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4화 〉004. 1막 1장 - 이유진 또는 아이작 (2) / Isaac
"마지막에 여기 있었나."
알록달록한 나무들이 나를 반긴다. 최고 레벨 사냥터 가을의 대지. 으. 기절했다 깨어나면 항상 기억이 애매하다니까.
[유리카쨩으로부터 길드 메시지 1건]
들어오자마자 알림이 하나 온다. 길드 메시지라. 무슨 일이냐. 손을 움직여 메시지를 확인한다.
[비상! 공성전 발생! 위치 칼빈 성! 전원 소집!]
칼빈 성이라면 우리 길드 영지의 북쪽에 있는 땅이다. 공격을 당한 건가. 북쪽에 있는 건 홍천군 녀석들. 배짱도 좋구만.
"공간 이동. 목표 지점. 칼빈 성."
오색의 숲이 사라지고 돌로 쌓아올린 칼빈 성의 탑이 나타난다. 하늘을 찌를 듯 높게 솟아오른 파란 지붕의 탑. 여긴 칼빈 성의 길드원 집합소다.
"아이작!"
"멕컬린."
주변을 둘러보는 나에게 맥컬린이 달려온다. 얼굴을 보니 상황이 매우 급하게 돌아가나 보다.
"어떻게 된 거야?"
"일단 따라와!"
맥컬린은 내 질문에 대답하지 않고 내 팔을 잡아끈다. 맥컬린에게 끌려가 도착한 곳은 성벽 위. 길드원들과 길드에 고용된 병사들로 가득하다.
"유리카쨩! 아이작 왔어!"
성벽 위의 망루에서 병사들을 지휘하던 유리카쨩이 망루에서 내려온다. 평소에는 귀엽지 않다고 입지 않던 전투 장비까지 차려입은 것이 긴장감을 불러일으킨다.
"왔어? 바로 전투 준비해줘."
유리카쨩은 별다른 말 없이 준비를 지시한다. 군말 없이 유리카쨩의 지시를 따른다. 장비 창을 열고 사냥용이 아닌 대인용 장비로 바꾼다.
흑룡의 망토를 중심으로 마나 최대치를 늘리는 방향보다 공격력을 중심으로 장비를 바꾼다. 각종 장신구가 내 몸에 주렁주렁 달린다. 준비는 다 끝났다. 마침 길드장도 만났겠다 궁금한 점을 물어보자.
"어떻게 된 거야?"
"보면 알기 쉬울걸?"
또 대답 대신 팔이 잡아당겨 진다. 이 인간들은 너무 행동이 앞서. 유리카쨩에게 끌려서 성벽의 끝자락에 도달한다. 성벽 너머에는 수만은 족히 되어 보이는 사람들이 모여있다.
"장난 아니네."
갑옷으로 잔뜩 무장한 병사들. 활과 화살을 들고 있는 궁수들. 말을 타고 있는 기마병들. 곳곳에 설치된 투석기들. 그리고 통일되지 않은 복장을 가진 유저 마법사들.
"몇 명이야?"
"NPC 4만7천. 유저는 3천. 합이 5만."
"많이도 모았네."
보이는 깃발의 종류는 세 개. 회색 늑대. 붉은색으로 쓰인 天. 황금으로 빛나는 태양.
회색 늑대는 그레이 울프 용병단이고, 하늘 천 자를 사용하는 건 홍천군. 황금 태양은 아폴론의 활. 다들 우리 총천연색보다는 아래로 치는 길드들이다.
"셋이서 연합?"
"퍼펙트 메이지까지 얻은 우리가 눈엣가시로 보인 거지."
저 세 개의 길드가 연합했다면 우리가 밀릴 가능성도 있다. 내가 퍼펙트 메이지가 아니었다면.
"사용한 소모품은 길드 자금으로 복구해 주는 거지?"
"구하기 너무 어려운 것만 아니면."
"돈으로 줘도 돼."
"방법은 있고?"
방법이 있냐고? 당연히 있다. 없었으면 말을 꺼내지도 않았지. 유리카쨩에게 의미심장한 웃음을 남기고 비행 마법으로 몸을 띄운다.
성벽 위의 사람들의 시선이 나에게 모인다. 멕컬린과 유리카쨩은 경악에 가까운 표정을 짓는다. 그도 그럴 것이 비행마법을 사용한 마법사는 아주 손쉬운 표적이 되기 때문이다.
당연하게도 화살들이 나에게로 날아온다. 나는 맞아줄 생각도 없지만.
"공간 왜곡."
화살들은 나에게 닿지 않고 옆을 지나쳐 간다. 적의 궁수들은 화살이 통하지 않는 것을 알고 사격을 멈춘다. 화살 다음에 날아온 것은 마법. 화염과 번개, 얼음들이 나에게 날아온다.
"마법 방어. 수호 의지."
마법은 마법으로 막는다. 저쪽도 생각이 있다면 공중에 떠 있는 한 명을 향해서 높은 등급의 마법을 사용하지 않을 것이다. 비효율적이거든.
방어 마법과 높은 체력만을 믿고 적진 중앙까지 날아간다. 계속 마법이 날아들고 체력이 절반 이하로 내려간다. 허리띠에서 유리병을 하나 꺼낸다. 천사를 나타낸 듯 날개가 세공된 병. 하얀색으로 반짝이는 액체가 들어있다.
칼라고르를 사냥할 때도 아까워서 마시지 못한 물약. 판매 물품이 아닌 순수 제작 물품. 공식적으로 만들 수 있는 사람은 나를 포함해서 다섯 명뿐. 들어가는 재료도 쉽게 구할 수 있는 것도 아니다. 전부 꽤 고생해야지 획득할 수 있다. 만약 유리카쨩이 지원을 약속하지 않았다면 여기서 쓰지 않았을 거다.
만드는 것이 그렇게 어려운 만큼 효과는 정말 뛰어나다. 코르크 마개를 딴다. 달콤한 냄새가 코를 자극한다. 나도 모르게 입맛을 다신다.
"너! 그거 마시면!"
성벽에서 유리카쨩이 목소리가 들린다. 거리가 꽤 되는데 전해지는 것을 보면 확성 마법을 사용한 것이다. 내가 들고 있는데 뭔지 알아차린 거지. 이걸 길드 자금으로 해결하려면 유리카쨩의 등골이 휘어버릴 거다. 하지만 그건 나랑은 상관없지.
유리카쨩을 향해 싱그러운 미소를 선보이며 물약을 들이켠다. 입안에 아주 달콤한 향이 퍼져나간다. 어떤 맛이라고 표현도 못 하겠다. 내가 먹을 수 있는 음식이 한정되어 있다 보니 맛을 표현하기가 상당히 힘들다.
[극상품 천사의 세레나데를 복용하였습니다.]
[24시간 동안 마나 회복량이 500% 상승]
[24시간 동안 마나 최대치가 500% 상승]
[24시간 동안 체력 회복량이 500% 상승]
[24시간 동안 체력 최대치가 500% 상승]
[24시간 동안 모든 능력치 +20]
[24시간 동안 마법 효율 1% 증가]
[24시간 동안 모든 마법의 재사용 대기시간 5% 감소]
[24시간 동안 모든 마법의 레벨이 10 상승합니다.]
[천사의 축복이 임합니다.]
[모든 마법의 재사용 시간이 초기화됩니다.]
[3등급 이하의 모든 축복 마법이 적용됩니다.]
[모든 체력과 마나가 회복됩니다.]
역시 사기야. 온갖 축복이 동시에 적용되며 내 주위에 찬란한 빛이 뿜어져 나온다. 사실 칼라고라를 사냥할 때 마셨으면 더 쉽게 잡았을 거다. 너무 아까워서 다른 방법을 쓴 거지.
"제기랄! 얼른 녀석을 쏴! 천사의 세레나데를 사용했다!"
내가 마신 물약의 정체를 눈치챘는지 마법사들 사이에서 소란이 일어난다. 다시 한 번 마법과 화살들이 나를 향해 날아든다.
"공간 왜곡. 마법 방어. 수호 의지."
올라간 레벨을 이용해 마법을 다시 사용한다. 원래는 불가능하지만, 재사용 대기시간이 초기화되었기에 가능한 꼼수. 날아든 마법들은 유의미한 피해를 주지 못한다.
안전을 확보했으니 다음은 공격이다. 유성 낙하는 인간들을 상대로 제 위력을 발휘하지 못한다. 전쟁에서 사용하기에 유성 낙하보다 좋은 마법이 있지.
"지옥 도래."
500% 증가한 마나가 전부 소모된다. 마나 소모량에 따라 위력이 달라지는 마법. 다섯 배 증가한 마나량으로 사용하면, 말 그대로 지옥이 펼쳐진다. 한 번에 많은 마나를 소모했기에 후유증에 시달려야 하지만, 천사의 축복은 그 후유증을 막아준다.
병사들이 서 있는 땅이 열린다. 벌어진 땅의 입에서 불꽃이 치솟는다. 하늘은 검게 물들고 점차 찢어진다. 하늘의 입에서는 불덩이가 쏟아지고, 땅에 떨어진 불덩이에서는 차마 표현하지 못할 기괴한 생김새의 존재들이 모습을 드러낸다.
나에게 날아드는 마법이 사라졌다. 밑에서 벌어지는 일을 해결하는 것도 바쁜데 공중의 나를 노릴 수는 없겠지. NPC 병사들도, 유저 마법사들도 조금씩 그 숫자가 줄어든다.
천사의 세레나데의 마나 회복력 증가 효과 덕분에 마나가 차오르는 것도 순식간이다. 금세 또 하나의 마법을 사용할 만큼의 마나가 모였다.
"소환물 강화."
차올랐던 마나가 다시 곤두박질친다. 땅을 기어 다니며 사람들을 집어삼키던 괴물들의 몸이 빛나기 시작한다. 어찌 된 영문인지 내 말을 듣지도 않는 저 존재들은 나의 소환물로 취급된다. 덕분에 강화 마법도 적용되지.
더욱 강해진 괴물들은 마법도 창칼도 무서워하지 않으며 공격을 계속한다. 진을 이루고 있던 병사들의 혼란이 가중된다. 점차 진형이 무너지고, 군대에서 개인으로 변해간다. 유저 마법사들이 고래고래 소리 지르며 병사들을 독려하지만 큰 효과를 발휘하지 못한다.
"이걸로 끝이면 섭섭하지."
허리띠에서 반짝이는 루비를 하나 꺼낸다. 붉은 루비는 태양 빛을 받아 불꽃 같은 빛을 내뿜는다. 영롱하다는 말이 어울리는 모습. 이 보석도 가격이 꽤 나간다. 평범한 루비가 아니라 이것저것 마법적인 가공이 되어 있으니. 루비 가격도 유리카쨩에게 받아낼 것이다. 그러니 아까워하지 말고 쓰자.
"그래도 아깝다."
손에서 루비를 놓는다. 중력을 따라 떨어지는 루비는 마치 불똥과도 같다. 루비가 바닥에 부딪힌다. 떨어진 루비를 중심으로 불꽃이 퍼져나간다. 모든 것을 삼킬듯한 화염의 땅이 펼쳐진다.
루비에 새겨진 마법은 화염의 땅. 효과는 보다시피 화염의 땅을 만드는 것. 병사들과 마법사들이 타들어 간다. 화염을 막기 위해 뭔갈 하려고 하면 괴물들이 덮친다. 괴물을 막으려 한다면 바닥에서 치솟는 화염이 공격한다. 이도 저도 할 수 없는 상황에 후퇴라는 명령이 떨어진다.
적들의 군세가 후퇴하기 시작한다. 아니, 저건 후퇴라고 부르지 않는다. 그저 패배한 병사들의 살고자 하는 도망. 생존을 위한 인간들의 처절한 도주. 그런데 나는 쉽게 보내줄 생각이 없다.
허리띠에서 유리병을 하나 꺼낸다. 녹색으로 찰랑거리는 액체. 이번에는 무슨 맛이냐. 코르크 마개를 따고 빠르게 목으로 넘긴다. 사과 맛이네. 마나가 차오른다. 충분한 마나가 차올랐다. 멀찍이 도망가는 적들을 향해 손을 뻗는다.
"용의 숨결."
차오른 마나가 바로 사라진다. 손끝에서 불꽃이 응축되고 등을 향해 쏘아진다. 내 앞 일직선 상에 살아남은 사람이 없다. 모두 고열로 순식간에 증발해 버렸다. 땅은 남은 열기로 타오른다. 불꽃을 직접 맞지 않은 사람들은 타오르는 공기로 인해 하나둘씩 쓰러진다.
헛웃음만 나온다. 강력할 줄은 알고 있었지만, 이 정도의 성능이라니. 이제 칼빈 성 앞에는 적들의 흔적을 찾을 수 없다. 전쟁은 손쉽게 끝났다. 할 일을 다 마쳤으니 돌아가야지.
비행 마법을 유지한 채 공중을 서서히 날아 칼빈 성의 성벽에서 나를 기다리는 유리카쨩과 멕컬린. 둘 다 얼굴은 놀람으로 가득 차 있다.
"아이작! 마지막 건 뭐야!"
내가 성벽에 내려앉자마자 유리카쨩이 내 멱살을 움켜잡는다.
"유리카쨩! 진정해!"
옆에서 맥컬린이 유리카쨩의 양팔을 잡는다. 옷매무새를 다듬고 콧김을 뿜어대는 유리카쨩을 바라본다.
"이번에 새로 얻은 마법. 그나저나 천사의 세레나데랑 마법 보석은 길드 자금으로 해결해 주는 거지?"
"너! 천사의 세레나데를 길드 자금으로 어떻게 해결하라고!"
유리카쨩의 비명이 칼빈 성에 울려 퍼진다. 불쌍한 길드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