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 19화 〉019. 2막 서장 - 맥발라의 아침 / Isaac (19/65)



〈 19화 〉019. 2막 서장 - 맥발라의 아침 / Isaac

해는 언제나 그 자리에
변하지 않고 그 자리에
눈을 뜨면 해는 그 자리에

- 시, `해는 그 자리에` 中 발췌 -






눈을 뜬다. 침대에서 몸을 일으켜 주변을 둘러본다. 나무로 만든 옷장, 나무로 된 바닥, 창문 너머에는 하늘이 조금씩 밝아지고 있다. 맥발라의 여관. 내가 어제 누웠던 곳.


손을 들어 올린다. 반지들이 잔뜩 끼워져 있다. 아이작의 몸이다. 이유진이 아니라. 대기록원에서 있었던 일은 꿈이라고 치부하기엔 너무 생생하다. 아마 진짜겠지.


머리가 복잡하다. 그래도 살고 싶은 대로 살라고 했으니, 난 살고 싶은 대로 살 거다. 살아오면서  해본 것들이 많다. 글린다를 데려다주고 여행이라도 떠나볼까. 몬스터들이 조금 걱정되지만, 나 정도 되면 큰 문제 없을 거다.


침대에서 내려와 창문을 연다. 새벽의 차가운 공기가 방안을 채운다. 차가운 것은 느껴지지만, 춥지는 않다. 조금씩 밝아지는 거리에는 사람들의 모습이 보인다. 바구니를 들고 어딘가로 바삐 움직이는 사람들. 활기가 느껴진다.


글린다는 아직 일어나지 않은 건가? 창문을 닫고 방을 벗어난다. 여관이 복도는 적막으로 가득 찼다. 방문 너머로  고는 소리가 조금씩 새어 나온다. 열쇠로 문을 잠그고 계단을 내려간다.


계산대에는 어제저녁과 다른 사람이 서 있다. 성인도 되지 않았을 듯한 소녀.  아주머니의 딸인가? 소녀는 밝게 웃으며 나에게 말을 건다.

"어? 벌써 일어나셨나요? 아침은 조금 더 걸릴 거에요."

"그런가요? 오늘 아침은 뭐죠?"


사람이랑 대화하는 걸 잘하지는 않지만, 먼저 말을 걸어준다면 대화가 어렵지는 않지. 적당한 의자를 골라 앉는다. 소녀는 계산대에서 나와 나를 마주 보는 자리에 자리를 잡는다.

"아침에 가게를 보는  너무 지루해요. 사람도 없고, 혼자 혼잣말만 하고, 가끔 일어나는 사람들은 바로 나가버리거든요?"

이 소녀는 심심했나 보다. 계속 자기 이야기를 늘여놓는다. 나는 그저 고개를 끄덕여 주며 뭔가 듣고 있다는 몸짓을 취한다. 실제로 듣고 있지는 않지만.


"으아! 너무 오래 잡고 있었죠? 죄송합니다!"

잠시 영혼이 가출해있는 동안, 소녀가 연신 사과를 하며 계산대로 돌아간다. 눈을 몇 번 깜빡이며 정신을 차린다. 소녀는 계산대에서 몸을 뻣뻣하게 굳힌  내 뒤를 보고 있다. 침을 삼키고 뒤를 돌아본다.

"방은 편하셨습니까?"


어제 봤던 분이다. 글린다에게 돈을 받은 여성. 아마도 주인. 말은 나를 향해 걸고 있지만, 눈동자는 계산대에 서 있는 소녀를 향하고 있다. 소녀는 여성의 눈빛을 피하며 침을 삼킨다. 몸이 떨리는 것이 여기서도 보인다.


"혹시  딸이 손님을 붙잡아 두고 있었습니까?"


딸이 맞았구나. 여성의 입은 웃고 있다. 타오르는 눈과는 별개로. 여기서 붙잡았다고 하면  소녀가 불쌍해지겠지.


"아닙니다. 꽤 즐거운 시간이었습니다."


내 대답을 들은 여성은 딸을 한번 노려보더니 다시 뒤로 돌아 어딘가로 들어간다. 냄새가 피어오르는 것으로 보아 저쪽이 부엌인가보다.


"감사합니다. 덕분에 오늘도 하루를 멀쩡하게 살아가겠네요."

소녀는 자신의 어머니가 부엌으로 들어간 것을 확인하고 다시 내 맞은편 자리에 앉는다. 계속 이런 식으로 아침을 보냈으니 혼날 수밖에.

"아저씨는 이름이 뭐예요?"

"어?"


아저씨라니. 아저씨라니. 아저씨라니. 지금 나의 몸은 아이작의 몸. 물론 이유진의 몸보다 나이가 많은  사실이다. 그래도, 아저씨라니.

"아. 이름을 물어보기 전에는 제 소개를 먼저 해야죠."

난  소녀와 친해지기 힘들 거다. 나랑 안 맞아. 너무 대화가 급격히 진행된다.

"제 이름은 아스민이에요. 아저씨는요?"


제발 아저씨라고 부르지 말아줬으면 좋겠다. 소녀는 눈을 반짝이며 나를 바라본다. 어떻게 대답을 해줘야 하나. 대기록원에 다녀온 이후로 내가 누구인지 어느 정도 가닥은 잡혔다. 최소한 소개는 할 수 있을 정도로.

"전 아이작입니다. 성은 따로 없어요."


"아이작 씨라고 불러도 되죠?"

"편하신 대로."

"아스민!"

"으악! 잘못했어요!"

부엌이 있는 쪽에서 주인아주머니의 목소리가 들려온다. 아스민은 깜짝 놀라며 의자에서 일어나 계산대로 돌아간다. 대화는 여기서 끝이겠군.

아스민의 아쉬운듯한 눈빛은 무시하고 여관을 나선다. 하늘이 파란빛을 내기 시작한다. 산 너머로 태양이 떠오르고 있다. 딱히 할 일은 없지만, 그냥 구경이나 하자.

적당히 거리를 거르며 주변을 둘러본다. 집 대부분에서 인기척이 느껴진다. 창문은 전부 닫혀 있다. 가끔 보이는 사람들이 하품하며 뭔가를 준비한다.


시끌벅적한 분위기. 살면서 느껴본 적이 없다. 병실에서 인생 대부분을 보냈으니 당연한 건가. 이런 것도 나쁘지는 않다. 내가 살아있다는 느낌이다.


아무런 목적도 없이 거리를 걷는다. 발밑으로 느껴지는  바닥. 피부로 느껴지는 바람. 하늘은 그저 하늘색이다.


걷다 보니 돌로 쌓아올린 성벽이 보인다. 너무 멀리 왔다. 돌아가자.


"아이작 씨! 아침 준비 다 됐어요!"

한 시간 정도 걷다   같다. 여관 1층을 향긋한 냄새가 가득 채운다. 식탁 몇 개가 벌써 사람들로 채워져 있다. 그중에는 글린다의 모습도 있고.


자연스럽게 글린다가 앉아 있는 식탁에 앉는다. 뭔가 불만이 있는지 글린다는 팔짱을 끼고 나를 노려본다.

"아이작 씨? 아이작 씨? 그게 이름이에요?"


뭐에 화났는지 알겠다. 여태까지 이름도 안 알려준 사람의 이름을 다른 사람을 통해 듣게 된 거니. 일단 변명하자.


"어제 잠결에 이름이 생각났어요."


인정한다. 변명은 하지 말았어야 한다. 글린다의 눈동자가 얼어붙는다. 아무런 말도 없이 바라보는 게 더 무섭다. 그렇다고 눈을 돌리면  되겠지.

한참을 시선을 나누고, 글린다가 한숨을 쉰다.

"식사나 하시죠."

아직 화가 풀리지 않았나 보다. 입 다물고 얌전히 있자.

"오늘의 아침은 스튜!"


아스민이 접시에 담긴 스튜를 들고 온다. 라고는 해도,  스튜 자체를 처음 본다. 토기 접시에 담긴 무언가. 채소가 이것저것 들어가 있고 하얀 국물이 가득. 글린다는 한숨을 쉬고 나무 수저를 들어 올린다. 먹을  있는 건가 이거.

스튜는 맛있다고 할  없는 맛이었다. 국물은 싱겁고, 채소들은 얼마나 끓인 것인지 물컹물컹. 글린다는 나름대로 식사를 즐긴 것 같다. 나는 고기나 구워 먹어야지. 어차피 굶어 죽지도 않을 테니.

지금은 글린다와 거리를 걷는 중이다. 글린다 왈, 여자는 여행할 때 필요한 게 많아요. 어쩌겠는가. 길잡이가 필요하다는데. 글린다와 함께 시장을 돌아다니고 있다. 마침 오일장이 열렸단다.


시장에는 엄청난 숫자의 사람들이 모여있다. 어디선가 물건을 들고 와서 좌판을 깐 상인들, 이곳저곳 돌아다니는 아이들, 물건을 들고 꼼꼼히 바라보는 사람들.

"원래 시장이 열리면 사람이 이렇게 많아요?"

"주변 마을에서 다 모이니까요."

글린다는 아직 화가 덜 풀렸다. 그리고 그걸 쇼핑으로 해소하고 있지. 글린다는 시장을 돌아다니며 눈에 띄는 모든 것을 구매하고 있다. 돈이 생겼다지만 너무 쓰는  아닐까. 심지어 저거 내가 번 거잖아.


"이상한 생각하지 마시고 이것도 들어요."

무언가 팔에 들려진다. 옷가지가 잔뜩.

"숙녀의 옷을 구경하는 건 예의가 없는 짓입니다!"


알겠습니다. 제가 너무 죄송합니다. 들고 있는 옷들을 물품 창에 보관한다. 뭐랄까. 글린다는 이 기능을 매우 편리한 가방 정도로 생각하는 것 같다. 물품 창에 뭐가 들어있는 줄 알고 있으면 놀라자빠지겠지만.


"대충 필요한  다 산 거 같아요."

 물건을 정리해보자. 한 달은 충분히 먹을 만한 건조식품. 뭔가의 가죽으로 만들어진 침낭. 그 외에 용도를 알  없는 도구들과 용도를 짐작할 수 있는 도구들. 방금 집어넣은 옷까지. 요정 잡이로 번 1800 트리탄 은화 중 절반 정도를 사용했다.  동네의 물가는 전혀 모르겠다.


글린다는  번 더 산 물건들을 점검하는 듯 손가락으로 턱을 짚는다. 그러면서도 복잡한 시장길을 걸어나간다. 나는 인파에 휩쓸리지 않고 쫓아가는 게 고작. 다행히 글린다를 놓치지 않고 시장을 벗어났다.


"준비가 다 끝났으니 움직이죠."


"어디로요?"

"당연히 오스왈츠 영지죠."

"정확한 방향은 알아요?"

걸어가던 글린다가 멈춰 선다. 저럴 줄 알았어.

"지도를 구할 수 있을까요?"


"대도시에서는 구할 수 있을 거예요."


필요하면 죄다 대도시에 있데. 정확한 위치를 모르고 움직이는 건 위험하겠지. 이 동네가 안전한 동네도 아니고. 툭하면 거대 늑대가 튀어나오는 동네니까.

"일단 여관으로 돌아가죠. 거기 사람들이 좀 있으니 한 명쯤은 위치를 알지 않을까요?"

"네. 일단 돌아가죠."


결국, 다시 여관으로 돌아왔다.

"에? 가신 거 아니었어요?"


"그러게 말입니다."


아스민이 놀란 표정으로 우리를 맞아준다. 식당으로도 이용되는 1층에는 손님 몇  정도만 앉아 있다. 일단 적당한 탁자를 잡아 앉는다. 그냥 안장 있는 것은 예가 아니므로 간단한 음료도 하나. 당연히 글린다가 주문했다.


곧 아스민이 두 개의 흙으로 만든듯한 잔을 들고 온다. 나와 글린다 앞에 하나씩. 들어 있는 것은 투명한 액체. 특별한 향은 나지 않는다. 글린다는 곧바로 잔을 들고 음료를 마신다. 문제가 있지는 않겠지만, 선뜻 마시고 싶지는 않다. 주문도 그거 두 잔이라고 했다. 도대체 그게 뭐냔 말이다.


"안 드시는 건가요?"

아직 가지 않고 옆에 서 있는 아스민이 나를 바라본다. 눈에는 눈물이 글썽인다. 마셔야 하는 처지에 놓였다. 잔을 든다. 눈을  감고 입안으로 집어넣는다. 웩. 무슨 맛인지 모르겠다. 신맛이 조금 느껴지는 물. 뭔가 톡톡 터진다. 상당히 기분 나쁜 맛이다.


"맛은 어때요? 괜찮죠?"

저 빛나는 눈빛에 담긴 기대를 저버릴 수는 없다. 있는 힘껏 웃어보자.

"맛있네요."


"아스민!"


"갈게요!"


다행히 아주머니가 아스민을 호출했다. 오스민은 빠르게 부엌 쪽으로 달려간다. 들고 있던 잔을 내려놓는다.

"맛없죠?"


"맛있다고는 못하겠네요."

글린다의 한쪽 입꼬리가 올라간다. 아직 잔에는 음료가  정도 남아있다. 눈을 감고 삼켜버린다.


"이건 뭐로 만든 거에요?"

"물이랑 과일 이것저것 허브 이것저것을 섞은 거죠. 집집마다 만드는 법이 달라요."

 비슷한 건가.

"자 이제 중요한 건 오스왈츠 영지까지 가는 길을 알아보는 건데."

"사람들한테 물어보죠."

글린다가 자리에서 일어난다. 헛기침하며 목소리를 가다듬는다. 여관에 앉아 있는 사람들을 둘러보며,

"오스왈츠 영지까지 길잡이! 500트리탄 은화!"


소리친다. 이럴 줄은 알았지만, 정말로 할 줄이야. 글린다는 허리에 손을 얹고 오만하게 사람들을 바라본다. 장담하마. 저래서 사람을 구하지 못할 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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