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0화 〉020. 2막 1장 - 폭풍가도 (1) / Isaac
인생은 바다
나는 항해자
고난의 파도에 맞서며
절망의 폭풍을 버터라
-시, `항해자` 中 발췌 -
"왜 아무도 알려주지 않은 걸까요."
글린다는 한숨을 쉬며 길을 걸어간다. 아무도 오스왈츠 영지까지 가는 길을 알려주지 않았다. 내가 보기에는 당연한 결과였지만. 글린다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나 보다.
"그래서 지금은 어디로 가고 있는 거예요?"
"그냥 북쪽이요. 제 기억이 맞으면 맥발라 북쪽에 큰 도시가 하나 있어요."
환전상과 마법 물품을 팔 곳이 있으면 좋겠다. 마차도 구하면 더 좋고. 지도까지 있으면 금상첨화.
"어떻게 말도 안 파는 거지?"
사봤자 나는 못 탈 거 같지만, 있으면 편하긴 하겠다. 우리는 흙으로 포장된 길을 걷고 있다. 포장이라는 말이 어울리는지도 모르겠다. 어쨌든 주변과 다르게 풀은 나지 않았으니 길은 맞을 거다.
길 위에는 다른 사람들의 모습이 보이지 않는다. 그냥 이렇게 평안하게 갔으면 좋겠다. 그리고 그러지 않을 거다. 뭔가 나에게 강한 적의를 보인다. 끈적끈적한 살기. 너무 싫다.
"왜 한숨을 쉬세요?"
글린다의 질문에 대답할 말이 없다. 무언가 나를, 아마도 우리를 노리고 있습니다. 웃기는 말이군.
"별거 아닙니다."
당장은 공격할 거 같지 않다. 기회를 노리는 건지 계속 주시만 하고 있을 뿐. 어디서 바라보고 있는 건지는 모르겠다. 그냥 빨리 처리하고 싶다. 그러려면 글린다를 떨어트려 놓아야 하는데, 근처에 마을 없나?
"뭘 그렇게 두리번거려요?"
"아. 그냥요. 근처에 마을이 있을까요?"
"없을 걸요?"
그러면 어떡하지. 나에게 찐득찐득한 살기를 뿜고 있는 녀석들은 언제 습격해올지 모른다. 먼저 공격해서 처리하고 싶은데. 그냥 양해를 구하고 잠깐 사라질까.
"자꾸 집중 못 하시는 거 같은데요?"
"아니요. 집중하고 있습니다."
글린다가 미심쩍은 눈으로 나를 바라본다. 집중하지 않고 있는 건 사실이지만, 특별히 이야기하고 있지는 않다. 그저 걸어갈 뿐. 하늘에는 불길하게도 먹구름이 모여들고 있다.
칫. 글린다는 하늘을 올려다보고 혀를 찬다. 표정이 좋지 않다.
"무슨 일 있어요?"
"폭풍이 올 거예요."
망했네. 폭풍이라니. 마을도 없는 길 위에서.
"어느 정도 걸릴까요?"
"저도 모르죠."
"가까운 마을은?"
"맥발라 북쪽에 있는 한다까지는 하루가 꼬박 걸려요."
내 감으로 볼 때 저 폭풍은 한두 시간 안에 몰아친다. 길 위에서 폭풍을 만나게 생겼네. 심지어 목숨을 노리고 있는 누군가도 있고. 정말 최악이군.
태양은 구름에 조금씩 가려져 간다. 바람도 조금씩 거칠어져 가고. 글린다는 입고 있는 망토를 여민다.
"이상하단 말이야."
바람 소리 사이로 글린다가 중얼거리는 소리가 들려온다. 이상하다고? 글린다에게 시선을 던진다.
"원래 이 시기에는 남부에 폭풍이 거의 없어요."
"그런 것도 알아요?"
"저 귀족이거든요? 배울 건 다 배웠습니다."
귀족인 거야 어느 정도 눈치챘지. 놀란 건 이 세계의 교육수준이지. 귀족이라 해도 여자를 교육하다니. 나름 발전한 부분도 있는 건가.
"그럼 이 폭풍은 자연적인 게 아닌 건가요?"
"잘 모르겠어요. 이런 걸 인공적으로 일으킬 수는 있나요?"
방법이야 있지. 당장 나만 해도 가지고 있는 마법으로 날씨를 조정할 수 있다. 폭풍은 물론, 폭설과 폭염까지. 말도 안 될 정도로 비효율적이라 쓸 일은 없지만.
"마법으로 가능하죠?"
"일단은요. 그래도 자연적으로 발생했을 가능성도 있습니다."
"그렇겠죠? 제가 너무 예민한 거겠죠?"
글린다의 말에 고개를 끄덕인다. 글린다는 예민하게도 이 폭풍의 정체를 눈치챈 거다. 혹시 몰라 마력 탐지를 사용했는데, 하늘의 구름이 전부 마나로 이루어져 있다. 자연적인 현상이 아니다. 누군가의 장난질. 딱 봐도 지금 우리를 노리는 녀석들일 테지. 폭풍이 시작되면 공격하러 들어올 거다. 준비를 해두자.
적의 숫자는 대충 스무 정도. 마법사도 껴 있을 테고. 나야 위험하지 않겠지만, 글린다는 위험할 수 있다. 글린다를 보호할 방법이 없는 건 아니지만, 나는 모험을 좋아하지 않는다.
"빨리 걷죠. 폭풍이 오기 전에 은신처를 찾아야 합니다."
속도를 올린다. 거의 달려가다시피. 글린다가 숨을 몰아쉬지만, 싸움에 적합한 장소를 찾아야 한다. 이곳은 너무 평원이다. 숨을 곳도 마땅치가 않다. 그런데 놈들은 어떻게 내 시선을 피하고 있는 거지?
머리 위로 차가운 것이 떨어진다. 그것을 시작으로 하늘에서 비가 내려온다. 많이 오는 것은 아니지만, 폭풍이 시작될 거라는 전조. 글린다의 인상이 구겨진다.
바람이 강하게 불어온다. 빗줄기가 차츰 거세진다. 그리고 살기도 점차 진해진다.
"저기 숲이 보여요!"
길에서 약간 벗어난 곳에 나무들이 자라나 삼림을 이루고 있다. 그렇게 커 보이지는 않지만, 몸 정도는 숨길 수 있겠지. 글린다와 잠시 시선을 나누고 숲을 향해 달려간다.
맥발라 숲의 나무들보다 작은 나무들. 잎도 촘촘하게 나 있지 않아 비가 계속 떨어진다. 길에서 맞고 있는 것보다야 괜찮지만. 적당히 큰 나무 아래에 주저앉는다.
"그칠 때까지 여기 있을 건가요?"
"상황을 보고 움직이죠."
살기가 조금 줄어들었다. 놈들의 계획에 문제가 발생한 것 같다. 길 위에서 습격이 계획이었고, 우리가 이 숲에 몸을 숨기면서 틀어진 것 같다. 숲에 숨은 건 좋은 선택이었군.
"천상의 불."
글린다가 몸을 떨고 있기에 마법을 사용한다. 글린다의 앞에 하얗게 타오르는 불꽃이 생겨난다.
"우와. 이건 뭐에요?"
타는 물질 없이 공중에서 타오르는 불꽃. 글린다는 천상의 불에서 시선을 떼지 못한다.
"열없이 온기만 내뿜는 불꽃이에요. 태울 걱정 하지 않고 사용하기에 좋죠."
오오. 글린다가 작게 감탄을 한다. 아무것도 모르고 즐겁게 웃고 있다. 나는 지금 적의와 악의에 스트레스를 받고 있는데.
빗줄기가 조금 줄어든다. 바람도 약해진다. 폭풍이 조금 줄어들었다.
"이제 슬슬 움직일까요?"
"이대로 가면 아예 그칠 거 같네요. 그다음 움직이죠."
이 숲에서 우리를 끄집어내겠다 이거지? 난 쉽게 안 당해준다. 인내심 대결이라도 하자. 난 자신 있거든.
공중에서 불타는 하얀 불꽃을 바라보며 때를 기다린다. 글린다는 꾸벅꾸벅 졸고 있다. 이 상황에서 잘도 잔다. 살기가 조금씩 짙어져 간다. 음습하게 나를 노리고 다가온다. 먼저 움직인다면 나야 좋지.
"타는 냄새?"
매캐한 냄새가 느껴진다. 글린다도 고개를 들고 주변을 둘러본다. 뒤쪽에서 검은 연기가 퍼져나간다. 숲에 불을 질렀구나. 빈대 잡겠다고 초가삼간 다 태울 놈들이다.
"에?"
막 잠에서 깬 글린다는 아직 상황을 파악하지 못했다.
"숲에 불이 났습니다. 얼른 도망가죠."
"으에?"
정신 좀 차려라. 망토 부분을 잡고 글린다를 일으켜 세운다. 아직 비가 그치지 않아 불이 빠르게 번지지는 않을 거다. 숲에서 벗어나면 바로 공격해 들어오겠지.
폭풍이 다시 심해진다. 강풍은 눈도 쉽게 뜰 수 없게 만든다. 지상에 내리꽂는 빗줄기는 땅을 때리며 땅의 비명을 즐긴다.
"불?"
땅에 두 발을 딛고 있으면서도 정신을 차리지 못했다. 아직 눈동자가 풀려있다. 영화를 보면 물벼락 맞으면 잠에서 깨는데, 이 인간은 어떻게 비를 뒤집어쓰면서 졸고 있지.
열기가 느껴진다. 뒤를 돌아보자 멀리서 치솟는 불기둥이 보인다. 저것도 마법인가. 이제 진짜 움직여야 한다.
"으악! 불이다!"
"네. 불입니다. 도망갑시다."
드디어 잠에서 깬 글린다가 소리친다. 잠에서 깼지 정신은 차리지 못했다. 뒤쪽의 불기둥을 바라보며 알 수 없는 소리를 치는 글린다의 어깨를 잡고 방향을 돌린다.
"자. 얼른 갑시다."
숲에 들어왔던 방형을 거꾸로 짚어 달려간다. 적의는 끈덕지게 우리를 쫓아온다. 떨구긴 힘들 것 같네. 그래도 위치는 파악했다.
"북쪽으로 달려요!"
숲을 빠져나오자마자 글린다를 길 쪽으로 밀어버린다. 잠시 균형을 잃고 비틀거렸지만, 금세 북쪽으로 달려간다.
"얼음 화살."
적의가 느껴지는 방향으로 손을 뻗는다. 손끝에서 얼음으로 만들어진 화살들이 쏘여진다. 아무것도 없는 길 한복판을 향해서. 공간에서 섬광이 일어나고, 얼음 화살이 깨져버린다.
아무것도 없던 공간에 작은 아지랑이가 피어난다. 그 아지랑이 너머로 검은 옷을 입은 복면인들이 나타난다. 어떻게 죄다 복면이냐. 다섯 명의 남자. 검과 활로 무장한 사람들. 여기엔 마법사가 없는 건가. 어디 있는 거지?
"어떻게 알았지?"
복면인 중 유일하게 검을 뽑아들고 있는 사람이 말한다. 저 사람이 내 마법을 부쉈겠지.
"살기가 풀풀 나더라고."
내 대답에 놈들은 입꼬리를 올린다. 남이 말하는데 웃다니. 가정교육을 제대로 받지 못했군. 놈들이 웃는 동안 마법을 준비한다. 양손에서 불덩이가 이글거리며 타오른다. 복면인들은 웃음을 멈추고 검집에 들어있던 검을 뽑아든다.
놈들의 긴장이 느껴진다. 아까 얼음 화살을 파괴한 걸 보아 화염구도 피해를 주기는 힘들 거다. 놈들이 서로 시선을 주고받는다. 그리고 나에게 달려든다.
"땅울림."
처음부터 화염구를 던질 생각은 없었다. 어차피 막을 건데 뭐. 오른발을 들고 땅을 내리찍는다. 내 앞의 땅이 크게 울렁거린다. 마치 파도가 치듯이. 달려오던 사람들은 균형을 잡지 못하고 넘어진다. 제대로 방어하지 못할 때 준비해둔 화염구를 던진다.
멋진 화염의 폭발. 치솟은 먼지는 강한 비바람에 빠르게 지워진다. 불에 그슬린 사람들의 모습이 보인다. 죽었나? 별로 죽이고 싶지는 않았지만. 어쩔 수 없는 건가. 죽은 사람들을 위해 잠시 묵념. 바로 몸을 돌려 글린다가 향한 방향으로 걸음을 옮긴다.
뭔가 강하게 등에 부딪힌다. 충격에 몸이 떠밀려 바닥에 넘어진다. 불길한 생각에 땅을 한번 구르며 일어난다.
"안 죽었어?"
몸에서 연기가 피어나는 남자가 칼을 들고 있다. 자세히 보면 연기도 옷에서만 나고 있다. 옷이 이곳저곳 타 맨살이 드러났다. 살은 그슬린 자국조차 없다. 쓰러져 있는 다른 사람들은 움직임을 보이지 않는다. 다른 사람은 죽은 건가?
"다른 생각을 할 틈은 없을 텐데."
"내 생각은 조금 다른데. 걱정 마. 내가 한 번 죽어봐서 아는데 그렇게 아프지는 않더라."
사실 엄청 아팠지만. 남자의 얼굴이 잔뜩 일그러진다. 그러더니 다시 풀어지고 웃기 시작한다. 제정신은 아닌 것 같다.
"크하하하."
우와. 완전 악당 웃음.
"글린다를 잡기 위한 별동대가 따로 있지."
어? 지금 뭐라고 했지?
"지금쯤이면 글린다 알폰소 오스왈츠는 빗속의 시체가 되어 있···."
퍽 하는 소리와 함께 남자의 머리가 터져 나간다. 염동 마법이 레벨이 올라가면 이런 일도 가능해진다
글린다가 달려간 방향을 바라본다. 제발 늦지 않았기를.
"질풍의 발걸음."
몸이 가벼워진다. 발을 내밀고 땅을 박찬다. 몸이 바람처럼 튀어나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