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 8화 〉008. 1막 2장 - Who am I (3) / Glinda (8/65)



〈 8화 〉008. 1막 2장 - Who am I (3) / Glinda

내 이름은 글린다. 글린다 알폰소 오스왈츠. 주로 글린다 오스왈츠라고 불린다. 테페리의 북동쪽의 국경을 수비하는 귀족 집안의 셋째 딸. 주변에서 항상 아름답다는 말을 들으며 자라왔다. 훗날 늙다리 귀족에게 시집갈 거라는  불만이긴 하지만, 무엇 하나 부족한 것이 없는 생활. 어차피 새로운 애인이야 만들면 되는 거고.

그렇게  문제 없이 자라왔다. 필요한 것은 대부분 가졌다. 이런 생활이 계속될 줄 알았다. 어제까지는. 어제가 맞긴 한가? 솔직히 잘 모르겠다. 그냥 어제라고 하자.

열여덟 번째 생일 기념으로 여름용 별장에 나 혼자 놀러 갔었다. 나흘의 휴식을 마치고 본가로 돌아가기 전날인 어젯밤. 시끄러운 소리에 잠이 깼다. 눈을 비비며 시녀를 불렀다. 아무도 대답하지 않았다. 거기서 이상함을 느끼고 밀실로 숨었어야 했다.

호기심에 침대를 벗어나 방문을 열었다. 처음으로 본 것은 시녀 하길의 머리. 잘려나가서 피를 흘리는 머리. 눈동자가 뒤집혀 흰자만 가득한 머리.  자리에 주저앉았다. 온몸이 떨렸다. 시체를 처음 보는 것은 아니었지만, 아는 사람의 사체는 처음 봤다.

기절할 뻔한  간신히 참았다. 하지만 구역질은 참지 못했다. 올라오는 저녁 식사를 손으로 틀어막았다. 조심스레 기어서 밀실로 가기 위해 침대 밑으로 움직였다. 누군가 내 다리를 붙잡았다. 그대로 밖으로 끌려갔다.

검은 복면을 쓴 남자. 덩치가 상당했다. 손아귀 힘이 상당했다. 분위기가 상당했다.

"없애버릴까요?"

나에 대한 말이라는 것을 바로 이해했다. 죽음에 대한 공포 때문에 어떠한 것도 하지 못했다. 여태까지 배웠던 호신술과 처세술 따위는 의미가 없었다. 나름 열심히 배웠는데. 솔직히 오줌을 지리지 않은 것만으로도 내가 대견했다.

"안돼. 실종시켜야 한다."

나를 붙잡은 남자가 내 목을 졸랐다. 그대로 기절했고, 깨어나 보니 입에 재갈이 물린 채로 나무에 묶여 있었다. 주변에는 칼을 든 복면인들이 한가득. 바로 또 기절할 뻔했다. 다행히 정신을 붙들고 주변을 살폈다.

어딘지 모를  속. 나는 묶여있고, 주변에는 칼을 든 사람들. 분위기를 보니 나를 살려줄 거 같지 않았다. 엄청나게 무서웠고, 엄청나게 무서웠다. 응? 지금은 무서워하는 거 같지 않다고? 당연하지. 복면인들이 전부 땅에 묻혀버렸거든.

 남자가 수풀을 헤치고 나왔다. 엄청 눈에 띄는 빨간 옷을 입고. 언젠가 보았던 코트라는 옷이다. 남방 민족들의 전통의상. 무릎 아래까지 내려오는 코트는 온몸을 덮고 있다. 귀걸이와 목걸이와 반지들. 걸치고 있는 검은 망토. 머리에는 정체 모를 티아라를 끼고 있다. 처음에는 길을 잘못 든 귀족인  알았다. 마법을 쓰기 전까지는.

남자를 향해 달려가던 복면인이 하늘로 들어 올려졌다. 마법이다. 그다음에 달려들던 복면인들은 땅에 파묻혔다. 얼굴만 밖에 나와 있다. 마법이다. 붉은 코트의 남자는 마치 아무것도 아니라는 듯 나에게 걸어온다. 그렇다. 지금부터는 현재진행형이다.

"괜찮으세요?"

엄청나게 멍청한 질문이라고 생각하지 않는 건가? 여자가 나무에 묶여 있는데 하는 질문이 괜찮으세요? 심지어 재갈도 묶여 있어서 대답도 못 하는데? 역시 마법사란 족속들은 제정신이 아니야.

"아. 맞다. 재갈."

남자는 그대로 내 입으로 손을 뻗는다. 그리고 멈춰 선다. 뭐야. 왜. 빨리 풀어줘. 답답하단 말이야. 남자의 눈을 바라보니 뭔가 고민 중이다.

"어. 그러니까. 제가 당신에게 손을 대어도 괜찮을까요?"

미친.  말도  되는 신사는 뭐지. 딱 봐도 구해야겠다는 생각이 안 들어? 내가 벼랑에 매달려 있어도 물어보고 구해줄 거야?

너무 답답한 나머지 소리를 질렀다. 물론 재갈에 막혀 읍읍 정도로만 들렸겠지만. 그래도  의사는 충분히 전달되었는지 재갈을 풀어 주었다.

"헉. 헉."

부족했던 숨을 몰아쉰다. 조금 전에 소리를 질렀더니 호흡이 모자랐다. 남자는 내가 진정할 때까지 얌전히 기다려줬다. 뭔 남자가 이래.

"괜찮으세요?"

"또 그 질문!"

내가 소리를 지르자 남자는 어깨를 움찔한다. 구해준 사람한테 예의가 아니라고 생각하지만, 너무 답답한걸.

"얼른 풀어주세요."

"어···. 네···."

남자는 맥 없이 대답하고 묶인 밧줄을 풀어 주었다. 팔이 너무 아프다. 밧줄에 쓸려서 상처가 나 있다. 진짜 짜증 나. 아버님께 말해서 관련자들 사지를 다 찢어 버릴 거야. 감히 나를 납치하다니. 세상에 태어난 걸 후회하게 해주겠어.

"저···. 그···. 옷이···."

남자는 자신의 눈을 반쯤 가리고 나를 가리킨다. 옷? 고개를 숙여 옷을 바라본다. 잠옷 차림. 잠을 자다 잡혀 왔으니 당연한 거지. 이 차림은 외간 남자에게 보여주는 것도 상당히 부끄러운 일이지만, 상황이 상황이니 그럴 수 있다.

하지만. 밧줄에 묶인 채 발버둥을 치다 흐트러진  때문에 빤히 들여다보이는 가슴골이나, 찢어져서 드러난 허벅지는 이런 상황이어도 보여주면  된다.

"꺅!"

나도 모르게 손이 나갔다. 아. 이 빌어먹을 성격. 언니와 오빠, 어머님과 아버님, 동생들과 시종들 전부 고쳐야 한다고 했다. 확실히 고쳐야겠군. 생명의 은인의 뺨을 때리는  귀족다운 일은 아니지.

남자는 빨갛게 변한 자신의 뺨을 만지며 당혹감을 얼굴에 표출한다. 미안합니다. 제가 이런 인간이라서. 고개가 돌아간 사이 얼른 옷을 가다듬는다. 찢어진 드러난 허벅지는 어떻게 할 수 없지만, 가슴은 가렸다.

"저기, 일단 미안하다고 말할게요."

내가 뭐라고 지껄인 거지? 미안하다고 할게요? 목숨을 구해준 사람의 뺨을 후려갈기고 한다는 말이 미안하다고 할게요? 으아아아아! 이 망할 성격! 빌어먹을 자존심! 무릎 꿇고 사과해도 모자랄 판에! 미안하다고 할게요!? 화나서 날 두고 떠나면 어떻게 하려고!

남자는  상황을 받아들이지 못하고 눈을 이리저리 굴린다. 나는 남자가 어떻게 행동할지 몰라 긴장한 채로 가만히 서 있는다.

"어. 음. 죄송합니다?"

남자의 사과는 어째서인지 의문문이다. 그렇겠지. 구해준 사람한테 뺨을 맞았는데. 정상적인 인간이라면 여기서라도 깊은 사과를 해야 하지만, 나라는 인간이 정상은 아니지. 내가 정상이 아니란 것에 약간의 자부심을 가지고 있다.

"알면 됐습니다."

나의 성격에 대해 포기를 선언하겠다. 그냥 이대로 살아야지. 신께서 내려주신 모습을 부정하는 것은 참된 신도의 모습이 아니지.

"저. 괜찮으세요?"

이 남자는  질문에 대한 대답을 받아야만 하는 사명이라도 있는 것 같다. 몇 번째 질문이지?

"괜찮아 보이세요?"

"아니요."

"네. 안 괜찮습니다."

"아."

저 남자도 성격 장난 아니네. 나처럼 정상은 아니야.

"제가 어떻게 해드려야 할까요?"

남자는 진심으로 질문하고 있다. 여기서 어떻게 행동해야 하는지 정말로 모르고 있다. 한심하다. 원래 나를 집에 바래다주겠다고 먼저 말해야 하지 않나?

남자를 바라보고 한숨을 쉰다. 남자는 그저 머리를 긁적인다.

"일단 저 좀 도와주세요."

"어. 네."

대답이 시원찮다. 그래도 마법사니 쓸모는 있겠지. 땅속에 묻힌 복면인을 향해 걸어간다.

"아!"

발이 아프다. 나 맨발이구나.

"저기."

남자가 나를 부른다. 고개를 돌려 남자를 바라본다.

"가져오기. 테일러의 작은 부츠. 흑털 망토."

하. 미친. 저건 사기야. 남자의 손에 신발과 검은 털로 짜인 망토가 나타난다. 내가  적이 없는 형태의 신발.  다 투박하게 생긴 게 내 취향은 아니지만 그런 거 가릴 처지가 아니다.

"이거라도···."

"고맙다고는 할게요."

남자의 손에서 신발과 망토를 빼앗듯이 가져온다. 어떻게 신는지 고민할 것도 없었다. 안쪽에 발을 집어넣으니 신발이 알아서 신겨졌다. 망토도 대충 걸쳤더니  몸에 맞게 조정된다. 역시 마법사는 사기야.

땅에 묻혀 있는 복면인 하나에게 다가간다. 아까부터 아무 말도 없는 걸 보면 기절한 것 같다. 얼굴에 쓰인 복면을 벗겨낸다. 얼굴에 흉터가 가득한 남자.

"아는 얼굴이에요?"

"모르는 사람이에요."

그러고 보니 남자와 나는 서로 존댓말로 대화 중이다. 왜지?  봐도 남자 쪽이 나보다 나이가 많다. 내가 귀족이라서 존댓말을 쓴다고 하기에는 저 사람은 내가 누군지도 모른다. 그리고 저 정도 마법사면 최소한 자작 위에 봉해진 사람일 텐데 말이야. 그건 중요한 게 아니니 넘어가자.

"깨울  있어요?"

"물벼락."

남자가 한마디를 하자 복면인의 머리 위에 작은 물방울이 생겨난다. 그래, 물벼락만큼 쉬운 방법은 없지. 이대로 있으면 나에게도 물이  거 같다. 내가 살짝 뒤로 물러나자 남자가 손가락을 튕긴다. 물방울에서 물이 쏟아진다.

"푸하!"

땅에 묻힌 복면인은 숨을 몰아쉬며 깨어난다. 아직 제정신은 아닌지 주변을 이리저리 둘러본다. 묻힌 상태에서 잘도 고개를 돌린다. 목이 유연한 사람이군,

"너!"

"입 닥치세요."

복면인이 말을 하기 전에 입에다 신발을 쑤셔 넣는다. 신발의 주인인 남자에게는 미안하지만, 손으로 입을 막기는 싫다.

"제 질문에 대답만 하세요. 다른 말은 일절 허용하지 않습니다."

복면인의 눈에는 그렇게 하겠다는 의지가 없다. 여기서 신발을 빼면 또 소리 지르겠지.

"마법사님."

"어? 저요?"

내가 부르자 남자는 주변을 두리번거리다가 자신을 가리킨다. 마법사치고는 멍청해 보인다. 그래도 실력 자체는 쓸만하니.

"주변에서 기다란 나뭇가지 좀 구해주시겠어요?"

남자는 고개를 갸웃하면서도 주변 나무의 가지 하나를 부러트려 가지고 온다. 손으로 잡아보니  내가 원하는 크기다.

"대답하세요!"

신발을 입에 물고 있는 복면인의 얼굴에 나뭇가지를 휘두른다. 복면인의 얼굴에 상처가 난다. 눈동자에는 불같은 분노가 활활 타오른다. 누가 이기나 한번 해보자 이거지?

계속해서 나뭇가지를 휘두른다. 복면인의 얼굴에 상처가 계속 증가한다. 눈동자 속의 불길은 쉽사리 작아지지 않는다. 오히려 점점 커지고 있지. 훈련을 잘 받았나 본데?

"으엑."

뒤에서 맥없는 소리가 난다. 잠시 휘두르기를 멈추고 뒤에 서 있는 남자를 바라본다. 얼굴이 창백해진 채로 눈동자를 벌벌 떨고 있다, 마법사라면서 이런 것도 못 봐?

남자는 무시하고 다시 나뭇가지를 휘두른다.  번 더 내리치자 나뭇가지가 부러져 버린다.

"하나 더 부탁할게요."

"어. 또 그렇게 하시려고요?"

그걸 왜 물어봐? 진짜 멍청이인가? 그래도 대답은 해주자. 우민을 교육하는 것 또한 귀족의 의무이니.

"쉽게 입을  생각이 없어서 조금 입을 가볍게 만들 겁니다."

"어. 마법으로 할 수 있는데."

"네?"

"마법으로 원하는 정보를 얻을 수 있어요."

역시 마법사는 사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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