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피바라기-212화 (212/223)

< --  2-7. 최종 결전.  -- >

대번에 그녀를 둘러싼 공기가 얼어붙을 듯 차가워졌다.

"상대할 가치도 없는 자들이로다. 모리배들이 힘을 얻었으니, 세상에 얼마나 패악을 끼칠지 실로 걱정스럽도다."

그녀가 추상같은 위엄으로 그들을 꾸짖었다. 그녀는 원래 모욕을 인내할 정도로 유한 성격이 아니다. 다만 이룬 경지가 워낙에 높다보니 자연스럽게 사소한 도발에는 금세 평정심을 찾았을 뿐이다.

게다가 지금 같은 경우에는 상대에게 느껴지는 힘이 지나치게 강했다. 개개인이야 그녀 스스로가 감당치 못할 상대를 찾아볼 수 없었지만, 그녀 개인의 강함이 전투의 승패를 판가름할 수는 없었다.

혼자 모두를 감당할 수 없다면 후에 다가올 천개의 눈동자와의 전투를 대비해 전력을 보존해야 했다. 만약 지금의 상황을 제대로 타개하지 못해 전력에 구멍이라도 생기면, 김형준을 비롯한 이들이 돌아왔을 때 무슨 낯으로 그들을 본단 말인가.

괴수와의 전투를 주도하는 것은 1등급 이능력자들이지만, 그들이 괴수에 닿기까지 길을 열어줄 이들이야말로 바로 이곳에 모인 이능력자들이다.

지현이 내심 상대방의 전력을 가늠하고 대비책을 찾고 있는데, 그녀를 도발했던 사내가 한걸음 더 앞으로 나왔다.

"천하의 소드엠프레스 답지 않게 뭘 그리 머리를 굴리시나. 이제 보니 검보다는 머리가 자랑이신가 보군. 아니 내가 생각하기엔 그 몸뚱이야말로 자랑스러워해도 될 만하지만."

그 노골적인 모욕에 자리에 모인 이능력자들의 투기가 금세 날카로워졌다. 전지현은 등뒤로 느껴지는 그들의 분노에 한손을 들어 제지하려 했지만, 이름 모를 이능력자의 말에 막히고 말았다.

"검후께서는 더 이상 참지 마십시오. 만약 전력의 보존을 생각해 참는 것이라면 말씀 드리겠습니다. 저희는 저런 듣도 보도 못한 놈들에게 당할 정도로 약하지 않습니다."

그녀의 내심을 짐작한 듯한 대한민국 이능력자의 말이다. 그녀가 저도 모르게 흠칫 놀라 뒤편을 바라보니 모두의 얼굴에 떠오른 표정이 한결 같았다. 앞날에 대한 두려움과 염려보다는 분노와 투지가 가득한 얼굴.

"어차피 어디서 굴러먹던 놈들인지 모르겠지만, 험하게 구른 걸로 치면 우리나라만한 곳이 있겠습니까?"

김수현이 고운 미소와 어울리지 않는 거친 말투로 전지현에게 말했다.

"어차피 이깟 놈들도 당해내지 못 할 거라면, 괴수한테는 도전할 생각도 말아야지요."

누군가의 말에 이능력자들이 고개를 끄덕이며 기세를 더욱 북돋았다.

그런데 그렇게 치솟는 기세가 심상치 않았다. 이제껏 완벽하게 파악했다고 생각했던 대한민국 이능력자들의 전력임에도, 그녀는 지금 도열한 이능력자들의 기세가 생소했다.

더욱 날카롭고, 더욱 강하고, 더욱 뜨겁다.

이들이 이 정도로 강자였나 하고 저도 모르게 돌아볼 정도로 그들의 투기와 기세는 드높았다. 요 몇 달을 함께 지냈던 전지현이 그리 놀랄 정도였는데, 상대야 오죽했으랴.

이제껏 이죽거리며 전지현을 도발하던 사내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변방의 노란 원숭이들이 제법이구나."

사내가 조롱하듯 한마디를 내뱉었다. 하지만 그의 얼굴에는 처음과 달리 은은한 긴장감이 떠올라 있었으니, 그들이 대한민국 이능력자들의 힘에 꽤나 놀랐음을 알려준다.

널따란 공터에 1200명에 가까운 이능력자들이 대치를 하고 있다. 주둔지의 입구를 막아선 400여명의 대한민국 이능력자들과 맞은편에 대치한 800여명에 달하는 무리, 이제는 그들의 의도가 좋은 것이 아니라는 것이 명확한 상황이다.

좋은 의도로 찾아온 손님이라면 이렇게 은밀하게 접근을 할리도 없었거니와, 지금 이 곳의 책임자라 할 수 있는 전지현을 그리 모욕하진 않았을 것이다.

게다가 그들이 나타난 곳은 천개의 눈동자의 영역, 자연스럽게 의심과 적의가 증폭된다.

양측 무리에서 이능의 활성화를 나타내는 빛무리가 간간히 터져 나온다. 당장에라도 서로에게 달려들 수 있도록 만반의 준비를 하는 모습이다.

일촉즉발의 위기감이 주변을 감싼다. 당장에라도 어느 한쪽이 짓쳐들어도 이상하지 않을 상황이다. 그리고 그렇게 먼저 움직이는 쪽이 정체불명의 무리이든 대한민국의 이능력자든 전투가 시작되면 이곳은 참혹한 전장이 될 터였다.

전지현이 선두에서 몇걸음인가를 앞으로 내딛었다. 만약 충돌이 생긴다면 어느 누구도

그녀의 일검을 견뎌내지 않고서는 통과할 수 없으리라.

그렇게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이런 미친! 피해!"

이제껏 전지현을 도발하고 비웃기 일쑤였던 사내가 비명과도 같은 소리를 내질렀다. 그 갑작스러운 말에 모두가 고개를 갸웃거리는데 전지현이 입을 열었다.

"늦었노라."

그녀의 입가에는 한줄기 미소가 담겨있었는데, 그 미소는 아름답다기보다는 섬뜩한 무언가를 담고 있었다.

"검영천하(劍影天下)"

나직한 그녀의 한마디에 그녀 주변에 수십 수백이 넘는 검의 그림자가 솟구치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렇게 솟아오른 검은 시차를 두지 않고 일제히 맞은편의 무리를 향해 날아들었다.

폭음과 욕설, 비명이 난무했다.

일제히 날아든 검에 꿰이거나 베이고, 그도 모자라 양단되는 인물들이 보였다. 기세등등하게 나타난 것 치고는 꽤나 무력한 모습이었다. 간간히 그녀의 공격을 피하거나 막아내는 인물들이 보였지만 그녀는 신경쓰지 않았다.

애초부터 은밀함에 중점을 둔 공격이다보니 위력이 원래의 검영천하에 비해 턱 없이 약했다. 이 정도의 성과만 해도 기대 이상의 성과였다.

일전에 접해본 영국과 타국의 이능력자들을 통해 그들은 기감이 자신들처럼 발달하지 않았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하여 이번에도 그들이 눈치 채지 못할 거란 계산으로 은밀하게 힘을 모아 공격을 준비했는데, 제대로 통한 듯했다.

대한민국의 이능력자였다면 등급을 떠나 단박에 그녀가 은밀하게 준비하는 공격을 알아차렸을 텐데, 적들은 전혀 알아차리지 못했다.

덕분에 전투를 시작하기도 전에 상대방의 전력을 대폭 감소시킬 수가 있었다.

대한민국 이능력자들의 투기가 또 한번 상승했다. 환호를 한다거나 별다른 행동을 취한 것은 아니었지만 드높이 오르는 기세만으로 그들이 지금의 공격에 기뻐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 수 있었다.

전지현은 그 마음을 느끼고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무리를 이끈다는 것은 수백년 수련을 거쳐온 검도의 수행과는 크게 상관이 없는 모양이다. 심력의 소모가 상당히 크다.

개인의 전투에 집중할 수도 없고, 그렇다고 무리의 뒤에 남아 그들을 일사분란하게 지휘할 수도 없다. 애초에 검맥에서는 그런 것을 배우지 않는다.

다만 그녀가 할 수 있는 것이라고는 아군의 부담이 줄 수 있도록 적들의 수를 줄이는 것, 비록 대인전에 능한 그녀인지라 기술을 발휘하는데 시간이 걸렸지만 충분한 효과를 보이고 있었다.

그녀는 다시 한번 은밀한 기운을 모으며 2격을 준비했다. 하지만 한번 당하고 난 뒤라서 적들도 이미 그녀의 2격을 두고 볼 수는 없었던 모양이었다.

상대편에서 번쩍거리는 빛무리가 다발로 쏟아져나왔다.

그녀의 공격에 복수라도 하듯 달려드는 공격은 비록 그녀의 검영천하에 비할 바는 아니었지만 제법 날카로운 구석이 있었다.

하지만 그녀는 미동도 하지 않은채, 2격을 위해 정신을 집중할 뿐이었다.

그리고 그렇게 일절 반응도 보이지 않는 그녀를 대신해 '달무리' 김수현이 앞으로 나섰

다. 그녀는 허공 중에 손을 내뻗고는 이리 저리 휘저었는데, 그녀의 손이 날래게 움직일 때마다 허공에 초승달 같은 빛의 칼날이 전방을 향해 쏘아졌다.

그녀는 대범하게도 날아드는 빛무리를 하나하나 요격했는데, 허공에서 부딪친 둥글거나 반월형인 섬광들이 굉음을 내며 터져 나갔다.

그녀가 모든 섬광을 요격하는데 걸린 시간은 불과 수초도 되지 않았다. 더 이상 날아드는 공격이 없는 것을 확인한 그녀가 양손으로 원을 휘젓고는 원래의 위치로 돌아갔다.

그녀는 물러섰지만, 그녀가 마지막에 남긴 손동작은 커다란 달과도 같은 빛덩어리가 되어 상대를 향해 쏘아져나갔다. 욕설과 함께 상대방 측에서 이런저런 공격들이 날아와 그녀가 내쏜 빛 덩어리를 요격해보지만, 결국 그녀가 원하는 곳에 도착하고야 그 빛은 제 모습을 감췄다.

자욱하게 피어올랐던 모래먼지가 점차 가라앉고, 불청객들의 모습이 마침내 드러났다.

단 두 번의 공격이었지만 꽤나 낭패스러운 꼴을 당한듯한 그들의 모습에 대한민국 이능력자들이 주먹을 불끈 쥐었다.

김수현의 달무리에 당한 적도 있었지만, 치명상의 대부분을 입은 이들은 전부 검후의 공격에 당한 이들이다. 그들은 자신들과 함께하고 있는 이가 누구인지를 깨닫고는 더욱

용기백배하였다.

그런 그들의 마음가짐은 상대에게 압박으로 다가갔고, 불청객의 수장으로 보이는 사내는 단정했던 옷매무새를 잔뜩 흐트러트린 채, 이를 악물고 있었다. 강자로 보이는 그를 위해 전지현은 다른 이들에게 향한 공격보다 몇배는 강한 일격을 선사했는데, 이에 고생 깨나 한 모양이었다.

"건방진 년. 감히 누구를 먼저 공격해."

그가 이를 한 벌 갈아붙이고는 크게 소리쳤다.

"제 7기병대 대열 앞으로!"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푸른 제복을 입은 사내들이 무리 앞으로 나서기 시작했다. 그들은 다른 동료들과는 다르게 비교적 멀쩡한 모습이었다.

"언제나처럼 누렁이들을 그들이 있을 곳으로!"

사내의 외침에 도열한 제 7기병대원들이 섬광을 번뜩이며 각자 탈것을 소환해내 그 등이나 목에 올라탔다. 말, 늑대, 사자, 퓨마, 괴조에 이르기까지 제각각의 모습을 한 맹수들의 등에 올라탄 그들이 일제히 도열하여 서서히 속도를 올리기 시작했다.

그리고 아직 힘을 채 다 모으지 못한 전지현을 대신해 대한민국 이능력자들 중 오분지 일정도가 앞으로 뛰어나왔다. 그들은 얼금과 불꽃 내지는 철갑을 몸에 두른 채 맞은 편에서 짓쳐들어오는 기이한 기병대를 맞아갔다.

폭음이 터져 나오고 비명이 솟구쳤다. 누구의 것인지 모를 팔다리가 허공에 날아오르고 피가 흩뿌려졌다. 그리고 그 충돌을 기폭제 삼아 양측의 인원들은 서로에게 달려들기 시작했다. 괴성을 내지르며 달려오는 적들과는 다르게 소리없이 발을 내딛는 대한민국의 이능력자들, 그 은근한 압박에 적들이 주춤거리면서도 빠르게 접근해온다.

"오늘은 어쩔 수 없이 손을 많이 더럽히겠구나."

그 순간 전장을 가로지르는 검후의 음성, 달려들던 적들이 그 자리에 얼어붙었다. 방금 전 그녀의 공격에 적어도 백여명은 되는 동료가 명을 달리 했다. 이제까지 뭔가를 준비하는 듯 했던 그녀였는데 그 준비가 끝났으니, 당장 두려움이 든 것이다.

"관천(貫天)"

역시나 그녀가 준비한 공격은 어마어마했다. 그녀의 전면에서 솟아난 한자루 거대한 검

이 그대로 자신들을 향해 달려들었다. 허둥대며 좌우로 갈라져보지만 검은 이미 지나고 난 후다. 스스스스검에 관통당한 이들이 스산한 소리만 남긴 채 허공에서 흩어져간다. 마치 존재 자체가 지워지는 듯한 모습에 새하얗게 질린 적들이다.

검후 전지현의 공격은 그것으로 끝이 아니었다. 이제까지 집단전을 대비해 적의 수를 줄이기 위한 공격들이었다 하면, 이제는 본신의 힘으로 그들을 휘저을 때였다. 그녀의 몸이 허공에 솟구쳤다가 이내 적진의 중앙에 내려 꽂혔다.

그리고 시작되는 그녀의 검무, 검격이라기보다는 춤사위에 가까운 그녀의 공격에 적들이 속수무책으로 쓰러지기 시작했다.

거침없이 적들을 쓸어가면서도 전지현은 무언가 석연찮은 느낌을 지울 수가 없었다. 주위를 둘러보아도 모든 전황은 아군의 우세, 아니 압도를 나타낸다.

처음 제7기병대라 불린 이들과 충돌한 대한민국의 이능력자들은 눈부실 정도의 활약으로 그들의 돌격을 완벽하게 저지했다. 거기에 더해 뒤이은 충돌에서는 대한민국의 이능

력자들이 어린애를 다루듯 상대를 꺽어간다.

그 하나하나가 보이는 기예의 완숙함이 감탄이 나올 정도긴 했지만, 그렇다고 하더라도 상대방이 지나치게 무력했다.

자신이 하루종일 느낀 불길함의 정체가 겨우 이것이란 말인가. 막상 뚜껑을 열어보니 내용물이 시원찮은 항아리를 끼고 십리는 질주한 기분이었다.

기이할 정도로 상황이 호전되어 가는 모습을 보며, 전지현은 더욱 불안함을 느꼈다. 그 불안함이 검에 그대로 드러나, 아름답던 그녀의 검무가 점차 딱딱한 단초가 되어 적들을 찢어발겼다.

그리고 그녀의 불길함은 이번에도 맞아떨어졌다. 한참을 적과 뒤섞여 공방을 주고받던 그들 사이로 거대한 무언가가 떨어져 내렸다.

============================ 작품 후기 ============================최대한 시간이 날 때마다 업뎃을 하고 있는데 한편 한편 쓰는데 걸리는 시간이 전에 비할 수가 없이 오래 걸립니다. ㅠㅠ 양해바라겠습니다.

양해바라겠습니다.

검후가 죽거나 ㄱㄱ당하면 선삭하고 다시는 제 글 안보시겠다는 분들이 엄청 많군요. 걱정 마십시오. 피바라기의 엔딩은 그렇게 비극적이진 않습니다. 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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