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2-7. 최종 결전. -- >
시간은 빠르게 흘러갔다. 어느세 두달이라는 시간이 흘러 천개의 눈동자와의 결전이 한달을 남겨두고 있을 뿐이었다.4300명의 대한민국 이능력자들이 서울 경계선에 집결했다. 최하급의 이능력자들조차도 현대식 화기를 손에 쥐고 참전할 정도였으니 온 나라의 이능력자 전력이 전부 모였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괴수의 등장 이전의 이능력자들의 수에는 채 반도 되지 않았다. 요 몇 년간 이능력자들의 희생이 얼마나 많았는지 알려주는 단편적인 예였다.
천개의 눈동자가 등장하고 난 이후 벌어진 크고 작은 전투들이 헤아릴 수 없을 정도로 많았다. 안개 속으로 침투한 이능력자 부대들의 전멸, 그리고 괴수와 치렀던 전투에서 또 다시 전멸, 민간인을 대피시키기 위한 전투 중 이능력자들 대부분 사망,이후 이뤄진 대대적인 국토수복작전과 몬스터들과의 전투에서 다수 사망.
대한민국 이능력자들에겐 실로 끔찍한 시간이 아니었을 수가 없었다.
게다가 지금 그들에게 남은 것은 그 어느 때보다 험악할 게 분명한 전장, 천개의 눈동자와의 전투였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금 서울 경계선이라 명명된 지역에 모인 이들의 사기는 하늘을 찌를 듯 했다. 양적으로 따지자면 전에 비할 수 없었으나. 질적으로 보자면 전과는 비교할 수도 없을 정도로 전력이 보강된 탓이다.
당장 대한민국이 자랑하는 1등급 이능력자 '피바라기' 김형준과 '검후' 전지현만 해도 세계에서 내노라 하는 강자들도 한 수 접어줄 정도의 인물들이다. 거기에 더해 일본과 영국, 그리스의 1등급 이능력자들이 지원을 왔다.
영국의 아서 팬드레건과 그리스의 메데이아, 메두사, 헤라클레스. 거기에 더해 일본의 아야나미 로유미까지.
일전에 패퇴했던 일산 괴수전과는 비교할 수도 없을 정도의 전력이다. 게다가 얼마나 도움이 될지는 알 수 없었지만 일산을 에워싼 대한민국 육해공군의 화망까지. 두려움보다는 투지와 호승심이 생기는 게 당연할 지경이다.
모두가 그렇게 한달 뒤에 닥칠 괴수전을 낙관하고 있을 때, 그들이 그토록 믿는 김형준을 비롯한 1등급 이능력자들은 고심에 빠져 있었다.
지난 괴수 전에서 보인 막강한 전력만 해도 감당하기 힘들 정도였거늘, 이제는 사념을 뿌릴 정도로 지능이 높은 놈이라는 것이 밝혀졌다. 거기에 더해 괴수의 주변에 도사린 수만마리가 넘는 몬스터들까지. 수 없이 많은 희생자들을 만들고, 1등급 이능력자들 마저 다수 전사를 했던 미노타우르스의 미궁보다 더욱 상황이 좋지 않았다. 미노타우르스가 도사리고 있었던 라비린토스에서야 아무리 많은 몬스터가 달려들어도 좁은 통로를 의지해 버틸 수가 있었다. 하지만 이번 전투는 뻥 뚫린 들판에서 벌어질 게 뻔하다 보니 그들의 시름이 깊어졌다.
"육군과 공군이 화망을 구축하여 작전 시작 전에 모든 화력을 퍼부을 예정이긴 합니다만, 얼마나 효과가 있을지 장담할 수 없습니다."
김형준이 쓴 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현대식 무기의 효과야 말할 나위도 없을 정도로 막강했지만 저 경계선을 기준으로 하여 일산방면으로 짙게 깔린 안개가 그의 마음에 걸렸다.
만약 그가 짐작한데로 저 안개가 비틀림과 같은 성질의 것이라면 현대식 무기가 제대로 작동할 가능성은 거의 전무했기 때문이었다.
만약 비틀림과 왜곡 속에서 현대식 무기가 제대로 효과를 발휘했다면 이능력자들이 그토록 오랜 세월을 D섹터를 관리하진 않았을 것이다.
그의 말에 모두가 고개를 끄덕여 공감을 표했다.
일단 말로는 모든 화력을 동원한다고 하지만 핵이라도 사용하지 않는 이상, 이번 전투의 주역이 이능력자들이라는 것은 자명했다. 그 중에서도 1등급 이능력자들의 활약에 따라 전투의 성패가 달린 것은 자명한 사실이었다.
"이건 뭐 시간이 남았다고 해도 할 수 있는 것이 없으니."
헤라클레스의 말이 핵심을 찔렀다. 그의 말처럼 그들에게 주어진 세달이라는 시간 중 아직 한달이라는 시간이 남았지만 더 할 수 있는 것이 없었다.
이미 모일 사람은 다 모였고, 군대의 전개도 완벽하게 펼쳐졌다. 거기에 더해 혹시 모를 북한의 도발을 대비하여 미 항모전단이 서해상에 주둔을 시작했고, 유럽을 비롯한 모든
나라들이 상황을 주시하고 있었다.
이미 지난 시간동안 수백번의 모의전투를 치렀고, 2등급 이하의 이능력자들도 작전에 익숙해졌다.
그들에게 주어진 시간은 아직 끝나지 않았건만, 정작 할 수 있는 일이 없다는 것이 아이러니했다.
하지만 그 모든 것들이 국제정세와 맞물려 있음에야 빠른 타개책이 생길 턱이 없었다.
이번 전투는 비단 대한민국의 문제만이 아니라 어쩌면 괴수로 인해 고통받고 있는 전 인류의 희망이 걸린 전투였다. 전투의 성패에 따라서 다른 국가들도 자국의 괴수에 대응하는 방식을 결정할 것이다.
만약 성공한다면 그들 역시도 온 전력을 모아 섬멸전을 펼칠 것이고, 실패한다면 국토를 포기해야 하는 상황이 될 것이다. 천개의 눈동자와 비슷하게 등급책정 불가의 괴수들로 판명난 드래곤과 야마타노 오로치를 비롯한 괴수들은 말할 것도 없고, 비교적 약체로 구분된 괴수들조차도 퇴치가 불확실하다.
"망할 놈들. 이 상황에서까지 이해타산을 따지다니."
헤라클레스가 분통을 터뜨렸다.
가장 이상적인 시나리오라면 전 세계의 1등급 이능력자들이 한자리에 모여, 각국의 괴수를 퇴치하는 것이다. 하지만 복잡하게 각 국가의 이해득실이 맞물린 국제정세이니만큼 절대로 이루어질 수 없는 시나리오이기도 하다.
당장에 대한민국과 국토를 맞댄 중국마저도 그 어떤 협조의 움직임을 보여주지 않고 있었다.
그도 당연한 것이 이번 전투를 성공적으로 마칠 경우 대한민국이라는 국가는 유래 없는 호황을 맞을 것이다. 이미 세 번의 1등급 몬스터 퇴치를 성공적으로 이끈 김형준이라는 희대의 이능력자가 있는 나라. 이제껏 약세를 보였던 외교적인 약점을 뛰어넘어 단번에 세계 최고의 발언권을 갖고도 남는다.
아직까지 괴수에 신음하고 있는 국가들은 셀 수도 없이 많았던 탓이다. 국가기능의 완전한 회복을 위해서 언젠가는 퇴치해야 할 괴수와, 그 괴수를 퇴치할 수 있는 이능력자가 있는 국가.
세계의 국가간 관계를 아우르는 새로운 척도가 될 것이다.
"그래도 이만큼이라도 모여주신 것을 저는 다행으로 생각합니다."
김형준이 헤라클레스에게 살짝 고개를 숙이며 감사를 표했다. 이미 자신이 도움을 준 적이 있는 국가들이라고 하지만, 원래 그렇지 않은가. 화장실 들어갈 때와 나올 때가 다른 것이 사람 속인 것을.
이미 자국의 골칫거리가 해결됐음에도 불구하고 이곳까지 달려온 그리스와 영국의 이능력자들은 말할 것도 없고, 자국 원로들을 설득하여 이곳까지 온 일본의 아야나미 로유미까지.
김형준에게는 생각지도 못한 조력자들이라 할 수 있었다. 그의 말에 아서 팬드래건을 비롯해 모든 이들이 손사래를 쳤다. 지고한 힘만큼이나 지고한 정신을 지닌 이들답게 그들은 은혜의 귀함을 알았고, 은인의 고난을 모른척할 정도로 몰염치하지도 않았다.
아야나미 로유미만이 그 모든 모습을 바라보며 미소를 짓고 있다가 농담처럼 한마디를
던졌을 뿐이다.
"이번 일 잘 끝나면 일본도 모른 척 하기 없깁니다."
그녀의 장난스러운 말에 분위기가 더욱 부드러워지고, 수뇌부가 모인 임시막사의 공기가 잠시나마 가벼워졌다.
대한민국의 도시마다 흔히 볼 수 있는 전광판, 평소라면 각종 광고들로 넘쳐났어야 할 그것들이 지금은 한결같은 문구를 나타내고 있었다.
결전까지 30일.
국가의 명운이 달려있다 해도 과언이 아닐 전투를 앞둔 대한민국의 절박한 상황이 그대로 드러났다. 하지만 대한민국의 국민들의 얼굴이 마냥 어두운 것은 아니었다. 그들에게는 적어도 희망이라는 것이 존재했으며, 또 그 희망을 현실로 만들어줄 존재가 있었다.
전 세계가 주목하는 피바라기 김형준과, 검맥, 그리고 이름 모를 수 많은 이능력자들까지.
워낙에 많은 매체들이 그들의 활약상에 대해 소개를 하다보니 국민들은 승리에 대한 기대감이 높아지고 두려움이 희석되었다. 정작 당사자들은 성패를 알 수 없는 전투에 시름이 깊어만 가는 것도 모르고.
어쨌건 그 덕에 대한민국의 분위기는 괴수전을 목전에 두고도 썩 나쁘지는 않았다.
어느 곳을 가도 이능력자들의 승리를 기원하는 플랜카드가 넘쳐났고, 각 지역의 이능력자들의 이름이 빼곡하게 쓰여진 명단과 그 아래 놓인 수많은 꽃송이와 기원들.
하나 하나가 국민들의 마음을 대변해준다.
그리고 지금 그렇게 그들이 만들어낸 거대한 희망과 사념이 모이고 모여 어느 한 곳으로 흘러들어간다.
짙은 안개 속 한치 앞도 볼 수 없을 정도로 뿌옇고 뿌연 세계다. 아무 것도 보이지도 들리지도 않는 세상이었지만 이따금씩 들려오는 푸르릉 거리는 숨소리와 낮은 그르렁거림으로 무언가가 존재한다는 것을 알려준다.
그리고 그 보다 더욱 깊은 안개의 중심에는 천개의 눈동자가 있었다. 압도적일 정도로 거대한 거체는 미동도 하지 않은 채 작고 가녀린 화신을 내세운 그가 정체를 알 수 없는 이들의 방문에 언짢은 기색을 보였다.
"내가 분명 말했을 텐데, 세달이라는 시간 동안은 움직이지 않겠다고."
이현지의 껍데기를 둘러쓴 그가 말했다. 지난 날 김형준과 헤어졌을 때와는 많은 변화가 있는 그녀의 모습이었다.
어린 듯했던 외모는 어딘지 모르게 성숙해졌으며, 매끄럽던 피부는 검붉은 핏줄이 잔뜩 돋아나 기괴하기만 했다.
게다가 한마디 한마디 던지는 음성이 남자의 것도 여자의 것도 아닌 기묘한 것이었다.
"아니면, 그 정도의 시간이 필요 없을 정도로 준비가 잘 이루어진 것인가?"
이제는 이현지의 음성이라기보다는 완전히 다른 무언가의 음성이 되어버린 그의 말에 상대가 몸을 떨었다.
상대의 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던 천개의 눈동자가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그렇게 가련하게 몸을 떨면서도 이곳에 온 것을 보니, 그건 아닌 모양이군."
그의 말에 몸을 떨고 있던 존재가 어렵사리 고개를 들었다.
"말하라."
상대가 자신의 기세에 완전히 눌려 정작 찾아온 용건을 말하지 못하자 천개의 눈동자가 기세를 갈무리했다.
그제야 숨통이 트였는지 숨을 몰아쉬는 상대방의 모습에 그가 눈살을 찌푸렸다.
"시답잖은 용건이라면 당장이라도 모든 것을 말살하리라."
그 말에 상대방이 뒤늦게 입을 열었다.
"천개의 눈동자시여. 듣던 것보다 더욱 강대한 힘에 그저 미개한 인간이 놀랐을 뿐이니 부디 노여움을 거둬주시기를."
일단 입이 열리자 기름을 바른 듯 매끄럽게 움직이는 혀를 가진 사내였다. 하지만 그런 사내의 태도가 마음에 들지 않았던 것인지 돌아오는 대답은 명백한 적의였다.
"긴 말은 좋아하지 않는다. 용건을 말하라. 내가 허락하기에 이 자리까지 무사히 온 것이며, 내가 감내하고 있기에 그대가 지금 숨을 쉬는 것이다. 내가 허락한 시간을 거둬들이기 전에 용건을 말하라."
기세를 갈무리했다지만 존재 자체에서 뿜어져 나오는 압도적인 무언가는 여전했다. 매끄럽게 혀늘 놀리던 사내가 그 말에 찔끔 놀라 자신이 찾아온 용건을 서둘러 말했다. 길지도 짧지도 않은 사내의 용건이 끝나자 이현지의 형상을 한 천개의 눈동자가 얼굴을 찌푸렸다.
"인간들이란 변하지 않는 군."
그의 말에 사내가 고개를 조아리며 대답을 회피했다. 한참이나 사내를 뚫어져라 바라보던 천개의 눈동자가 입을 열었다.
"그대의 이름은?"
천개의 눈동자가 이름을 묻자 사내가 더욱 고개를 숙여 보였다. 하지만 바짝 숙여진 그의 입가에는 비열한 웃음이 떠올라 있었으니,
"필립 헨리 셰리던입니다."
============================ 작품 후기 ============================죄송합니다. 요즘 술이 늘어서 제정신이 아닌 시간이 기네요. 덕분에 정작 글을 쓰지 못했었습니다. 오늘부터는 진득하니 앉아서 글을 좀 써봐야겠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