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2화 〉022. 2막 1장 - 폭풍가도 (3) / Isaac
빗방울이 땅에 떨어지는 소리. 바람이 귓가를 스치는 소리. 진흙을 밟으며 달려가는 소리. 거칠어진 숨소리. 금속과 금속이 부딪히는 소리. 심장의 박동 소리. 그 외의 다른 소리는 들려오지 않는다.
글린다의 안색이 안 좋아지고 있다. 10분 정도 뒤도 보지 않고 달리고 있다. 전력 질주가 아니라 하더라도 지치기 딱 좋은 시간이다. 글린다의 걸음이 점점 느려진다. 뒤쫓아 오는 지옥의 전사들과 가까워지고 있다.
마법을 날려봐도 거리가 벌어지지 않는다. 땅을 들어 올리고 강풍으로 밀어도 철갑의 전사들은 쉬지 않고 달려온다. 공간 마법을 사용해 볼까 생각했지만, 아직 방해 마법의 효과가 남아있다.
"글린다 양."
"네?"
"죄송합니다."
미안한 건 미안한 거고, 일단 살리고 보자. 옆에서 달리고 있는 글린다의 허리를 낚아챈다.
"으엣?"
글린다가 이상한 비명을 지른다. 정말 미안하지만, 어쩔 수 없는 거다. 글린다를 들어 올려 어깨에 들쳐멘다. 뭔가 상당히 모양이 이상하지만, 어쩔 수 없는 거다.
"질풍의 발걸음."
마법을 사용한다. 발걸음이 가벼워진다. 그대로 앞으로 튕겨 나간다.
"으아악!"
어깨에 엎어진 채로 뒤쪽을 보고 있는 글린다가 소리친다. 많이 미안하지만, 어쩔 수 없는 거다. 글린다의 비명을 무시하고 달려나간다. 글린다가 얹혀져 있는 반대 방향으로 고개를 돌린다. 지옥의 전사들과 거리가 벌어지기 시작한다. 계획대로.
이대로 계속 달려나가면 문제없이 시간을 끌 수 있으리라. 그렇게 생각했다.
"마법사님! 저놈들 뛰어요!"
그게 무슨 소리야? 라고 생각한 순간 내 앞으로 흑색의 갑옷을 입은 전사가 떨어진다. 땅이 울리고, 깨지고, 갈라진다. 미친. 분명 UMO 내에서는 없던 일. 그리고 지금은 그런 생각을 할 때가 아니다.
"하늘 걸음."
마법을 사용하고, 공중을 딛고 뛰어오른다. 내가 서 있던 곳에 검은 대검이 휘둘러진다. 어마무시하군.
그대로 공중을 몇 번 디뎌 지옥의 전사 뒤편에 착지한다. 땅을 딛고 달려나간다. 뒤쪽에서 달려오는 소리가 들린다.
"글린다 양! 뒤쪽 상황 중계 부탁합니다!"
"알겠어요!"
놈들이 점프할 수 있다는 것을 알게 된 이상, 거리란 건 무의미하다. 언제든 뛰어올라 내 앞에 착지하면 되니까. 뒤쪽 상황은 글린다에게 맡기고 나는 열심히 달리는 게 맞다.
분명 UMO 내에서는 지옥의 전사가 저런 행동을 하지 않았다. 누군가의 연구 결과 지옥 전사의 AI는 돌진과 공격이 전부라고 했다. 100번이나 실험을 한 것으로 보아 나보다 할 일이 없는 사람이었지. 방금처럼 같이 장애물을 뛰어넘는 행동은 불가능한 존재였다. 게임 속에서는. 이곳은 게임이 아니라는 듯 내 예상을 벗어나는 움직임. 앞으로는 게임 속 지식을 기준으로 생각하면 안 되겠군.
"뒤에 칼!"
"대지의 장벽!"
글린다의 말을 듣고 본능적으로 마법을 사용한다. 팍 하는 소리와 함께 뒤쪽에서 흙더미가 무너진다. 뭔가 대지의 장벽을 부쉈다. 뒤를 돌아볼 시간은 아깝다. 글린다에게 설명하게 하자.
"어떻게 된 겁니까!"
"괴물들이 칼을 던졌어요!"
하. 원거리 공격까지 하는 거야? 돌아버리겠다. 정말. 원거리 공격을 막을 방법이 아예 없지는 않지. 나만 있다면 말이야. 어깨에 글린다를 짊어진 상태에서 막기는 쉬운 일이 아니다. 글린다가 잘 경고해주기를 바라는 수밖에. 다행히 글린다는 다른 사람의 어깨 위에 있는 것치고는 경고가 빠르다. 정확성은 둘째 치자고.
"저놈들 더 빨라져요!"
으엑. 더 빨라진다고? 고개를 살짝 뒤로 돌린다. 정말이다. 질풍의 발걸음으로 벌어지고 있던 거리가 줄어들기 시작한다. 이걸 어쩐다냐. 일단 계속 달리면서 생각하자.
"또 칼!"
"대지의 장벽."
뒤도 돌아보지 않고 마법을 사용한다. 아까와 마찬가지로 쌓아올려진 흙의 벽이 무너지는 소리가 들려온다. 덤으로 빠르게 다가오는 발소리도.
빗줄기는 끊임없이 내려온다. 아까와 비교해서 조금 줄어들긴 했지만. 질척거리는 땅도 불어오는 바람도 변함없다. 목숨이 위험한 상황도. 발소리는 더 가까이 들려오고, 떠오르는 방법이 없다. 생각하자. 이 상황을 극복할 방법을. 난 UMO 랭킹 1위다. 온갖 역경을 다 이겨냈고, 잡을 수 없다는 괴물들도 사냥했다. 생각해라. 살아날 방법을.
"또 뛰었어요!"
글린다의 말이 끝남과 동시에 내 앞에 지옥의 전사가 나타난다. 흑색으로 빛나는 대검을 당장에라도 휘두를 듯이 들고서.
"하늘 걸음."
아까와 같은 방식을 사용한다. 마법을 쓰고서 공중을 디딘다. 그대로 지옥 전사의 머리를 뛰어넘으려는 찰나. 무언가 발목을 붙잡는다. 차가운 금속질의 손. 망했네.
"으아악!"
글린다의 비명과 함께 몸이 휙 기울어 버린다. 땅에 내던져지는 게 느껴진다. 이대로 넘어지면 위험하다. 나야 그렇다 쳐도 글린다는 진짜 죽을 수 있다. 글린다를 하늘로 던진다. 나중에 마법으로 받지 뭐.
등에 강한 충격이 느껴진다. 얼굴로 빗방울이 쏟아진다. 머리가 멍하다. 머리 주변으로 철컥거리며 쇠가 부딪히는 소리가 들려온다. 공중에는 아직 글린다가 떠 있다.
"절대 방어."
양팔을 뻗으며 마법을 사용한다. 검은 대검이 내 머리 위에서 멈추어 선다. 마법을 안 썼으면 죽었겠군. 잠시 틈이 생긴 동안 몸을 굴려 사선에서 빠져나온다. 떨어지는 글린다를 향해 손을 뻗는다. 글린다가 그 자리에서 멈춘다. 염동 마법의 응용이다. 공중에 멈추어 버린 글린다의 표정이 가관이다. 그래도 웃는 건 나중에 하자.
몸을 굴린 그 자리에서 일어난다. 잠시 누워 있던 동안 지옥의 전사들이 많이 가까워졌다. 당장 내 앞에도 한 녀석이 있고 말이야.
"얼른 내려주세요!"
공중에 떠 있는 글린다가 소리 지른다. 정말 미안하지만, 그건 나중에 해줄게. 지금은 좀 바쁘거든.
완전히 포위되기 전에 빠져나가야 한다. 하늘 걸음은 이미 파훼 되었고. 다른 방법이 필요하다. 떠오르는 방법이 몇 개 있기는 하지만, 이런저런 이유로 기각. 하나 남은 방법이 있다. 될지 안 될지 모르지만, 시도는 해보자. 실패하면 기각한 방법들 쓰면 되고.
"유령화."
몸이 반투명해진다. 그대로 앞에 서 있는 지옥의 전사를 지나간다. 강철 장갑이 나를 붙잡으려 하지만, 잡히지 않는다. 통했다.
지옥의 전사를 지나치자마자 몸이 원래대로 돌아온다. 유령화 마법은 다 좋은데 지속시간이 너무 짧은 게 흠이다. 염동 마법으로 받치고 있던 글린다를 놓는다. 그대로 떨어지는 글린다를 잡아채 다시 어깨에 얹는다.
"짐짝 취급하지 마세요!"
미안하지만, 어려울 거 같아. 글린다의 불만은 무시하고 다시 달리기 시작한다. 뒤에서 다시 지옥의 전사들이 따라오는 발소리가 들린다. 이제 몇 분 남았냐. 슬슬 나도 지치는 거 같은데.
계속되는 폭풍은 나의 체력도 앗아가고 있다. 덤으로 어깨에 놓인 글린다도 꽤 부담된다. 그렇다고 내려놓을 수도 없으니.
"흐에엑! 저거 좀 봐요!"
글린다가 내 턱을 잡고 강제로 돌린다. 어떻게 내 어깨에 엎어진 상태로 이런 게 가능한지는 모르겠다. 나도 모르게 발걸음을 멈췄다. 지옥의 전사들이 하나로 합쳐지고 있다. 하하. 정말 어이없네.
검은 갑옷들이 하나로 모인다. 스물의 갑옷이 하나가 된다. 거대한 몸을 가진 하나의 검은 갑옷. 고개가 아플 정도로 올려다보아야 한다. 들고 있는 칼은 웬만한 빌라 정도의 크기. 맞으면 골로 가겠군.
"저건 진짜 위험한데."
헛웃음이 절로 나온다. 100 미터는 족히 되어 보이는 크기. 물론 사람은 밑에서 올려다보는 높이를 정확히 측정하는 능력 따위 없다. 그냥 보기에 그렇다는 거지. 어깨에 매달려 있는 글린다의 입에서도 바람 빠진 웃음소리가 들려온다.
거대해진 지옥의 전사는 내 몸뚱이 정도 크기는 될 붉은 안광으로 나를 내려다본다. 온몸이 저릿저릿해질 정도의 살기. 놈은 천천히 발을 들어 올린다. 그리 빠르지 않은 속도로 내 머리 위로 옮겨진다. 거대한 발이 머리 위에 머물자 빗방울이 떨어지지 않는다. 우산으로 제격이네.
"마법사님!"
글린다의 외침에 정신을 차린다. 이러고 있을 때가 아니다. 발로 땅을 박차고 튀어 나간다. 뒤쪽에 철갑 부츠가 쿵 하고 떨어진다. 사방으로 물이 튀고 충격이 땅을 울린다.
"쫓아와요!"
고개를 살짝 돌린다. 그 거대한 몸집이 나를 쫓는다. 위압감이 장난 아니다. 다행히 그렇게 빠르지는 않다. 따라잡히진 않겠네. 생각을 지우고 계속 달려나간다. 지옥의 전사가 발을 디딜 때마다 그 진동이 전해진다.
빗소리와 바람 소리, 숨소리와 발걸음 소리. 찰박거리는 물웅덩이와 뒤쪽에서 전해지는 거대한 발소리. 잠시 하늘을 보자 구름이 조금씩 사라지고 있다. 폭풍은 곧 멎는다.
호흡이 점점 거칠어진다. 다리에 힘이 풀리기 시작한다. 몇 분 남은 거지? 확실히 나는 지쳐가고 있다.
"검!"
글린다를 끌어안고 땅을 구른다. 진흙이 온몸에 묻고 머리 위로 강한 바람이 스쳐 지나간다. 지옥의 전사는 다시 검을 휘두르기 위한 자세를 취한다. 거리를 더 벌려야 한다.
재빠르게 넘어져 있던 자리에서 몸을 일으킨다. 글린다가 몸을 꿈틀거린다. 얼굴에 묻은 진흙을 털어내고 있다.
"또!"
"하늘 걸음."
이번에는 위로 올라가자. 공중을 밟으며 위로 몸을 띄운다. 발아래 쪽으로 검은 대검이 스쳐 지나간다. 위로 피한 건 좋은 선택이었다. 검은 땅을 가르며 대지에 심한 상처를 낸다. 땅을 굴러 피했으면 갈려버렸을 거다.
땅에 안전하게 발을 붙이고 달려나간다. 비는 거의 그쳤다. 가끔 떨어지는 것만 제외하면. 도로에 조금씩 햇살이 비치고 있다.
"마법사님! 사라지고 있어요!"
시간이 다 된 건가? 걸음을 멈추고 뒤를 돌아본다. 거대한 형체가 무너지기 시작한다. 머리부터 아래 방향으로. 땅에 떨어진 투구는 검은 불로 변해 사라진다. 그대로 아래 방향으로 갑옷이 하나하나 분해된다. 땅에 떨어지고 불로 변해 사라진다. 이제 정말 끝났다.
어깨에 들쳐메고 있던 글린다를 내려놓는다. 글린다는 바로 옷을 정리하고 한숨을 쉰다.
"다 끝났네요."
"그러게요."
마지막까지 있던 철제 부츠까지 불로 변해 사라진다. 하늘에서 내려오던 빗줄기가 멈춘다. 폭풍 또한 지나갔다.
"이제 어떻게 하죠?"
"어떡하긴요. 걸어가야죠."
목적지는 북쪽에 있을 한다. 비에 젖어 질퍽이는 길을 걷는다. 앞으로의 여정이 심히 걱정된다. 내 감이 말하길, 이런 습격이 계속될 거란다. 나도 그에 동의하는 바이고.
글린다도 그렇게 생각하는지 쉽게 표정을 풀지 못한다. 도대체 글린다는 왜 저렇게까지 목숨이 노려지는 거지? 왠지 오스왈츠 영지에 도착해도 편하게 쉬지 못할 거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