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1화 〉021. 2막 1장 - 폭풍가도 (2) / Isaac
빗방울이 얼굴을 때린다. 땅에 고여버린 웅덩이들을 짓밟으며 달려간다. 마법사가 그 자리에 없었을 때부터 눈치챘어야 했다. 아니. 아예 적의를 감지했을 때 글린다를 들쳐메고 도망갔어야 한다.
땅을 박찬다. 물방울이 사방으로 튄다. 도대체 어디 있는 거냐. 나를 습격한 놈들을 다 처리하는 데 1분도 걸리지 않았을 거다. 글린다가 열심히 도망가봐야 얼마 가지 못했을 시간. 그런데도, 글린다의 모습이 보이지 않는다.
"글린다 양!"
대답이 들려오지 않을 걸 알면서도 소리친다.
"여기요!"
"어?"
대답이 들렸다? 아무것도 없던 공간에서 아지랑이가 피어오른다. 아지랑이 너머로 피가 잔뜩 묻어 있는 검을 든 글린다가 걸어 나온다. 옷에도 피와 살점으로 보이는 것이 잔뜩 묻어 있다.
"어···. 어?"
할 말이 없다. 어떻게 된 거지? 저 피는 뭐지? 왜 눈에 안 보였던 거지? 질문은 목구멍에서 턱 막힌다.
"이거요?"
나를 보던 글린다가 손에 들린 검을 들어 올린다.
"별거 아니에요. 절 습격해서 혼내줬죠."
그렇게 쉽게 말할 수 있는 거였나. 아지랑이가 더 커지더니 보이지 않던 광경이 보인다. 쓰러져 있는 사람들, 사방에 흩뿌려진 피. 다 글린다가 한 거야?
"오스왈츠 가문원은 검술을 수행하거든요."
"어쨌든 무사해서 다행입니다."
한시름 놓았다. 일단 다행이네.
"끝인가요?"
"아닐 겁니다."
글린다가 처리한 사람들 사이에 마법사의 모습이 보이지 않는다. 투명 마법을 사용할 정도의 마법사가 근처에 있다. 검사는 어떻게 했어도, 마법사는 위험하겠지. 일단 글린다를 피신시키자.
"차원문 개방. 목표 지점. 맥발라 여관."
손을 뻗고 마법을 사용한다. 내가 당장 떠올릴 수 있는 안전한 곳은 맥발라의 여관뿐. 눈앞에 파란 타원의 구멍이 나타난다. 흔들리다 사라진다. 마법이 실패했다. 왜? 마나가 부족해서? 그럴 리 없다. 그럼 누군가 방해를 했다는 거다.
"미리 공간 억제를 사용하길 잘했네."
허공에 아지랑이가 생겨나고 잘 차려입은 남자가 하나 나타난다. 떨어지는 빗줄기는 입고 있는 비단옷에 닿지 않는다. 무언가에 밀려 땅에 떨어진다. 마법사. 폭풍을 부른 마법사. 절로 이가 갈린다.
"이봐. 거기 마법사."
가정 교육을 귓구멍으로 흘린 게 분명한 마법사가 나를 가리킨다.
"글린다를 넘기면 그냥 지나가 주마."
말투가 참. 심지어 되지도 않는 말을 하고 있다. 글린다를 넘겨주다니. 사람이 물건이냐? 그런 것은 당사자에게 묻는 게 예의지.
"따라가실래요?"
"말이라고 하시는 건가요?"
나름의 농담이었는데 글린다는 마음에 들어 하지 않는다. 상대측 마법사도 농담에 웃지 않는다. 너무 오래 병실에 누워 있어서 개그감각이 떨어진 게 분명해.
"넘겨줄 생각은 없나 보군. 그럼 힘으로 뺏는 수밖에."
글린다가 싫어하니 막는 거로 결정. 일단 글린다를 보호하자. 검술을 조금 한다 해도 눈먼 마법에는 쉽게 죽을 거다.
"마법 보호."
마법을 사용하자 글린다 주변에 반투명한 막이 생겨난다. 글린다는 살짝 놀라 뒤로 물러선다. 마법사의 표정은 굳어버린다.
"거기서 나오지 마요."
생각이 있다면 나오지는 않겠지만, 혹시 모르니 경고는 해두자.
"준비는 다 끝났어?"
그러고 보니 저 마법사 나름의 예의를 알고 있군. 상대가 준비될 때까지 기다려 주다니. 말버릇만 좀 고치면 착한 사람이 될 거 같다. 난 예의가 없지만 말이야.
손을 휘젓는다. 폭풍이 몰려와 먹구름이 가득한 하늘이 반짝인다. 하늘에서 번개가 내리꽂힌다.
"이야. 꽤 위험한 마법을 쓰는데?"
칫. 안 죽었나. 한 번에 처리할 생각이었는데. 마법사는 입꼬리를 올리며 비웃는다. 그 손에는 붉은 불꽃이 이글거리며 타오른다. 맞아줄 생각은 없지만.
날아오는 불꽃을 향해 손을 들어 올린다. 날아오던 불덩이는 공중에서 터져나간다. 이것도 염동 마법의 응용. 마법사의 얼굴이 일그러진다.
"당신 생각보다 강하군요."
"확인은 안 해봤지만, 내가 이 세계에서 가장 강할걸?"
오만해 보이는 말이지만, 나름의 확신이 있다. UMO 내에서도 최강이었고 그 힘이 이어진 이 세계에서도 최강일 거다.
"그럼 이제 내가 최강이겠군."
마법사의 손끝에서 번개의 화살이 날아든다. 저건 염동 마법으로 막기 힘들지. 다른 방법이야 항상 널려있지만.
"수호 의지."
번개가 날아와 내 몸에 부딪힌다. 따끔한 느낌조차 없다. 간신히 부딪혔다는 것을 인지할 정도의 충격. 역시 마법은 사기야.
"화염 화살 연발."
이번에는 불꽃 화살. 수십 발이 날아들지만, 전부 나에게 부딪히고 사라진다. 마법사의 얼굴이 구겨진다. 그 후로도 계속 마법이 날아들지만, 실질적인 피해를 주지 못한다. 가끔 아픈 것도 있었지만, 딱밤을 맞는다고 죽는 것도 아니고.
마법사의 표정이 점점 흉악하게 변해간다. 자기 뜻대로 안 되는 것이 짜증이 나는가 보다. 이것보다 강한 마법은 쓰지 못하는 것 같다. 이제 슬슬 끝을 내버리자.
"오지 마!"
"싫어."
계속해서 마법을 쏘아대는 마법사에게 한 걸음씩 걸어간다. 마법들은 전부 부딪혀 힘없이 사라진다. 내가 가까이 갈 때마다 마법사는 뒷걸음질 친다. 그러면서도 마법을 쉬지 않는다. 어떤 의미로는 대단하군.
"제기랄!"
"욕은 하지 맙시다."
뒤로 물러서던 마법사가 넘어진다. 아무것도 없는데 넘어지다니. 넘어져 버린 마법사는 마법을 사용하지 않고 그저 나를 바라본다. 눈동자에는 경악이 가득하지만, 공포는 없다. 놀라운 의지력.
"이렇게 쉽게는 안 죽어!"
아니. 딱히 죽일 생각은 없는데. 마법사가 품에서 무언가를 꺼낸다. 검은 수정. 딱 봐도 불안하기 짝이 없는 물품. 막아야 한다.
바람으로 칼날을 만들어 검은 수정을 들고 있는 손을 잘라낸다. 마법사의 오른손이 몸에서 떨어져 나간다. 문제는 수정이 이미 가루가 되었다는 것.
마법사는 비명을 지르지 않는다. 잔뜩 핏발선 눈으로 나를 노려볼 뿐. 깨어진 수정의 조각들이 마법사의 주변으로 모여든다. 그 주위를 감싸며 서서히 회전한다. 이건 위험하다. 그 판단만으로 뒤로 뛰쳐 올랐다. 내가 있던 자리에 번개가 내리꽂힌다. 검은 번개가. 정확히 말하면 접근을 허락하지 않듯, 주위에는 계속 번개가 내리꽂힌다.
"저건 뭐에요!"
마법 보호 안쪽에서 글린다가 소리친다. 나도 잘 몰라서 대답해 줄 수는 없지만.
마법사를 감싼 수정 가루들이 점점 늘어난다. 자신을 복제하듯 계속해서 늘어난다. 결국, 검은 수정의 조각들은 완전히 마법사를 뒤덮는다. 절로 침이 삼켜진다.
"임하라! 지옥의 전사들이여!"
검은 가루로 이루어진 막 너머로 마법사의 목소리가 들려온다. 번개는 그쳤다. 비는 더욱 강하게 쏟아진다. 바람 소리에 마법사의 목소리가 묻혀간다.
"나의 적을 몰살하라!"
땅이 진동한다. 이리저리 흔들린다. 글린다가 균형을 잡지 못하고 넘어진다. 검은빛이, 모든 것을 삼킬듯한 검은빛이, 내뿜어진다.
빛이 가라앉는다. 꽉 감았던 눈을 뜨고 마법사가 있던 자리를 바라본다. 아무것도 없다. 없는 줄 알았다. 땅이 갈라지고 검은 철제 장갑을 낀 손이 올라온다. 다음은 반대 손. 사람 키만 한 검은 대검을 들고 있다. 뒤이어 몸 전체의 모습이 드러난다.
전신을 검은 갑옷으로 뒤덮고 있는 존재. 눈구멍에서는 붉은 기운이 넘실거린다. 그런 존재가 계속 땅에서 올라온다. 스무 명이 될 때까지.
"저게 뭐예요?"
글린다가 아까와 같은 질문을 던진다. 다른 점이 조금 있지. 저번의 질문은 경악에 찬 질문이었고, 이번에는 공포의 감정이 섞여 있다.
다행인지 이번에는 질문에 대답해 줄 수 있다. 소환 마법 중 하나인 지옥 전사의 행진. 지옥에서 불러낸 전사들이 적을 무참히 도륙하게 하는 마법. 강력한 마법이지만, 문제는 대가가 사용자의 목숨이라는 거다.
땅에서 전부 올라온 지옥의 전사들은 붉은 기운이 넘실거리는 눈으로 나를 바라본다. 덤으로 글린다도.
"글린다 양."
"네?"
쇠가 부딪히는 소리와 함께 전사들이 나에게 걸어온다. 내 앞에 서서 나를 노려본다.
"제가 신호하면 도망가는 겁니다."
"네?"
빗방울을 두들겨 맞으며 적당한 순간을 잰다. 지옥의 전사들은 이기라고 있는 놈들이 아니다. 아무리 내가 퍼펙트 메이지라고 해도, 모든 마법에 최고의 저항력을 가진 녀석과 싸울 생각은 없다. 그렇다고 물리 공격을 하는 건 자살 행위고. 딱 삼십 분. 이 전사들의 소환 시간은 삼십 분이 전부. 속도도 빠르다고는 할 수 없다. 운이 좋다면, 살아남을 수 있을 거다.
"도망가요!"
보호막 안에 있던 글린다가 달려간다. 나도 신호를 보냄과 동시에 글린다와 같은 방향으로 달려간다. 내가 서 있던 자리에 검은색으로 빛나는 대검이 내리꽂힌다. 질풍의 발걸음이 아직 끝나지 않았기에 맞진 않았지만, 땅이 파헤쳐진 걸 보면 위험하기 짝이 없다.
글린다가 먼저 달려가긴 했지만, 거리도 크게 차이 나지 않았고 나는 마법이 적용된 상태기에 금세 따라잡았다. 글린다는 자기 옆에 서 있는 나를 보고 살짝 움찔했지만, 발을 멈추지 않는다.
달려가는 와중에 살짝 뒤를 돌아본다. 지옥의 전사들은 무거운 검을 어깨에 걸쳐 매고 달려오고 있다. 땅이 팰 정도로 무거운 갑옷을 입은 상태로 빠른 속도를 쫓아온다. 따라잡히지는 않겠지만, 거리가 멀어지지도 않는다.
옆에서 글린다의 숨소리가 들려온다. 거칠어진 숨소리. 나야 문제없지만, 글린다는 금방 지칠 것 같다. 마법으로 도와주고 싶어도 UMO의 모든 강화 마법은 기본적으로 자기 자신에게만 적용된다. 대규모 마법도 있지만, 사용하기까지 시간이 걸린다.
비바람이 전신을 때린다. 이것도 나쁘다. 날씨가 이러면 쉽게 체온을 빼앗긴다. 금방 지칠 거다. 땅이 젖어 있는 것도 문제. 진흙은 질퍽하게 신발에 달라붙어 속도를 떨어트린다. 방법이 필요하다.
"대지의 장벽."
뒤로 돌아 마법을 사용한다. 길 한복판에 흙으로 이루어진 벽이 솟아오른다. 저거에 막힐 리는 없다. 그저 시간을 끄는 용도. 그래 봤자 몇 초 정도.
다시 앞을 보고 달려가는데 뒤에서 뭔가 부서지는 소리가 들린다. 살짝 고개를 돌리니 지옥의 전사들이 흙벽을 그냥 몸으로 부수고 들어오는 것이 보인다. 몇 초가 아니구나. 1초도 버티지 못한 것 같네.
"저건 뭐에요!"
글린다가 또 같은 질문을 던진다. 달리면서 잘도 말한다. 지금은 급하니 나중에 대답해주는 거로.
"나중에! 일단 달려요!"
대답에 글린다는 앞을 보고 발을 움직인다. 뒤쪽을 보지 말자. 어디서 들은 건데 뒤를 신경 쓰며 달리면 걸음이 느려진다더라. 이제 이 분 정도 지났으니 앞으로 이십팔 분 남았다. 글린다가 지쳐 자빠지기에 충분한 시간. 방법이 필요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