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피바라기-217화 (217/223)

< --  2-7. 최종 결전.  -- >

크레이터의 중심에서 오롯이 서 있던 김형준이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모두가 방금 전의 엄청난 충격에 다이달로스가 형체조차 남기지 못하고 소멸한 것은 아닐까 기대를 해봤지만, 그저 바람일뿐이다.

방금 전까지 김형준이 서 있던 공간에 흐릿한 형체가 어른거리다가 이내 형상을 갖췄다. 검후와의 접전 이전에 보였던 왜소한 노인의 모습을 한 다이달로스였다.

"예상치 못했던 건 아니지만, 역시나 모습을 드러냈구나."

다이달로스가 혀를 차며 말하는데 이미 진즉부터 상황이 이리 변할 것을 예상하고 있었던 듯한 모습이다.

"하긴 지금의 너희들은 저 광활한 우주에도 눈을 심어두었다지. 하늘보다 더 높은 곳에서 내려다보는 눈을 어찌 피할까."

인공위성을 말하는 것일까. 다이달로스의 말에 조금은 경의가 담겨 있었다. 그저 본신의 이능과 힘만이 전부였던 그의 시대와는 다르게 지금은 과학이라는 것이 어마어마하게 발전해버렸다.

몬스터와 이능력자들에게 대부분이 무력하다 하지만 현대의 기술 수준은 그들에게도 위협적인 것, 다만 그들이 미리 손을 써 위협적인 상황을 만들지 않을 뿐이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최첨단 감시장비로 인한 노출이 달갑지는 않은 것인지 다이달로스가 허공을 노려보며 이를 갈았다.

"시간이 지나면 지워버려야 할 것들. 인간이 손을 대서는 안 되는 영역이야."

그 한마디를 통해 만약 이능력자들이 다이달로스와 괴수들의 난동을 막아내지 못한다면 문명이 쇠퇴할 것임이 자명해졌다. 그것도 그가 바라는 것이 완전한 인류의 말살이 아닌 지배였을 경우에만 한하는 것이지만.

한참 떠들어대던 다이달로스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자신의 존재감이 적지 않을텐데 김형준이 완벽하게 자신을 무시하고 있었던 탓이다.

"놈..."

광폭하게 기세를 올려보지만 김형준은 여전히 그를 돌아보지 않았다. 투구 속에서 차가운 눈빛을 흘리며 걸음을 옮겼을 뿐이다.

"미안해요. 늦어버렸어요."

전지현의 앞에 당도한 그가 낮은 목소리로 사과했다.

전신이 피투성이가 되어 꼴이 말이 아니었지만 전지현은 그가 눈앞에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안도가 되는 것인지 해사하게 웃어보였다. 상황에 맞지 않는 미소였지만 만신창이가 된 자신을 보고 걱정이 태산일 그를 위해 지어보인 웃음이다.

"볼일은 다 끝나셨는지요."

평소의 그녀를 돌이켜보면 산발을 한 머리와 넝마가 된 꼴을 부끄러워할만도 하건만 그녀는 개의치 않았다. 역시 그의 아내이자 한 아이의 어미 이전에 그녀는 수백년 수련을 쌓아온 검수다.

만신창이가 된 꼴을 하고도 검을 쥔 손은 굳건했고, 그를 바라보는 눈빛은 별빛과도 같은 빛을 잃지 않았다.

"보안 때문에 미리 얘기하지 못 했어요. 미국 쪽에서 이미 괴수를 몰이 해놓은 상태라 짧은 시간이지만 꽤 큰 성과를 얻었습니다."

그의 말에 섭섭할만도 하건만 그녀는 여전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을 뿐이다.

"감히 나를 상대로 등을 돌리는가!"

그때 터져나온 광폭한 기세, 다이달로스가 특유의 어두운 기운을 폭사시켰다.

아무래도 김형준이 자신을 안중에도 두지 않자 기분이 상한 모양이다. 순간 사방을 에워싸오는 불길한 기운을 느낀 김형준이 슬며시 몸을 비틀었다.

자신의 아내를 바라보던 따스한 빛따위는 이미 온데간데 없이 투구 속에서 차가운 광망이 번뜩였다.

"그렇게 보채지 않아도 상대해 줄 테니, 입 닥쳐."

한명의 검수로 그녀를 인정한 탓에 내색치 않으려 했지만 아내의 처참한 몰골에 몹시 상심한 그였다. 그런게 그 원흉이 도리어 성을 내고 있으니 그가 분노하지 않을 길이 없었다.

일순간 그를 중심으로 돋아나기 시작한 검붉은 덩굴이 순식간에 사방 몇백미터를 가득 채웠다. 이제는 그의 트레이드마크가 된 찔레가시의 숲이다.

"하찮구나. 이깟 것이 뭐라고..."

다이달로스는 자신의 하반신을 잡아채는 덩굴을 바라보며 콧방귀를 꼈다. 이깟 덩굴들 따위 한번 몸을 털면 그만이라 생각한 그가 몸을 빼내려다 그대로 굳어버렸다.

예상과는 다르게 힘을 쏟아부어도 몸을 빼낼 수 없었던 탓이다. 그저 김형준이 다수의 몬스터를 상대할 때 사용하던 흡혈의 줄기라 생각했던 그가 이를 악물었다.

"니가 떠들지 않아도 네놈의 끝은 이미 정해졌어."

김형준이 차갑게 한마디를 내뱉고는 고개를 돌렸다. 자랑스럽다는 표정으로 자신을 바라보는 아내에게 향한 그의 눈빛이 한없이 따뜻하다.

"고생했어요. 이제는 제가 맡을게요."

그의 말에 그녀가 완강히 고개를 저었다.

"아닙니다. 이제야말로 제대로 해볼 생각입니다. 부디 무인으로써 저를 존중한다면 기회를 빼앗지 마소서."

그 단호한 말에 김형준이 다시 그녀의 몸을 훑어보는데 전신에 빼곡하니 상처가 없는 곳이 없었다. 처참한 꼴에 다시 다이달로스에 대한 분노가 치밀어 오르는 것도 오르는 것이지만 염려가 앞섰다.

이미 한번 패퇴당하다 시피한 그녀다. 이제 와서 재도전을 한다고 달라질 것이 없다 생각한 그가 고개를 저으며 그녀를 만류하려는데 그녀의 기세가 돌변했다.

"이미 검자루를 버렸습니다. 헤아려 주소서."

피투성이가 되어서도 여전히 맑고 웅혼한 기운을 품은 그녀의 기세에 김형준이 잠시 망설였다. 다른 이였다면 기회를 주었겠지만 그녀는 자신의 아내다. 그녀에게 무슨 일이 생긴다면 도저히 살아갈 자신이 없었다.

"전장의 장수는 제게 맞지 않는 직책이었나봅니다."

그녀가 은연중에 자신이 전력을 다하지 못했음을 표현했다. 그저 자존심이 상해 내던진 아집인가 하여 그녀를 바라보니 그녀의 눈은 흔들림이 없었다.

한참이나 그녀의 눈을 바라보던 김형준이 결국 물러섰다.

"조심해요. 힘을 다하지 못한 건 저쪽도 마찬가지 같으니까."

걱정이야 태산이지만 수백년을 무인으로 갈고닦아온 그녀의 의지를 꺽지 못한 김형준이 그저 조심할 것을 당부하며 몸을 돌렸다.

그의 뒤편에서 날카로운 기세가 솟구치며 천지를 진동시키는데, 때마침 자신이 펼쳐낸 찔레가시의 줄기에서 벗어난 다이달로스가 흉성을 돋운다.

"어디 그 오만함만큼이나 능력이 되는지 봐야 직성이 풀리겠구나!"

방금 전과는 다르게 몸을 부풀린다든지 그 어떤 징후도 없이 다이달로스가 김형준을 향해 달려들었다. 흉악한 표정으로 자신에게 양 손을 내뻗는 다이달로스의 모습에 그가 잠시 전지현에게 시선을 두었다.

그를 믿는 것인지 높이 치솟았던 기세를 갈무리하며 스스로를 정비하는 그녀의 모습에 김형준이 고개를 저었다.

역시, 이대로는 좀 불안하다.

생각이 끝남과 동시에 그의 모습이 그대로 사라졌다. 그리고 다시 나타난 것은 다이달로스의 등 뒤, 당황하여 몸을 돌리는 다이달로스의 표정을 보며, 김형준은 투구 속에서 차갑게 웃었다.

"방금 전 공격에서 멀쩡한 것도 잠시 몸을 피하는 재주가 있어서였다지."

이미 그에 대해 파악을 한 것인지 김형준이 냉정한 음성으로 중얼거렸다. 방금 전 자신의 공격에서 멀쩡하게 살아남은 다이달로스, 허상처럼 허공에서 나타난 그를 보며 진즉에 그의 능력을 파악한 그였다.

또한 다이달로스는 모르겠지만, 김형준은 모종의 루트를 통해 다이달로스를 비롯한 세계격변의 원흉들에 대한 정보가 들어온 상태였고.

"원래는 사지를 끊고 고통 속에서 죽는 모습을 봐야 직성이 풀리겠으나, 그녀가 원치 않으니 그대의 종말은 내 손을 떠났다."

이미 몸을 돌리고 자신을 향해 보랏빛으로 빛나는 손톱을 들이미는 다이달로스의 모습을 보며 김형준이 으르렁거리듯 말했다. 그 사소한 위협에 왠지 한기가 돋은 다이달로스였지만 막상 김형준이 내뻗은 손에서 튀어나온 꽃송이가 몸에 닿았음에도 별 일이 없자 다시 흉성을 터트렸다.

오랜시간을 세상을 눈 아래로 보며 군림해오던 자신이 지레 겁을 먹었음에 화가 난 모양이었다. 양손에 날카롭게 뻗어낸 손톱을 뻗어내가는데 등 뒤에서 한줄기 서늘한 예기가 느껴졌다.

심상치 않은 느낌에 몸을 돌리니 한자루 검이 눈 가득 들어왔다.

"이제 제대로 놀아보자꾸나."

가까스로 손톱을 내뻗어 검을 막아낸 다이달로스에게 전지현이 말했다. 그리고 시작된 그녀의 춤사위.

너울거리며 움직이는 동작 하나 하나가 우아하고 아름다웠지만 그 안에 담긴 기운은 세상 그 어떤 기운보다 파괴적인 것, 다이달로스가 허투루 그녀를 대하지 못하고 숨겨둔 힘을 이끌어낸다.

그를 중심으로 수십미터 높이의 벽이 치솟으며 기하학적인 구조로 영역을 넓혔다.

"이게 그의 능력인가."

이미 미노타우르-모노케라스를 통해 그가 라리빈토스를 설계한 것을 알고 있던 김형준이 잠시지만 감탄하며 갑작스레 솟아난 구조물을 바라보았다.

어마어마한 기운의 파동이 끊임없이 그 중심에서 터져 나오는 것을 느낀 그가 조금은 걱정스러운 눈빛으로 구조물을 바라보다 고개를 돌렸다.

이제는 그녀의 싸움이다. 염려스러운 마음에 발길이 떨어지지 않지만 혹시 몰라 수를 써두었으다. 나중에 그녀가 알면 화를 낼 수도 있겠지만 그녀를 잃는 것보다는 낫다고

생각한 그가 애써 신경을 쓰지 않으려 한다.

그제야 눈 앞에 펼쳐진 전장의 모습이 그의 눈에 들어왔다. 사방 어디를 보아도 넘쳐나는 것은 선홍색과 녹색의 선혈로 수놓아진 처참한 모습이다.

새삼 다시 분노가 솟구친 그가 양손을 넓게 펼쳤다. 그리고 뻗어나가기 시작한 수백 수천 수만의 줄기들, 세상 모두가 말하기를 집단전에서 최강이라고 손꼽는 그의 주특기 찔레가시의 숲이 펼쳐진다.

탐욕스러운 줄기가 흉물스럽게 이를 드러내며 저 너머에서 자신들을 향해 눈을 번뜩이는 몬스터들을 향했다.

전투기가 허공을 가득 매우며 아직도 강하를 멈추지 않는 몬스터들을 요격한다. 원래대로라면 큰 타격이 없어야 할 몬스터들이 어쩐 일인지 그대로 불길에 휩싸여 사라져버린다.

그리고 시작된 포성과 화염이 화면을 뒤흔든다.'국민 여러분!'

격앙된 기색을 숨기지 않고 떠들어대는 이한나 음성이 스피커 너머까지 그 절절한 감정을 전해온다.

'주둔지를 습격한 의문의 무리는 이미 무력화되었고, 몬스터들 역시 빠르게 정리되어 가고 있습니다! 사방 어디를 보아도 이능력자들의 압도적인 우위가 보입니다!'

화면에 비친 이능력자들의 전투는 일전의 팽팽했던, 또는 처절했던 모습과는 달랐다. 아까 전까지만 해도 보이지 않던 몇몇 이능력자들이 압도적인 힘을 선보이며 몬스터며 습격자들을 정리해나가는데 그 힘이 김형준이나 전지현에 못지않아 보였다.

지금 화면을 보고 있는 사람들은 모르겠지만, 김형준과 함께 원정길에 올랐던 1등급 이능력자들이 전원 전투에 참가한 것이었는데 과연 그 이름이 헛되지 않을 정도의 활약을 보여주고 있었다.

그 중에서도 가장 압도적인 것은 등급에 상관없이 수백의 몬스터들을 찔레가시로 고사시켜버린 김형준이다. 사람들이 그토록 마지 않던 영웅적인 모습의 그와 극적인 반전에 모두가 열광했다.

게다가 이제껏 별다른 활약이 없던 대한민국군이 작정이라도 한 듯 포화를 쏟아 부었다. 전투기가 불을 뿜고 보이지 않는 포대에서 쏘아올린 포탄이 전장의 한켠을 초토화

시켰다.

'피바라깁니다! 피바라기! 여러분 피바라기와 이능력자들이 다시 한 번 해냈습니다!'

이제는 자신이 무슨 말을 하는지도 모르고 열광적으로 중개를 하는 이한나의 음성에 사람들이 함성을 내질렀다. 전투는 아직도 끝나지 않았건만 대한민국의 전 국토가 기쁨의 함성에 진동한다.

그렇게 사람들이 승리를 확신하고 함성을 내지르는 사이 전투는 끝이 나 간다. 흉악한 포효를 내지르던 몬스터들의 모습도 이제는 보이지 않고, 간간히 저항하던 습격자들도 죄다 제압되어 한곳에 모아진다.

다이달로스가 만들어낸 구조물만이 굳건하게 전장의 중앙을 지키고 있었지만, 격렬한 파동으로 보아 전투의 끝이 길지 않았음을 알려준다.

승리.

모두가 승리라는 단어를 떠올렸지만, 격전에 지치고 피드백에 시달리는 이능력자들의 모습에 환호하던 사람들은 다시 침묵했다. 그 어디에도 그들이 생각하던 승리자의 모습은 없었으며 단지 처참한 전투의 증거만이 보일 뿐이었다.

그리고 결국 다이달로스가 만든 거대한 구조물이 굉음과 함께 붕괴하며 검후라 불리는 여인이 나타나는 것으로 전투는 종결되었다.

상처투성이인 승리였지만 대한민국 이능력자들은 승리했다.

============================ 작품 후기 ============================완결까지 몇편 안 남았는데 왜 이리 힘든 걸까요. 지친 마음을 다잡고 한편 써 올립니다.

완결까지 이제 5편.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