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에필로그 -- >
천개의 눈동자는 과연 그들이 우려했던 것만큼이나 강대한 존재였다.
베지 못할 것이 없을 듯 했던 아야나미 로유미의 대검은 그저 겉 언저리의 촉수를 베어내는 데 만족해야 했고, 거력이 깃든 아서 팬드래건의 공격 역시 그저 그 거체를 흔드는 것으로 끝이 났다.
메데이아의 흑마법도 헤라클레스의 괴력도 모두 통하지 않았다.
시간이 지날수록 불리해지는 것은 1등급 이능력자들, 초장부터 심력과 힘을 지나칠 정도로 쏟아부은 탓에 급격하게 지친 모습을 보이고 있었다.
김형준 역시 마찬가지였다. 일전에 그렌델을 처리하는데 큰 공을 세웠던 흡혈목은 밑둥부터 부러져나가 몬스터들의 밥이 된지 오래였고, 먼 곳까지 뽑아낸 찔레가시의 덩굴들도 촉수와 부딪쳐 나가 힘의 수급이 원활하지 않았다.
게다가 그의 이능은 흡혈과 생명력을 기반으로 한 위험천만 한 것, 다른 이들보다 전투의 승패에 민감할 수밖에 없었다. 이기는 전투에서는 오히려 큰 힘을 얻을 수 있지만, 한번이라도 패퇴당했다가는 그대로 소멸해버린다.
뱀파이어 진조의 시조가 한 말에 의하면 그의 각성 역시 정도라기보다는 사도에 가까운 것, 이번 전투를 승리하지 못하면 대한민국의 안녕은커녕 스스로의 안위조차 장담할 수 없는 상황이다.
그의 얼굴을 가리고 있던 뿔난 투구가 스르륵 사라졌다. 온몸을 물샐 틈 없이 감싼 채 흉악한 돌기로 촉수를 찔러대던 피의 갑주 역시 이내 천천히 사라져버린다.
힘이 다한 것일까? 아니다. 아직까지 형형하게 빛나는 눈으로 괴수를 노려보는 그는 온몸으로 아직 끝나지 않았음을 표현하고 있었다.
그의 시선이 저 높은 곳을 향해 들렸다.
그리고 아득한 높이에서 자신을 내려다보는 괴수의 돌기, 현지의 모습이 보였다. 어마어마한 공세를 홀로 감당하면서도 평온한 표정을 유지하는 그녀의 얼굴에 가득한 것은 지극한 권태로움.
그 어떤 악의나 살의조차 보이지 않는다.
그것이 더욱 분하고 분한 김형준이다. 한때는 가족처럼 생각했던 현지의 얼굴이 지금은 소름끼치는 시선으로 자신을 비롯한 인간들을 내려다 보고 있었다.
분노가 치솟는다. 저 가증스러운 얼굴로 자신을 기만하고 수 없이 많은 사람들을 학살한 그녀, 이제는 그 얼굴이 진정으로 괴수의 그것인지조차 알 수가 없다.
단지 저 수 많은 촉수들처럼 괴수에게는 그저 거추장스러운 무언가가 아닐까.
그의 속에서 분노가 휘몰아친다. 열화처럼 솟구치는 분노가 커지고 커지다가는 마침내 세상에 현신했다. 사라졌던 피의 갑주가 더욱 거대하고 사나운 모습으로 그를 둘러쌌다.
꺾이고 찢겨진 채, 애처롭게 흘러내려있던 붉은 날개가 떨어져 나가고 그 자리를 대신해 검붉은 피막의 날개가 솟아올랐다.
마치 악마와도 같은 형상을 한 투구에 길다란 뿔이 자라나고, 좁디 좁은 투구 틈 사이로 붉은 안광이 번뜩였다. 지난 루마니아에서 보였던 각성당시와도 비슷한 모습으로 변모한 김형준은 다시금 양손을 모아 힘을 끌어올렸다.
그의 온몸이 외쳤다. 위험하다고. 더 이상 무리하게 생명력을 뽑아 올렸다가는 승리하더라도 성치 않을 것이라고.
하지만 그는 온몸이 내지르는 비명을 무시했다. 혈관이 터졌는지 피가 흘러나온다. 그리고 바로 곁에서 돋아난 흉물스러운 덩굴이 그렇게 터져나온 피조차도 게걸스럽게 빨아들인다.
그는 스스로의 피부가 점점 거칠어지다 나중에는 나무 껍질처럼 퍼석퍼석해지는 것을
느꼈지만 개의치 않았다.
단 한번이면 된다. 스트리고이를 물리쳤던 것처럼 단 한번만 그 강대한 힘을 사역할 수 있으면 된다.
두근. 그때였다. 갑작스럽게 그의 심장이 뛰기 시작했다. 조금씩 빨라지던 박동이 이내 심장을 진동시키듯 울려댄다.
두근. 두근. 두근.
퍼석퍼석하게 말라가던 그의 피부가 이내 다시 윤기를 되찾는다. 그리고 변이를 마쳤던 피바라기가 몸을 부풀리기 시작했다.
날카롭게 돋아났던 돌기가 송곳니처럼 끝을 바짝 세우고, 거기에 더해 흉악한 악마의 뿔이 더욱 기괴한 모습으로 비틀리다 하나로 합쳐지고 합쳐져 종내에는 단 하나의 뿔만이 남았다.
그렇게 돋아난 뿔 끝에 거대한 힘이 뭉치기 시작했다.
김형준은 스스로도 인식하지 못한 사이에 일어난 변화를 인지하기도 전에 괴수를 향해 몸을 날렸다. 촉수가 날아든다. 그의 몸이 비틀린다. 또 다른 촉수가 그를 감아온다. 어깨에 돋아난 날카로운 돌기가 촉수를 짓이겨버린다.
수 없이 많은 촉수가 그를 향해 짓쳐들었지만 그는 때로는 피하고 때로는 산산조각 내며 마침내 괴수의 거체 중에서도 가장 높은 곳에 도달할 수 있었다.
현지의 형상을 한 괴수의 돌기가 그를 향해 손을 뻗는다. 이제까지와는 차원이 다른 압박이 그를 짓누르며 밀어내려 하지만, 심장 어림에서 솟아난 정체불명의 힘이 그를 지탱했다.
김형준이 손을 높이 치켜들었다. 그의 손에 쥐어진 겨우살이 나무의 가지, 미스틸테인이 순식간에 늘어나 저 하늘이라도 꿰뚫을 듯 날카로운 기세를 토해낸다.
'이것이 그대의 라그나로크인가. 그렇다면 망설이지 말아라.'
언젠가 들어봣던 음성, 미노타우르-모노케라스의 음성이 그의 머리를 스쳐갔다.
이현지의 얼굴이 그의 눈에 가득 들어왔다. 심상치 않은 자신의 기세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무표정한 얼굴을 한 그녀가 입술을 달싹였다. 그녀의 입술이 전하려는 것이 무엇
인지 깨달을 새도 없이 그의 손에 쥐어진 미스틸테인이 내쏘아졌다.
새롭게 재건축된 서울의 중심가 광화문에는 전에는 볼 수 없었던 거대한 비석이 들어섰다. 대한민국에서 내노라하는 석공들이 모여 만들어낸 이 아름다운 비석에는 수 없이 많은 이름들이 새겨져 있었다.
'싸울아비 진태식'
'달무리 김수현'
'불꽃놀이 장승일'
'이야기꾼 김상현'
한때는 대한민국에서 모르는 사람이 없을 정도로 이름을 날리던 이들이 이제는 비석에 새겨진 이름으로만 남아 있었다.
세계 최초로 등급 책정 불가의 괴수가 쓰러진 곳은 대한민국이었다. 이미 그 전부터 무수히 많은 1등급 몬스터들을 처단해온 피바라기 김형준이 있는 곳이라 모든 사람들은 엄지를 추켜세우며 '역시'라는 말을 연발했다.
비록 참전한 9421명의 이능력자들 중 불과 282명만이 살아남은 처절한 격전이었지만, 대한민국은 그날 이후로 몬스터의 위협으로부터 완벽하게 안전해졌다.
한때는 유니온이 관리하던 D섹터 어느 순간 비틀림을 토해내지 않았고, 살아남은 이능력자들에 의해 정리되어버렸다.
이제 대한민국은 세계최로로 명실상부한 '몬스터 청정국가'가 된 것이다.
상처뿐인 승리렸지만 사람들은 환호했고, 또 그들이 내지른 기쁨의 함성만큼이나 커다란 슬픔과 애도를 가슴에 묻었다.
그것이 지금 광화문에 위치한 '구국영웅비'였다.
대한민국의 국민은 물론 해외의 유수한 인물들까지 이루 헤아릴 수 없을 정도로 많은 사람들이 이 구국영웅비를 다녀갔다.
누군가는 경외에 찬 눈으로 이 비석을 눈에 담았고, 누군가는 슬픔으로 가득 차 그 비석을 눈에 담아가지 못하기도 했다. 당시의 격전에는 외국에서 지원나온 이능력자들 역시 수가 상당했던 탓이다.
그런 구국영웅비를 바라보던 여인 하나가 고개를 떨궜다. 살짝 치켜올라간 눈매가 평소
라면 사나워보였으련만, 지금처럼 비탄에 찬 표정을 하고 있으니 그 모습이 그렇게 슬퍼보일 수가 없었다.
"병신 같은 새끼."
그녀의 고운 입술이 달싹이며 험악한 욕지거리가 흘러나왔다. 근처에 있던 다른 추모객들이 듣지도 못할 정도로 작은 목소리로 누군가에게 원망을 쏟아냈다.
"지가 뭐라고."
울먹임을 가득 담은 음성으로 한참이나 비석을 쓸어내는 그녀의 모습에 일행으로 보이는 남자가 그녀를 만류했다.
"도연아...."
마찬가지로 비탄을 가듬 머금은 음성으로 김도연을 만류한 거구의 사내, 민용모는 그녀의 손이 몇 번이고 쓸어만지는 비석을 보았다.
'피바라기 김형준. 영국과 그리스, 루마니아에 이어 고국을 구원한 영웅.'
다른 이들과는 다르게 꽤나 큼직하게 적힌 문구에는 그들의 친우이자 구국의 영웅인 김
형준의 이름이 적혀있었다.
민용모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김도연은 한참이나 더 애처롭게 비석의 한 귀퉁이를 쓰다듬었다.
"어?"
그렇게 김도연과 민용모가 김형준을 기리며 슬픔을 삮히고 있는데 바로 곁에서 고운 음성이 들려왔다.
"윤민아?"
민용모가 잠시지만 슬픔도 잊고 눈을 크게 떴다.
"오랜만이에요. 용모씨. 도연씨."
이전에 유니온에 속해있을 때와는 다르게 부드러운 말투를 한 그녀가 차분한 미소로 그에게 인사를 했다.
눈물이 그렁그렁하던 김도연 역시 잠시 슬픔을 뒤로 하고 오랜만에 재회한 그녀를 반겼다.
"이야. 진짜 오랜만이네요."
일전의 그녀는 황룡의 첩자 노릇을 한 그녀가 김형준을 기만한 것에 분노해 그녀를 탐탐치 않아 했지만, 지금의 그녀는 전혀 그런 해 묶은 감정 따위 없는 모습이다. 단지 오랜만에 만난 얼굴이 신기하고 반가운 기색이었다.
"그날 이후로 처음 이죠?"
그날 대한민국이 몬스터로부터 완벽하게 해방이 된 날, 중국의 황룡은 초토화가 되었다. 놀랍게도 황룡은 이능력자의 인체를 비롯한 무수히 많은 인체로 끔찍한 실험을 해왔고, 이를 통해 이능력자의 잠식을 오히려 힘을 이끌어내는 기회로 삼으려고 했다.
중국의 이능력자들이 1등급에 이르러서도 큰 힘을 발휘하지 못한 이유가 거기에 있었다. 자연적으로 탄생한 초인들과는 다르게 인위적으로 만들어낸 초인은 불완전하기만 했다.
안타깝게도 민용모와 김도연은 그렇게 초토화된 황룡의 본거지에서 그녀와 조우했다. 동생을 찾으러 황룡에 들어와 있던 그녀가 황룡의 소속원으로 몰려 곤욕을 치르고 있을 때 민용모가 그녀를 발견한 것이다.
김형준의 이름을 팔아 그녀가 검맥 소속임을 밝히고 사정을 설명하니 다행스럽게도 다른 황룡의 이능력자들처럼 처참한 끝을 맞이 하진 않았지만, 나중에 알고보니 그녀가 그토록 보고싶어하던 황룡의 여동생 역시 인체실험의 희생자로 이미 세상에 없음을 알게되었다.
평생을 이중첩자로 살아오다 간신히 찾은 동생은 인체실험의 대상으로 희생되었고, 마음에 품었던 사내는 괴수와의 결전으로 끝을 맞았다.
이렇게 기구한 팔자의 여인을 어찌 매몰차게 대한단 말인가. 김도연 역시 같은 여자로써 그녀의 기구함을 충분히 이해하고 공감했다.
"민아씨는 여기 무슨 일로... 아... 죄송합니다."
민용모가 반갑게 말을 하다가 이내 끝을 흐렸다. 그녀 역시 이 비석에 새겨진 이름 하나와 관련이 있다는 것을 뒤늦게 떠올린 탓이다.
김형준과 검맥의 배려로 간신히 만난 그녀의 또 다른 여동생은 그녀 모르게 마지막 전투에 참가했다가 전사했다. 정말로 기구한 여인이다.
"죄송하긴요. 오히려 그녀석이 마지막에라도 뜻 깊은 일을 한 것 같아서 저는 만족합니다."
말이야 그렇게 하지만 낯빛이 어두워지는 것까지는 숨길 수 없었던 모양이다. 그녀의 입매가 파르르 떨린다.
"황룡의 첩자로, 유니온의 청소부로 살던 녀석이 마지막으로 이름도 없이 살아가던 동생은 여기 새긴 이름만이 녀석이 살다갔다는 유일한 증거랍니다. 아마 동생도 자랑스러워 할 거에요."
유일한 증거일 뿐만 아니라 마지막 기록이 되어버렸지만, 그녀의 말은 거짓이 아닌 듯 보였다.
한 귀퉁이에 새겨진 이름을 쓰다듬는 그녀의 손길이 처연하다.
"어? 하얀 송곳니 민용모다!"
"옆에 김도연도 있어!"
반가우면서도 씁쓸한 재회를 나누고 있던 그들 사이로 사람들의 음성이 끼어들었다. 모자를 깊게 눌러쓴 민용모와 김도연이 잠시 이야기를 나누는 사이에 그들의 얼굴을 알아본 추모객들이 소란을 떤 것이다.
같이 있다가는 소란에 윤민아 역시 휘말려들까 걱정한 민용모가 그녀에게 눈짓을 보냈
다. 그 사이에 김도연이 모자를 벗고는 자신을 드러냈다.
"5년전 피를 흘린 영령이 깃든 곳입니다. 소란은 자제해주세요."
완곡한 부탁을 하는 그녀의 모습, 모자로 가려져 있던 이마에 커다란 상흔이 새겨져 있다. 당시 참전했던 이능력자들이라면 하나같이 얻어간 격전의 증거다.
그녀의 말에 소란을 떨던 사람들이 금세 진정된다. 그 모습을 대견하게 바라보던 민용모가 뒤늦게 윤민아를 찾았지만 이미 윤민아는 인파 속으로 사라진 후였다.
============================ 작품 후기 ============================
다음 편이 마지막입니다. 함께 해주신 독자님들께 미리 감사의 말씀을 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