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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바라기-222화 (222/223)

< --  에필로그  -- >

저 멀리 보이는 하늘이 푸르기만 하다. 5년 전까지만 해도 짙게 깔린 안개와 그 너머를 둘러싼 꺼지지 않는 불길로 가득 차 있던 곳이 지금은 여느 도시의 모습과 다를 게 없었다.

물론 아직도 정리가 끝나지 않은 건물의 잔해 따위가 당시의 모습을 조금이나마 보여주고 있었지만 불과 5년 사이에 이룬 변화치고는 극적이다.

최소한 그 당시에는 지금처럼 부산스럽게 움직이는 인파가 존재하지 않았으니까.

"또 여기 나와 계셨어요?"

그 변화된 서울과 일산의 경계를 망연히 바라보고 있던 사내는 청아한 음성에 고개를 돌렸다. 저녁거리라도 준비하고 있었는지 앞치마를 두른 채 자신을 바라보고 있는 아름다운 여인을 발견한 사내가 환하게 미소를 지었다.

"아. 날이 참 좋아서요."

시원하게 치켜올라간 입가에 놓인 흉물스러운 상처가 인상적인 사내, 김형준은 자신의 아내를 그윽한 눈으로 바라보았다. 그 노골적인 시선이 부끄러웠는지, 그녀는 잠시 얼굴을 붉히다가는 이내 다가와서 잔소리를 했다.

"날이 찬데 이러고 있으면 감기 걸려요."

빠른 걸음으로 다가온 그녀가 흘러내린 담요를 다시 추켜올려준다. 잠시 고개를 숙인 그녀의 얼굴에 슬픈 빛이 스쳐갔지만, 다시 고개를 든 그녀는 활기 찼다.

"어서 들어가요. 당신이 좋아하는 돈까스 해놨어요."

차분하고 조신했던 이전과는 비교도 될 수 없을 만큼 유쾌한 어투다. 왠지 그 말투에 가슴이 먹먹해진 김형준은 쓴웃음을 도로 삼켜야 했다.

"어. 그럴까."

김형준이 의자에서 일어나자 이제껏 담요에 숨겨져 있던 그의 몸이 드러났다. 이전까지만 해도 탄탄한 근육으로 꽉 차있던 그의 하반신이 이루 말할 수 없이 앙상했다.

전지현의 시선이 김형준 모르게 그의 하체를 스쳐갔다. 앙상하고 볼품 없는 모양새의 하반신, 마치 큰 병에라도 걸린 것처럼 비루한 모습이다.

"갑시다. 돈까스라는 말을 들으니 배가 꼬르륵 거리네."

짐짓 쾌활하게 말을 한 그가 비틀거리며 걸음을 옮긴다. 스스로의 체중을 감당하는 것조차 힘이 든지 이리 저리 몸을 휘청이며 위태로운 걸음을 옮기는 그의 모습에 전지현이 남모르게 눈물을 흘렸다.

또한 아무렇지도 않은 듯이 태연하게 걸음을 옮기던 김형준 역시 그녀가 잠시 고개를 돌린 사이에 얼굴을 잔뜩 일그러트리며 고통에 찬 표정을 지어 보였다.

한걸음 한걸음 내딛는 것이 너무도 고통스러웠다. 하지만 그는 해내야 했다. 그래도 처음에는 안지도 서지도 못했던 것이 이제 와서는 조금씩 나아져 여기까지 왔으니, 그간의 시간을 위해서라도, 아니 앞으로를 위해서라도 그는 감내해야 했다.

결국 모른 척 하려던 전지현이 참지 못하고 흐느끼자 그의 걸음이 멈춰섰다.

"왜요. 나아지고 있잖아요."

짐짓 너스레를 떨지만 잠깐 사이에 온몸을 흠뻑 적신 땀이 더욱 안쓰러워 보인 그녀다. 김형준이 황급히 이런저런 말을 꺼내 그녀를 달래본다.

"그래도 모노케라스의 도움이 아니었으면 전 이 자리에 있지도 못했을 거에요. 이 정도만 해도 우리 감사하자고요."

마지막 공격을 주고 받을 당시 그는 마지막 생명의 근원까지 끌어올려야만 했다. 어중간한 공격으로 몰아내기에는 천개의 눈동자는 너무도 강인했으니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가 이렇게 살아남은 것은 그의 몸에 흡수된 미노타우르스-모노케라스의 심장이 또다른 생명의 근원을 제공해준 덕이었다.

다만 그 반신에 달한 모노케라스의 심장이라지만 온전한 심장도 아니고 다이달로스의 눈을 피해 건넨 파편 하나로는 그의 몸을 온전하게 보전치 못했다는 것이 문제였다.

하지만 김형준은 그마저도 감사했다. 지금도 간간히 흘러나오는 방송매체에 담긴 자신의 마지막 모습은 누가 봐도 시체와도 다름이 없었다. 지금 이렇게 살아있는 것이 기적이라고 해야 옳을 지경이었다.

"자. 작년에는 겨우 앉앗죠? 이번에는 걸을 거에요. 지금처럼 어설프게 말고 제대로."

그녀의 뺨에 흘러내린 눈물을 닦아주며 김형준이 호기롭게 말했다.

"그리고 언젠가는 제 힘을 다 되찾을 거에요."

과연 생사를 걸고 몇 번이나 사람들을 구원해낸 그의 의지다. 사소한 말 한마디도 마치 선언과도 같은 힘을 지니고 있다.

간신히 눈물을 머추고 고개를 든 그녀에게 김형준이 입을 맞춘다.

후다닥.

그때 그들의 귓가에 들려오는 다급한 발소리. 고개를 돌리니 어설픈 표정으로 정원의 한켠에 숨으려 우왕좌왕하는 윤민아가 있었다.

"와... 왔니?"

당황한 얼굴로 윤민아와 김형준을 번갈아 바라보던 전지현이 붉게 달아오른 볼을 감싸고는 뛰쳐나갔다.

"하이고. 결혼한지 얼마나 됐는데 아직도 저러네. 진짜 저건 천성이야."

김형준이 장난스럽게 웃으며 이야기를 하니 윤민아가 미안한 표정으로 주춤주춤 다가온다.

"미안해. 내가 방해했지?"

얼굴 가득 미안한 기색을 담은 그녀를 보고 김형준이 피식 웃음을 터뜨렸다.

"뭐, 그렇다고 하기에도 아니라고 하기에도 좀 그렇네."

장난기 다분한 음성이 금새 떨려온다. 윤민아가 황급히 달려가 비틀거리는 김형준을 부축했다.

"아, 나 땀 엄청 났는데."

잔뜩 일그러진 얼굴로 하는 말이 같지도 않아 윤민아가 새침하게 눈을 흘겼다.

"됐어. 씻으면 돼."

윤민아의 말에 김형준이 미안하다 재차 사과하고는 걸음을 옮겼다.

"헉. 헉. 그보다... 헉... 동생은... 헉.. 잘 보고 왔어?"

단지 몇걸음을 옮긴 것으로도 숨이 차는지 김형준이 숨을 몰아쉰다. 윤민아가 건성으로 고개를 끄덕이며 더 이상 말하지 말라 하며 그를 부축해 저 멀리 보이는 집으로 향한다.

"어서 와요! 돈까스 식으면 맛 없어요!"

이제는 완연한 주부가 되어버린 그녀가 평소처럼 그들을 반긴다. 멀리서 손을 흔들며 자신들을 부르는 그녀의 모습에 윤민아가 미소로 화답을 하고는 작게 속삭였다.

"그보다 연아는 아직도 소식 없어?"

그녀의 말에 순간적으로 그의 걸음이 멈췄다가 이내 다시 움직인다.

"아직..."

태연한 안색으로 말하려 하지만 숨길 수 없는 슬픔과 안타까움 분노. 그 복잡한 기색에 윤민아가 황급히 위로했다.

"비맥주님이 수소문하고 있으니 금방 찾을 거야."

그녀의 말에 다소 위안을 얻었는지 그가 잠시 한숨을 내쉬었다가 물었다.

"민아야..."

망설임 가득한 어조. 그녀가 조심스럽게 눈을 마주쳤다.

한때는 찬란하게 빛났지만 이제는 탁하게 변해버린 김형준의 눈동자 너머에 혼란스러

운 기색이 잔뜩 휘몰아친다.

"연아... 정말 우리 딸일까?"

김형준의 말에 그녀가 눈을 크게 떴다.

"그.. 그게 무슨 소리야!"

화를 내는 것도 아니고 부정하는 것도 아닌 애매한 그녀의 대답에 김형준의 얼굴이 다시 일그러졌다.

"아니야..."

그는 힘없이 말을 얼버무렸다. 다시 걸음을 옮기기 시작한 그들은 어느 누구도 입을 열지 않았다.

"우와! 냄새 좋네!"

하지만 아내에게는 걱정을 끼치기 싫었던 탓일까. 김형준이 이내 호들갑을 떨며 아내가 차린 식탁을 칭찬했다.

전지현이 이내 다가와 윤민아로부터 김형준을 건네받았다. 익숙한 동작으로 그를 부축해 의자에 앉힌 그녀가 정성스레 만든 음식을 그의 앞에 내려놓는다.

그 평화로운 풍경을 바라보던 윤민아의 입가가 비틀렸다.

김연아. 김형준의 딸이자 이제는 아홉 살이 되었을 아이가 실종된 것은 꽤나 오랜 시간 전이었다. 실의에 빠진 그들에게 비맥주는 더욱 충격적인 이야기를 해주었는데, 그녀가 찔레가시의 악령 소희에게 빙의됐을 가능성이 높다는 것이었다.

모두가 마지막 전투에서 전사했다 알고 있는 김형준의 생존소식을 그녀가 전해들은 것도 그 무렵이었다.

"연아를 찾아야 해. 하지만 그를 혼자둘 수도 없어."

하루 하루 죽지 못해 살아가고 있던 그녀에게 찾아온 전지현의 말이었다.

대한민국의 안위를 위해서라면 무슨 짓이라도 할 수 있는 비맥의 특성상, 그녀의 딸이 악령에게 빙의됐다 여겨지면 바로 처단할 비맥주였다. 그런 그에게 딸의 행방을 맏길 수만은 없었던 전지현은 결국 스스로 연아를 찾아나설 각오를 했다.

그것이 윤민아가 김형준의 생존소식을 전해 들을 수 있었던 이유이며, 지금처럼 그들

가족만을 위한 만찬에 끼어들 수 있는 여지가 되었다.

한때 윤민아를 포용할 생각까지 했던 전지현이 윤민아를 떠올리고 김형준을 맞긴 것이다. 잠시 과거를 회상하는 사이에 식사는 즐겁게 마무리가 되고, 아내와 윤민아 두 여인의 부축을 받은 김형준이 침대에서 곤히 잠이 든다.

그 날 이후로 소진된 생명력 탓인지 그의 활동시간은 길지 않았다. 차츰 나아지고는 있었지만 아지 정상적인 생활을 하기에는 무리다.

김형준이 완전히 잠든 것을 확인한 전지현이 민아를 불러냈다.

"광주에서 연아와 닮은 사람을 봤다는 사람이 있어. 어쩌면 오늘은 좋은 소식을 가지고 올지도 모르겠어."

주소나 위치, 또는 전화번호 따위가 빼곡히 적힌 메모지를 손에 쥔 그녀가 말했다.

"네. 집은 걱정 마시고 다녀오세요."

하지만 윤민아는 그녀의 저런 낙관적인 이야기를 수도 없이 들었다. 하지만 매번 전지현은 축 처진 어깨로 돌아왔으니 오늘도 큰 기대는 하지 않았다.

"그럼 잘 부탁해. 혹시 중간에 깨거나 하면 저기 약 있고, 식사는 좋아하는 음식들로 준비해둔게 있으니 조리만 해서 내줘."

마치 세살박이 아이를 두고 떠나는 엄마처럼 이런 저런 소리를 하는 그녀의 모습이 진정 철혈의 여인 검후가 맞는지 싶을 정도다. 이미 골백번이나 들어왔던 그녀의 당부를 윤민아는 다시금 새겨 들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다녀올게."

마지막까지 그녀에게 몇마디 당부를 남긴 전지현이 허리춤에 자신의 애검을 감아찼다. 그리고는 몇 번이나 뒤를 돌아보다 집을 나섰다.

어디선가 헤매고 있을 자신의 딸을 찾기 위해. 하지만 헛걸음을 하게 되어도 그녀는 아무렇지도 않은 얼굴로 돌아올 것이다. 지금 그녀가 있어야 할 곳은 대한민국을 구한 영웅이자 자신의 하나뿐인 그의 곁이다.

언젠가 그가 모든 상처를 딛고 일어났을 때, 그의 곁에는 자신과 딸이 함께 하기를 바라고 또 바란다.

피바라기의 이름은 세상에 다시 나타나지 않겠지만, 그의 남편이자 한 아이의 아버지인 김형준은 앞으로 영원할 테니.

============================ 작품 후기 ============================

대망의 엔딩을 내렸습니다. 이 대망이란 단어가 정말로 크게 망했다는 의미로 독자님들에게 인식이 될지, 아니면 다른 식으로 의미가 닿을지 모르겠습니다.

저 스스로도 하지 못한 이야기와 제대로 표현하지 못한 이야기에 아쉬움이 남고 후회가 가득하니 독자님들이 보시기에 이 결말이 얼마나 미진하고 부족하게 느껴질지 감히 상상이 갑니다.

당장이라도 처음부터 다시 쓰고 싶은 마음이 정말 굴뚝 같지만, 1년간 피바라기를 비롯한 글을 연재해오면서 심신이 이루 말할 수 없이 피폐해져서 도저히 엄두가 안 나네요.

그런 탓에 세상을 멸망시키려던 배후세력의 이야기도, 또 여기저기 뿌려진 작고 큰 인연도 이대로 묻어둔채 이야기를 마무리 짓겠습니다.

끝으로 여기까지 함께 해주신 독자님들께 감사의 인사를 드리며 글을 마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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