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2-7. 최종 결전. -- >
아아아아아아아아아
이제껏 미동도 없던 괴수가 기이한 공명음을 터뜨렸다. 흉물스러운 외모와는 다르게 너무도 맑은 울림을 가진 포효가 온 전장을 진동시켰다.
"크윽."
괴수를 향해 똑바로 솟구쳐 올랐던 1등급 이능력자들이 그 기이한 울림에 신음을 내뱉었다. 온몸이 굳고 정신이 아득해진다. 힘껏 내쏘았던 몸이 허공 중에서 목표를 상실하고는 힘 없이 비행한다. 마치 꿈을 꾸는 듯한 묘한 부유감을 떨쳐내려 이를 악물어보지만, 몸은 여전히 말을 듣지 않는다. 덕분에 아야나미 로유미를 비롯한 1등급 이능력자들은 눈 앞에서 짓쳐드는 거대한 촉수를 멍하니 바라만 보아야 했다.
수십개의 촉수에 격타당한 이능력자들이 몸을 빼낼 틈도 없이 다시 날아든 촉수들이 그대로 그들의 몸을 휘감았다.
"끄아아악!"
어지간한 고통으로는 비명조차 내지르지 않을 1등급 이능력자들이건만, 그들의 입에서 터져 나온 것은 처절한 절규다.
김형준은 이를 악물었다. 어쩐 일인지 자신은 멀쩡했다.
동료들을 무력화시킨 포효도, 거대한 촉수 공격도 어쩐일인지 자신에게는 닿지 않았음을 깨닫고는 그가 사납게 외쳤다.
"무슨 생각이냐!"
눈 앞에서 넘실거리는 거대한 촉수들을 이리 저리 피해 날아오르다 보니 어느사이엔가 괴수를 내려다봐야 하는 곳까지 올라섰다.
일시지간 허공에 멈춰선 그가 온몸을 뒤틀며 정신없이 손을 뻗어댔다. 손짓 하나에 검붉은 줄기가 수천가닥이 생성되고 맞은 손의 움직임에 검붉은 기운이 마구 쏘아져나간다. 다른 이능력자들이 피로 열어준 길을 내달리면서부터 준비한 공격들이다. 마구잡이처
럼 보이지만 찔레가시의 줄기와 검붉은 기운들이 서로를 보완하며 촉수를 잘라내며 괴수를 향해 짓쳐들었다.
거대한 촉수가 떨어져나간다. 그가 잘라낸 촉수 중에는 다른 이들을 휘감고 있던 촉수들도 있었는데 덕분에 촉수의 구속에서 벗어난 1등급 이능력자들이 몸을 추스르며 다시 공세로 돌입한다.
아야나미 로유미의 날카로운 검기가 대기를 찢어발긴다. 아서 팬드래건의 거력이 괴수의 동체를 후려친다. 메데이아의 주변을 감싼 불길한 안개가 괴수의 거체를 휘감고, 다시 또 그 자리에 헤라클레스와 메두사가 사납게 공세를 퍼붓는다.
경천동지할만한 1등급 이능력자들의 공격이다. 귀를 찢을 듯한 파공음과 굉음, 그리고 육안으로 보일 정도로 형상화된 충격파들이 사방을 진동시켰다.
당장 공세를 늦추었다가는 기회가 오지 않을 것처럼, 이능력자들은 미친 듯이 공격을 퍼부었다.
그리고 그들과 손발을 맞추어 전력을 다해 공세를 이어가던 김형준은 문득 멀지 않은 곳에 보이는 거체에 돋아난 돌기가 눈에 들어왔다.
흉물스러운 표피 사이로 돋아난 돌기는 너무도 작고 여려 하마터면 그도 놓칠 뻔 했다.
눈에 힘을 주고 노려보니 그제야 돌기의 정체를 알 수 있었다.
사납게 광풍을 일으키던 몸짓이 일순간 멈추고, 그의 등가에 돋아난 거대한 날개가 의지와는 다르게 완만한 날개짓을 한다. 허공중에 떠올라 있던 몸이 서서히 내려앉으며 이내 돌기와 마주한다.
"현지..."
김형준의 입을 통해 흘러나온 것은 안타까움과 분노, 그리고 형용할 수 없는 감정들이 뒤섞인 한마디.
괴수와 융화되어 이제는 인간이라고 볼 수도 없을 그녀가 그의 작은 읊조림에 대답했다.
"오랜만이야."
너무도 태연한 음성이 마치 오랜 시간을 되돌려 평화로운 그 시절을 떠올리게 한다. 그 아련한 기분에 김형준은 도리어 얼굴을 일그러트렸다.
"왜지? 나한테 세달이라고 했잖아."
그녀를 다시 보게 되면 무슨 말을 해야 할까. 그녀는 천개의 눈동자일까, 아니면 이현지일까.
지난 시간 품어왔던 수 많은 의문이 단숨에 뒤죽박죽이 되어버리며, 간신히 한마디가 흘러 나왔다.
"더 기다릴 이유가 없었으니까."
대꾸를 하는 그녀의 음성이 천연덕스럽다. 너무도 당연한 것을 대답하는 투라 듣고 있던 김형준의 얼굴이 더욱 일그러졌다.
"네가 먼저 꺼낸 약속이야. 굳이 그런 짓을 벌일 필요가 있었어?"
지금도 동료들의 공격은 멈추지 않고 있었다. 1등급 이능력자가 작정하고 펼쳐낸 공격이 만들어낸 어마어마한 충격이 사방을 휩쓸었지만 김형준과 괴수, 아니 이현지는 아무 것도 느껴지지 않고 아무 것도 들리지 않는 다는 듯 자신들의 대화를 이어갔다.
"형준. 여전히 나는 너희를 이해할 수가 없어."
그녀가 모호한 말로 대답을 한다. 그의 의문과는 전혀 상관없는 대답이다. 김형준이 사납게 그녀를 다그치려는데 그녀가 입을 열었다.
"내가 약속한 것은 너희 인간. 인류에게야. 너 하나와 나눈 약속이 아니지."
짤막한 말이지만 그는 단번에 모든 상황을 파악했다.
필립 헨리 셰이던. 며칠 전 서울 주둔지를 습격해던 의문의 무리를 이끌던 이능력자다. 그들의 공격에 맞추어 몬스터들이 강하를 했었다.
"그는 더 이상의 시간이 필요치 않다고 했거든."
추측이 확신이 된다.
"필립 헨리 셰이던..."
분노와 안타까움이 범벅이 된 음성이 그의 잇새로 비어져 나왔다. 다이달로스와 허준영, 그리고 필립 핸리 셰이던. 인간이기를 포기하고 인류를 멸망시키려던 이들이다. 얼마나 큰 이상과 포부를 갖고 있었는지는 그로써는 알 수 없지만, 그들의 독단으로 수를 헤아릴 수 없는 이들이 희생되었다.
분노로 몸이 떨려온다. 죽어간 이들에 대한 비통함으로 이가 악다물어졌다. 자신이 밟
고 지나온 혈로가 새삼 떠올라 발끝이 저릿저릿해질 지경이다.
김형준의 얼굴이 악귀처럼 일그러졌다.
"네 입장에서는 그나 나나 똑같은 인간이겠구나."
하지만 표정과는 다르게 그의 입에서 흘러나온 음성은 차분한 음색이다. 대답할 필요도 없는 것일까. 이현지는 무표정한 얼굴로 미동도 없이 그를 바라보고 있다.
그 비인간적인 모습에 어느 정도 마음이 가라앉은 김형준이 잠시 눈을 감았다 뜨는 것으로 평정을 찾았다.
"대체 이러는 이유가 뭐지?"
내내 그를 괴롭혀오던 의문 하나, 괴수들은 왜 나타나자마자 인간을 공격했을까. 지금 와서 미노타우르스와 천개의 눈동자를 보면 그들은 이성이 있는 존재다.
그들이 택할 방법이 과연 적대행위 하나뿐이었을까.
수많은 고심을 담은 그의 의문이었지만 그녀의 대답은 여전히 간단했다.
"그 자리에 있었으니까."
최초의 조우에서 행한 학살행위를 그녀는 너무도 당연하다는 듯이 일축해버렸다.
간신히 평정을 찾은 김형준의 얼굴이 다시 일그러졌다.
그런가. 단지 그뿐인가. 우리 인간이 발밑의 개미를 굳이 피해 가지 않는 것과 다르지 않구나.
"그리고 오랜 시간 내가 미뤄뒀던 일이기도 하고."
지금과는 비교도 되지 않을 정도로 선인들의 힘이 강했을 시절, 고조선 역시 그녀의 손에 멸망당했다. 하지만 역사는 이어졌고 한민족은 지금까지 살아왔으니 그녀가 완벽하게 성공한 것은 아닐 터였다.
"공존은 힘든가."
무의식중에 내뱉은 말에 놀라 김형준은 하얗게 질려버렸다. 덜덜 떨리는 손으로 자신의 입을 어루 만지는데 이현지가 그 말간 눈동자로 자신을 바라보고 있다.
"내 손에 죽은 인간들만 수백만이야. 그리고 그 수는 앞으로도 늘 테고."
차가운 현실이 그녀의 입을 통해 구체적인 모습을 드러낸다.
"그런데도 너는 나에게 공존을 말 하는 거야?"
김형준은 눈을 질끈 감았다. 그리고는 속으로 수없이 자신을 탓했다.
미쳤구나. 김형준. 이제 와서 뭘 바라는 거냐. 다시 예전으로 돌아가 가족이라는 허울을 둘러쓰고 하하 호호 거리기를 바라는 것이냐.
그렇게 하기에는 너무 먼 길을 와 버렸다. 게다가 그들이 지나온 길에는 수 없이 많은 사람들의 눈물과 피가 가득했다.
스스로도 가당치않은 말을 했다 생각한 그는 온몸에 기운을 돌리기 시작했다.
"결심했어?"
마치 이제껏 그의 결심이 서기를 기다린 듯한 그녀의 말이다. 김형준은 의아함을 느꼈지만 고개를 한번 젓는 것으로 그 의문을 털어버렸다.
"어차피 길은 처음부터 하나였으니까."
잔잔하게 가라앉았던 그의 기운이 다시 폭풍처럼 휘몰아쳤다. 힘없이 늘어져있던 양손이 다시금 치켜올라갔고 그 손끝에 날카로운 기운이 맺히기 시작했다.
"그래. 현명한 생각이야."
그나마 온전하게 인간의 형상을 하고 있던 이현지가 조금씩 괴수의 그것과 닮아간다. 흉물스러운 핏줄이 마치 촉수처럼 자라나 그녀의 전신을 뒤덮고, 보기좋은 빛깔을 하고 있던 피부가 검고 붉고 푸르게 변해버린다.
"어차피 너는 인간, 나는 괴물."
차가운 현실이 그녀의 입을 빌어 흘러나왔다.
"이제 남은 것은 누가 죽느냐겠지."
검붉은 핏줄에 잠식되어가면서 남긴 그녀의 마지막 한마디, 그 말을 끝으로 김형준은 허공으로 날아올랐다.
수백대의 헬리콥터가 허공을 날고 있었다. 저마다 고유의 로고와 심볼을 밖아넣은 헬리콥터들은 위태롭게 자리를 지키고 있었는데, 그들의 바로 아래 펼쳐진 처참한 광경을 화면에 잡느라 필사적이었다.
허공에서 바라본 이능력자들의 전투는 장관이라는 말로도 표현할 수 없을 그런 종류의 것이었다.
수백개로 나뉜 날카로운 창이 몬스터들의 파도를 헤집고, 서로에게 이를 들이댄다. 수백개의 로터음에도 불구하고 그들이 자리한 곳까지 들려오는 비명소리와 고함소리, 그리고 굉음.
전투가 치열함은 두말할 것도 없다. 하늘에서 바라보기에도 수백의 창이 지나간 자리에 남은 것은 붉은 얼룩들 뿐이었으니.
"제발...."
얼굴에 그득 긁힌 상처가 있음에도 고운 느낌의 여인, 이한나가 양손을 모아 간절히 기도했다.
"포격이 끝났어!"
헬리콥터의 파일롯이 비명처럼 소리쳤다. 이따금씩 스쳐가던 포화 덕에 그나마 높은 곳에 자리를 잡고 있던 방송국의 헬리콥터들이 일제히 하강하기 시작했다.
"오. 신이여..."
누군가의 입에서 흘러나온 한마디, 그 한마디보다 지금 그들의 눈에 보이는 광경을 잘 표현한 것은 없다.
눈을 돌리는 곳마다 보이는 곳에 가득한 것은 피와 육편, 그리고 몬스터의 흉물스러운 잔해들이다. 사지 멀쩡한 시체 한구 찾아보기 힘든 그 처참한 흔적에 사람들이 신음을 내뱉었다.
"저쪽으로 가봐요!"
생각이상으로 끔찍한 참상에 넋을 잃고 있던 이들을 일깨우는 가녀린 음성에 파일롯은 헬리콥터의 기수를 돌렸다. 뒤늦게 정신을 차린 헬리콥터들이 이한나가 탄 기체에 따라붙는다.
"아직 싸우고 있어!"
허공에서 볼 때는 미처 알지 못 했다. 수백개의 창날이 모이고 모여 거대한 송곳을 이루었을 때, 또 그 송곳이 미친 듯이 몬스터들의 파도를 헤집고 나아가다가 멈춰선 순간 그들은 이능력자들 중 살아남은 사람이 없을 거라 생각했다.
그만큼 전장에 남은 흔적은 처절하기만 했으니까. 몬스터들이 흉성을 터트리며 이능력자들의 시체를 뜯고 있는 모습을 지나쳐 그들이 도달한 자리에는 수백에 달하는 이능력자들이 아직도 사투를 벌이고 있었다.
"살아남은 사람들이 있어!"
이한나가 다급하게 외치며 헬리콥터의 고도를 더욱 낮출 것을 요구하는데 거대한 섬광 하나가 그들이 탄 기체를 스쳐간다.
파일롯이 비명을 내지르며 헬리콥터의 고도를 올리고, 이를 따라 다른 방송국의 헬리콥터들도 고도를 올린다.
"구해야돼!"
카메라가 돌아가는 생중계, 하지만 이한나는 그조차도 잊었는지 파일롯에게 구조하자
외친다.
"더 이상 내려갔다가는 위험합니다!"
안 그래도 촬영을 위해 필요 이상으로 낮은 고도를 유지하던 타 방송국의 헬리콥터 한 대가 몬스터들의 손에 붙들려 추락해버렸다. 인간으로썬 상상도 할 수 없을 정도로 높이 뛰어오른 용아병의 짓이다.
이한나가 눈물을 내쏟으며 입술을 잘근 잘근 씹었다.
"아..."
그녀가 발만 동동 구르는 그 시간에도 이능력자들은 피를 흩뿌리며 쓰러지고 있었다. 안타까운 마음에 눈이라도 질끈 감고 싶지만 그녀는 눈물이 그렁그렁한 눈을 도리어 부릎떴다.
고작 오백여명이나 될까. 눈부신 활약을 하는 여인 하나를 의지한 채 이능력자들은 힘겹게 전투를 이어나가고 있었는데, 도저히 돌파구를 찾지 못해 서서히 고사하는 상황이었다.
이한나의 시선이 저 너머로 옮겨갔다.
검붉은 안개가 가려버린 저 너머, 굉음과 막대한 에너지의 파동이 끊이지 않고 터져 나오는 곳이다.
"제발..."
그녀는 두 손을 모아 기도했다. 지금 이 순간에도 생과 사를 넘다들며 괴수와 사투를 벌이고 있을 1등급 이능력자들의 성공과 생환을 바라고 또 바랐다.
그리고 그 바람이 이루어진 것인가. 전장의 한 귀퉁이를 완전히 가리고 있던 검붉은 안개가 산산히 흩어지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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