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피바라기-206화 (206/223)

< --  2-7. 최종 결전.  -- >

울먹이는 눈빛으로 입을 오물거리던 윤민아가 마침내 무언가를 결심한 듯 입을 열었다. 아니, 입을 열려고 했다.

그 순간 들어선 방문자가 아니었다면 그녀는 몇 년간 마음에 품고 있던 이야기를 했을지도 몰랐다. 하지만 검후 전지현이 갑작스레 문을 열고 들어서자 그녀는 도로 입을 다물어버렸다.

"와 있었구나."

방에 들어서면서 잠시 흠칫해보이는 전지현의 태도에 윤민아가 조용히 고개를 숙여보였다. 김형준은 윤민아가 무언가 이야기를 꺼내려다 입을 도로 다문 것을 알고 있었지만 전지현의 태도에 물을 수가 없었다.

자신이 1등급 이능력자가 되기도 전부터 이미 지고한 경지에 올라있던 그녀다. 그런데 마치 방안에 누가 있었는지 몰랐다는 듯한 태도라니, 기감을 사용함에 있어 자신보다 더한 능력을 발휘하는 그녀의 태도가 조금은 억지스러웠다.

알 듯 말듯한 그녀의 행동에 그는 속으로 한숨을 내쉴 수 밖에 없었다.

"그동안 별 일은 없었는지, 우리가 너무 무심했구나."

'우리'라는 말이 윤민아에게는 꽤나 아프게 들렸을 법 했지만, 전지현은 짐짓 모르는 척 했다.

"조만간 일들이 정리되면 황룡에 있는 동생들도 데려올 방법을 찾아볼 테니, 너무 걱정하지 말 거라."

결국 그녀가 던진 말에 윤민아가 잠시간의 꿈에서 깨어 현실로 돌아왔다. 지금 상황에서 자신이 걱정해야 할 것은 자신의 감정이 아니라, 동생들의 안위였다.

자신도 모르게 그간 참아왔던 감정을 표출할 뻔 했던 윤민아는 입술을 한번 짓씹고는 고맙다는 말을 전했다.

"그래. 그렇게 시간이 오래 걸리진 않을 테니, 그간 몸이라도 잘 회복하 거라. 고운 얼굴이 다 상한 걸 보니 내 마음까지 안 좋아지는 구나."

말 끝에 윤민아를 지긋이 바라보는 것이 명백한 축객령이 분명했다. 윤민아는 고개를 숙여보이고는 몸을 돌렸다. 몸을 돌리기 이전에 잠시 김형준에게 시선을 주었지만, 조금은 곤란한 얼굴로 아내를 바라보는 그의 모습을 보고는 이내 방을 나서야만 했다.

"왜 그러십니까."

김형준의 시선을 느꼈는지 전지현이 의뭉을 떨었다.

"아. 아뇨. 뭐..."

딱히 뭐라 말할 만한 말도 없었던 터라 김형준이 말을 얼버무리니, 그녀의 표정에 복잡한 빛이 떠올랐다.

윤민아가 떠난 방에 침묵이 감돌았다.

김형준이 그토록이나 좋아하던 함께라서 더 편안하고 아늑한 그런 종류의 침묵이 아니라, 가슴이 갑갑해지는 그런 종류의 침묵이었다.

두 남녀 모두 속으로 수많은 생각을 하는지, 대화가 없는 와중에도 제각각 표정이 수시로 변한다.

"제가 못나 보이십니까."

결국 스스로에 대해 더욱 엄격한 전지현이 입을 열었다. 밑도 끝도 없는 말이었지만,

지금 그녀가 말하는 것이 방금 전의 행동에 대한 것임을 김형준이 어찌 모르겠는가.

단박에 고개를 저으며 부정하니, 그녀가 다시 입을 열었다.

"저도 무척 후회중입니다. 내가 왜 그랬을까. 그 아이에게도 의지할 상대가 필요할 텐데. 그냥 밖에서 그 아이와 당신이 함께 있는 것을 알고나니 왠지 모르게 조바심이 났습니다."

수백년을 살아오고도 처음 맞이한 사랑이라는 감정에 아직은 모르는 것이 많은 그녀였다. 그간 민아에 대해 여러번 언급해오면서도 질투의 빛을 보인 적이 없었건만, 오늘은 또 감정이 복받친 모양이었다.

"말할 필요 없어요. 그냥 당신이 하고 싶은 데로 하면 돼요."

김형준이 다정한 얼굴로 말을 하자 그녀의 얼굴이 붉어졌다.

"수백년 수련을 하고도 아직도 스스로를 절제하지 못한다니, 부끄러워 숨고 싶을 지경입니다."

말로만 그리 말하는 것이 아니라, 진정으로 부끄러워하는 모습이 역력한 그녀의 모습에 김형준은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윤민아.

물론 그에게 있어서 특별한 존재다. 처음 유니온과 연계를 할 때부터 중간에서 그와 유니온을 이어주었던 존재이며, 긴 시간동안 툭닥거리며 알게모르게 정이 많이 쌓인 존재다.

그리고 나중에 가서는 그녀가 자신을 마음에 담고 있다는 사실을 알았고, 그 뒤로는 부쩍 신경이 쓰였다.

한참을 잊고 지내다가 오늘 잔뜩 초췌해진 얼굴의 그녀를 보니 안쓰러운 마음이 컸지만, 그는 이내 그녀에 대한 생각을 접었다.

지금 눈 앞에 있는 사랑스러운 여인만을 평생 사랑해도 부족할 한 평생이다. 자신이 저지른 과오에도 늘 한결같은 그녀를 두고 다른 여자에 대한 생각을 하다니, 자신이 죽일 놈이다.

김형준이 말없이 다가가 전지현을 안아주었다.

"수백년 수련이 무슨 상관이에요. 몇천년을 살아온 메데이아와 이아손도 그렇게 얽혀가며 살아가는데. 사람 감정에 수련의 정도가 어딨어요. 그냥 당신은 편한 데로 행

동해요. 어차피 난 당신 것이잖아요?"

그 따뜻한 말에 힘을 얻은 것일까. 전지현의 얼굴에 서려있던 자괴감이 옅어진다. 하지만 자괴감이 사라진 자리에 조금은 엉뚱한 발상이 자리를 잡았다.

그녀가 대뜸 입을 열어 김형준에게 자신의 생각을 말했다.

"그렇군요. 역시 제가 속 좁게 굴었던 모양입니다. 잠시만 기다리십시오. 민아 그 아이를 다시 불러오겠습니다."

갑작스러운 그녀의 말에 김형준이 몸을 굳혔다. 어느 틈엔가 그의 품에서 빠져나간 그녀가 김형준이 뭐라 말하려는 것을 막았다.

"당신은 제 것입니다. 그렇지요?"

전에 없이 솔직한 질문이라 김형준은 눈만 크게 뜬채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

"그렇다면 된 것입니다."

그리 말하고 방을 나선 전지현을 잡지도 못한 김형준은 한참만에 다시 찾아온 윤민아를 보며 어색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

도대체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 수가 없는 전지현의 행동에 그저 당황한 내심을 내리 누를 뿐이었다.

"아. 검후께서 다시 들어가보라 해서. 네가 뭐 할 말이 있을 거라고."

역시나 검후에게 등 떠밀려 다시 돌아온 것인지 그녀 역시 당황한 기색이 역력했다. 속으로 한숨을 내쉰 김형준은 일단 그녀에게 자리에 앉을 것을 권했다.

그리 고급스럽지 않은 가죽 쇼파에 마주 앉은 그들은 한동안 말이 없었다. 윤민아는 아까의 결심이 한번 무너지고 나자 다시 입을 열기가 쉽지 않았는지, 고개조차 제대로 들지 못하고 애꿎은 탁자 모서리만 쓰다듬고 있었다.

그 모습을 보아하니 먼저 이야기를 꺼낼 기미는 전혀 보이지 않는 지라 결국 김형준이 먼저 입을 열었다.

"유니온에 같이 파견온 동생 이름이 뭐였지?"

이미 시간이 오래 흘러 그녀와 나누었던 이야기가 기억이 제대로 나지 않은 김형준이 물었다.

"... 량쯔요우..."

어렵사리 꺼낸 질문이었지만 짤막한 대답만을 던지고 여전히 고개를 숙이고 있는 윤민아 탓에 그는 곤란한 표정을 지었다.

"동생이 어디 있는지는 알 수 있을까? 만약 찾기만 하면 다시 되돌릴 수 있을 거야."

일단 그녀의 동생에 관한 것을 화제로 삼아 이야기를 이어가니 그래도 어색함이 덜어졌다. 윤민아 역시 어색한 얼굴로나마 고개를 들어 그와 시선을 마주했다.

"유니온이 와해될 때, 청소부들은 D섹터 인근으로 자리를 옮겼어. 아무래도 그쪽에 있는 파견인원들은 유니온과는 별개로 임무를 계속하고 있었으니, 그 쪽이 그나마 편했던 모양이야. 내 동생도 그들 틈에 끼어 있을 거야."

유니온과는 별개로 D섹터의 경계 임무는 계속되어 왔다. 유니온의 타격대와 이능력자들의 자발적인 참여로 난리통에도 별다른 사건 없이 경계가 이뤄졌었는데, 청소부들도 그쪽으로 합류한 모양이었다.

그곳이라면 출신에 상관없이 오로지 능력만으로 평가를 받는 곳이니, 세간의 시선을 피해 가기엔 D섹터만큼 좋은 곳도 없었으리라.

김형준은 그말에 고개를 끄덕여주곤 다시 말했다.

"일단은 네 동생을 이쪽으로 데려올 테니, 이야기를 해봐. 네 말에 의하면 정신적인 세뇌가 들어간 것은 아닐 것 같은데. 어떤 상태인지 우리도 봐야지 알 수 있지."

윤민아가 그말에 몇 번이나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가 그간 2중 첩자로 양쪽에서 이용을 당할 수밖에 없었던 이유 중 가장 큰 이유가 동생들의 존재들때문이었다.

황룡에 있는 동생이야 황룡이라는 단체의 특성상 쉽게 접근할 수가 없지만, 이미 와해된 유니온에 속해있던 량쯔요우라면 데려오는데 아무런 문제가 없었다.

게다가 이능력자들 사이에선 거의 돋보적인 존재가 되어버린 김형준의 한마디라면 당장 오늘이라도 그녀를 이 자리까지 데려올 수 있을 것이다.

그렇게 생각하니 그녀의 마음이 들뜨기 시작했다. 그간 소원해졌던 자매가 다시 상봉을 할 수 있게 되었으니 언니 된 입장으로 어찌 기분이 좋지 않을쏜가.

"한국에서 쓰는 이름이 뭐야?"

조금은 민감한 질문이라 그가 주저주저하다 물었지만, 동생과 다시 만날 수 있다는 사실에 기분이 들뜬 윤민아는 수월하게도 대답해준다.

"윤선아."

그녀의 말에 김형준이 고개를 끄덕여주곤 바로 전화기를 주워들었다. 어딘가로 연락그녀의 말에 김형준이 고개를 끄덕여주곤 바로 전화기를 주워들었다. 어딘가로 연락을 하더니 이내 짧게 윤선아의 이름을 말하고 그녀를 데려와줄 것을 부탁한다.

어조야 부탁하는 어조지만 받아들이는 이는 부리나케 윤선아라는 존재를 수배하여 바로 조치를 취할 것이다.

이미 김형준의 말을 거스를 수 있는 이능력자는 이 대한민국에 존재하지 않았으니까.

김형준이 하는냥을 바라보고 있던 윤민아는 한창 들뜬 기분으로 그를 바라보다가 다시 볼을 붉혔다.

새삼 방금 전에 자신이 꺼내려던 말이 떠오른 탓이다. 게다가 전지현이 자신의 등을 떠밀며 했던 말이 어찌나 노골적이었는지, 한번 기억을 떠올리고 나니 동생의 일도 저만치 사라져버릴 만큼 가슴이 두근댄다.

짤막하게 통화를 끝낸 김형준은 긍정적인 답변을 받아 마음이 가벼워졌는지 미소마저 띤 얼굴이었다.

"잘 됐네. 지금 타격대하고 같이 순찰조로 들어갔는데, 임무가 끝나면 바로 이쪽으로 보내주겠데."

그렇게 가벼운 마음으로 말을 건네는데 윤민아의 얼굴이 심상치 않았다. 많이 초췌해지긴 했지만 그 모습이 오히려 보호본능을 자극하는 모습이라 김형준은 저도 모르게 헛기침을 했다. 새삼 자신의 아내가 무슨 생각을 하는 건지 궁금해진 그였다.

그가 속으로 전지현의 머릿속에 대해 연구를 하고 있는데 윤민아가 용기를 내 입을 열었다.

"검후... 좋은 분 같아..."

상념에 빠져있던 김형준이 그말을 듣고는 정신을 차렸다. 듣고보니 자신의 아내에 대한 칭찬이라 그가 흐뭇한 얼굴로 맞장구를 쳤다.

"좋은 사람이지. 강하고 아름답고 당당하지. 나한테는 과분할 정도야."

김형준의 표정이 조금은 푼수 같았던지라 윤민아가 살풋 웃음을 보였다. 지금에야 이런 저런 일을 겪고 높은 위치에 올라 차분해지긴 했지만, 그녀가 아는 김형준은 원래 천성이 가벼운 남자였다.

암울한 상황에서도 그 가벼움이 변하지 않는 그것이 오히려 매력적이라 그녀는 그 빛에 빠져버린 것이다. 그를 볼 때마다 자신도 힘든 상황 속에서 저렇게 살 수 있지 않을까 하는 동경이 들어 자꾸만 바라보다가 어느 순간 그에게 빠져버렸다.

"맞어. 그런 거 같아. 너한테는 과분할 정도지."

이내 기분 좋게 웃으며 그의 말에 수긍을 하니 김형준도 그제야 편안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 그녀와 그는 원래부터 가릴 것 없이 서로 툭닥거리던 사이, 이제 와서 불편해져버린 것이 아쉽던 차였다.

"이해심도 많으시던걸."

김형준은 전지현의 그릇이 자신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큰 그릇이라는 것을 처음부터 알고 있었기에 쉽게 그 말에 수긍했다. 그렇지 않고서야 지난 자신의 과오를 그렇게 품어주었을 리가 없었다.

"그러니까 나 같은 년한테까지 신경을 써주시지."

자기비하에 가까운 말이었지만 그녀의 태도는 가볍기만 했다.

"나한테 용기를 좀 내보라던데?"

그녀의 자기비하에 조금은 난감한 표정을 짓고 있던 김형준이 눈을 크게 떴다.

아니, 이 사람은 대체 무슨 말을 한 거야.

자신의 아내가 벌인 황당한 일에 그는 진땀을 흘렸다.

============================ 작품 후기 ============================일단 최종 챕터에서 다루기에는 조금 가벼운 이야기일 수 있지만, 이 이야기와 이후 이야기들은 밀접한 관계가 있어 비중을 주었습니다.

이제 슬슬 이 작품의 뒷이야기와 결말부 나올 듯 하네요. 아무것도 모르고 글 시작해서 여기까지 이야기를 끌어온 것이 신기할 지경입니다. 또 함께 해주신 독자님들께도 너무 감사드리고요. 부족한 글이지만 마지막까지 열심히 써나가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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