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6화 〉016. 1막 4장 - 맥발라의 요정 (3) / Unknown
요정 가루 채집은 상당히 흥미로운 작업이었다. 마력 탐지의 올바른 사용법을 알았다는 게 가장 흥미로웠지. 마법사만 할 수 있다는 말에 사용해 본 것이 정답이었다. 세상이 다르게 보였다. 말 그대로 마나의 움직임이 보였다. 모든 생명의 흔적이 느껴졌다. 매트릭스에서 네오가 사물을 보듯이. 너무 고전인가.
마력 탐지를 사용하니 요정 가루도 쉽게 찾을 수 있었다. 엄청 눈에 띄거든. 나무와 나무 사이에 둥실 떠 있는 요정가루는 마나를 내뿜고 있었다. 눈을 똑바로 뜨면 제대로 보기가 힘들 정도의 밝기. 이 정도 마나가 들어있는 재료를 화장품으로만 쓰다니.
"으아아. 배불러."
글린다는 간장 비슷한 것에 절인 고기가 담겼었던 접시를 멀리 밀어 넣는다. 꽤 많이 있었는데 다 먹었구나. 숲에서 마법사를 만나고 요정 가루를 일곱 개 더 채취했다. 공간 이동으로 돌아온 뒤, 시청에서 요정 가루를 돈으로 바꾸었다. 하나에 150 트리탄 은화. 합쳐서 1,800 트리탄 은화. 시청에서는 주머니에 담아서 글린다에게 건네줬다.
"이제 제대로 된 음식을 먹을 수 있어요!"
돈이 담긴 가죽 주머니를 흔드는 글린다는 신나 보였다. 글린다는 앞서 가며 건물 하나로 들어갔고, 지금은 앞에 접시를 가득 쌓아놓은 채로 행복한 표정을 짓고 있다. 확실히 마을에서 받았던 건조식품보다야 먹을 만하다. 내 입에는 안 맞지만.
"이제 어떻게 하죠?"
"어떻게 하긴요. 돈도 있겠다. 제대로 된 여관에서 잠이나 자죠."
글린다의 얼굴이 풀려있다. 여태까지는 긴장감이 드러났는데, 지금은 그런 것 따위는 없다. 자신이 누군가에게 죽을 뻔했다는 것도 잊고 있을 거다. 움직일 방향이 전해졌으니 움직이자. 처리해야 할 일도 있고. 내가 자리에서 일어나자 글린다도 자리에서 일어난다. 건물을 떠나면서도 빈 접시들을 아쉬운 듯이 바라본다. 아직도 부족한 거냐.
거리에는 가로등이 켜져 있다. 당연히 전기로 작동하는 것은 아니다. 그냥 평범한 기름 등. 불투명한 유리관에 들어가 있어 밝지도 않다. 꽤 많은 사람의 모습이 보인다. 어딘가로 급히 뛰어가는 사람, 술에 취한 듯 비틀거리는 사람, 주변을 이리저리 둘러보며 조심히 걸음을 옮기는 수상한 사람까지. 이곳도 사람이 사는 곳이라는 것이 피부로 와 닿는다.
검은 하늘에는 달이 두둥실 떠올라있다. 하얀 달은 거리를 오가는 모든 사람에게 공평한 빛을 나눠준다. 이곳의 달은 지구의 달과 비슷하네. 조금 더 큰 거 같긴 하지만.
"저기로 들어가죠."
앞서 걷던 글린다가 건물 하나를 가리킨다. 3층짜리 건물. 표지가 걸려있지만 못 읽는다. 돼지로 보이는 생물의 그림이 걸려있다. 덤으로 술잔의 그림도. 글린다가 온 것으로 보아서는 여관이겠지.
글린다가 문을 연다. 안쪽에서 따뜻한 바람이 불어온다. 나무 탁자와 의자. 불이 피어오르는 모닥불. 천장에서 늘어트려 진 양초들. 음식과 술이 올려진 탁자와 웃고 떠드는 사람들. 정말 내가 생각했던 여관의 모습.
"뭐 하세요?"
"어? 아니요. 그냥."
잡생각에 빠진 글린다가 끄집어낸다. 나를 보는 글린다의 눈에는 의문이 담겨있다. 내 대답에 미심쩍어하면서도 글린다는 여관 안쪽으로 들어간다. 글린다가 걸어가는 방향에는 계산대로 보이는 가구와 그 뒤에 서 있는 중년 여성이 있다. 여관의 주인이겠지. 여성은 글린다와 그 뒤를 따라가는 나를 보고 반갑게 웃는다.
"어서 오세요."
"방 두 개. 아침 포함. 하루 묵을게요."
글린다는 주머니에서 은색으로 빛나는 동전을 한 움큼 집어 꺼낸다. 여성은 계산대에 올려진 동전들을 세어보더니 몇 개의 동전을 남기고 주어 든다.
"남은 돈으로는 목욕물을 준비해주세요."
"지금 준비해 드릴게요. 3층 왼쪽 끝방 두 개입니다."
여성은 뒤쪽 벽에 걸려 있던 열쇠를 건네준다. 투박하게 생긴 열쇠에는 무언가 쓰여 있다. 글자를 모르는 나로서는 해석할 수 없는 내용. 열쇠를 받아든 글린다는 하나를 나에게 넘겨주고 구석에 있는 계단을 올라간다. 여기서 글린다를 놓치면 난 내방을 못 찾을 거다. 분명해. 얼른 글린다를 따라서 계단을 올라간다.
기다란 복도. 복도의 끝에는 3층으로 올라가는 계단이 있다. 오른쪽은 회반죽으로 이루어진 벽. 왼쪽의 나무 벽에는 문이 달려 있다. 문에는 열쇠를 집어넣을 고리와 무언가 글자가 쓰여있다. 당연히 읽을 수 없다.
"빨리 오세요."
내가 주변을 둘러보는 동안 글린다는 3층으로 올라가는 계단을 반쯤 올라가 있다. 나를 바라보며 얼른 따라오라고 손짓한다. 구경은 그만두고 따라가자. 3층도 2층과 같은 형태의 복도로 구성되어 있다. 왼쪽이 아니라 오른쪽이 객실인 것만 빼면.
"이쪽 방 두 개예요."
글린다는 복도의 끝에 있는 방 두 개를 가리킨다. 방의 문에는 열쇠와 똑같은 글자가 쓰여있다. 물론 못 읽는다. 빨리 배울 방법을 생각해보자. 가지고 있는 마법부터 찾아보자. 혹시 있을지도 모르지. 통역마법이 번역기능도 해줄 가능성이 있고. 글린다는 이미 자기 방으로 들어갔다. 일단 방에서 생각하자.
여관의 방은 아늑하다. 좋게 말해서 그렇단 거다. 솔직한 감상평. 너무 좁다. 기다란 방에는 침대 하나, 옷장 하나, 요강으로 보이는 단지가 전부. 놀라울 정도로 단출하다. 여기서 잠들 생각은 없지만, 자는 사람은 엄청 불편하겠어.
"내다보기. 대상 자신."
침대에 앉아 마법 창을 점검한다. 시간도 남고, 곧 마법을 쓸 일이 생긴다. 꼼꼼히 찾아봤지만, 글자를 번역해 주는 마법은 없다. 통역 마법을 믿어보는 수밖에. 쥐고 있는 열쇠를 바라보며, 마법을 사용한다.
"통역."
아무런 일도 일어나지 않는다. 열쇠에 적혀 있는 글은 그대로. 통역은 쓸모없는 마법으로 확정! 혹시 다른 말은 자체 통역이 안 될 수도 있겠지만, 왠지 어떤 말도 이해할 수 있을 거 같다. 내가 하는 모든 말 또한 다른 이들이 이해할 것도 같고. 그냥 그렇게 느껴진다. 그게 중요한 건 아니니 넘어가자.
"계신가요?"
누군가 문을 두드린다, 처음 듣는 남자의 목소리. 적의가 느껴지지는 않는다. 침대에서 일어나 잠긴 문을 살짝 열어본다. 수염이 덥수룩한 남자가 사람 좋아 보이는 웃음을 지으며 서 있다. 발치에는 김이 모락모락 피어나는 나무 욕조. 손에는 긴 천을 하나 들고 있다.
"목욕물 가져 왔습니다."
그러고 보니 글린다가 목욕물을 준비해 달라고 했다. 이렇게 배달되는 시스템이었구나. 목욕이라. 할 일이 있어 하는 건 무리. 하지만. 나름의 알리바이 정도는 만들 수 있겠지.
문을 활짝 연다. 남자는 나를 향해 꾸벅 인사를 하고 크지 않은 욕조를 방 안으로 들고 온다. 방 한쪽 구석에 욕조를 놓아둔 뒤 천을 침대에 올려둔다. 아마 수건 대용이겠지.
"문 앞에 놓아두시면 나중에 가지러 오겠습니다."
남자는 다시 나에게 고개를 숙이고 방문을 나선다. 나무문을 잠근다. 이제 나 혼자만의 시간. 지급 입고 있는 옷은 눈에 너무 띈다. 색깔부터 빨간색이다. 모습을 감추기에 적당한 장비가 있지.
"소환. 검은 사신의 암행복."
손에 검은색으로만 이루어진 평범해 보이는 천 옷이 하나 나타난다. 코트를 벗고 옷을 갈아입는다. 입자 내 몸에 맞게 크기가 줄어든다. 몸에 꼭 달라붙는 옷. 약간 불편한 감이 있지만, 문제는 없을 거다. 벗어 놓은 코트는 물품 창에 보관한다. 이제 움직이자.
"공간 이동. 목표 지점. 맥발라 숲."
달이 비쳐오는 검은 숲. 그나마 남은 달빛도 나뭇잎에 가려져 잘 보이지 않는다. 발밑에 흙이 느껴진다. 또 수풀 너머에 다른 사람의 존재도 느껴지고.
"오! 정말 왔네!"
수풀이 들썩이더니 낮에 보았던 마법사가 나타난다. 덥수룩한 머리와 요란한 옷차림은 그대로다. 평범한 사람, 글린다 같은 사람이 보면 이 사람은 단순히 미친 사람으로 보일 것이다. 마력 탐지로 본 이 사람은 주변을 요란하게 빛나게 할 정도로 뛰어난 마법사다. 처음 봤을 때는 이 빛 때문에 많이 놀랐다.
"부르셨지 않습니까."
마법사는 나를 환영한다는 듯이 양팔을 벌리고 웃는다. 저 인간과 처음 만났을 때 머릿속으로 목소리가 들려왔다. 마법 정신 대화. 저 사람이 말한 것은 하나. 나를 적대해. 그에 따라 불덩이로 위협도 하고 반말로 협박도 했지. 나랑 맞는 일은 아니었다.
"정말 믿을 줄은 몰랐거든."
수풀에서 나온 마법사는 옷에 묻은 이것저것을 털어낸다. 확실히 믿음이 가는 모습은 아니지. 원래라면 나도 믿지 않았을 거다. 반지가 말해주지 않았다면. 이 숲에는 뭔가 있다. 늑대 수준이 아닌 더욱 거대한 뭔가. 소을을 보고 반지가 진동했던 수준으로 울린다.
"저도 나름의 방식이 있어서 말입니다. 그래서 저건 뭡니까?"
숲 안쪽을 가리킨다. 본능과 반지가 말하기를, 저 깊숙한 곳에 아주 무시무시한 뭔가가 있다고 한다. 이 남자도 저 존재 때문에 이 자리에 있겠지. 남자는 내 손끝을 따라가 숲 안쪽으로 시선을 향한다.
"너도 느껴지는구나?"
"저걸 못 느끼면 마법사 때려치워야죠."
푸하하하. 남자는 웃는다. 배까지 잡고 땅을 뒤구른다. 이상한 인간. 남자는 한참을 웃더니 자리에서 일어나 심각한 표정을 짓는다.
"저걸 발견하고 일주일 동안 아홉 명의 마법사를 만났어. 전부 거절하더군."
솔직히. 나도 못 느끼고 있었지. 이 남자가 있던 지점에서 반지의 울림을 느낀 건 순전히 운이 좋아서였다. 마침 숲 속의 존재가 나에게 적의를 들어내지 않았으면, 무시하고 지나갔겠지. 정말 불덩이를 쏘았거나.
"질문에 먼저 대답이나 하시죠? 저건 뭡니까."
"맥발라의 요정."
"에? 그거 전설 아닙니까?"
"짜잔! 그런데 아니었습니다!"
역시 이상한 인간. 남자는 양손을 활짝 펼치며 어딘가의 광대 같은 자세를 취한다. 표정에도 장난기가 가득하다.
"아마 사상체일 거야."
음. 나는 그게 뭔지 모르는데. 남자는 마치 내가 알고 있는 게 당연하다는 듯이 말한다. 마법사라면 알고 있어야 하는 상식인가. 상식 공부를 해야겠군. 글린다를 통해 글자도 배우고, 상식도 좀 배우자.
"사상체가 뭔지 모르는구나."
표정에서 다 드러났군. 딱히 감출 생각은 없었지만, 읽히는 것이 기분은 좋지 않다. 남자는 잠시 헛기침을 하더니 설명을 시작한다. 이런 걸 설명충이라 부른다지.
사상체는 유령 비슷한 거다. 사람들의 생각과 상상이 모여서 탄생하는 마나 생명체. 요약하자면 이 정도. 당연히 나는 이해 못 했다. 중요한 건 지금 이 숲에 전설 속의 요정의 모습을 갖춘 사상체가 있다는 거다. 덤으로 많이 위험하고.
"그런데 전설 속의 요정이면 착한 거 아니에요?"
"그렇게 생각할 수도 있지. 직접 보면 말이 달라질 거야."
남자는 말을 던지고 숲 속으로 걸어간다. 거대한 힘을 가진 존재를 향해. 어쩔 수 없다. 나에게는 다른 선택지 따위 없지. 남자를 뒤따라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