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피바라기-208화 (208/223)

< --  2-7. 최종 결전.  -- >

"형준?"

언제나처럼 약간은 칭얼거리는 듯한 말투였다. 그 음성에 왠지 마음이 차분하게 가라앉은 김형준이 다시 입을 다물었다.

막상 말을 하려 하지만, 어떻게 말을 꺼내야 할지 감이 오지를 않는지 꽤나 고민인 기색이었다.

뭐라 말을 꺼낸다는 말인가. 네가 천개의 눈동자가 뿌린 사념 중 하나냐고? 아니면 인간이 맞냐고?

고민에 빠져있는 김형준과 전지현을 잠시 바라보던 이현지가 다시 고개를 돌렸다.

김형준과 전지현이 눈빛을 주고 받았다. 서로의 생각을 눈빛으로 주고 받지만 딱히 좋은 방법이 떠오르지를 않았다.

결국 그렇게 시간이 하염없이 흘러갔다.

이현지는 무엇을 그렇게 바라보고 있는 것인지 산 아래 펼쳐진 풍경을 질리지도 않고

바라본다.

"하고 싶은 말 있는 거 아니야?"

시선조차 돌리지 않은 채, 이현지가 물었다.

"응. 현지야. 그게 말이지..."

아직도 생각을 정리하지 못한 김형준이 잠시 말을 끄는 사이에 그녀가 다시 입을 열었다.

"허준영은 죽었겠구나."

갑작스러운 그녀의 한마디에 그들의 몸이 굳었다. 그들이 그러거나 말거나 이현지는 말을 이어 나갔다.

"형준이 여기 왔다는 건, 허준영과 만났다는 거겠지."

그들이 그토록 바라지 않았던 상황이건만, 이현지는 스스로 그들의 의문을 시인해간다.

"무슨 말이야?"

김형준이 간신히 꺼낸 한마디에 그녀가 고개를 돌렸다.

차라리 투명해 보인다 해도 좋을 그녀의 눈동자가 고요하게 그를 바라본다.

"허준영은 내가 알던 누군가를 닮았어."

역시나 알아듣기 힘든 그녀의 말이다.

"다른 사람들의 빛나는 영혼의 색과는 다르게 혼탁하게 꾸물거리는 빛깔, 허준영도 그처럼 달랐어. 너희들처럼 영롱하게 빛나지도 않았고, 예전의 선인들처럼 맑고 순수하지도 않았어."

김형준과 전지현의 눈이 크게 뜨였다.

"아마도 너희들과 가는 길도 달랐겠지. 그리고 너희들이 이 자리에 있다는 것은 그가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일 테고."

이현지의 음성에는 더 이상 그들이 익숙했던 칭얼거림이나 어눌함이 터럭만큼도 보이지 않았다.

또박또박한 음성과 차분하게 가라앉은 음성이 지독스러우리만치 무덤덤했다.

"자. 물어봐. 나는 어떤 질문이든 대답해줄 수 있어."

이현지의 말에 김형준이 간신히 입을 열었다.

"너는... 인간이 아닌 건가?"

결국 그렇게 꺼낸 한마디가 차가운 비수가 되어 그들의 가슴께를 찔렀다. 이제껏 그녀와 지내왔던 시간들이 그 한마디에 색이 바래버린다.

"인간이라. 인간이 뭔데? 이 껍데기를 말하는 거야? 아니면 너희들이 말하던 영혼을 말하는 거야?"

그녀의 질문은 대답을 기다리는 종류의 것이 아니었다.

"글쎄. 더 솔직하게 묻지 그래."

이현지의 말간 눈동자가 김형준의 속을 들여다보듯 투명한 빛을 발했다.

"너하고 괴물이 어떤 관계냐고."

단도직입적인 말에 김형준과 전지현중 누구도 입을 열지 못했다. 눈을 질끈 감은 전지현과 절망한 기색이 역력한 김형준의 모습에 이현지가 고개를 갸우뚱 거렸다.

"너희들이 묻지 않는다고 해서 다시 전처럼 돌아갈 수 있는 것은 아니야."

그녀의 말에 김형준이 이를 악물었다.

그렇다. 이현지가 한 말처럼 이제는 다시 되돌릴 수 없었다. 차라리 비맥의 맥주 구형찬이 한 말을 듣지 못했다면 모를까. 여기까지 와서 없던 일처럼 유야무야 넘어갈 수 없는 상황이 아니었다.

결국 결심이 선 김형준이 허리를 꼿꼿이 폈다. 그의 얼굴에 가득했던 혼란스러운 기색이 사라지고 무겁게 가라앉은 각오만이 남았다.

"너는..."

잔뜩 쉬어버린 목소리로 그가 입을 열었다.

"천개의 눈동자가..."

그의 시선이 똑바로 이현지의 눈을 마주 쳐갔다.

"뿌린 사념 중 하나인가?"

김형준이 내던진 질문의 의미를 새삼 깨달은 전지현이 감았던 눈을 떴다. 이제는 그들도 현실과 마주해야 할 순간이다.

두 내외의 시선이 이현지의 시선과 얽히고 엉켜든다.

"괴물이 뿌린 사념 중 하나냐고?"

이현지가 천천히 고개를 저었다.

"아니. 난 그런 게 아닌데."

그녀의 부정에 김형준과 전지현의 안색이 밝아진다. 하지만 그 순간은 아주 잠시였을 뿐이었다. 이현지가 연이어 꺼낸 말에 그들의 얼굴은 도리어 처음보다 배는 딱딱하게 굳어버렸다.

"난 너희가 말하는 천개의 눈동자이자 멸망을 지켜보는 눈 그 자체야."

덤덤하기만 한 그녀의 음성이 지독스러우리만치 비현실적이다. 아무 대답도 하지 못하고 입만 뻥긋거리는 그들을 향해 이현지가 다시 말했다.

"이게 너희들이 알고 싶어 하던 것이야?"

그녀의 질문에도 김형준 내외는 꼼짝도 하지 못했다. 그저 갑작스럽게 현실의 차가움 속에 내던져진 육신을 부르르 떨고만 있었을 뿐이다.

그간 그녀와 보내왔던 시간들이 그들의 머릿속에서 엉키고 엉키다 지난 전투에서 보았던 그 거대한 괴수와 뭉쳐버린다. 그날 처절하게 죽어간 이능력자들의 모습과 이현지와 보냈던 나날의 기억이 동시에 떠오르고, 다시 또 헤아릴 수 없는 서울시민의 희생과 천진하게 웃는 낯의 이현지가 스쳐간다.

비맥의 맥주 구형찬에게 이야기를 들었을 때와는 달랐다. 그 당시에는 그저 충격에 빠졌을 뿐이라 하면, 지금의 그들은 엄청난 감정의 편린들에 미동조차 할 수 없을 지경이었다.

애정, 친애, 믿음, 추억, 과거, 동정, 애틋함, 그리움.... 배신, 증오, 불신, 거짓, 현실, 기만, 의문, 분노....

수 없이 교차하는 감정 속에서 몸을 떨던 그들이 이내 진정했다. 수백년간의 수행시간이 헛되지 않았었던 듯 전지현의 눈동자는 맑고 고요했다. 김형준 역시 예전의 그와는 달리 빠르게 진정을 찾았다.

길지 않았던 고뇌의 순간이었음에도 불구하고 그들의 얼굴은 극도로 지쳐보였다.

평정을 찾았지만 그들은 대화를 이어나가지 못했다. 이제 와서 이현지가 천개의 눈동자 그 자체라는 사실을 알았으니 이 자리에서 검이라도 뽑아들어야 할까. 그도 아니면, 왜 그랬냐고 절규라도 해야 한다는 말인가. 모든 것이 부질없고 가치 없었다.

그녀와 보낸 시간 자체가 거짓이었음에야 지금에 이르러선 그 어떤 것도 의미를 찾지 못했다.

그들의 주변을 둘러싼 공기가 칼날처럼 날을 세웠다. 당장 말을 잘못 꺼냈다가는 금방이라도 적으로 돌아서서 서로의 생사를 걸고 싸워야 할 것 같은 압박감이 그들을 내리 눌렀다.

하지만 그런 압박감을 느끼는 것은 그들뿐이었는지, 이현지가 아무렇지도 않게 이야

기를 꺼냈다.

"배신자니. 괴물이니 소리 지르지 않을 거야?"

여상스러운 그녀의 말투가 도리어 차갑게 느껴진다. 여전히 대답조차 없는 김형준 내외의 모습에 이현지가 다시 말을 이었다.

"의외네. 화라도 엄청 낼 줄 알았는데."

그녀의 말에 김형준이 턱이 악다물렸다. 오랜 수행을 바탕으로 완벽하게 마음을 다스린 전지현과는 다르게, 간신히 스스로의 감정을 억누르고 있을 뿐인 김형준이었다.

표면적으로야 진정이 된 모습이라고 하지만 그의 내면은 여전히 맹렬한 감정의 소용돌이가 몰아친다. 그나마 그것을 억누르는 것은 지난 시간 지나온 아수라장과 사건들이 그를 조금이나마 단단하게 만든 탓이리라.

이전의 그였다면 상황도 나몰라라 하고는 폭주했을 테니까.

"이제는 작별인가?"

한참이나 그들을 바라보던 이현지가 중얼거렸다. 그 작별이라는 말에 김형준이 움찔

거렸다.

그들은 아직 결정을 내리지 못했다.

천개의 눈동자 자체라고 자신을 밝힌 그녀를 어떻게 할 것인지. 힘으로 찍어 눌러 억류를 할 것인지, 그도 아니면 이 자리에서 제거하던지.

그들이 바라는 선택지는 아니었지만, 그들에게 주어진 선택의 폭은 넓지 않았다.

"내가 인간이었다면 너희들에게 미안함을 느꼈을까."

덤덤히 질문을 하는 그녀의 음성이 지독할만큼 텅 비어 있다.

"내가 인간이었다면 너희들과 함께 했던 시간이 소중했겠지? 그리고 행복한 기억으로 남아 있었겠지?"

공허한 음성에 누구도 대답을 하지 못하고 있는데 그녀가 고개를 저었다.

"하지만 그런 것들이 내게는 도무지 감흥을 일으키지 않아. 아마 내가 인간이 아닌 탓이겠지."

그녀의 뒤편에 펼쳐진 푸른 하늘에 까만 점 하나가 생기더니, 금세 커다랗게 몸을 불렸다.

"나는 너희들에게 미안하다는 말조차 하지 못하는구나."

점으로만 보였던 무언가가 빠르게 그들을 향해 달려들었는데, 그 모습이 언젠가 김형준이 보았던 적이 있던 몬스터의 모습이었다.

영국행 중에 보았던 괴조와 똑같은 모습을 한 몬스터가 이현지의 뒤편에 안착해 고개를 내리 깔았다.

"그럼에도 아무렇지도 않으니, 이번에도 배운 게 없는 모양이야."

그녀가 바닥에 넙죽 엎드린 괴조의 머리를 밟고 천천히 그 거대한 등으로 올라섰다.

김형준과 전지현은 아무런 행동도 하지 못하고 그녀를 지켜볼 뿐이었다. 잠시나마 전지현의 눈가에 살벌한 빛이 일렁였지만 이내 사라졌다. 김형준이 그녀의 기색을 눈치 채고는 만류한 탓이다.

이제 와서 그녀를 죽여도 변하는 것은 없다. 천개의 눈동자는 여전히 존재할 테고, 이현지라는 존재는 이제 없으니까.

이현지가 그런 그들을 바라보다가 입을 열었다.

"하지만 너희들 덕에 많은 것을 보았으니, 보답을 할게."

괴조가 힘차게 날개짓을 하며 날아올랐다.

"세달. 세달 안으로는 움직이지 않을게."

그녀가 무덤덤하게 던진 한마디에 그들의 눈이 크게 치떠졌다.

"세달 동안 날 막을 준비를 해. 철저하게. 너희들이 동원할 수 있는 방법을 총 동원해서. 만약 제대로 준비하지 못한다면 후회할 거야."

괴조에 오연히 올라탄 그녀가 무심하게 한마디를 내뱉었다.

"이번에는 멈추는 일 없이 다 부숴버릴 작정이니까."

그 선포와도 같은 한마디에 담긴 기운이 천지를 진동시켰다. 이제껏 덤덤하기만 했던 말투는 사라지고 절대자의 위엄이 가득 서린 음성으로 그녀가 다시 말했다.

"그럼 세달 뒤에 봐."

============================ 작품 후기 ============================먼저 휴재에 대해 사과드립니다. 일전에 제가 후기로 주변 분들에게 잘 해드리라고 한 적이 있었죠. 사실은 그날 형제와도 같은 친구를 앞세운 날이었습니다.

글 쓸만한 상황이 아니었는데, 주변 작가분들의 격려와 지인들의 다독임으로 어찌 어찌 글을 써내렸습니다. 근데 그게 좀 괜찮아졌나 싶더니 여파가 뒤늦게 더 심해졌습니다.

덕분에 마음을 추스를 시간이 필요했습니다. 지금도 나아졌는가 하면 그건 또 아니지만 그래도 완결까지는 어떻게든 가보도록 하겠습니다.

항상 개인사로 인해 독자분들과의 약속을 지키지 못해 죄송합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