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1화 〉011. 1막 3장 - 작은 마을, 거대한 늑대 (2) / Glinda
마법사는 눈치가 빠른 것 같다. 내가 여동생이라고 소개하자마자 그에 맞추어 연기한다. 남자들이 나를 보는 시선도 눈치챈 거 같고. 영지까지 큰 문제 없이 갈 수 있겠다.
지금 나는 마법사와 서른 명 정도의 남자들과 함께 숲길을 걷고 있다. 스물은 다시 마을로 돌아갔고. 남자들은 창을 든 채로 힐끔힐끔 나를 바라본다. 그 눈동자가 너무나 역겹다. 솔직히 눈알을 뽑아버리고 싶지만, 아직은 참는다. 나는 지금 귀족이 아니라 방랑 마법사의 여동생이다.
"이 근처에서 발견되었다는 말이 있습니다."
남자 하나가 횃불을 내려 땅을 비춘다. 땅바닥에는 거대한 발자국이 찍혀 있다. 성인의 머리통만 한 크기. 발자국이 저 정도면 진짜 집채만 한 덩치를 가졌겠네. 마법사는 무릎을 꿇고 앉아 발자국에 손을 올린다. 뭔가를 알겠다는 듯 고개를 끄덕인다. 자기 이름도 모르는 사람이 뭘 알겠냐마는.
"뭔가 알겠나요?"
"알 거 같습니다."
당당하게 말하는 마법사의 눈동자는 약간 흔들린다. 거짓말이다. 다행히 다른 사람들은 눈치채지 못한 것 같다. 저런 거짓말에 속아 넘어가다니. 한심하기 짝이 없다.
"여기서부터는 저와 여동생만 가겠습니다."
마법사가 얼굴에 미소를 지으며 말한다. 그 말에 남자들은 약간 당황하기 시작한다.
"위험한데 여동생분은 저희가 데리고 있는 게···."
나한테 무슨 짓을 하려고! 검은 속내가 다 보이는 말. 뒤에 있는 다른 남자들이 나를 위아래로 훑어보며 침을 삼킨다. 역겨워. 나중에 반드시 갚아줄 거야.
"당신들보다는 제가 데리고 있는 게 안전할 겁니다."
마법사가 단호하게 말하자 남자들도 주장을 이어가지 못한다. 결국, 남자들을 그 자리에 남겨둔 채로 나와 마법사만이 숲으로 들어간다.
"방법은 있어요?"
밤바람이 세차게 불어온다. 마법사가 준 망토가 추위를 막아준다. 머리 위에 빛나는 구체를 띄운 마법사는 걸음을 멈추고 나를 돌아본다.
"도망갈까요?"
"엑?"
"아니. 저 인간들 딱 봐도 좋은 인간들은 아닌데, 꼭 도와줄 필요가 있을까요?"
마법사의 말이 틀린 건 아니다. 저 인간들은 우리가 늑대를 잡아도 공격해올 인간들이다. 하지만 저 인간들을 도와줘야 할 이유가 있다. 배에서 숙녀가 내서는 안 되는 소리가 난다. 마법사가 나를 바라본다. 그 눈동자에는 당혹감이 가득하다. 어쩔 수 없다고! 납치된 다음부터는 아무것도 못 먹었단 말이야! 최소한 하루는 종일 굶은 상태란 거지.
"전 아무것도 듣지 못했습니다."
웃기고 있네! 여기서 화를 낼 수는 없다. 화를 내면 내 배에서 그런 소리가 났다는 것을 인정하는 꼴. 그렇게 될 바에는 혀를 깨물고 죽을 거다.
"흠흠."
작은 헛기침으로 주의를 돌린다.
"보다시피 제 상태가 이래서······."
"네. 식사는 중요하지요."
마법사는 나와 눈을 마주하지 않는다. 아. 그냥 혀 깨물고 죽을까. 말 수를 줄이고 걸어가던 마법사가 멈춰 선다. 손을 들어 올려 멈추라는 신호를 보낸다.
"조심하세요. 앞에 있습니다."
늑대가? 수풀 너머에 집보다 커다란 그 늑대가? 솔직히 약간 무섭다. 자기보다 커다란 육식동물을 보고 무서워하지 않는 인간은 드물 거다. 마법사는 그 드문 사람 중 하나에 속한다.
"번개 그물."
마법사가 손을 내민다. 그 손끝에서 파란 번개가 파지직 거리며 퍼져나간다. 이름 그대로 그물과도 같이. 수풀과 나무 사이를 헤집고 다니는 번개. 진록의 숲이 밝게 번쩍거린다.
"끝."
"끝?"
마법사는 수풀 안쪽으로 걸어 들어간다. 정말 끝난 건가. 살짝 침을 삼키고 마법사를 따라간다.
"생각보다 심한데."
검게 타버린 거대한 늑대의 사체를 보고 마법사가 중얼거린다. 확실히 조금 심하긴 하네. 털은 바짝 타버렸다. 살의 일부도 녹아내렸고. 눈이 있어야 할 부분은 검은 배로 가득하다. 보기 좋은 광경은 아니다.
"불러내기. 도축용 칼."
마법사의 손에 작은 칼이 하나 생겨난다. 눈살을 찌푸리며 늑대의 사체에 다가간 마법사는 칼을 늑대의 목에 박아 넣는다. 으엑 이라던가, 으어어라는 소리를 내는 마법사는 쉽게 늑대의 머리를 잘라낸다. 저럴 거면 왜 그런 소리를 내는 거지?
"진짜 크네요."
마법사는 양손으로 늑대의 머리를 들어 올린다. 사람의 몸통만 한 머리통. 마법사는 뭔가 마음에 들지 않는지 얼굴이 편하지 않다.
"돌아가서 보여주면 되겠죠?"
"그렇겠죠."
너무 손쉽게 끝났다. 뭔가 격렬한 전투 같은 걸 기대했는데 아쉬움이 느껴진다. 마법사는 왔던 길을 그대로 되짚어 돌아간다. 목 없는 늑대의 사체는 고약한 냄새만을 풍기며 숲에 버려진다.
"흐엑!"
남자들이 우리를 보고 처음 한 말. 정확히 말하면 마법사가 들고 있는 늑대 머리를 보고 한 말이지만. 마법사는 들고 있는 머리를 땅에 떨어트린다. 쿵 하는 소리가 작게 땅을 울린다. 마법사는 놀란 표정을 짓고 있는 사람들을 바라보며 웃는다. 약간 사악해 보이기까지 하는 웃음.
"이제 적당한 대가를 받을 차례입니다."
마법사의 말에 사람들은 침을 삼킨다. 모두의 시선이 촌장에게 쏠린다. 촌장을 자신을 바라보는 마을 사람들을 보고 눈동자를 이리저리 굴린다. 마법사에게 줄 대가가 없다는 거지. 치사한 놈들.
"너무 많은 걸 바라지 않습니다. 잠자리와 음식을 좀 내어주시죠."
"아. 그런 거라면 얼마든지요."
촌장의 얼굴이 갑자기 밝아진다.
"저를 따라오시죠."
아주 못사는 마을은 아닌 것 같다. 나름 길도 정비되어 있고, 곳곳에 횃불로 불을 밝혀 놓았다. 집들의 상태도 상당히 좋은 편. 농사를 짓는 마을로 보이지는 않는데 수입을 어디서 얻는 거지?
지금 나는 마법사와 함께 늦은 저녁 식사를 하고 있다. 위치는 촌장의 집. 식탁에는 보리빵과 묽은 수프, 뭔지 알 수 없는 고기가 놓여있다. 평소라면 절대 먹을 일 없는 음식이지만, 난 배가 고프다.
"맛은 어떻습니까?"
옆에 서 있는 촌장의 아내가 묻는다. 목소리가 떨리는 것이 느껴진다. 촌장은 들어오자마자 자신의 아내에게 뭐라고 귓속말을 했다. 그 말을 들은 촌장 아내의 눈동자에 공포가 깃들었고, 지금 이 상태로 이어졌다. 아마 마법사가 얼마나 강한 존재인지 말한 거겠지. 그런데도 촌장의 눈동자에는 더러운 욕망이 깃들어있다.
"맛있습니다."
분명 촌장의 눈동자를 읽었을 것이다. 그러면서도 얼굴에 웃음을 지우지 않는다. 촌장의 아내는 마법사의 대답에 안심한 듯 한숨을 쉰다. 조금 자세히 관찰했다면, 마법사의 앞에 놓인 접시가 거의 줄지 않았다는 것을 알 거다. 입맛에 맞지 않는 게 당연하지.
"잘 먹었습니다."
마법사의 말에는 영혼이 없다. 그것을 눈치채지 못한 촌장의 아내는 마법사 앞의 접시를 치운다. 나도 어느 정도 허기를 달랬기에 접시를 살짝 앞으로 민다. 촌장의 아내는 그 행동의 의미를 깨닫고 내 앞의 접시도 치워준다.
"이제 잠자리를 안내해드리겠습니다."
촌장이 손바닥을 살살 비비며 웃는다. 저 웃음 속에는 어떤 감정이 있을까. 마법사는 웃으며 의자에서 일어난다. 촌장은 앞서 걸어가고 마법사는 그 뒤를 따른다. 마법사가 움직였으니 나도 움직여야지.
우리는 촌장의 안내에 따라 이 층으로 올라갔다. 작은 복도에 나 있는 두 개의 방. 촌장은 왼쪽 방문을 연다. 작은 창 하나. 밖은 캄캄하지만, 횃불의 빛이 조금 들어온다. 바닥에는 단순한 형태의 양탄자 하나. 아무런 무늬도 없다. 그리고 침대가 두 개. 두 개?
"방이 모자라서 한 방에서 주무셔야 할 거 같습니다. 남매니까 문제는 없겠지요?"
역할이 발목을 잡는다. 여기서 거절하면 엄청나게 이상할 거다. 그렇다고 남자랑 한 방이라니! 이건 아니지!
"방을 내주신 것만으로도 감사합니다."
마법사는 나를 이끌고 방 안으로 들어가 문을 닫는다. 아무렇지도 않은 거야? 여자랑 같은 방을 쓰는데? 아버님을 제외하고 남자와 같은 방을 쓰는 건 처음이다. 심지어 그때는 다섯 살이었고. 긴장이 안 된다고는 할 수 없다. 만난 지는 하루밖에 되지 않았지만, 마법사가 나쁜 인간은 아니란 건 알 거 같다. 그래도 긴장되는 건 긴장되는 거다.
내 맘을 아는지 모르는지 마법사는 침대 하나에 걸터앉는다. 혼자 멍청하게 서 있을 수는 없지. 다른 침대에 앉아 마법사를 마주 본다. 잠시의 침묵 후에 마법사가 입을 연다.
"이제 어떻게 하죠?"
"그게 끝?"
"네?"
나도 모르게 속마음이 밖으로 새 나왔다. 이런 상황이면 남자가 뭔가 로맨틱한 말을 해야 하지 않나? 안심을 시켜주든가. 내가 책을 너무 많이 읽은 건가······. 아버님 말씀이 맞았다. 소설을 너무 많이 읽지 말라고 할 때 들었어야 했다.
"오스왈츠 영지가 어디에요?"
"저의 집이 있는 곳이요. 테페리의 북동 국경을 지키는 귀족 집안이에요."
마법사는 아무것도 이해 못 했다는 표정을 짓는다. 도대체 어떻게 살아왔길래······.
"마법사님은 남쪽에서 오셨나요? 그 코트는 남쪽 지방 옷인데."
"그래요?"
표정을 보아하니 정말 아무것도 모르는구나. 둘 중 하나다. 마법사는 기억을 잃었던지, 어딘가의 오지에 숨어서 마법을 배운 거다. 나는 후자에 한 표.
"내일 일은 내일 생각하죠. 일단 잠을 잡시다."
나쁘지는 않은 선택이다. 솔직히 이 마을의 남자들이 걸리기는 하지만, 마법사가 쉽게 당하지는 않을 거다. 침대에 몸을 눕힌다. 불편하다. 엄청나게 딱딱하고, 부스럭거리고, 따뜻하지도 않다. 그래도 잠을 잘 수 있겠지.
옆을 살짝 돌아보자 마법사는 벌써 자리에 누웠다. 눈을 감고 있는 걸 보면 잠이 든 거 같다. 참 빨리도 자는구나. 눈을 감는다. 이 마을에 오래 머물고 싶진 않다. 날이 밝으면 바로 떠날 것이다. 그러려면 일찍 자야지.
그리고 잠은 오지 않는다. 긴장이 풀려서 내가 겪은 일이 생생하게 떠오른다. 납치당해서, 어딘가로 이동되고, 죽을 뻔했다가, 구조받았다. 집까지는 최소 일주일 거리. 부모님도 시종도 아무도 없는 곳에서 잠을 잔다. 심지어 외간 남자랑 한 방. 쉽게 잠이 올 리가 없지.
난 집에 돌아갈 수 있을까? 날 납치한 사람들의 목적은 뭘까? 또 습격해오지는 않을까? 아버님은 날 찾고 있을까? 오빠랑 언니는? 머릿속은 온갖 의문들로 가득 차 있다.
그저 뜬눈으로 밤을 새울 거 같다. 몸을 계속 뒤척인다. 잠을 청하기 위해 눈을 꼭 감지만 효과는 없다. 다시 눈을 떴을 때는 어두운 밤······. 이 아니네?
침대에서 몸을 일으켜 주변을 둘러본다. 작은 창 너머로 햇빛이 들어온다. 하늘은 어슴푸레하게 빛난다.
"일어났어요?"
마법사가 웃으며 반겨준다. 그 새 잠들었던 거야?
"아침은 이동하면서 먹을 거에요. 얼른 움직이죠."
마법사는 침대에서 일어나 방을 나선다. 흐트러졌던 망토를 정리하고 얼른 따라나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