모습. 어두운 가게가 아니라 마법 전등을 이용한 밝은 가게. 이상한 도구들이 아닌 나무로 만든 선반에 가지런히 정렬된 도구들. 반짝거리는 수정 구슬 대신 반짝이는 마룻바닥. 이상한 가게로 보이지 않는다. 오히려 귀족들이 자주 들르는 보석점에 버금가는 모습.
"어서 오세요."
나보다 조금 어려 보이는 금발의 종업원이 나와 마법사를 반긴다. 방긋 웃는 모습이 보기 좋다. 마법사는 종업원의 인사를 받는 둥 마는 둥 가게를 이리저리 살펴본다.
"작은 가게치고는 있을 건 다 있네요."
마법사가 가게를 둘러본 감상을 말한다. 음. 나는 잘 모르겠다. 마법사만의 뭔가가 있나 보지.
"이건 가격이 얼마 정도 되나요?"
"1,200 트리탄 은화입니다."
켁. 마법사가 들어 올린 것은 검은색으로 빛나는 수정. 확실히 특이하고 마법적으로 보이는 물건이다. 그래도 가격이 그렇게 비싸다니. 그 정도면 평범한 4인 가정의 열흘간의 생활비보다 많다. 최소한 내가 배운 바로는.
"생각보다 싸네요."
"최근에 큰 광산이 발견돼서요. 전체적으로 마나석 가격이 내려갔답니다."
종업원의 말에 마법사는 고개를 끄덕인다. 1,200 트리탄 은화가 싼 거구나. 마법사의 금전 감각은 참 이상한 것 같다. 나도 귀족이라 천민의 금전 감각과는 다르다고 자각하고 씨지만, 마법사는 더 이상하다.
이상한 게 아닐 수 있다. 저 인간은 2만 트리탄 은화 가치가 있는 마법 물품들을 거리낌 없이 파는 인간이다. 사실은 엄청난 부자가 아닐까. 환전상을 찾았던 걸 보면 타국의 돈을 잔뜩 들고 있을 수도 있다. 갑자기 마법사가 눈부시게 빛난다.
"글린다 양? 왜 손으로 눈을 가리고 계세요?"
"당신이 너무 빛나 보여요."
"무슨 소리인가요?"
"그냥 하던 일이나 하세요."
다행히 마법사가 내뿜는 빛은 금방 가라앉았다. 다행인가?
마법사는 계속해서 종업원이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눈다. 마법과 관련 없는 나는 알아듣지 못하는 그런 이야기들.
처음 봤을 때야 전부 신기한 도구들이었다. 사용법을 모르니 금방 지루해졌지만. 마법사와 종업원의 열띤 대화는 식을 줄 모른다. 이제는 여기서 버티지 못하겠다.
"저 다른 가게 좀 둘러보고 있을게요."
마법사는 알았다는 듯 나를 보고 고개를 끄덕인다. 그리고 다시 종업원과 열띤 대화. 아. 열이 확 오른다.
조용히 가게를 빠져나간다. 가게 안쪽도 밝은 편이었지만, 역시 태양광을 이기지는 못한다. 태양이 눈을 찌른다. 잠시 눈을 감는다. 다시 눈을 떴을 때는 거리가 선명하게 보인다.
뭔가를 들고 열심히 움직이는 사람들. 연인으로 보이는 사람들은 서로의 얼굴을 보며 즐겁게 웃는다. 아이를 데리고 있는 두 젊은 남녀. 갑자기 어머니와 아버지의 얼굴이 떠오른다.
"하아."
한숨이 입 밖으로 새어 나왔다. 기분이 울적해진다. 여태까지는 도망을 다니느라 느끼지 못했던 감각. 이렇게 쉬고 있으니 내가 가족과 떨어져 있다는 생각이 물밀 듯이 들어온다.
"정신 차리자,"
뺨을 때려 정신을 집중한다. 내가 정신을 차려야지만 안전하게 영지로 돌아갈 수 있다. 마법사는 조금 못 미더우니.
일단 좀 움직이자. 아까까지의 분위기로 봐서는 대화가 금방 끝날 것 같지는 않았다.
"뭐라도 좀 먹을까."
스트레스를 받을 때는 뭔갈 배에 채워줘야 한다. 단 것이면 더 좋고. 길을 걸으며 간단하게 먹을 간식거리를 찾는다. 그때 달콤한 냄새가 코로 스며들어온다. 입에 침이 고인다. 반사적으로 고개가 돌아간다.
상점가의 어두운 골목에서 피어오는 향. 괜찮겠지? 골목에 들어간다고 납치당하고 그런 건 이야기 속에서나 그런 거다. 골목이긴 하지만, 대로 바로 옆이고. 설마 무슨 일이라도 있겠어? 금방 들어갔다 나오면 되지 뭐.
뭔가에 이끌리듯 골목 안쪽으로 발을 옮긴다. 안쪽에 작은 등불과 나무 탁자가 보인다. 그 너머에 서 있는 노인의 모습도. 뭘 파는 건지 몰라도 맛있을 거 같다.
"뭘 팔고 계신 건가요?"
탁자 위에는 아무것도 놓여있지 않다. 그럼 이 냄새는 어디서 나는 거지?
"....."
노인의 입술이 달싹거린다. 뭔가 말하는 것 같지만 잘 들리지 않는다.
"뭐라고 하셨어요?"
"네 목숨."
"네?"
목 뒤가 따끔하다. 손으로 만져보니 뭔가 박혀 있다. 골목 주변에서 검은 옷을 입은 사람들이 나타난다. 당했네. 시야가 줄어드는 것이 느껴진다. 땅이 점점 가까이 다가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