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7화 〉017. 1막 4장 - 맥발라의 요정 (4) / Unknown
"숙여."
앞서 가던 마법사가 몸을 땅에 붙이며 말한다. 얼떨결에 그 남자와 같은 자세를 취한다. 남자는 포복을 하며 앞으로 나간다. 왜 저렇게 움직이는지 모르겠다. 나보다 알고 있는 게 많으니까 따라 하자.
포복으로 전진하던 남자가 멈춰 선다. 나도 당연히 멈춰 서고. 남자는 고개를 돌려 나를 바라본다. 입술을 손으로 막는다. 내가 이 세계에 처음 와서 그러는데 조용히 하라는 신호 맞지? 그리고는 손가락으로 앞쪽을 가리킨다 이건 앞을 보라는 걸 테고.
나무가 자라지 않는 공터에 무언가 흐릿한 형체가 보인다. 음. 날개도 달려있고, 더듬이 같은 것도 있는 것 같군. 혹시 몰라 마력 탐지를 사용하고 바라본다. 거대한 빛. 순수한 마나. 어마무시하다.
"놀랍지? 저런 존재가 세상에 해가 되지 않는다는 것도 어불성설이지."
남자의 말이 맞다. 내가 마법에 문외한이라도 저게 위험하다는 건 확실히 알겠다. 심지어 적의까지 가지고 있으니. 거대한 불꽃이 사람을 불태우고 싶어서 움직인다고 생각해봐라. 무섭겠네. 제거하는 게 맞을 거다.
"그런데 저건 어떻게 없애요?"
"글쎄다? 마법으로 때리면 사라지지 않을까?"
이 인간도 생각 없이 사는군. 나랑 비슷한 점도 있네. 이 남자 말이 맞다. 일단 때리면 사라지겠지. 남자와 시선을 나눈다. 둘 다 고개를 끄덕이고, 동시에 자리에서 일어난다.
"얼음 창."
"화염 구."
두 개의 마법이 동시에 요정을 향해 날아간다. 정확히 요정에 명중하고 폭발한다. 둘 다 폭발하는 성질은 없는 마법일 텐데.
폭발로 인해 생겨난 먼지가 서서히 가라앉는다. 흙먼지 너머에서 밝게 빛나는 요정이 우리를 바라본다. 눈도 없는데 바라보는 게 느껴진다. 시선과 적의가 화살처럼 날아든다.
"더 날려!"
남자의 손에 다시 불꽃이 피어오른다. 그래. 한 번에 안 되면 많이 쏘면 되지.
"마나 충격."
손을 위에서 아래로 내리친다. 요정 주변의 나뭇가지들이 꺾인다. 풀이 짓눌리고, 땅이 파인다. 요정은 그대로다. 이런 방식은 안 통하나.
"불꽃 창 연발."
남자가 뻗은 손에서 불타오르는 창들이 발사된다. 요정의 주변에 꽂히고 아무 일도 없었다. 요정이 움직이기 시작한다. 우리를 향해서.
요정이 조금씩 다가올 때마다 강한 압박감이 느껴진다. 공기가 나를 짓누르듯이. 내 옆의 남자도 그것을 느끼는지 인상을 쓰고 있다. 이런 방식으로는 효과가 없다.
"왜 효과가 없을까요?"
"사상체라서?"
이 인간도 잘 모르기는 마찬가지군. 어쩌자고 이런 인간을 믿고 따라왔을까. 내가 멍청했다. 차라리 준비를 더 하고 혼자 움직였어야 했다. 요정은 점차 가까이 다가온다. 가벼운 마법들을 계속 날려보지만, 요정은 멈추지도, 느려지지도 않는다.
"도망갈까?"
"그건 아니죠."
"그렇겠지?"
"그래도 거리는 조금 벌릴까요?"
"그거 좋네."
작전이 정해졌고, 나와 남자는 요정을 등지고 달려간다. 다행히 뒤에서 공격이 날아오지는 않는다. 이런 식이면 조금 쉬울지도? 적당히 거리를 벌렸다고 판단하고 몸을 돌린다. 요정과의 거리가 크게 벌어졌다. 속도가 빠르지는 않군. 게릴라 전으로 가면 어떻게든 될 거 같다.
"다시 마법!"
남자의 신호에 맞추어 마법을 쏘아낸다. 화염과 얼음과 번개의 협주. 요정은 아무 일도 없다는 듯이 우리에게 다가온다.
"미쳤네."
"그러게요."
할 말을 잃게 하는 내구도. 흑룡 칼라고라도 이 정도로 맞으면 생채기는 날 것이다. 방법을 찾아야 한다. 그리고 나는 나름의 방법이 있지.
"훔쳐 보기. 대상 맥발라의 요정."
[이름 : 맥발라의 요정]
[레벨 : 896]
[체력 : 100%]
[마나 : ???%]
[사상체. 물리적 피해를 입지 않습니다. 마법적 피해를 입지 않습니다.]
[맥발라의 요정. 전설의 존재. 직접적인 공격은 불가하나 존재만으로 주변에 피해를 준다.]
우와. 레벨 896이래. 1000부터는 초월로 올라가니까 거의 막바지의 경지. 게다가 웬 사상체라는 것 때문에 물리적, 마법적 피해도 입지 않는단다. 사기네. 내 옆의 마법사도 강해 보이지만, 잘 쳐줘도 700레벨 정도. 물론 이건 UMO의 기준이지.
어찌 되었든 좋은 정보를 알아냈다. 물리와 마법이 통하지 않으면 정신 공격이지. 관련된 마법이야 차고 넘친다.
"조금 시간 벌어주세요."
"어쩌려고!"
남자의 말 따위는 무시하고 마법을 준비한다. 질질 끄는 건 내 취향이 아니다. 정신 마법은 재미없는 마법이기도 하고. 한 번에 끝내자.
마법이 준비되는 시간 동안 남자는 열심히 불꽃을 쏘아낸다. 물론 전혀 소용없다. 사실 마법을 쏘든 쏘지 않든 저 요정이 다가오는 속도는 같을 거다. 재밌을 거 같아서 시킨 거지 다른 이유는 없다.
"영혼 절멸."
정신 계열 초월 마법. 왜 영혼이라는 단어가 들어갔는지는 모르겠지만, 효과는 뛰어나다. 요정의 움직임이 멈춘다. 밝았던 빛이 조금씩 꺼져간다. 흐릿하던 형체가 조금씩 사라지기 시작한다.
"헐."
남자의 입에서 바람 빠진 소리가 난다. 자기가 해도 해도 안 되던 일을 옆 사람이 한 번에 처리했으니 놀랄 수밖에. 요정이 있던 자리에는 아무런 흔적도 남아있지 않다.
"끝이네요."
"어···. 끝이네···."
뭔가 하고 싶은 말이 많아 보이지만, 아무 말도 하지 않는다. 좋은 자세다. 너무 많은 질문은 명을 줄이지. 내가 죽일 생각은 없지만.
"그럼 전 돌아가 볼게요?"
"잠깐!"
공간 이동으로 떠나려는 나를 남자가 붙잡는다. 일단 마법의 사용을 중지한다. 남자는 요정이 사라진 곳으로 가서 땅을 파기 시작한다. 살짝 흥미가 동한다. 맨손으로 흙을 파헤치는 남자에게 다가간다.
"여기 찾았다."
남자가 흙더미 속에서 무언가를 꺼낸다. 노란색으로 빛나는 보석. 주먹만 한 크기의 그 보석은 강한 마력을 품고 있다.
"자 여기."
"이거 주는 건가요?"
"네가 잡았잖아."
그대로 내 손에 억지로 쥐여준다. 약간의 따뜻함이 느껴진다.
"이건 뭐에요?"
"마나석. 정확히 말하면 조금 다르지만."
내가 알고 있는 마나석과는 다르게 생겼군. UMO내의 마나석은 파란색인 데다 빛을 내뿜지도 않았다. 뭐, 여긴 UMO가 아니니까. 일단 보관은 해두자. 어디든 써먹을 일은 있겠지.
"이제 다 끝난 거죠?"
"그래. 잘 돌아가라고."
남자가 내 눈앞에서 사라진다. 공간 이동도 쓸 줄 아는군. 역시 어느 정도 실력은 되는 사람이다. 그나저나 이름도 안 물어봤네. 뭐. 언젠간 인연이 닿으면 다시 만나겠지. 돌아가자. 여기 있는 것도 의미 없고.
"공간 이동. 목표 지점. 여관."
물은 식어 있었다. 시간이 얼마나 지났을까. 옷을 갈아입고 욕조를 들어 복도로 내놓는다. 이제 알아서 가져가겠지. 옷을 입은 그대로 침대에 드러눕는다. 이제 뭘 하지?
당연하게도 잠은 오지 않는다. 이걸 당연하게 여기다니. 조금 문제가 있네. 창밖으로는 달과 별이 밝게 빛난다. 할 일이 없으니 잡생각만 머릿속에 떠오른다. 나는 누구인가. 나에게 있어 가장 중요한 의문. 도저히 답을 내릴 수가 없다.
그저 눈을 감는다. 시간이 지나가기를 기다리며.
"저기요. 마법사님?"
방문이 두드려진다. 글린다의 목소리. 무슨 일이지? 침대에서 일어나 잠긴 방문을 연다. 내가 나갔다 온 사이에 옷을 구해 입었는지 처음 보는 옷을 입고 있다. 손에 망토가 들려있는 것을 보면 돌려주러 왔나 보다.
"이거. 잘 썼어요."
맞네. 글린다는 방으로 들어와 망토를 침대 위에 올려놓는다.
"저······. 글린다···. 양?"
그러고 보니 글린다를 이름으로 부른 적이 없다. 한 번 이렇게 불렀으니 계속 밀고 가자. 내가 이름을 부르자 글린다는 멈춰 나를 돌아본다.
"이 망토는 계속 입고 있으세요."
"네?"
침대에 올려진 망토를 들고 글린다에게 건네준다. 글린다는 어리둥절해 하면서도 망토를 받아든다.
"그거 마법 물품이에요."
"에엑!"
그렇게 놀랄 일린가. 글린다에게 준 흑털망토는 좋다고 말할 수 없는 장비다. 그래도 피해 경감은 기본적으로 붙어 있지. 눈먼 공격 정도는 막아줄 수 있을 거다. 더 좋은 물건도 많지만, 제한이 이것저것 붙어 있다. 심지어 엄청 높은 제한들이 잔뜩. 평범한
"어···. 마법 물품이면 가격이 꽤 나갈 텐데 주셔도 되는 거에요?"
이 동네는 마법 물품 가격이 어떻게 형성되어있는 걸까. 억 단위는 나오는 건가? 글린다의 얼굴에는 경계심이 떠올라있다. 그럴 수 있어. 초면에 가까운 사람이 엄청난 가격의 물건을 준다면 나라도 의심하겠지.
"저한텐 이런 게 많아요."
글린다는 의심을 지우지 않은 상태로 내 손에서 망토를 받아 챙긴다. 의심이고 자시고 지금의 이득은 챙긴다. 좋은 자세다.
"그리고 할 말도 좀 있어요. 앞으로의 계획이요."
"그건 좀 중요하겠네요."
방 안으로 들어온 글린다는 내 침대에 걸터앉는다. 그 옆에 앉을 자신이 없는 나는 벽을 기대고 선다.
"우선 저희가 가야 할 곳이 정확히 어디인가요?"
"테페리 북동 국경을 책임지는 오스왈츠 영지요. 맥발라에서 걸어서 20일 정도에요."
꽤 거리가 먼 곳이다. 테페리는 지금 내가 있는 나라겠지?
"마차를 살 수 있을까요?"
"돈은 있으세요?"
"이런저런 금붙이는 꽤 많이 가지고 있어서."
글린다가 턱을 괴고 잠시 고민한다.
"돈이 있더라도 마차는 큰 도시에서나 제작해요. 맥발라에서는 구하기 힘들 거에요."
일단 근처의 큰 도시를 목적지로 삼자. 걸어서 가는 거보다 효율적이겠지.
"그럼 이 근처에서 마차를 살만한 도시가 있을까요?"
글린다는 대답을 하지 않고 눈을 이리저리 돌린다. 사회 공부를 열심히 안 했구나. 뭐 다른 사람들한테 물어보면 알 수 있겠지.
"여기서 오스왈츠 영지까지 가는 길은 알아요?"
글린다의 선택은 침묵. 갑자기 글린다를 데려다주는 것에 대한 의문이 샘 솟는다. 어디 다른 사람한테 물어봐야지. 아예 길잡이를 고용하는 것도 방법이겠다.
"내일 아침을 먹고 바로 출발할 테니 준비해두세요."
"네. 알겠습니다."
글린다의 말에 자신감이 사라졌다. 방 밖으로 나가는 글린다는 고개를 내리깔고 걷는다. 뒷모습이 약간 불쌍해 보인다. 그렇다고 해 줄 말은 없으니 그냥 보내는 거로.
이제 다시 나 혼자다. 침대에 누워 천장을 바라본다. 나무로 만들어진 천장. 이제 어떻게 해야 할까나. 한숨만 늘고 있다. 잠은 오지 않고, 그저 눈만 감고 있다. 내일은 어떤 일이 일어날지 모르겠다. 기대는 되지 않는다. 침대 위에서 뒤척인다. 불편함만이 느껴진다. 거친 이불을 덮고 그저 시간이 흐르기를 기다린다. 오늘도 날이 사라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