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피바라기-207화 (207/223)

< --  2-7. 최종 결전.  -- >

여상스러운 대화가 갑자기 뚝 끊겨버렸다. 윤민아가 붉어진 얼굴로 한참을 망설이다가 간신히 입을 열었다.

"저기... 다 알지?"

뜬금없는 말이었고, 또 앞뒤 자른 모호한 말이었지만, 김형준은 단박에 그 의미를 알아챌 수 있었다.

"어."

이제 와서 부정을 하기에도 곤란한 일이라 짤막하게 대답을 한 그의 얼굴에 곤란한 기색이 역력하게 떠올랐다.

달리 어떤 말도 없었지만, 김형준의 온몸이 윤민아의 고백에 대해 불편함을 표했다. 딴에는 엄청난 용기를 냈답시고 고개를 숙인 그녀는 김형준의 그런 기색을 잃지 못 했다.

그녀가 느릿느릿한 말투로 이야기를 이어갔다.

"딱히 너에게 부담을 주려는 건 아니야. 그러기에 검후는 너무 좋은 분이거든."

그간 억누르고 숨겨왔던 감정이 이제는 수면 위로 떠올랐다.

"다만 나도 말 하고 싶었어. 그냥 말하는 건 상관없잖아. 나쁜 년이라 욕할 수도 있고 염치도 없는 년이라 욕 할 수도 있을 거야. 그래도 이번만큼은 내 마음을 밝혀도 되잖아."

평생을 황룡의 품에서 첩자로 교육받아왔고, 유니온에 잠입한 이후로는 단단한 가면을 쓴 채 살아와야 했던 그녀다.

강압적인 말투와 태도는 여리디 여린 그녀가 첩자 생활을 해오는 데 있어 피치 못하게 두른 철갑과도 마찬가지였으리라.

그런 태도조차 벗어던진 그녀는 처음으로 자신의 감정에 대해 타인에게 말을 했다.

"대단한 감정은 아닐 거야. 그냥 수 많은 좌절을 겪으면서도 늘 가볍던 네 모습이 좋았을 뿐이야. 어쩌면 나도 너처럼 살 수 있지 않을까 하는 동경일지도 몰라."

서툴기만한 그녀가 조심스럽게나마 자신의 감정을 토로한다.

"이런 감정이 내게는 사치라는 거 알지만. 그래도 사람 마음이라는 게 어쩔 수 없더라고. 그러니까..."

이야기를 늘어놓다가 고개를 든 그녀의 얼굴이 붉게 상기되어 있었다. 숨길 수 없는 자괴감이란 감정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감정에 솔직해진 그녀의 얼굴은 아름다웠다.

그간의 마음고생으로 초췌해진 얼굴도 지금만큼은 도리어 보호해주고 싶을 정도로 연약함으로 보일 뿐이었다.

하지만 그런 그녀의 얼굴이 순식간에 굳었다.

스스로의 감정에 취해 주절 주절 이야기를 늘어놓느라 몰랐는데, 뒤늦게 김형준의 딱딱하게 굳은 얼굴을 발견한 것이다.

저 혼자만의 감정과 용기에 고취되어 있던 마음이 순식간에 가라앉았다.

"미안."

그녀의 안색이 변하는 것을 바라보던 김형준이 짧게 한 마디를 꺼냈다. 아내가 무슨 생각으로 이런 자리를 만든 것인지 이해할 수는 있었으나 받아들이는 것

은 별개의 문제다.

자신이 아내에게 저지른 과오는 평생을 사죄해도 모자랄 것, 어설픈 동정과 정으로 그녀에게 상처를 줄 수는 없었다. 그의 입장에서는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는 그녀의 마음과 고백이다.

그런 생각이 그의 얼굴에 그대로 드러나 버렸다.

"아니야... 내가 미안..."

윤민아의 얼굴이 급기야 창백하게 질려버렸다. 자신으로써는 다시 없을 용기를 내어 시작한 고백이었건만, 채 본론을 꺼내기도 전에 무참히 짓밟혔다.

한순간이지만 그에게 자신의 감정을 고백하며, 어쩌면 하고 기대를 했던 그녀의 마음이 무너져 내렸다. 사랑에 빠진 여자는 그렇게 순식간에 차가운 현실로 내동댕이 쳐져 만신창이가 되었다.

"길게 대답하지 않을게. 그래봐야 서로만 힘들어질 뿐이니까."

이만큼이나 냉정한 모습이 있었나 싶을 정도로 김형준은 단호하게 자신의 의사를 표현했다.

"너는 좋은 여자야. 황룡의 첩자니 뭐니는 이제 흘러간 과거고."

좋은 여자라. 그녀는 그에게 좋은 여자가 되고 싶은 것이 아니었는데, 그녀가 그토록이다 바라던 님의 입술은 얼음으로 만들어진 듯 차가운 말을 토해낸다.

그녀의 눈에 천천히 눈물이 차올랐다. 보기만 해도 안 쓰러울 정도로 애처로운 얼굴을 한 그녀가 필사적으로 눈물을 참고 있는 모습은 김형준에게도 가슴 아픈 모습이었다.

하지만 어쩌랴. 자신의 마음에는 그녀가 들어올 자리가 없는 것을.

"그러니 네 인생을 찾아. 량쯔요우와 황룡에 있는 동생은 어떻게든 내가 빼내어 줄게. 그러니 너도 앞으로는 유니온이니 황룡이니 신경쓰지 말고 네 인생을 살아."

스스로도 모르는 사이에 잔인한 말을 지껄이고 있었지만 김형준은 입을 멈출 수 없었다.

"분명 더 좋은 사람을 만날 수 있을 거야."

애달프도록 애모하던 존재에게 듣는 단어가 날카롭게 날을 세우고 그녀의 가슴을 할퀴고 또 할퀴었다.

"알았지? 윤민아 힘내! 유니온의 얼음덩어리로 유명하던 네게 지금 무슨 꼴이니."

단호하게 마음먹었지만, 마음이 무겁게 가라앉는 것까지야 김형준도 어쩔 수 없었다. 결국 참다 참다 눈을 질끈 감은 윤민아의 창백한 뺨을 타고 눈물이 흘러내렸다.

"가서 화장이라도 하도록 해. 오랜만에 보는 동생이 걱정하겠어."

하지만 그의 무거운 표정과는 달리 그가 내뱉는 단어는 깃털처럼 허공에 떠올라 뾰족한 깃을 그녀의 가슴에 박아 넣었다.

방 안에 침묵이 내려앉았다.

간신히 자신이 할 말을 다 한 김형준은 그 무거운 분위기를 견디지 못하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완곡하게 축객령을 내렸지만 실의에 빠진 그녀가 미동도 않자 자신이 방을 나선 것이다.

그가 떠나고 난 자리에 홀로 남은 윤민아의 어깨가 들썩이기 시작한다.

방을 나선 김형준은 품을 뒤적거렸다. 이리 저리 손을 쑤셔 넣어보지만 이내 스스로가 담배를 끊었다는 사실을 뒤늦게 깨닫고는 한숨을 내쉬었다.

연아를 갖고난 이후로는 한번도 태우지 않았던 담배가 지금만큼 간절한 적이 없었다.

담배연기를 대신해 짙은 한숨을 토해낸 김형준이 이내 무거운 발걸음을 옮겼다. 등 뒤로 느껴지는 흐느낌에 견딜 수가 없던 탓이다.

침울한 얼굴을 한 그가 복도를 지나 건물을 나서려는데 아내의 음성이 그를 잡았다.

"이야기가 잘 되지 않은 게로군요."

숨김 없이 드러난 김형준의 표정을 살핀 그녀가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앞으로는 이런 일 없도록 해줘요. 당신은 괜찮다고 하지만 제가 마음이 편치가 않아요."

스스로의 나이가 지나치게 많아 그것이 자격지심이 된 것인지, 그도 아니면 원래의 생각이 그러한 것인지. 이따금씩 기이한 관용을 보여주는 아내의 태도에 적잖이 화가 난 김형준이었지만 차마 내색하지 못했다.

그저 불만어린 표정으로 그리 이야기 하니 그녀가 조용히 고개를 끄덕여준다.

"일단 현지의 일이 마무리되는 데로 중국으로 가야겠어요."

김형준이 무거운 공기를 떨쳐내기 위해 화제를 돌렸다.

지금이야 현지를 비롯한 각성자들에 대한 일이 우선이었지만, 그 일이 해결되고 나서는 황룡으로 갈 생각을 한 김형준이었다.

냉정하게 선을 긋고 나니 미안한 마음이 들어 그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마음이 편치 않을 것 같았다.

그런 내심을 눈치 챘는지 전지현이 차분한 어투로 대답했다.

"일단 날이 밝으면 현지를 찾아가시지요. 귀로 들은 이야기가 있다지만 동생 같은 아이고 자식 같은 아이이기도 하니 직접 눈으로 살펴보아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녀의 말에 김형준이 고개를 끄덕였다.

다음날 날이 밝기가 무섭게 김형준과 전지현은 아지트를 나섰다. 그들이 잠시 휴식을 취하는 사이에 누군가가 아지트를 찾아왔지만, 방문자가 윤민아의 방을 향해 가는 것을 알고는 그들은 신경을 껐다.

아마도 그녀의 동생, 량쯔요우 윤선아가 온 것일 것이다.

사연 많은 자매의 상봉을 곁에서 지켜보고 싶은 마음이 없었던 것은 아니었지만, 그들은 걸음을 서둘렀다.

아직은 이른 시간이라 아무도 나와 있지 않은 검맥의 본산이다. 도맥의 그것보다 몇배는 은밀하게 숨겨진 입구를 지나 산을 오르다보니 하나 둘 낮 익은 얼굴들이 인사를 건네 왔다.

진즉에 대한민국으로 돌아온 진태식을 비롯한 이들이 반가운 기색을 보였지만 김형준과 전지현은 멈추지 않았다. 원래부터가 수련장을 제외한 곳은 넓지 않은 검맥의 본산이다. 빠른 걸음으로 쉬지 않고 이동하는 그들은 이내 목적한 곳에 도착할 수 있

었다.

"어? 언제 오셨어요?"

아침 수련이라도 하려던 모양인지, 가볍게 몸을 풀고 있던 여인이 눈을 동그랗게 뜨고는 인사한다.

검맥의 핵심 인원 중 하나인 '달무리' 김수현이다. 흑단 같은 머리를 질끈 동여맨 그녀가 부리나케 그들에게 달려왔다.

아마도 수련에 한참 몰두해 있던 와중이라 민용모를 통해 정보를 전달받지 못한 모양이다.

"아. 이틀인가 됐어요. 잘 지냈어요?"

어색하게나마 웃는 얼굴로 마주 인사를 받아주니 김수현이 크게 소리쳤다.

"연아야! 아빠, 엄마 왔다!"

그녀가 몇 번이나 소리를 치자, 그녀의 뒷켠에 있던 초옥의 문이 빼꼼 열리고는 조그만 아이가 모습을 드러냈다.

"엄마!"

며칠 떨어져 있을 때마다 부쩍 크는 것이 저 또래의 아이라지만 그들이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더 자라버린 연아가 아장거리는 걸음으로 그들에게 달려온다.

행여라도 넘어질까 걱정하며 자신들의 딸을 반기는 그들의 얼굴도 지금만큼은 그간의 시름도 고민도 존재하지 않았다.

"엄마! 아빠!"

짧은 혀로나마 애타게 엄마와 아빠를 찾는 딸을 본 부모의 심정이 다 그럴진데, 그들이 어찌 기뻐하지 않으랴.

순간적으로 이 곳에 찾아온 목적도 잊은 김형준과 전지현이 며칠만에 본 연아를 끌어안고 쓰다듬으며 난리통을 떨었다.

그런 모습을 김수현이 흐뭇하게 바라보았다.

한참동안이나 난리법석을 떨고 나서야 연아와 떨어진 김형준 내외는 김수현에게 물었다.

"현지는 어디 있지요?"

여전히 연아의 고사리 같은 손을 꼭 쥐고 놓지 않은 부부의 모습에 웃음 지으려던 그녀는, 그들의 표정이 짐짓 심각하자 덩달아 얼굴을 굳혔다.

"아. 현지라면 제일봉에 있을 걸요. 요 근래에는 잠잘 때나 식사 때가 아니면 그곳에서 도통 내려오질 않아서."

그녀의 대답에 김형준과 전지현이 눈빛을 주고받았다.

"뭐 달리 이상한 점은 없었고요?"

제법 진지하게 던진 질문에 김수현이 잠시 고개를 갸우뚱거리다가 대수롭지 않게 대답했다.

"현지야 뭐, 원래 좀 맹한 구석도 있고 이상한 구석도 있잖아요. 특별히 달라진 건 없어요."

그녀의 대답에 고개를 끄덕인 부부는 떨어지지 않으려는 연아를 잠시 더 그녀에게 부탁하고는 제일봉이라 불리는 산봉우리를 향해 몸을 돌렸다.

제일봉은 거창한 이름과는 다르게 보통 사람이라도 조금만 걸어 올라가면 금세 정상에 도착할 수 있는 낮은 산봉우리였다.

그런 산봉우리니만큼 김형준 부부는 순식간에 정상에 도착할 수 있었다.

낮다지만 엄연한 산봉우리, 주변의 풍광이 한눈에 들어오는 봉우리의 끄트머리에 그들이 그렇게도 찾고 있던 이현지가 있다.

잠시 시선을 주고 받은 김형준과 전지현이 그녀에게 다가섰다.

"현지야. 뭐해. 우리 왔어."

평소처럼 이현지를 대하려 하지만 그것이 잘 되지 않는지 김형준의 말투가 조금은 어색했다. 스스로도 금방 그 사실을 깨닫고 아차했지만 이내 엎질러진 물이었다.

다행이라고 해야 할지 불행이라 해야 할지, 이현지는 그의 말을 듣지 못한 것인지 여전한 자세로 산 아래의 풍경을 바라보고 있었다.

다시 말투를 가다듬은 김형준이 이현지를 불렀다.

"현지야."

몇 번이나 그렇게 현지를 불렀을까. 산 너머를 바라보고 있던 이현지가 그의 목소리에 반응을 했다.

평소에도 한번 불러서는 좀체 들은 척을 안하던 그녀였으니만큼, 이런 반응이 이상한 것은 아니었지만 김형준은 저도 모르게 움찔 거렸다.

============================ 작품 후기 ============================뚜둥. 정신적 하렘. 고백 받고 받아주지 않는 것이야 말로 진정한 인기남... 은 개뿔.

저거 받아주면 주인공 죽어야죠. ㅎㅎㅎㅎㅎ어쨌건 주인공도 사람이니 미안해서라도 황룡을 처리해야 하게 생겼습니다. 이것 참. 어쩔 수 없이 현지 일 정리되면 바로 중국 가야겠네. ㅋㅋㅋㅋ항상 읽어주시는 독자님들 감사드립니다! 코멘트와 추천 쿠폰으로 마지막까지 신나게 같이 달리시지요. 껄껄!

어쨌건 주인공도 사람이니 미안해서라도 황룡을 처리해야 하게 생겼습니다. 이것 참. 어쩔 수 없이 현지 일 정리되면 바로 중국 가야겠네. ㅋㅋㅋㅋ항상 읽어주시는 독자님들 감사드립니다! 코멘트와 추천 쿠폰으로 마지막까지 신나게 같이 달리시지요. 껄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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