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2-7. 최종 결전. -- >
허준영의 눈빛에 공허한 빛이 떠올랐다. 그렇게나 아등바등 살아왔건만, 이제 와서 모든 것이 다 물거품으로 돌아가 버렸다.
수많은 상념과 기억들이 그의 머릿속을 엉클어놓다가는 이내 사라졌다. 지난 잡념따위야 어찌 되었건간에 이제 스스로에게 주어진 시간이 많지 않음을 깨달았다.
당장 반쯤은 소멸 되버린 자신의 육신만 해도 당장 죽어도 이상할 것이 없는 치명상이었다. 아니, 지금처럼 살아있는 것이 도리어 기괴해 보일 지경이다.
"결국 이리 됐군요."
피거품을 내뱉으며 던진 말이 고작 한마디였다. 김형준과 전지현이 그를 쳐다보는데, 그 시선에 담긴 감정이 복잡했다. 크게 보면 수천만 희생자를 만든 사건의 배후 중 하나고, 또 작게 보아도 자신들의 생명을 위협한 인물이다.
눈빛이 고울 리가 없지만 어쩐지 그 비틀린 집념이 안쓰럽기도 해, 입맛이 썼다.
"네놈의 죄는 저승에 가서 사죄해라."
하지만 그런 그를 동정할 수조차 없는 게 김형준의 입장이었다. 그러자니 영문도 모르고 죽어간 수천만 생목숨이 너무도 가치 없게 되어 버린다.
싸구려 동정으로 모든 사건의 과오를 덮을 수는 없었다. 김형준이 마음을 다잡고 기세를 일으켰다.
단 하나뿐인 날개가 넓게 펼쳐지고 반대편에는 검붉은 기운이 뭉쳐 날개의 짝을 맞췄다. 처음 변이할 당시의 비현실적인 기세는 아니지만, 충분히 압도적인 기세라 가뜩이나 창백하게 질려있던 허준영이 더욱 하얗게 질려버린다.
"그래야겠죠? 하하."
억지로나마 입가를 비틀며 초연한 척을 하지만, 그의 눈자위에 짙게 내려앉은 허무함과 죽음의 기운이 숨김없이 내심을 보여준다.
"그런데 어떻게 한다. 사죄해야 할 영혼도 그 곳엔 없을 텐데. 이미 그들의 영혼은 잘게 갈아 넣어 제물로 바쳤는데. 누구한테 사죄해야 하죠?"
김형준의 기세가 사그라들었다. 저 혼자 중얼거리는 허준영의 목소리가 점점 잦아드는 것이 그대로 두어도 곧 생과 이별할 것 같아서였다.
전지현과 김형준이 서로 무거운 시선을 주고 받았다. 그들이 생각한 악인의 최후와는 너무도 다른 허준영의 모습에, 마음이 더욱 무겁게 가라앉았다.
"아. 아직 해야 할 일이 많은데. 이게 죽는 건가요? 눈앞이 잘 안보이네요. 꽤나 무섭네요. 죽는다는 거. 별거 아닐 줄 알았는데..."
애써 담담함을 유지하던 목소리에 흐느낌이 섞여들었다.
"다른 사람들도 이랬으려나. 아니다. 그 사람들은 자기가 죽는다는 것도 몰랐겠지."
두서없이 떠들어대는 허준영의 목소리가 그의 생이 끝나감을 보여주었다.
"아... 내가 뭘 해야 했더라. 하긴 이제 와서 소용없으려나..."
헤아릴 수 없이 긴 세월을 살아온 절대 강자라고는 생각할 수 없는 그의 마지막 모습은 마치 어린아이가 투정을 부리는 듯한 모습이었다.
이제는 초점조차 사라진 눈동자로 알아들을 수 없는 말을 웅얼거리던 허준영이 결국
고개를 꺾었다.
작게나마 웅얼거리던 목소리가 거친 산봉우리의 바람에 섞여버리고, 그마저도 이내 침묵을 한다.
한참을 멍하니 허준영의 육신을 바라보던 전지현이 기운을 일으켜 그의 시신을 불태웠다. 한순간 피어난 불꽃이 다시 사그라들고 그 자리에 남은 것은 아무 것도 없었다.
유언은커녕 재조차 남기지 못하고 생을 마감한 허준영, 도맥에서 자라 여덟 선인들의 진전을 이어받아 대한민국 술법사의 맥을 이어오던 큰 별이 그렇게 져버렸다.
선인들에 의해 짓밟혀버린 인간에 대한 애모와, 비틀어진 집념으로 점철된 삶이었다. 그 어떤 장엄함도, 비장함도 없이 비참하고도 비참한 종말이었다.
허준영의 죽음을 씁쓸하게 곱씹고 있던 전지현과 김형준은 이내 가까이 접근한 또 다른 기운에 고개를 돌렸다.
신경 쓰지 않는다면 그 자리에 있는지조차 모를 정도로 미약한 존재감을 지닌 기이한 인상의 사내가 그들을 바라보고 있었다.
"비맥주님 덕분에 잘 마무리가 되었습니다."
김형준이 고개를 숙여 보이며 말하자 비맥주가 여전히 속을 알 수 없는 표정으로 고개를 젓는다.
"그럴리가요. 허준영의 술법은 그대를 잡아둘 정도로 강력하지 않았습니다. 다만 시간이 조금 지체 되는 것 정도야 어찌 할 수 없는 일이었지만, 그마저도 혼자 알아서 잘 빠져나오지 않았겠습니까."
겸손의 말이라고 하기에는 그 어조가 너무도 무덤덤하여, 듣는 김형준이 무안할 정도였다.
비맥의 맥주 구형찬이 나타난 것은 김형준이 막 사자들을 반쯤 휩쓸고 났을 무렵이었다. 그렇게 나타난 그는 너무도 간단한게 허준영이 펼친 술법의 핵을 찾아 파괴해버렸고, 뒤이어 모든 상황을 설명해주었다.
비맥은 이 땅에 존재하는 모든 맥을 감시하기 세워진 단체라는 충격적인 말과 함께 근래 들어 허준영이 계획한 일들을 간단하게 설명해주었다.
당시에는 전지현이 위기에 처한 줄도 모르고 비맥주와 이런 저런 이야기를 나눴는데, 심상치 않은 기운의 파동에 뒤늦게 달려오지 않았으면 평생 한이 될 뻔 했다.
검후의 힘을 너무 과신했고, 적을 얕본 탓이었다. 어쨌거나 일은 잘 해결되어 모든 일이 잘 마무리가 되었다. 앞으로도 해결할 일이 무궁무진했지만 허준영을 상대한 것만으로 심력이 고갈되었다.
육체적인 압박감보다는 정신적인 피로가 너무도 커 당분간은 회복에 전념을 해야 하리라.
"이제 대한민국의 전승은 검맥과 비맥밖에 남지 않았구나..."
전지현이 탄식과도 같은 한숨을 내뱉었다.
그녀의 말마따나 대한민국에 존재했던 무수한 맥들은 이미 사라졌고, 그나마 남은 검맥과 궁맥, 비맥, 도맥 중 두 개의 맥이 맥주를 잃었다.
어쩌면 그간 전승자를 구해 비전을 전수했을지도 몰랐지만, 지금의 상황을 봐서는 크게 기대할 수가 없었다.
"어쩔 수 없지요. 그나마 궁맥은 이미 예전부터 비전의 상당부분을 소실하지 않았었습니까. 그마저도 잃었다는 것이 아쉽지만 대승적인 측면에서 생각했을 때 큰 손실이라고 생각하진 않습니다."
구형찬이 감정 없는 어조로 상황을 분석했다.
검맥은 오로지 산에서 수련하는 이들로 이루어진 곳이었으며, 세상의 일에 크게 관여하지 않았다. 그 덕에 수 많은 외침과 난리속에서도 오의와 비전을 온전하게 이어올 수 있었는데, 궁맥은 관과 지나치게 친밀했던 탓에 몇 번인가의 외란에서 상당부분의 비전을 소실당했다.
"게다가 박진희 그 사람은 그릇이 지나치게 작았습니다. 따지고 보면 맥의 비전을 소실한 윗분들이 술과 법에 너무 집착했던 탓이죠. 기, 심, 예를 온전하게 닦아주었다면 오늘과도 같은 일은 없었을 겁니다."
전지현은 그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허준영이 배신을 한 이유도 이해할 순 없지만 어느 정도 납득은 할 수 있었다. 인간에 대한 애모가 비틀려 마선으로 끝나는 경우는 비일비재했으니.
하지만 궁맥주의 배신은 그녀에게 있어 일고할 가치도 없었다.
수양을 한다는 이가 공명심에 눈이 멀어 질투로 일을 그르치다니. 그녀의 입장에서는 도저히 용납할 수 없는 이유였다.
"그리 말씀하실 것도 아닙니다. 따지고 보면 세상을 좌지우지할 힘을 갖고도 숨어 살아야 했으니, 그런 불만이 쌓일만도 하지요. 맥의 수행자들도 엄연히 사람이니까요."
구형찬 비맥주가 박진희 맥주의 입장을 어느 정도 이해한다는 투로 이야기 하자 전지현이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천상 무인인 그녀에게는 이해할 수 없는 공명심과 사욕이었다.
구형찬은 그런 그녀의 내심을 알면서도 말을 돌렸다. 그가 모습을 드러낸 것은 더욱 시급한 일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 일이 아니었다면 김형준과 전지현을 돕지 않았으리라. 어차피 처음부터 자신의 도움이 필요할 것 같지도 않았던 이들이었던데다가, 자신의 입장에서는 허준영이 사라진 뒤에도 배후 세력과 접촉을 유지하는 것이 더욱 이득이었다.
하지만 한가지 사건으로 인해 모든 계획을 수정해야 했다.
"그 현지라는 아이는 어디 있지요?"
구형찬이 전혀 생각지도 못한 존재를 꺼내들었다. 전지현과 김형준은 본능적으로 불길함을 느끼면서도 애써 담담하게 대꾸했다.
"일단은 검맥의 수현이란 아이에게 맡겨두었습니다."
김형준의 대답에 구형찬이 다시 물었다.
"검맥에 있다는 말씀이시군요."
조금은 숨을 돌린듯한 그의 태도에 결국 불안함을 참지 못핸 김형준이 물었다.
"보안을 유지하느라 아직 얼굴을 보진 못했지만, 마지막 연락이 닿았을 때까지만 해도 그리 들었습니다. 그런데 우리 현지는 갑자기 왜?"
김형준의 질문에 구형찬이 난감한 표정을 지었다. 어지간한 일로는 표정조차 바뀌지 않던 그의 얼굴에 떠오른 기색에 김형준은 덜컥 겁이 났다.
불길함이 스물스물 기어올라와 그의 발목을 잡아끌기 시작했다.
"그렇게 말을 하다 말면 제 마음이 어떻겠습니까. 하던 말 마저 하세요."
다급한 마음에 조금은 공격적으로 변한 그의 말에 구형찬이 잠시 입술을 깨물고는 말했다.
"일단 제 말을 끝까지 들어주겠다고 약속하십시오."
그의 말이 어찌나 비장한지 김형준은 더욱 불안해져 일단 고개를 끄덕여주었다.
"좋습니다. 그럼 말씀을 드리지요."
그가 입을 열자 전지현과 김형준은 온 신경을 모아 그의 말에 집중했다.
"먼저 이런 말씀을 드리게 되어 유감이지만, 현지라는 아이의 신병이 필요합니다."
갑작스러운 말이 얼마나 황당했던지 김형준이 구형찬의 당부도 잊고 입을 열려다가 도로 다물었다.
"혹시 그간 그 아이에 대해 이상한 점을 발견하시진 못하셨는지요."
구형찬의 말에 그들이 기억을 더듬었다. 하지만 현지라는 존재가 워낙에 온전치 않은 상태에서 그들과 만났던 터라 이상한 점이 너무도 많아 도리어 무엇이 이상한지 알 수 없게 되어 버렸다. 자신 없는 표정으로 고개를 저으니 구형찬이 한숨을 내쉬었다.
"길게 말하지 않겠습니다. 솔직하게 말씀드리죠."
김형준과 전지현이 서로의 손을 붙잡고는 시선을 교환했다. 알 수 없는 예감이 그들의 가슴을 갑갑하게 내리눌렀지만, 그들은 애써 담담한 기색을 해보였다.
"현지라는 아이는 인간이 아닙니다."
청천벽력과도 같은 말이었다. 너무도 놀란 김형준 내외가 눈만 크게 뜬채 입만 뻥긋거렸다. 구형찬은 차라리 그들이 제정신을 차리기 전에 모든 사실을 털어놓자 생각했는지, 빠르게 말을 이었다.
"현지라는 아이는, 천개의 눈동자가 서울에 퍼트린 수 많은 사념 중 하나입니다."
이미 연아와 함께 자신의 동생, 내지는 아이라고 생각하고 품은 현지였다. 그런 그들에게 구형찬의 말은 날벼락과 다름이 없는 그런 종류의 것이었다.
"군부가 창설한 이능력자 부대 기억하십니까? 서울 참사 사태에서 새롭게 각성한 이능력자들을 선점해서 만들어낸 부대죠. 저희 비맥은 그 일에 대해 조사를 하고 있었습니다."
구형찬의 설명이 이어졌다.
"그런데 말입니다. 대한민국뿐만 아니라 세계 어디를 가보아도 이토록 한지역에서 동시다발적으로 각성한 예는 없었습니다. 그래서 저희는 전승되는 이야기를 조사하면서 군부의 이능력자 부대원들을 조사했지요."
뒤늦게 정신을 차린 김형준이 떠듬거리며 물었다.
"그런데 왜 현지가..."
말 꼬리를 흐리는 그를 난감하게 바라보던 구형찬이 대답했다.
"조사는 저희뿐 아니라 허준영 역시 참여했었습니다. 그는 잘만 하면 세계를 다시 한 번 혼란에 빠지게 만들 동기로 이 일에 파고 든 것이지요. 어쨌건 허준영과 제가 조사를 해서 밝혀진 바로는 당시 각성한 이능력자들은 괴수의 사념에 잠식된 것이라는 결론입니다."
============================ 작품 후기 ============================지난 화 코멘트에 달아주신 비평과 조언은 깊게 새겨듣도록 하겠습니다. 앞으로 남은 전개를 펼침에 있어 유의하도록 하겠습니다.
조언과 비평, 비판은 허접스러운 글쟁이를 성장시키는 좋은 단백질원입니다.
전개를 펼침에 있어 유의하도록 하겠습니다.
최대한 반영하여 극을 이끌어가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