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4화 〉014. 1막 4장 - 맥발라의 요정 (1) / Unknown
요정님 요정님 아름다운 요정님
나에게 당신의 가루를 뿌려주세요
그 누구보다 아름다울 수 있게
- 연극, 맥발라의 요정 1막 3장 中 일부 -
밤 동안 깨어 있었다. 작은 창 너머로 해가 떠오른 것을 보았다. 바로 글린다를 깨웠다. 글린다는 빠르게 침상을 정리하고 마룻바닥에 내려왔다. 마을 사람들은 이미 일어나 있었다. 최대한 눈을 마주치지 않고 마을을 벗어났다. 그들은 아직 나를 두려워하고 있다. 마을을 벗어나는 동안 글린다는 아무것도 묻지 않았다. 왜 저들의 눈빛이 변했는지. 왜 아침을 먹고 떠나지 않는지. 글린다의 눈에는 궁금증이 한가득하지만, 입 밖에 내지 않았다. 약간의 고마움이 느껴진다.
마을 밖으로 한 시간 정도 걸어 나오는 냇가. 간단하게 아침을 해결하기 위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글린다는 맨바닥에 앉는 걸 한참이나 주저했다. 다른 방법이 없기에 앉았지만, 표정이 썩 좋지는 않다.
"그런데 저희 어디로 가는 거예요?"
"북쪽?"
글린다의 표정이 굳어버린다. 어떻게 하겠나. 난 여기 지리도 모르는데.
"저희는 어디에 있는 거예요?"
"숲에서 북쪽?"
"마법사님은 아는 게 뭐에요?"
"아마 없을걸요?"
깊은 한숨. 글린다가 나를 한심하게 쳐다본다. 별로 기분이 좋지 않다. 그래도 글린다와 이런 시답잖은 이야기를 나누면 사람들의 시선이 잊힌다.
"냇가가 있으니까 주변에 도로가 있을 거예요. 거길 따라 올라가죠."
좋은 생각이다. 역시 현지인은 달라. 마을에서 구해온 건조식품은 말린 생선과 말라 비틀어진 빵. 당연히 맛은 없다. 배고픈 글린다는 꾸역꾸역 목으로 넘기지만, 배가 고프지 않은 나는 맛 정도만 보는 정도.
아침을 해결하고 다시 길을 나섰다. 글린다의 말대로 금방 정비된 도로를 발견했다. 그래 봐야 흙길이지만. 이 길을 따라가면 어디든 도착은 하겠지. 길을 걸어가는 동안 글린다는 계속 주위를 두리번거린다. 뭔갈 찾는 거 같은데. 뭔지는 모르겠다.
10분 정도 더 걷자 글린다가 멈춰 선다. 글린다의 얼굴이 하얗게 변했다.
"뭔가 문제 있나요?"
"마법사님."
나를 부르는 글린다의 목소리가 떨린다. 표정을 읽을 수가 없다. 불안, 두려움, 부끄러움, 분노, 짜증. 온갖 것들이 섞여 있다. 시시때때로 변한다.
"괜찮으신가요?"
"마법사님?"
"네?"
저 말에는 분노가 담겨 있다. 글린다의 눈동자 속에 불꽃이 일렁인다.
"뒤돌아서세요. 제가 다시 돌아보라고 할 때까지."
저런 눈동자를 가지고 있는 사람의 말을 안 들으면 안 좋은 일이 닥친다. 얼른 뒤를 돌아선다. 누군가 달려가는 소리가 들린다. 그래 봐야 글린다겠지만. 부스럭거리는 수풀 소리. 아아. 이제 좀 감이 잡혔다. 급했구나 너.
"귀 막으세요!"
"네."
얌전히 귀를 막는다. 하늘을 올려다본다. 파란 하늘에는 하얀 구름이 두둥실 흘러간다. 구름의 숫자가 많다. 전부 북쪽을 향해 흘러간다. 폭풍이라도 오는 걸까.
누군가 등을 찌른다. 얼굴이 빨간 글린다가 나를 찔렀다. 다 끝났구나. 귀를 막고 있던 손을 뗀다. 여기서 뭔가 말을 하면 어색하겠지? 아무 말도 없이 길을 걷는다. 글린다도 따로 말을 하지 않는다. 어색한 침묵과 함께하는 동행. 나쁘지는 않은 것 같다. 햇살과 바람과 구름만이 흘러간다.
"보인다."
"뭐가요?"
멀리 무언가의 형체가 보인다. 성벽인가? 글린다의 눈에는 보이지 않는 모양이다.
"성벽?"
"으음. 전 잘 안 보이네요."
"더 가까이 가보죠."
그 대화를 끝으로 다시 침묵. 글린다와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눌 사이가 아니기는 하지. 얼마 걷지 않아 내가 보았던 것이 모습을 드러낸다. 돌로 쌓아올린 장벽. 성벽이라 하기에는 약간 모자라다. 주변에 펼쳐져 있는 농지에는 사람들이 허리를 숙인 상태로 무언가를 하고 있다. 농사에 대해서는 아무것도 모르는지라 뭘 하는지는 모르겠지만.
장벽에는 문이 하나 뚫려 있다. 5m 정도 되어 보이는 문 옆에는 두 명의 무장한 병사가 지키고 있다. 다른 사람의 모습은 보이지 않는다.
"어딘지 알겠어요?"
"남쪽 어딘가의 작은 도시요."
글린다도 모르는군. 글린다가 모르면 알 사람이 없는데. 들어가는 데 문제는 없겠지? 약간 긴장되지만 그걸 밖으로 표현하지는 않는다. 당당하게 글린다와 함께 문을 지나간다. 옆에 서 있는 병사들은 특별히 제지하지 않는다. 통행세 같은 건 따로 없는 건가?
거리에는 2층 건물들이 가득 들어서 있다. 2층을 넘어서는 건물들도 간혹 보이지만, 겉모습에서부터 화려함이 느껴진다. 길은 돌로 만들어져 있다. 걸을 때마다 소리가 울린다. 꽤 많은 사람이 보인다. 상인으로 보이는 사람들도 있고, 어딘가로 급히 달려가는 사람들도 있다.
"식당을 찾아야겠죠?"
해가 중천에 떠 있다. 나야 배가 고프지 않지만, 글린다는 배가 고플 거다. 아마도.
"그런데 돈은 가지고 계세요?"
걸어가던 걸음이 멈춘다. 대답은 할 수 없다. 물품 창에 돈이야 잔뜩 있지만, 이 세계의 화폐제도와는 다를 테고. 글린다가 소리가 들리게 한숨을 쉰다. 자기도 돈이 없을 거면서 한숨을 쉬다니. 돈을 얻을 방법이 필요하다. 글린다의 영지까지는 마차로도 일주일이 걸리는 거리. 걸어간다면 얼마나 걸릴지 모르겠다.
나 혼자라면 문제가 없겠지만, 글린다는 밥도 먹어야 하고 수면도 취해야 한다. 그러려면 돈이 필요하다. 당장 떠오르는 방법은 환전. UMO 내부 통화는 골드라고 부르는 금화. 만약 이게 실제로 내 손에 쥐어진다면, 환전상을 통해 이곳의 화폐로 바꿀 수 있겠지.
"혹시 이 도시에 환전상이 있을까요?"
"환전상이요? 주로 대도시에나 있는데."
그럼 첫 번째 방법은 기각. 환전 말고도 다른 방법은 생각해 뒀다. 하나는 물품 판매. 내가 가지고 있는 물품들은 가격이 꽤 나갈 것이다. 아마도? 대부분 마법 물품이지만, 장신구에 가까운 효과를 품고 있는 물품도 많다. 그런 걸 팔아서 돈을 얻는 것도 나쁜 방법은 아니겠지.
"그럼 마법 물품을 팔만한 곳은?"
"그런 가게도 대도시에만 있어요."
망했군. 다른 방법이 떠오르지 않는다. 아무 말도 없이 글린다와 거리를 걷는다. 돌 바닥과 부딪히는 발소리만 들린다. 글린다는 뭔가 생각 중인지 땅을 내려다보며 걷는다. 저러면 위험하지 않나? 그나저나 점심은 어떻게 하지. 도시에 들어왔는데 건조식품을 먹일 수는 없고.
거리를 걷다 보니 넓은 광장에 도착했다. 중앙에 분사가 하나 놓여있다. 물을 뿜는 것은 날개 달린 사람. 요정인가? 주변으로는 작은 노점상들과 가게들이 즐비하다. 그냥 바닥에 자리를 깔고 무언가를 파는 사람들도 있다. 그리고 상인들 만큼이나 많은 사람. 다들 얼굴에 웃음이 깃들어 있다.
"여기 어딘지 알겠어요."
분수대의 동상을 본 글린다가 말한다.
"테페리 남쪽의 맥발라 시. 그럼 그 숲은 맥발라 숲이었나?"
글린다가 뭐라고 하지만 이해 못 하겠다. 그래도 현재 위치를 찾았으면 목적지까지의 이동로를 찾을 수 있겠지. 나쁘지 않은 수확이군,
"그럼 돈을 벌 방법이 있죠."
글린다의 웃음이 의미심장하다. 음. 하나도 좋아 보이지 않아. 무슨 생각을 하는지 몰라도 나에게 좋은 쪽은 아닐 거 같다.
"어떤 방법이죠?"
"맥발라 시의 명물. 요정 잡이."
아. 이름만 들어도 엮이고 싶지 않다. 글린다는 내 옷자락을 잡아끌고 어딘가로 끌고 간다. 돈이 없는 사람은 거절하지 못한다. 옷자락이 끌려 도착한 곳은 2층 건물. 뭔가 표지에 쓰여 있지만, 난 이곳의 글자를 모른다. 그러면서 대화는 되지만. 언제 시간이 되면 글자도 배워야겠군.
나무문을 열고 안쪽으로 들어간다. 천장에 빛나는 구체가 매달려 있다. 전기는 아닐 테고. 저것도 마법인가? 정면에는 나무로 만들어진 벽 너머로 두 사람이 앉아 있다. 벽에는 창이 뚫려 있고. 무슨 매표소 같다. 그리 넓지 않은 공간. 벽을 넘어서 들어가지 않는 한 열 명 정도가 서 있는 것이 전부일 것이다.
"여긴 어디예요?"
글린다만 들리게 작게 말한다.
"맥발라 시의 시청이에요."
시청에는 왜? 더 불안해지기 시작했다. 그나저나 시청치고는 상당히 작다. 아니면 원래 다 이 크기인가? 이런저런 의문은 접어두자. 글린다는 나를 끌고 왼쪽 창구 앞에 세운다.
"요정 잡이 신청할게요."
"네. 이걸 작성해서 오세요."
글린다의 말에 시청의 직원이 사무적인 태도로 무언가 잔뜩 적혀있는 나무판을 하나 내민다. 종이가 아니란 건 아직 이 세계의 종이 공급에 문제가 있다는 거다. 기술적인 문제이든, 효율성의 문제이든. 글린다는 직원에게서 판을 받아 들고 옆에 놓여 있던 깃털 펜을 꺼낸다. 잉크병에 담겨 있던 깃털 펜은 촉이 검게 번들거린다.
펜을 쥔 글린다는 나무판에 글자를 써내려간다. 쉼 없이 빠르게. 물론 나는 뭘 쓰고 있는 건지 모르지. 순식간에 작성을 끝낸 글린다는 판을 직원에게 건네준다. 직원은 판을 유심히 살펴보더니 고개를 끄덕인다.
"등록되셨습니다."
직원이 말하자 글린다는 등을 돌려 시청 출입문을 향해 걸어간다. 잠시 머뭇거리다 글린다를 따라간다. 광장으로 나온 글린다는 아무런 주저함도 없이 왔던 길을 그대로 되짚어간다.
"어디 가는 거예요?"
내 질문에 글린다는 계속 걸으면서 대답한다.
"요정 잡이 하러요."
"그게 뭔데요?"
좀 멈춰 서보란 의미를 담고 있지만, 글린다는 계속 걸으며 대답한다.
"보면 알아요."
"어디 가는 거예요?"
제발 이야기 좀 해주고 가자. 글린다는 걸음을 멈추지 않으며 대답한다.
"맥발라 숲이요."
"그 숲?"
글린다는 고개를 끄덕인다. 이제 아예 대답도 안 하네.
"거기라면 마법으로 갈 수 있는데."
드디어 글린다의 걸음이 멈춘다. 글린다는 경악에 가득 찬 눈으로 나를 바라본다.
"어떻게요?"
글린다의 눈이 더욱 커진다.
"마법으로요."
"그러니까 무슨 마법이요!"
이제 소리까지 지르네.
"보면 알아요."
글린다는 이를 갈기 시작한다. 놀려먹는 기분이 나쁘지는 않구나. 먼저 시작한 쪽이 잘못이지 뭐.
"알았으니까 뭐든 해봐요."
"일단 손잡으세요."
글린다는 잠시 머뭇거리다 내 손을 잡는다. 약간의 미심쩍음이 담겨 있는 표정.
"공간 이동. 목표 지점. 맥발라 숲."
써 본 적은 없지만 가능할 거라 믿는다. 머릿속에 내가 숲의 모양이 보인다. 본능적으로 이곳이 내가 원하는 맥발라 숲임을 직감한다. 마법을 사용한다.
"으윽. 속이 안 좋아."
글린다는 내 손을 놓고 흙바닥에 쓰러진다. 그렇다. 흙바닥이다. 우리는 지금 맥발라 숲에 도착했다. 글린다의 말을 빌리자. 마법사는 사기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