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5화 〉005. 1막 1장 - 이유진 또는 아이작 (3) / 李有盡, Isaac
바라모아의 뚜껑이 열린다. 오랫동안 같은 자세로 있어 뭉친 근육을 풀어준다. 이번에는 10시간 정도 있었나? 배가 조금 고프다.
침대 옆에 놓여있는 냉장고를 연다. 안에 있는 것은 묽게 풀어진 죽이 전부. 1년 전까지는 평범하게 음식을 먹었지만, 소화기관이 너무 약해져서 흰 쌀죽이 아니면 소화가 안 된다.
하얀 그릇에 담긴 죽을 하나 꺼낸다. 말만 하면 새롭게 해 줄 테지만, 지금은 새벽 두 시다. 꼭 필요하지 않은 일로 체력을 소모하게 하고 싶지는 않다.
전자레인지에 3분간 덥힌다. 띵 하는 소리와 함께 따뜻한 죽이 만들어진다. 수저를 챙기고 한 숟갈씩 떠서 입에 집어넣는다. 제대로 된 맛이 느껴지지 않는다. 미각은 3달 전쯤에 잃었다. 나는 점차 죽음에 가까워져 간다.
비어버린 그릇은 침대 위 작은 탁자에 올려놓는다. 내가 저런 걸 일일이 씻을 건강이 못 돼서. 그대로 침대에 눕는다. 이불을 목까지 덮어쓰지만 잠은, 나에게 올 생각이 없다.
잠이 들지 않는다면 다시 UMO나 해야지. 닫힌 바라모아의 뚜껑을 연다. 안으로 들어가 의자에 앉는다. 뚜껑을 내리고 전원을 올린다. 로고가 나타나고 사라진다. 내 얼굴을 헬멧이 덮는다. 음악과 함께 들려오는 여성의 목소리.
[VARAMOA에 오신 것을 환영합니다. 이유진 님.]
"UMO 가동."
[Ultimate Magic Online을 가동합니다. 즐거운 시간 되세요.]
칼빈 성 전투가 끝나고 나는 흑천성에 서 있다. 가을의 대지보다는 못하지만, 그래도 최고 레벨의 사냥터 중 하나. 좋은 재료가 많이 나오기에 자주 들르는 곳이다.
메시지가 하나 와 있다. 유리카쨩에게서 온 메시지. 온갖 욕설과 함께 2억 골드가 첨부되어 있다. 사용한 천사의 세레나데와 화염의 땅 마법이 새겨진 루비의 값. 많이 모자라지만 모자란 부분은 재료로 메꾸어주기로 했다. 유리카쨩은 거래가 확실해서 좋다.
길드에서 재료를 공급해 준다고 해도 특별한 것들은 내가 직접 구해야 한다. 그래서 지금 여기 있는 거고. 안전지대에서 벗어난다. 흑천성은 실내 사냥터이기에 대규모 마법을 사용하는 것에 적합하지 않다. 그만큼 몬스터가 적게 나오지만, 그것은 시간이 더 오래 걸린다는 것을 의미하기도 한다.
"벗어날 수 없는 눈동자."
미니 맵에 빨간 점들이 나타난다. 셋에서 다섯씩 모여있는 빨간 점. 우선 가장 가까운 곳을 향해 걸어간다. 어둡고 침침한 복도. 횃불이 놓여 있지만 밝게 비추지는 못한다. 나야 착용 중인 목걸이의 효과로 어둠을 뚫어서 볼 수 있지만.
오래되어 구멍이 숭숭 나 있는 나무문이 나타난다. 이 문 너머에 네 마리의 몬스터가 있다. 문을 발로 걷어찬다. 부서지는 것은 아닐지 걱정될 소리를 내며 문이 활짝 열린다. 방 안쪽에 있던 해골들의 빈 눈구멍이 나를 바라본다. 일단 정식 명칭은 성의 망자들. 한때 이 흑천성에 살던 사람들이라는 설정이다.
해골들이 입을 쩍하니 벌린다. 날카로운 이빨이 나를 노린다.
"지옥 불 탄환."
해골들을 향해 뻗은 손가락에서 검게 타오르는 불꽃이 날아간다. 언데드 계통 몬스터에게 추가적인 피해를 주는 마법. 앞에 서 달려오던 해골은 불꽃에 얻어맞고 검은 불꽃에 둘러싸인다. 괴로운지 입을 벌리지만, 어떠한 소리도 새어 나오지 않는다.
"불의 장벽."
방의 입구에 타오르는 불의 벽이 생겨난다. 지능이라고 부를 만한 것이 없는 해골들은 불의 장벽을 돌파해 나에게 달려든다. 아직 아무도 죽지 않았다.
"가져오기. 파마의 검."
오른손에 흰색으로 빛나는 검 한 자루가 나타난다. UMO의 모든 유저는 마법사다. 직업이라고 해도 마법사를 세부적으로 나눈 것이 전부. 근접 전투를 위한 기능도 물품들도 거의 없지만, 아예 불가능한 건 아니다.
나에게 달려드는 해골 하나의 머리를 향해 검을 휘두른다. 하얀 칼날과 하얀 해골이 부딪힌다. 금속과 금속이 부딪힌 듯한 깨지는 소리가 울려 퍼진다. 솔직히 손도 조금 저리다.
"무기 강화."
파마의 검이 잠시 반짝인다. 한걸음 뒤로 물러서며 휘둘러지는 날카로운 손톱을 피한다. 방 밖으로 뒷걸음질 쳐 벽을 기대고 해골들과 마주 본다. 하나는 반파에 가깝다. 처음에 지옥 불 탄환을 맞은 녀석이다. 다른 셋은 비교적 멀쩡하다.
휘둘러지는 해골의 팔에 맞추어 검을 들지 않은 왼손으로 손가락을 튕긴다. 나는 이제 놈들의 뒤에 서 있다.
"얼음 폭풍."
방안에서 문 쪽에 몰려 있는 해골들을 향해 마법을 사용한다. 차디찬 바람이 몰아닥친다. 얼음 조각들을 싣고 몰아치는 바람은 해골들의 뼈마디를 얼어붙게 한다. 해골들이 몸을 돌려 나에게 다가오려 하지만, 그 몸동작은 거북이보다 느리다.
천천히 걸어가 검으로 놈들을 두들긴다. 내가 이래서 근접전을 선호한다. 스트레스가 풀리거든.
"후우. 끝났다."
네 마리의 해골은 금세 뼛가루가 되어 사라진다. 자신들의 흔적인 물품들을 남기며. 필요한 재료는 나타나지 않았다. 하긴 네 마리 잡았다고 나올 거면 여기로 사냥을 나오지도 않았다. 그냥 돈으로 사고 말지.
벗어날 수 없는 눈동자는 내가 지역을 떠날 때까지 유지된다. 가까운 곳에 다섯 마리가 뭉쳐 있는 곳이 있다. 천천히 걸어 그 녀석들에게 다가간다.
"아이작?"
누군가 나의 이름을 부른다. 이런 고레벨 사냥터는 사용하는 인원이 한정되어 있기에 만나던 사람을 자주 만날 수밖에 없다. 나를 부른 사람을 본다. 붉은 십자군의 길드장 테페리우스. 우리 총천연색과는 그다지 나쁜 관계는 아니다. 개인적인 친분도 조금 있고. 그렇다고 친구라고 하기에도 뭐하지만.
"테페리우스. 넌 연금술도 없지 않냐?"
이곳은 테페리우스가 사냥하기에 좋은 곳이 아니다. 레벨을 위해서라면 마법의 대지가 훨씬 좋은 사냥터이다. 내가 이곳에 있는 이유는 재료를 얻기 위해서. 그럼 테페리우스는?
붉은 십자군은 암살 길드다. 다른 사람에게 의뢰를 받고 유저를 죽이는 것을 업으로 삼은 길드. 그런 길드의 길드장이 여기까지 와서 나에게 말을 걸었다는 것은.
"아. 의뢰를 좀 받아서."
역시나. 테페리우스는 나를 바라보며 미소를 짓는다. 차마 선하다고 말할 수 없는 웃음.
"누구한테 얼마?"
말했듯이 테페리우스와는 친분이 있다. 우리 쪽에서 의뢰도 했고, 이런 것 정도는 물어볼 수 있는 사이.
"홍천군에서 금광 하나."
"내 몸값 많이 올랐네. 그런데 이길 자신은 있어?"
"설마. 그래서 착수금으로 1만 골드 당겨 받았지."
"똑똑하네."
"나도 UMO에서 5년 정도 굴러먹었거든."
나와 테페리우스는 서로를 보고 웃는다.
"화염 탄."
"얼음 창."
웃음이 멈추기도 전에 서로를 향해 마법을 날린다. 내가 쏜 얼음 창과 화염 탄이 공중에서 부딪힌다. 폭발로 인해 시야가 가려진 틈을 타 문 하나를 박차고 방으로 들어간다. 이런 좁은 공간에서의 대인 마법전은 위치 선정이 중요하다.
쾅하는 소리가 복도에 울려 퍼진다. 테페리우스도 나와 같은 선택을 한 것이다. 벗어날 수 없는 눈동자는 유저를 감지할 수 없다. 다른 마법을 사용해야 한다.
"마법장 은폐. 마법장 탐지."
마법장 탐지는 마나를 가진 존재를 탐지하는 마법. 실제로는 다른 유저의 위치를 파악하는 데 사용한다. 마법장 은폐는 그 마법장 탐지에 대항하는 마법. 미니 맵에 아무런 정보도 뜨지 않는다. 당연하지. 테페리우스도 나와 같은 마법을 사용했을 테니.
둘 다 마법장 탐지가 의미 없다는 것을 알고 있다. 단지 이것이 PvP의 기본이기에 사용할 뿐.
"보관하기. 파마의 검."
아직 들고 있는 검을 사라지게 한다. 유저와의 전투에서 근접전은 미친 짓.
"절대적 강화. 마법의 축복. 수호 의지."
이런저런 강화 마법을 사용한다. 유저와의 전투에서 방어 마법은 큰 의미가 있지 못한다. 테페리우스처럼 PK를 전문으로 할 때는 더욱더. 압도적인 화력으로 먼저 밀어붙이는 게 답이다.
"파괴의 손아귀."
내 손이 붉게 물든다. 손을 들어 등을 기대고 있던 벽을 잡아 뜯는다. 으적이라는 단어로 표현할 만한 소리가 나며 내가 통과할 만한 구멍이 생긴다. 원래 이 마법의 용도는 근접전에서 상대의 일부를 뜯어내는 거지만, 이런 응용도 가능하다.
건넛방으로 넘어간다. 테페리우스의 모습이 보이지 않는다. 이런 식으로 벽을 몇 번 부수면 나오겠지. 내가 나온 구멍을 뒤로하고 반대쪽 벽으로 걸어간다. 손으로 벽을 잡고 강하게 뜯어낸다.
"관통하는 화염."
마치 나를 기다렸다는 듯 불꽃의 창이 날아든다. 마법을 사용할 시간이 모자라 양팔을 교차해 막아낸다. 뜨거운 불꽃의 창이 팔을 뚫고 몸통을 뚫고 지나간다. 뱃속이 뜨겁다.
큰 피해를 주는 마법은 아니지만, 이름 그대로 상대의 마법 방어력을 관통한다. 이래서 유저를 상대할 때는 방어 마법의 의미가 없다는 거다.
"번개 작렬."
번쩍거리는 번개가 날아온다. 이번에는 반응할 시간이 있다.
"강철의 손아귀."
내 양손의 모습이 변한다. 금속처럼 변한 팔은 은색으로 빛난다. 오른팔을 그대로 앞으로 뻗는다. 나를 향해 날아오던 번개가 팔에 둘러싸인다.
"아. 도대체 그 응용은 뭐냐?"
"비밀,"
테페리우스는 머리를 잡고 한숨을 쉰다. 나도 최근에 알아낸 응용 마법. 강철의 손아귀는 번개를 잡아낸다. 완벽하게 잡아낸 것이기에 피해를 보지 않는다.
"이제 그만하지?"
"좋아. 항복."
테페리우스는 두 손을 올리며 손가락을 튕긴다. 그대로 이 흑천성에서 사라진다. 테페리우스와 나를 객관적으로 비교하면 두 단계 정도의 차이가 있다. 기습이 성공했으면 모를까 정면에서 일대일 싸움은 내가 절대적으로 유리하다. 테페리우스도 그걸 알고 있기에 손쉽게 항복한 것이다.
"홍천군 녀석들 귀찮게 하네. 유리카쨩에게 말 해둬야겠지?"
아마 나 말고 총천연색의 다른 간부진들도 공격했을 거다. 쉽게 당할 친구들은 아니니 걱정은 안 해도 되겠지. 나름 믿음직한 침구들이지.
오늘은 날이 아니다. 그냥 길드 본부로 돌아가서 놀아야지. 사용한 물품이나 좀 만들면서.
"어?"
갑자기 가슴이 찢어질 듯 아프다. 숨이 막혀 온다. 뭔가 머리를 찌른다. 서 있을 수 없어 바닥에 쓰러진다. 온몸에서 힘이 빠져나간다. 뭐지?
[사용자의 신체에 심각한 이상을 발견했습니다. 긴급 로그아웃까지 3초.]
내 실제 몸에 이상이 생겼다. 발작인가? UMO 내부에서 발작이 일어난 건 처음이다. 너무 괴롭다. 가슴이 터질 거 같다. 목에서는 뭔가 올라올 것 같다. 숨 쉬는 것조차 힘들다.
"컥컥."
죽는 건가? 죽음 자체를 두려워하지는 않는다. 나는 항상 죽음과 가까이 살았으니. 하지만 아픈 건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 긴급 로그아웃까지의 3초가 너무나 길게 느껴진다. 빨리. 빨리!
[긴급 방출.]
시야는 어둠으로 덮여버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