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피바라기-213화 (213/223)

< --  2-7. 최종 결전.  -- >

아무런 징후도 없이 갑작스레 내리꽂힌 괴물체는 서서히 몸을 일으켰다. 단단하고 거대한 체구를 천천히 일으킨 괴물체가 잠시 어리둥절한 기색으로 주변을 살펴보다가, 이능력자들을 발견하고는 포효했다.

여덟 개의 팔과 다리를 가진 거대한 몬스터의 사나운 포효에 주변에서 난전을 벌이던 이능력자들이 황급히 떨어져 나갔다.

"용아병?"

누군가가 의문섞인 한마디를 내뱉었다. 이곳은 D섹터도 아니었고, 그렇다고 괴수의 권역인 안개 속도 아니었다. 괴수의 선언 이후로 전부 물러난 몬스터들일진데, 이 곳에 뜬금없이 용아병이 나타났다.

대한민국의 이능력자들이 상황파악을 채 하기도 전에 또다른 굉음과 함께, 무언가가 날아들었다.

하나, 둘, 열, 백.

처음에는 그들의 주변에만 떨어져 내리던 몬스터들이 어느 순간부터 후방에 위치한 주둔지 내부를 향해 내리 꽃혔다. 수도 점차 늘어 나중에는 헤아릴 수 없는 몬스터들이 허공에서 떨어져내렸다.

용아병이나 다른 고등급의 몬스터들이야 자리를 털고 일어났지만, 낙하시의 충격을 견디지 못하고 그대로 전신이 으스러져 절명한 몬스터들도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대지를 딛고 일어서는 몬스터들의 수는 늘어만 갔으니, 서울 경계선에 위치한 모든 곳이 금세 소란스러워지며 사이렌소리를 내뱉었다.

"이게 무슨..."

전지현 역시 끊이지 않고 흐르던 검격을 멈추고는 허공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녀가 바라보는 순간에도 소리 없이 허공을 유영해 대지에 내리꽂히는 몬스터들의 수가 점차 늘고 있었다.

스윽.

멍하니 하늘을 올려보고 있던 그녀는 갑작스러운 살기에 몸을 황급히 틀며 물러섰다. 허겁지겁 물러나 몸을 내려보니 언제 배었는지 옆구리가 날카로운 무언가에 베여 피를 울컥거리고 있었다.

고개를 든 그녀가 정면을 노려봤다.

그곳엔 언제 나타났는지 모를 사내가 음흉한 미소를 짓고 있었다. 처음 그녀를 도발했던 사내였다.

"조금 더 손맛을 느꼈으면 좋았을 텐데, 좀 아쉽군."

느물거리는 말투로 그녀를 응시하는 사내의 눈동자가 마치 뱀의 그것처럼 번들거렸다. 전지현은 한손으로 상처를 내리누른 채, 사내에게 일갈했다.

"어차피 법도를 기대한 것은 아니었으나, 치졸함이 끝도 없구나!"

그녀의 호된 꾸지람에도 사내의 미소는 더욱 짙어질 뿐이었다. 발끈하려던 전지현은 미소 뒤에 숨겨진 스산함을 발견하고는 마음을 가라앉혔다.

갑작스러운 기습이었다고 하나 자신의 이목을 피해 공격을 성공시킨 사내다. 만만히 볼 수 없는 상대인데다가 하필이면 자신은 모든 이능력자들을 지휘하는 입장이다. 평소라면 김수현을 비롯한 유능한 이들에게 지휘를 맡기고 전투에 전념했을 테지만 지금은 상황이 좋지 않았다. 용아병을 비롯한 각종 몬스터들이 이능력자들의 진지에 나타

나 가뜩이나 혼전이었던 전투가 아비규환으로 치닫을 기미가 보였다.

눈앞의 상대에게만 매달려 있을 수도 없는 최악의 상황이다.

그 모든 불리한 상황 속에서도 전지현은 마음을 가라앉혔다. 전장의 상황도, 눈앞의 사내도 어느 하나 허투루 볼만한 것이 없었다. 섣부르게 움직였다가는 오히려 당하는 것은 이쪽이다.

넘실거리며 그녀의 몸 주변을 휘감던 기세가 조금씩 옅어지다가 이내 전부 갈무리된다.

그 모습을 바라보고 있던 사내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이런 저런 상황을 연달아 터트려 그녀를 흔들어볼 요량이었는지 얼굴에 아쉬움이 가득했다.

그 표정이 너무나도 노골적이라 전지현은 마음속에 세운 칼날을 더욱 날카롭게 세웠다. 어쩐지 무시당한 느낌이랄까.

전과는 다르게 요란하지 않은 기세가 끈적끈적하게 사내를 압박했다.

"대한민국에는 김형준 빼고는 다 쭉정이라더니. 정보부가 또 실수했군. 도대체가 돈값을 못 하는 이들이라니까."

얼핏 자신들이 정보부까지 갖춘 거대한 조직임을 내비친 사내에게 전지현이 냉랭하게 쏘아붙였다.

"그분이 자리를 비운 것을 알고 들이친 게로구나! 비겁한 놈들!"

감정적으로 흥분했다기보다는 지엄한 꾸중과도 같은 말투였다. 사내는 그 말에 피식 웃음을 지었다.

"내가 가장 강할 때, 상대가 가장 약할 때. 전투에 가장 좋은 적기지. 기본적인 교리 가지고 지루한 언쟁하고 싶은 생각은 없는데."

그 이죽거림에 전지현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의 입장에서는 시간을 끌다보면 다른 이들의 조력이 더해질 수도 있는 상황이었다. 그런 이유로 그들이 처음 나타났을 당시 성격에도 맞지 않게 말을 늘였던 것인데, 이제 와서는 전부 무소용이다. 아니, 오히려 갑작스레 난입한 몬스터들을 맞아 고전하는 대한민국의 이능력자들을 감안하면 그녀야말로 시간이 촉박했다.

한시라도 빠르게 사내를 제압하고 전장을 정리해야 했다.

전지현이 자신의 애검을 곧추세웠다. 상황은 위급하지만 그녀의 기세는 평온하다. 끈적

끈적하게 상대를 압박하는 기운조차도 소란스럽다기보다는 장중하다는 느낌이다.

수백년 수련이 지금 빛을 발한다.

"쉽게는 넘어오지 않는군. 그렇다면 부숴주지. 그 도도한 얼굴을 엉만진창으로 만드는 것도 또 다른 즐거움일 테니."

그렇게 말한 사내의 몸이 흐릿해진다. 마치 잔상처럼 희미하게 일렁이던 그의 모습이 이내 사라져버렸다. 과연 그런 능력이었던가.

사내의 첫 공격에 자신이 속수무책으로 당했다 싶었더니, 아무래도 암살에 관련된 쪽으로 특화된 능력자인 듯 했다.

그녀가 조심스럽게 눈을 감았다. 눈으로 잡아 낼 수 없는 사내이니 기감을 통해 그를 잡을 생각이었다. 수천에 달하는 기운이 어지럽게 흩어져서 명멸하고 있다. 혼탁한 몬스터의 기운과 사나운 이능력자들의 투지가 사방에서 소용돌이 치듯 휘몰아치는데, 점차 그 기운들이 사라져간다.

전장에 가득한 몬스터의 포효도, 귀청을 찢을 듯한 폭음과 고함소리도 이내 사라져버렸다. 그리고 마침내 완벽한 침묵이 되어버린 세상 속에서 그녀는 한줄기 희미한 기운을 추적했다.

잡힐 듯 잡히지 않는 은밀한 기척의 흔적을 따라가던 그녀의 기감이 결국은 목표물을 찾고야 말았다.

그녀의 감겼던 눈이 번쩍 뜨이며 오른손에 감아쥔 애검이 섬광처럼 휘둘렸다. 대기를 찢어발기는 굉음과 함께 그녀 앞의 공간이 그대로 갈라져버렸다. 믿을 수 없게도 공간 자체를 베어낸 듯한 그녀의 일격에 세상이 그대로 갈라지고, 허공에서 뿌연 잔상이 드러났다. 완벽하게 양단이 되어버린 모습의 사내, 허무하다 싶을 정도로 무력한 죽음이다. 알게 모르게 그녀를 주시하고 있던 이능력자들의 환호가 터져나왔지만 그녀의 표정은 도리어 심각해졌다.

저것 또한 허상에 불과하다.

그녀의 검이 그리 말하고 있었다. 그녀는 다시 눈을 감고 사내를 찾으려다가 번쩍 눈을

떴다. 기감에 잡힌 상대가 한둘이 아니었다. 갑작스러운 적의 난입인가 했지만, 그렇다고 보기엔 사내의 은밀한 기운과 너무도 닮은 기운들이었다.

하나, 둘, 셋.

순식간에 수십으로 갈라진 기운이 시간차를 두고 그녀를 향해 달려든다. 아무래도 기감이 발달한 동방의 이능력자들을 상대하기 위해 마련한 한 수 같았는데, 상대가 좋지를 않았다.

전지현의 입가에 더없이 진한 미소가 지어졌다. 입가에 매달린 곡선은 평소 그녀가 짓던 자애로운 미소도, 김형준에게만 보이던 수줍은 느낌의 그것이 아니었다.

"잔재주를 부리지만, 뭐 상관없으리라."

서릿발처럼 차가운 그녀의 나직한 한마디, 이윽고 그녀의 검이 검집으로 들어갔다.

"전부 부숴버리면 그만일 테니."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검이 다시 뽑혀드는데 기이하게도 아무리 뽑아도 검 날이 끝도 없이 뽑혀져 나온다. 원래의 검날이 지닌 길이인 1.6미터를 넘어 2미터 4미터 10미터...

끝도 없이 검집에서 뽑혀져 나오던 검날이 마치 채찍처럼 사방을 휘어감았다. 그녀 주변에 가득찬 희뿌연 검날이 마침내 사방 수백미터를 에워쌌을 때, 검집에서 뽑혀 나오던 검봉이 모습을 드러냈다.

"압(壓)"

나직한 한마디와 동시에 사방을 둘러싸고 있던 검날이 갑자기 요동을 치며, 조여들었다. 마치 뱀의 움직임과도 닮은 그 소란스러움이 기괴한 소음을 내며 무섭게 공간을 찢어발겼다.

건물의 잔해나 바위따위, 그리고 운이 나쁜 몇몇 몬스터들이 그대로 그 검날에 베어져버린다. 그러고도 기세를 줄이지 않은 희뿌연 검날이 점점 좁혀지고 좁혀져 마침내 십여미터의 지름을 가진 원을 남기고 있다.

그녀의 입가에 더욱 차가운 미소가 떠올랐다. 기감에 걸린 상대의 기운만 해도 수십이 사라져버렸다. 실체는 아니었겠지만, 이제 남은 기운이 두엇밖에 없으니 그대로 분쇄해버리면 될 것이다.

이제껏 뱀처럼 요란스럽게 옥죄어가던 검날이 갑작스레 사라졌다. 이를 대신하여 나타난 것은 공간의 균열, 마치 가슴어름을 기준으로 세상을 위와 아래로 분리시켜버린 듯한 광경이 벌어진다.

털썩.

그리고 그 균열의 중심에서 사내가 모습을 드러냈다. 어떻게 몸을 피한 것인지 한쪽 어깨가 그대로 잘려져 나가 분수처럼 피를 울컥대는 사내가 바닥에 무릎을 꿇었다.

고통보다는 불신에 가득찬 빛을 띈 눈으로 사내가 그녀를 바라보았다.

어떻게?

라고 묻는듯한 그 표정에 그녀가 차갑게 말했다.

"그대는 모르겠지만, 이 나라는 한시도 조용한 적이 없었지. 이깟 잔기술따위 동방의 암살자들이 수백번은 써먹는 수법이니."

그녀의 대답에도 사내는 여전히 현실을 받아들이기 힘든 모양이었다.

"하지만!"

그녀가 다시 그의 말을 막는다.

"그만! 그대와 내가 나눌 것은 입으로 하는 대화가 아닐지니!"

서슬이 퍼런 그녀의 검이 다시금 하늘로 치켜 올라갔다. 하지만 당장이라도 내려쳐질 것만 같았던 그녀의 검은 이내 다시 거두어졌다.

"이제야 실체를 보게 되는군."

그녀가 차갑게 말했다.

"이런 쓸모없는 인간을 위해 나선 것은 아니지만, 나도 그쪽에 원한이 있지."

정체불명의 사내의 습격, 몬스터의 난입, 그리고 이번에는 또 다른 존재가 전장에 나타났다. 급변하는 전장의 흐름 속에서 전지현이 전에 없이 긴장한 표정을 지었다.

몇 번인가 봤던 노인의 모습, 그리스에서도 보았고 루마니아에서도 보았다. 단지 그때와 지금의 노인이 뿜어내는 기운이 너무나도 다를 뿐, 그들은 애초부터 같은 존재임을 그녀도 알고 있었다.

"아바타 없이 현신해보기는 정말 오랜만이로구나."

허공중에서 갑자기 모습을 드러낸 인물, 다이달로스가 감회가 새롭다는 듯이 지껄이는

모습을 바라보며 전지현이 자신의 애검을 양손으로 잡았다.

"이제 우리 사이에 남은 이야기를 해야지?"

비록 아바타였지만 루마니아에서 끝도 없는 고통을 당했던 다이달로스의 눈가에 광폭한 기운이 일렁였다.

============================ 작품 후기 ============================죄송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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