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7화 〉007. 1막 2장 - Who am I (2) / Unknown
"물품 창. 아이템 창. 장비 창."
나는 지금 바위 위에 앉아 있다. 늑대의 사체에서 멀찍이 떨어진 곳에서. 시체는 사라지지 않았다. 이곳이 현실이라는 것을 증명하는 듯이.
현재의 최우선 과제는 물품 창을 여는 것. 여러 가지 물약들과 소비 물품들만 꺼내도 내 전력은 두 배로 상승한다. 일단 명령어로는 작동하지 않는군. 다른 방법을 찾아보자.
UMO 시스템 중 작동하는 것은 마법 정도. 다른 뭔가 있을지도 모르지만, 일단 내가 할 수 있는 건 마법이 전부다. 그러면 마법으로 해결할 방법을 생각해보자.
마법 창은 열리지 않는다. 내가 어떤 마법을 보유하고 있는지도 확인할 수 없는 상황. 자주 쓰는 것들은 기억하지만, 자주 쓰는 것만 기억한다. 분명 보조마법 중에 사용할 만한 게 있었는데.
"이 빌어먹을 기억력."
하나도 기억나지 않는다. 거의 쓰지도 않는 마법인 데다, 필요하면 검색할 수 있다는 편리함이 기억을 방해한다. 이걸 표현하는 말이 있었는데 그것도 기억나지 않는다. 이것이 현대사회의 문제점이다.
"분명 정보 뭐였는데."
생각나는 단어들을 전부 입에 담는다. 정보 탐색. 정보 찾기. 정보 보기. 등등. 마지막에 정보창 검색을 끝으로 단어가 생각나지 않는다. 이건 아니군.
"훔쳐 보기. 대상 자신."
갑자기 떠오른 단어. 내 앞에 작은 창이 나타난다. 정보라는 단어가 들어갔다고 생각한 나 자신이 밉다.
[이름 : ???]
[레벨 : 초월++]
[체력 100%]
[마나 99%]
[레벨이 동등하여 다른 사항을 볼 수 없습니다.]
훔쳐 보기 마법은 대상의 이름을 알고 있어야 작동한다. 나는 내 이름을 모른다. 나는 이유진인가 아이작인가. 아직 정할 수 없는 나의 이름.
"이것밖에 안 뜨나? 물품 창 보는 마법도 있을 텐데."
사용했던 기억은 있다. 딱 한 번. 실제로 아무도 사용하지 않는 마법. 몬스터에게 사용하면 떨어트리는 물품이 나타난다. 즉, 쓸모가 없다. 사람에게 사용하면 그 사람에게 경고가 간다. 즉, 쓸모가 없다. UMO의 만 개가 넘어가는 마법 중 당연코 쓸모없는 마법 1순위를 당당히 차지하는 마법. 그래서 이름은 기억 못 한다.
"물품 보기. 대상 자신."
아니군. 물품 훔쳐 보기. 훔쳐 보기 물품. 물품 훔치기. 등등 또 되지도 않는 말을 계속 중얼거린다. 역시나 안 된다. 한숨이 절로 나온다.
그냥 갈까. 안 된다. 여기가 얼마나 위험한지도 모르는데. 이 세계가 얼마나 위험한지 모른다. 아까 거대 늑대를 보면 안전한 세계는 아니다. 그런 곳에서 오래 살아남으려면 언제나 최상의 상태를 유지하는 것이 좋다.
생각하자. 내가 딱 한 번 써보았던 그 마법을. 나의 기억력은 믿을 만하지 못하지만, 게이머로서의 나의 본능은 썩 믿을 만할 거다. 아마도.
"몰래 보기. 대상 자신."
기억이 났다. 일명 3대 보기 마법. 정보를 보는 훔쳐 보기. 물품을 보는 몰래 보기. 마법을 보는 내다보기. 전부 쓸데없는 마법들. 훔쳐보기 정도는 가아아아아끔 쓰이지만, 다른 두 개는 절대 쓸 일이 없다.
내 앞에 나타난 작은 창. 여태까지 모아온 엄청난 숫자의 아이템이 들어있다. 내용물을 알고 있으면 꺼내는 것은 문제없지.
"가져오기. 불타는 얼음의 반지."
내 손에 얼음으로 이루어진 반지가 나타난다. 내부에는 불꽃을 품은 얼음 반지. 착용할만한 반지는 아니지. 실험을 위해 꺼내봤을 뿐이다.
"보관하기. 불타는 얼음의 반지."
반지가 내 손에서 사라진다. 이걸로 물품 창에 수납되는 것도 확인했다. 이제 마법만 확인하자.
"내다보기. 대상 자신."
정확히 15,726개의 마법이 나타난다. 이야. 이 마법들을 다 모은 나도 대단하다. 사실 여기 모아둔 마법 중 실제로 쓰는 건 200개를 넘기지 않는다. 대부분은 다른 마법의 열화 판이던가, 뭔가 쓰기에 모호하다던가, 왜 있는지조차 모르겠는 것이 수두룩하다.
대표적인 게 염색 마법. 천으로 된 장비의 색을 바꿀 수 있는 마법. 참고로 천으로 만들어진 장비들은 효율이 떨어진다. 대부분은 가죽 장비를 챙겨 쓰지. 아니면 특별한 재료로 만들어진 걸 쓰고.
딱 한 번. 흥미 때문에 써본 것이 전부다. UMO에는 그런 마법들이 넘치고 넘친다. 그래도, 여기는 실제 세계니까 쓸만한 곳이 있겠지.
마법들을 하나하나 관찰한다. 어떤 이름을 가졌는지, 어떤 효과를 발휘하는지. 이 세계서는 어떤 일이 일어날지 모른다. 쓸모없던 마법을 쓸 일이 생길지도 모른다. 당장만 해도 3대 보기 마법을 사용하게 되었다. 앞으로 이런 일이 얼마나 벌어질지 나는 모른다.
"좋아. 대충 외운 거 같고."
두 시간 정도의 투자로 15,726개의 마법을 전부 살폈다. 모든 마법을 외우지는 못했지만, 그건 나중에 틈틈이 외우자.
이제 다음 목표를 진행할 시간. 이 숲을 벗어난다. 그리고 사람을 찾는다. 언어에 대한 문제의 해결책은 있다. 찾아보니 통역마법이 있더라. 특별한 임무를 위한 마법. 즉, UMO 내에서 딱 한 번 밖에 쓸 일이 없는 마법. 이런 마법이 도움될 줄이야.
"지도 작성."
내 앞에 작은 창이 나타난다. 내 시야가 미치는 곳이 지도로 그려진다. 이것도 왜 있는지 모르겠는 마법. 시스템적으로 미니 맵을 지원하면서 지도 작성이란 마법은 왜 있는 건가.
이 마법에 대해서 많은 토론이 오갔다. 특별한 임무와 연관되지도 않았고, 시작하면 처음부터 획득하는 기본 마법. UMO가 시작하고 2년에 걸친 토론 끝에 도출된 해답.
처음 계획 당시에는 미니 맵 시스템이 없었는데 나중에 생겼다. 지도 작성 마법은 삭제돼야 했던 마법이었지만, 어떤 이유에서인지 남아 있게 되었다, 즉, 제작사의 잘못이다.
"나쁘지 않은 결론이었지."
결국, 제작사인 아르고스에서 공식적으로 자신들의 실수라는 것을 인정했다. 이것이 바로 집단 지성의 힘이다.
그래서 난 지금 뭔 생각을 하는 거냐. 이건 나의 안 좋은 버릇 중 하나. 병실에 누워 있으면 할 만한 것이 없다 보니 쓸데없는 잡생각이 많아진다.
현재에 집중하자. 이 숲에서 벗어나는 것에 집중하자. 사람을 찾자. 목표를 바라보자.
바위 위에서 일어나서 걷는다. 지도 작성 마법은 내 시야가 미치는 범위만 적용된다. 지금 당장은 쓸모가 있는 편이 아니라는 말. 여긴 게임이 아닌 현실 세계이니 기본적인 지리 상식은 통하겠지.
일반적으로 강 주변에는 마을이 있다. 이 세계의 문명 수준에 따라 도시가 있을 수도 있다. 이 정도의 숲에 길도 나 있지 않고 집채만 한 늑대가 돌아다니는 걸 보면 현대적인 문명을 기대하기는 힘들겠지만.
"우선 목표는 강 찾기인가."
마법으로 나타난 창을 시야 한쪽 구석으로 치워 놓는다. 미니 맵 역할 정도는 할 거다. 강을 찾는 건 그다지 어렵지는 않을 거다. 두 시간 정도 돌아다니면 찾을 수 있겠지.
"안 보여."
다섯 시간 째. 강? 웃기는 소리 하고 있네. 강은커녕 시냇물도 찾지 못했다. 약간 지그재그로 걸었지만 나름 한 방향을 가지고 움직였다. 그런데도 숲이 끝나지 않는다. 해는 조금씩 지고 있다. 멀리 있는 풍경을 바탕으로 길을 찾으려 해도 나무가 시야를 방해한다.
다섯 시간 동안 걸었는데 지치지 않는다는 것은 내 몸이 완전히 아이작의 것으로 대체되었다는 거겠지. 그럼 나는 누구지? 아이작의 몸을 가진 이유진? 아니면 이유진의 정신을 가진 아이작?
또 쓸데없는 잡생각. 이런 건 나중에 안전한 곳에서 생각하자.
물이 흐르는 곳을 찾기 위해 낮은 곳을 향해 걸어도 보았지만, 중간에 다시 높아진다. 그보다 땅이 너무 평평하다. 누군가 인공적으로 정리한 것처럼. 높낮이의 차이가 거의 없다.
지도 작성으로 계속 위치를 파악하고 있지만,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는다. 빨리 방법을 생각해보자. 이대로라면 해가 져 버린다. 반대쪽으로 가야 하나? 직선으로 가면 두 시간이면 갈 수 있을 거다.
그러긴 싫다. 이유는 없다. 그냥 고집일 뿐. 그저 앞으로 계속 걸어간다. 이러다가 이 행성을 한 바퀴 도는 거 아닐까.
"어?`
등골이 오싹해진다. 앞에 뭐가 있다. 왼손 중지를 바라본다. 적대적 존재를 감지하는 반지. 지금 내 앞에는 뭔가 있다.
침을 삼킨다. 아마 이전에 봤던 거대 늑대 정도일 테지만. 그리고 그 정도면 금방 처리할 수 있지만. 확인은 해볼까? 여기가 얼마나 위험한지도 알아봐야겠고.
호흡을 가다듬고 앞으로 걸어간다. 혹시 몰라 방어 마법을 몇 개 사용했다. 이러면 기습 정도는 피하겠지.
나뭇가지 몇 개와 수풀 몇 개를 지나친다. 작은 공터가 나타난다. 그리고 왠지 봐서는 안 될 걸 본 것 같다.
공터 중앙에 입에 재갈을 문 금발 소녀가 나무에 묶여 있다. 그 주변에는 칼을 든 흉흉한 사람들이 한가득. 얼굴까지 가린 게 딱 봐도 수상하다. 어디서 많이 본 장면인가 했더니만, 꼭 전형적인 이세계물의 서두 같다.
여주인공이 나쁜 사람들에게 붙잡혀있고, 주인공은 그런 여주인공을 구한다. 뻔하군. 뻔해.
"누구냐!"
깊은 생각에 잠겨버리기 전에 묶인 소녀의 옆에 있는 남자가 고함을 지른다.
"글쎄요. 전 누구일까요."
나도 모르게 존댓말이 나왔다. 대부분 사람은 칼을 든 사람이 소리 지르면 존댓말을 할 거로 생각하지만. 그보다 누구냐니. 어떻게 대답해야 하는 질문일까.
난 이유진인가, 아이작인가. 아니면 그 둘을 적당히 섞은 존재? 이 부분에 대한 해답은 빠르게 얻어야겠군. 이런 질문에 대답을 안 하면 좋은 일이 일어나지는 않지.
"자신을 숨기다니! 죽어라!"
봐봐. 이런 일 생기잖아. 칼을 빼 든 남자가 나에게 달려온다. 침착하게 남자를 노려보고 마법을 사용한다.
"천상의 쇠사슬."
하늘에서 빛으로 만들어진 쇠사슬이 내려와 달려오는 남자를 묶는다. 그대로 끌고 올라가며 지상에서 10m쯤 되는 곳에 멈춰 선다. 공격력은 전혀 없지만 제압기로의 효과는 가장 좋은 마법.
매달린 남자는 몸을 이리저리 뒤틀며 빠져나오려 한다. 쉽게 되지는 않을 거다. 나도 저거에 묶이면 빠져나오기 힘들거든.
"어. 일단 대화로 해결하는 건 어떨까요?"
최대한 사람 좋아 보이는 미소를 지으며 말한다. 칼을 든 사람들은 얼굴이 가려져서 보이지 않지만, 나무에 묶인 소녀의 눈동자에 당혹이 깃든 것은 보인다.
"마법사다! 전원 돌격!"
음. 대화로는 해결할 수 없구나. 마법을 써야겠지? 저 사람들은 게임 속의 몬스터가 아니다. 죽이지 말고 제압하자. 방법은 많으니까.
나를 향해 달려오는 사람들. 칼은 노을을 받으며 붉게 빛나고 있다. 묶여 있는 소녀는 이 상황을 받아들이지 못하고 있다는 눈을 하고 있다. 금방 구해줄 거니까 걱정하지 말라고. 그런데. 구해주는 게 맞는 거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