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5화 〉025. 2막 2장 - 마차 여행 (3) / Glinda
으윽. 몸이 쑤신다. 눈을 뜨니 천막 너머로 내리쬐는 햇볕이 느껴진다. 마차는 계속 덜컹덜컹. 누워 있는 의자는 나름 푹신하지만, 역시 불편한 건 불편한 거다.
눈을 비비며 몸을 일으킨다. 늘어지게 하품을 하고 기지개를 켠다. 마차를 타고 움직이기에 특별히 할 일은 없다. 마차가 움직인다고?
"마법사님!"
마법사를 부르며 마차 밖으로 고개를 내민다. 이름을 알고 있긴 하지만, 왠지 입에 안 붙는단 말이지. 마법사는 마부석에 앉아 말을 몰고 있다. 몰고 있는 건가. 손에는 아무것도 들려있지 않다. 고삐를 쥐어야 하지 않나?
"글린다 양. 일어나셨군요."
마부석에 앉아 있던 마법사는 고개를 돌려 나와 눈을 마주친다.
"밤새 마차를 모신 거에요?"
"네."
"안 주무셨어요?"
"뭐 잘 필요 있나요?"
"안 피곤하세요?"
"전 잠이 필요 없는 몸이랍니다."
거짓말 같진 않다. 마법사가 잠이 필요 없는 건지, 저 사람이 특별한 건지 모르겠다. 내가 상관할 문제는 아니니.
"말은 좀 쉬게 하셨나요?"
"밤에 조금 멈춰있었습니다."
잘 운전하고 온 거 맞지? 왠지 대답들에 힘이 없다. 마법사는 내가 말이 없자 다시 정면을 바라보고 말을 몰고 있다. 약간 걱정스럽지만, 알아서 잘하겠지. 뭐.
마차의 문을 닫고 안으로 들어간다. 의자에 몸을 기대고 눈을 감는다. 잔잔한 흔들림에 맞추어 눈을 감는다. 방금까지 자고 일어났지만, 잠을 자는 것은 언제나 옳은 법. 그대로 수면의 바다에 몸을 두둥실.
꾸르륵. 정신이 번쩍 든다. 이게 내 배에서 난 소리라니. 빨리 한다를 떠나기 위해 저녁을 부실하게 먹었다 해도 이건 아니다. 마법사는 못 들었겠지?
확인해보기 위해 마차 문을 살짝 연다. 마법사는 앞을 바라보고 있을 뿐. 안 들킨 거 같네. 일단 아침을 먹어야겠다. 모든 식량은 마법사가 가지고 있다. 뭔지 모를 마법으로 식량부터 시작해서 모든 것을 어딘가에 보관한다. 아주 좋은 마법이다.
"마법사님. 아침 먹어요."
문을 열고 마법사에게 들리게 말한다. 마차가 멈추기 시작한다.
"벌써 시간이 그렇게 됐군요."
사흘간 마법사를 본 결과, 마법사는 음식을 거의 먹지 않는다. 잠이 필요 없는 것처럼 음식도 필요 없는 건가. 간편한 몸뚱이군.
"금방 준비하죠."
마부석에서 마법사가 내린다. 아무것도 없는 곳에서 건초를 꺼내고 말들의 앞에 내려놓는다. 손을 대지 않고 마구를 풀어 말들이 편히 쉬게 한다. 품에서 어디서 나왔는지 모르는 돗자리를 펴고 그 위에 맥발라에서 사온 음식들을 늘어트려 놓는다. 역시 마법은 사기야.
마차의 문을 열고 땅을 밟는다. 돗자리로 다가가 조심스레 신을 벗는다. 그러고 보니 이 신발도 마법사한테 받은 거네.
"어서 앉으세요."
마법사와 마주 보고 자리를 잡는다. 꺼내진 음식은 베이컨이 들어간 샌드위치. 만들어진 지 하루가 지나가는데 안에 들어있는 채소는 싱싱하다. 마법은 역시 사기야.
샌드위치는 아주 맛있다. 산도 잘 배어 있고 아삭아삭한 식감이 일품이다. 마법사가 잔에 따라준 물을 마신다. 물이 담긴 잔은 무려 황금으로 된 잔이다. 이곳저곳에 반짝이는 보석까지 붙어있는 왕후장상이나 쓸법한 그런 잔. 어째서 이런 걸 가졌는지는 묻지 말자. 원래 너무 많이 알려고 하면 다친다. 그거도 크게.
"잘 먹었습니다."
"잘 먹었습니다."
내가 세 개를 집어먹는 동안 마법사는 하나밖에 먹지 않았다. 남자보다 많이 먹다니. 이건 여자로서의 수치다. 라고 생각하기엔 여태까지 마법사보다 많이 먹어 왔다. 저것만 먹고 배부르다는 마법사가 이상한 거지.
"이제 다시 움직이죠."
마법사가 자리에서 일어난다. 나도 다시 신을 신는다. 마법사는 돗자리와 남은 샌드위치를 다시 사라지게 한다. 말들을 쓰다듬으며 다시 마구를 채운다. 남은 건초를 어딘가에 집어넣는다. 마법은 역시 사기야.
문을 열고 마차에 올라탄다. 편안하진 않은 의자에 몸을 얹는다. 으아아. 나른하다. 이틀 동안 안전을 위한 강행군을 했다. 그리고 그 피로가 오늘 쏟아지고 있다. 그럼 조금 자고 생각해볼까.
"출발하겠습니다."
그 말과 동시에 마차가 잔잔하게 덜컹거리기 시작한다. 덜컹덜컹덜컹. 아. 기분이 좋다. 몸이 녹아내리는 기분이다. 둥실둥실 몸이 떠오른다.
덜컹거린다. 누워 있는 자리가 심하게 흔들린다. 이 상태로는 잠들지 못하겠다. 감겨 있던 눈을 슬며시 뜬다. 감각이 정상으로 돌아온다.
마차가 격렬하게 흔들리고 있다.
"화염구."
밖에서 마법사가 마법을 사용하는 소리가 들려온다. 폭발소리도 함께. 엄청난 속도로 달리는지 말발굽 소리와 바퀴가 굴러가는 소리마저 들린다. 마차는 격렬하게 흔들리고 있다.
"마법사님!"
상황을 확인하기 위해 문을 열고 마법사를 부른다. 열린 문으로 화살이 날아와 박힌다. 힉.
"문 닫고 들어가 있어요!"
이럴 때는 말을 잘 듣는 게 좋다. 빠르게 문을 닫고 얌전히 의자에 앉는다. 얌전하게 앉았다기에는 마차가 너무 흔들리지만. 이 마차는 싸구려라 창문도 달리지 않았다. 그때 마법사의 물건을 더 팔았어야 했어. 그래서 지금은 어떤 상황이지? 문을 열기에는 너무 위험하다는 건 알겠다.
[지금 산적들한테 습격받고 있어요.]
"힉!"
나도 모르게 놀라 소리쳐 버렸다. 방금 마법사의 목소리가 머릿속에 들려 왔다.
[놀라지 마요. 그냥 보통의 마법이에요.]
이런 걸 보통이라고 하는 마법사의 머릿속이 궁금하다. 마법사는 다 이런 건가.
[그냥 평범하게 머릿속으로 말을 거시면 돼요.]
그런 게 가능한 걸 평범이라고 하지 않을 거로 생각합니다만.
[지금 잠깐 여유 있으니까 물어볼 거 물어보세요.]
쫓기고 있는 것처럼 보이는 데 여유입니까? 마차는 계속 흔들리고 있다. 간간이 폭음이나 뭔가 날아와 꽂히는 소리도 들리고. 아마 화살이겠지.
[제 말 들리시나요?]
[잘 들립니다.]
한 번 시도해 본 건데 잘 되나 보다. 생각하는 거랑은 조금 달라서 약간 힘을 써야 한다. 조금 하다 보면 요령도 붙겠지.
[어떻게 된 거에요?]
[산을 넘는 도중에 산적들이 습격해 왔습니다. 말을 타고 있네요.]
말까지 타고 있다면 전문적인 녀석들이다. 잠깐. 지금 산이라고?
[지금 시각이 어떻게 되죠?]
[해가 조금씩 지고 있네요.]
나 얼마나 잔 거지. 반나절을 그대로 자 버렸다니. 점심도 먹지 않고. 잡생각을 하는 동안 마차가 크게 덜컹거린다. 의자에 앉아있지 못하고 바닥에 넘어졌다.
[으아아. 큰일 났다. 산적들이 마법을 쓰는데요?]
[말도 안 돼! 마법사가 산적이라니!]
마법사라면 어딜 가든 먹고살 만큼의 돈을 벌 수 있는 존재들이다. 아무리 약하더라도 마법사라고 불릴 정도면 말 다했지. 신념이나 생각이 달라서 산에 틀어박혀 사는 마법사는 있다지만, 산적이 된 마법사는 처음 본다. 어디의 반란군도 아니고 산적이라니. 마법사라는 이름이 울게 분명하다.
[진짜 마법사 맞아요?]
[약간 수상쩍긴 하네요. 마법도 하나밖에 안 쓰고 있고.]
[지팡이를 들고 있다거나?]
[오. 어떻게 아셨어요? 빨간 나무 지팡이를 휘두르네요.]
[마법 물품이네요.]
[그럼 마법사가 아닌 거죠?]
[네.]
[좋아. 그럼 날뛰어도 되겠네요.]
그것을 끝으로 마법사의 목소리가 들려오지 않는다. 마법 물품을 쓰는 사람과 마법사도 구분 못 하다니. 마법사가 맞긴 한 걸까. 그나저나 산적들이 마법 물품은 어디서 구한 거지? 마법을 사용하게 하는 수준이면 쉽게 구할 수 있는 물건은 아닌데.
비명과 폭발음이 몇 번씩 들린다. 마법사가 산적들을 처리하는 거겠지. 마차의 흔들림도 줄어든다. 속도가 줄어들었다고 보는 게 맞겠지.
곧 마차가 완전히 멈춰 선다. 마차의 문이 열리고 검은 망토를 걸친 마법사가 들어온다.
"산적들은 전부 치워버렸어요."
마법사는 내 맞은편 의자에 앉으며 웃는다. 사람을 처리했다고 하면서 웃는다니. 마법사는 이해 못할 인간이다. 나도 사람을 죽이고 우울해 하거나 하지는 않지만, 웃지는 않는다고.
"으아! 한 번 움직였더니 개운하다!"
행복한 미소를 지으며 크게 기지개를 켠다. 제대로 본적 없지만, 마법사인 걸 알면서 덤빌 정도면 산적의 숫자도 상당했을 거다. 그런 거랑 싸우고서 개운하다고 말하다니. 인간이 아닐지도.
"참. 엄청 중요한 소식을 알아냈는데."
갑자기 마법사가 진지한 표정을 짓는다. 양손을 모아 무릎 위에 올려놓는다.
"산적 녀석들. 마법 지팡이를 대가로 의뢰를 받은 모양이더라고요."
마법 지팡이를 지급하다니. 누군지 몰라도 통이 크다.
"의뢰 대상은."
"당연히 저희겠고요."
내 말에 마법사는 고개를 끄덕인다.
"구체적으로 말하면 이 산길을 지나가는 마차였어요."
손톱을 물어뜯을 뻔했다. 다행히 직전에 손을 멈췄지만. 내 목숨을 노리는 누군가는 우리가 마차를 구매했다는 것을 알고 있다. 나를 미행하고 있다는 소리. 별로 좋지 않다. 정확히 말해서 매우 좋지 않다.
나를 숲으로 순간이동 시키고 죽이려 했다. 그리고 실패한 것을 알아채자마자 다음을 준비한다. 계속 뒤따라 붙으면서. 매우 집요하고 끈덕진 녀석이다. 도대체 누구지? 아니. 누구냐는 중요하지 않다. 왜라는 질문이 중요하지.
내 가치를 생각해보자. 북동부 변경백의 셋째 딸. 위로는 오빠가 둘. 계승권 없음. 후계자 싸움은 아닐 거다. 후계자 싸움이어도 여자는 외딴 귀족에게 시집을 보내지 죽이지는 않는다.
정치 문제? 라고 하기에는 오스왈츠 가문은 한 번도 중앙으로 진출한 적이 없다. 무려 8대에 걸쳐 북동부 국경을 수비한 군인 집안. 군내정치라고 하기에도 아버지의 권력이 크지 않다.
옆 영지의 공격? 우리 영지가 가진 게 뭐가 있다고. 끽해야 군사용 성채 몇 개 정도. 사업성이 있는 광산도 없다. 개인적인 복수도 아닐 거다. 내가 알기로는 우리 가문에 특별한 적은 없다.
나를 납치해서 협박? 죽이려고 했으면서? 심지어 협박으로 얻어낼 만한 것도 없다.
적국의 공격? 그럴 거면 오빠들을 공격했지. 나는 지휘관도 아니라고. 검술을 조금 배웠다지만, 그건 그저 취미 생활 정도였다. 기사가 될 생각도 없단 말이지.
"정신!"
내 눈앞에서 손가락이 튕긴다. 반쯤 나가 있던 정신을 붙잡는다. 마법사 내 눈을 보더니 만족스러운 듯 고개를 끄덕인다.
"아직 확실한 거 하나 없는데 너무 깊게 생각하지 맙시다. 생각에 얽매이면 행동이 나오지 않아요."
완전히 공감할 수는 없지만, 틀린 말은 아니지. 아직은 재료가 부족하다. 좀 더 많은 재료가 필요하다. 내 목을 노리는 자를 특정할 수 있는 재료가. 만약 누군지 밝혀지면, 쉽게 보내주지는 않을 거다.
"그건 그렇고 식사하실래요?"
"먹을래요."
"금방 준비하겠습니다."
좋아. 일단 먹고 생각하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