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피바라기-205화 (205/223)

< --  2-7. 최종 결전.  -- >

상상도 하지 못했던 이야기에 그들 내외는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다.

"믿기 어려운 이야기일 테지만 지금보다 더 강한 힘을 지니고 있던 고조선이 멸망한 데에는 마찬가지 일이 벌어졌다고 생각할 수밖에 없는 상황입니다. 이 결론에 대한 신뢰도는 굉장히 높습니다."

구형찬이 덤덤한 어조로 설명을 해 나가는데 그 말이 어찌나 비현실적으로 들리던지 김형준은 차라리 귀를 막고 싶을 지경이었다.

"다방면에서 이루어진 조사는 굉장히 세밀했습니다. 개중에는 군부대에 속한 이능력자를 대상으로 한 직접적 실험도 있었는데, 당시 외부의 자극을 연달아 받은 이능력자는 결국 폐기되었습니다. 그 와중에 힘에 먹혀버려, 아. 요즘 말로는 잠식이라고 한다죠? 잠식된 모습이 천개의 눈동자와 굉장히 흡사한 모습이었지요."

그의 말에 따르면 분명 비인도적인 방법 역시 대의를 위한다는 명목으로 행해졌을 것이다. 김형준은 새삼 비맥의 맥주가 자신을 돕기는 했지만 인간적인 호불호를 떠나 오직 대의를 보고 움직이는 사람임을 깨달았았다.

그렇게 생각하고 나니 그의 말을 믿지 않을 수가 없었다.

"뭐 자세한 것까지야 말해도 복잡하기만 하니 결론을 말씀드리지요. 지난 서울 참사때 다발적으로 각성한 이능력자들은 천개의 눈동자의 사념 탓입니다. 믿기 어려운 일이지만 사념 자체가 당신들이 말하는 이능력과 진배 없을 정도의 의지를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믿어지십니까? 일개 괴수의 사념이 물리력을 발현한다는 것이?"

그의 설명대로라면 당시 각성한 이능력자들은 온전한 이능력자가 아닌 오직 천개의 눈동자의 사념을 통해 이능을 발현하는 존재들이었다.

게다가 외부의 자극에 의해, 폭주와 잠식을 당한 사례를 생각해보면 지금 대한민국은 시한폭탄을 품에 안고 있는 것과 마찬가지였다.

이야기가 어느 정도 마무리가 되었는지 구형찬이 숨을 가다듬었다. 덤덤한 얼굴로 호흡을 가다듬는다는 것이 꽤나 이질적으로 보였지만, 김형준과 전지현은 신경쓸 여유가 없었다.

그들 입장에서는 갑작스레 날벼락을 맞은 것과도 다름이 없었다. 가뜩이나 다이달로스를 통해 밝혀진 배후만 해도 그들의 머리를 엉망으로 만드는 마당에 또 다른 사건이 터져 나왔다. 미처 정리 못한 머리가 더욱 엉클어지고 혼란스러워질 지경이었다.

이현지.

지난 서울 참사 이전에 김형준이 직접 구해온 아이다. 당시 회복할 수 없는 끔찍한 화상을 입고 서울을 헤매던 김형준이 우연히 만나, 그 처지를 가엽게 여겨 데려왔다. 그 무렵의 김형준은 심적으로도 크나큰 타격을 받은 상태였던 차였는데, 말도 제대로 통하지 않는 이현지를 통해서 꽤나 큰 위로를 받을 수 있었다.

거기에 시간이 흘러 정까지 쌓여버렸으니 이제 와서는 가족이라는 말이 전혀 어색하지 않을 존재였다.

그런데 그런 이현지가 인간이 아니라니. 그의 입장에서는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는 일이었다.

"김형준 맥주가 보호하고 있는 그 아이 같은 경우에는 개중에서도 특출나게 강한 사념을 받은 아입니다. 능력이 강할수록 사념이 더욱 강하게 들러붙은 경우라고 할 수 있으니까요."

유니온을 통해 2등급에 해당하는 이능력자로 판명난 그녀였다. 첫 각성시부터 2등급으로 책정되는 경우는 드물었는데 그녀는 꽤나 특별한 케이스였다.

지금에서나 1등급 이능력자니 1등급 몬스터니가 매체를 통해 쉽게 접할 수 있는 환경이 되어서 그렇지, 예전 같았으면 2등급 이능력자만 해도 당장 유니온의 간부로 포

섭될 정도의 강자였다.

"자극에 견뎌내는 수준은 어떻게 됩니까. 그리고 그 사념이라는 것을 벗겨낼 수 있는 겁니까?"

김형준이 무거운 어조로 물었다.

자극에 견뎌내는 한계가 높다면 자신이 평생 데리고 있을 수 있다. 그는 이제 그 정도 능력이 있는 존재가 되었으니까.

또 만약 방법이 있다면, 어떤 수를 내서라든지 그녀를 정상으로 되돌릴 것이 다짐한 김형준이다. 하지만 구형찬은 그런 그의 의지를 단번에 부숴버렸다.

"되돌릴 방법이라. 그런 건 없습니다. 이제 와서는 당시 각성한 사람들이 정말 사람이 맞는지조차 의심스럽습니다. 어쩌면 이미 죽고 사라진 존재들을 천개의 눈동자가 껍데기만 이용하는 것은 아닐까 합니다."

구형찬의 말에 김형준은 차라리 눈을 감아버렸다.

위태위태하긴 하지만 순수하기만 한 이현지였다. 그런데 그런 그녀의 행동 자체가 잘 만들어진 로봇의 연기와도 같은 것이었다니, 그의 입장에서는 도저히 믿기 힘든 일이

었다.

결국 그날의 비맥주와의 만남은 그것으로 끝이 나버렸다. 이현지에 대한 모든 책임은 김형준이 지는 것으로 하고, 그녀를 김형준이 맡기로 한 것이다.

어차피 김형준과 전지현이라는 보호자보다 더 든든한 울타리는 이 세상에 없을 테니 비맥주도 굳이 그 부분을 물고 늘어지진 않았다.

세계 최고의 강자 부부라는 울타리는 외부의 위협도 막아줄 수 있지만, 반대로 안에서 밖으로 뛰쳐나가려는 위험의 소지를 원천 봉쇄할 수 있을 것이다.

그렇게 무거운 마음으로 김형준과 전지현은 발걸음을 돌렸다.

이제는 집보다 더욱 편안하게 느껴지는 검맥의 아지트에 들어선 김형준은 쓰러지듯 주저앉았다.

연달아 터져나온 사건에 정신이 없기도 했지만, 그 사안 하나 하나의 중대함이 이루 말할 수 없었던지라 심력 소모가 지나치게 컸다.

지금은 아무 생각도 없이 쉬고 싶을 뿐이었다.

하지만 그마저도 마음대로 못하는 상황이었다. 비맥의 맥주 구형찬이 넘겨준 정보도, 다이달로스가 토설한 사실들도 무엇 하나 시일을 다투지 않는 것이 없었다.

그는 전화기를 들어 사람들을 모으기 시작했다.

자신이 돌아온 사실을 뒤늦게 알고 연락을 해온 민용모에게 모든 사실을 알려주고, 또 다른 정보를 찾아보려 했지만 역시나 쉽게 밝혀질 사안은 아니었던 모양이다.

그저 모든 라인을 가동해 군부의 이능력자들의 현재 동태를 살펴보겠다는 말을 끝으로 통화를 마쳤다.

그러던 차에 량차오웨이, 윤민아가 그를 찾아왔다.

서울 지부장의 손에서 구출한 그 무렵 이후로 처음으로 대면한 그녀는 눈에 띄게 수척해져 있었다. 도도하다 말해도 좋을 정도로 차갑던 인상은 온데간데없고 그저 수척한 얼굴만이 남아있었다.

그간 정신이 없어 잊고 있던 차에 잔뜩 상해버린 얼굴의 윤민아를 보자 김형준은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아. 잘 지냈어?"

어색하게 첫 인사를 하니 그녀가 고개를 한번 젓고는 바로 본론을 꺼내들었다.

"이야기는 들었어. 전 라인을 동원해서 정보를 찾고 있다지?"

어떻게 포로에 가까운 신분의 그녀였지만, 김형준과 민용모의 배려로 인해 자유가 보장되어 있었던 터다. 하지만 이런 보안사항에까지 쉽게 접근할 수 있을지는 몰랐던 김형준의 얼굴이 저도 모르게 굳어버렸다.

그 굳어버린 얼굴을 보며 윤민아가 더욱 쓸쓸한 표정을 지었다.

"그런 표정 지을 거 없어. 너도 알다시피 나는 2중 첩자야. 이미 버림 받았지만 정보를 얻을 수 있는 수단이 전부 막힌 것은 아니야."

스스로를 첩자라 말하는 그녀의 모습은 고통스러워 보여 김형준의 얼굴에 아차하는 표정이 스쳐갔다. 뭐라 변명을 하려는데 그녀가 다시 입을 열었다.

"동시다발적으로 각성한 이능력자들에 대한 정보가 필요하지?"

그녀의 말에 김형준이 쓴웃음을 지었다. 변명보다는 지금 처한 상황을 해결해나가는 것이 중요함을 깨닫고는 그가 정색을 했다.

"그러고보니 유니온에서 말했었지? 이능이 사람들을 옮겨다닌 적이 있다고."

그간 정신이 없어 잊고 있었지만 처음 각성한 이현지에 대해 대화를 나눌 때, 윤민아가 그 문제에 대해 언급한 적이 있었다.

당시에는 그저 수동적으로 주어진 지령이나 해결하고 살아오던 김형준이라 이내 듣고 잊어버렸지만, 이제 와서 그 일이 이렇게까지 큰 사건이 되어 돌아올 줄은 당시에는 상상하지 못했다.

"맞아. 그 정보라면 유니온에 아직도 있어. 조사를 한창 하는 와중에 조직이 와해돼버려 쓸만한 사실이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김형준은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그간 유니온의 행적이 너무도 폭거라 스스로 와해시켜버리긴 했지만, 유니온이 마냥 자기 배를 채우는 것에만 급급했던 것은 아닌 모양이다. 지금처럼 조직이 무너져버리기 전에는 D섹터를 그리도 오랜 시간을 잘 관리해왔고, 이쪽 세계 일이라면 꽤나 깔끔하게 정리를 해오기도 했다.

그리고 이능력자의 동시다발적 각성에 대해서도 의구심을 갖고 조사를 했던 모양인데, 중간에 조직이 힘을 잃어 그 바통을 비맥과 허준영이 넘겨받았던 것이다.

지금 와서 생각해보면 유니온이 와해돼지 않았다면 지금보다는 상황이 조금 나았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지만 김형준은 이내 고개를 저었다.

대의를 위한다는 말 이제 지겹다.

수를 헤아릴 수 없는 이능력자들이 그 말에 죽어갔고, 당장 눈 앞의 윤민아만 해도 황룡과 유니온의 대의 속에서 희생된 처지가 아닌가.

"일단 내가 아는 사실만 말해줄게. 더 필요한 정보가 있다면 유니온의 잔존 세력과 접촉해야 할 거야."

그렇게 말한 그녀가 간단하게나마 자신이 알고 있는 정보를 설명했다.

유래가 없던 동시다발적 각성과 바로 직후 이뤄진 이능의 이동, 결국 몇 번인가 이동을 하던 이능은 적합체를 찾아 안착을 했다는 것이다.

그 이후에는 여느 이능력자들과 다를바 없어 당시에는 중요도를 대폭 낮췄지만, 여전

히 수상한 점이 남아있어 조사를 하는 인력은 계속해서 있어왔다는 것이 그녀의 설명이었다.

"그렇다면 유니온의 잔존세력과 만나야겠군. 하지만 쉽게 정보를 줄까? 나는 그들 입장에서 보면 원수나 다름 없잖아?"

설명을 다 듣고 난 김형준의 질문에 윤민아가 고개를 저었다.

"지금 남은 세력이라고 해봐야 유니온의 세뇌에 가까운 교육을 받은, 타격대와 청소부 그리고 하위단체들 뿐이야. 너를 원수라고 생각하는 이들은 간부들뿐이니 그들 입장에선 오히려 반길 지도 모르지."

김형준의 입장에서는 제법 설득력이 있는 말이었다. 사실 그가 칼을 꺼내 든 것도 일반 이능력자들을 위한다는 명목에서였으니, 원수라고 해봐야 고위층을 비롯한 기득권세력들에 한정될 뿐이었다.

남은 이들과 접촉할 가치가 있다고 납득한 김형준은 어깨를 폈다. 조금은 도움이 되는 정보를 접하고 났더니 무거운 마음이 그나마 가시는 기분이었다.

"민아. 넌 어떻게 지냈어?"

지금은 담소를 나눌만한 상황이 아니었지만, 그간 그녀의 존재를 까맣게 잊고 있던 것에 대한 미안함에 김형준이 말을 건넸다.

윤민아는 막 방문을 나서려다가 김형준의 말에 걸음을 멈췄다.

"포로라고 생각할 수조차 없이 잘 지내고 있었지."

어쩌면 그녀의 말에 조금이나마 원망의 감정이 남아 있다고 생각한 것은 김형준 스스로의 자격지심이었을까.

당시에는 뭐든 포용해줄 것처럼 이야기 해놓고 일이 바쁘다는 핑계로 그녀에 대한 것을 까맣게 잊고 있었다.

황룡과 그녀의 동생, 그리고 그녀의 처우에 대해서.

그날 이후에도 그녀는 여전히 같은 시간을 살고 있었으리라. 아무것도 해결돼지 않고 아무것도 장담할 수 없는 미래 속에서 그저 홀로 끙끙대며 앓고 있었을 것밖에 할 수 있는 게 없었을 것이다.

변명처럼 입을 열려는 김형준의 입을 윤민아가 막아버렸다.

"원망하는 건 아니야. 내 주제에 이렇게 몸 성히 살아서 자유를 누리는 것만 해도 엄청난 호사라는 거 나도 알아."

원망하는 건 아니라 말하지만 그녀의 어조에는 섭섭함이 묻어있다. 애써 숨기려고 했지만 대화가 길어지자 감정을 참지 못하는 기색이었다.

"그런 말 하지 마. 너는 최소한 검맥과 내가 존재하는 한, 량차오웨이가 아닌 윤민아야. 너를 첩자라고 매도할 사람은 없어."

결국 꺼내든 변명 아닌 변명이 듣기에도 가당찮았다. 스스로 그녀에게 희망고문을 하고 있음을 알고 있는 그였지만, 그는 그녀라는 존재를 가볍게 생각할 수가 없었다.

이성에 대한 감정은 아니었다. 그런 마음을 품자니 자신이 아내에게 저지른 과오가 너무도 컸고, 그녀에 대한 헌신과 사랑이 확고했다.

스스로도 단정내릴 수 없는 감정 속에서 김형준이 윤민아를 바라보았다. 그 다정한 눈빛에 갑작스레 복이 받쳤는지 윤민아의 눈동자가 금세 뿌옇게 바랬다.

이내 뺨을 타고 흘러내리는 눈물을 느끼며 윤민아는 김형준의 시선을 마주보았다. 짧지만 길게만 느꼈던 시간을 뒤로 하고 윤민아는 김형준과 그렇게 눈을 마췄다.

============================ 작품 후기 ============================복선에 대한 것은, 나름 변명을 하자면 여기 저기 꽤 깔아두었었는데.

아마 너무 오래 휴재를 해서 호흡이 끊기다보니, 복선에 대해 기억하기가 어려우신 듯 합니다. 노골적이진 않지만 꽤나 여기 저기 장치를 깔아두었는데 말이죠.

이게 다 불성실하게 연재를 한 글쟁이의 잘못입니다. ㅠㅠ 용서해주소서.

지난 화에 코멘트로 달아주신 것처럼 사념에 대한 언급은 57화에서도 있었고 그 이후에도 쭈욱  있어왔습니다. 지금 밝히자니 네타가 될 것 같아 입이 간질간질 합니다.

다만 완결이 날 즈음에는 모든 부분을 납득하진 못 하더라도 굵직굵직한 일들에 대한 것들은 아! 이래서 그떄 그랬구나 하고 생각하실 수 있는 전개를 보여드리겠습니다.

항상 읽어주시는 독자님들 감사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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