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피바라기-203화 (203/223)

< --  2-7. 최종 결전.  -- >

허준영의 말을 들을 틈도 없지 전지현은 연달아 몸을 날려야했다. 계속해서 화살이 날아왔기 때문이었다.

한 대 한 대에 담긴 기운이 예사롭지 않았던 터라 전지현은 좁은 산봉우리를 이리 저리 누비며 화살을 피해야 했다.

"박진희!"

한창 화살을 피하느라 정신이 없던 전지현이 건너편 산봉우리에서 연달아 시위를 퉁기는 궁맥의 맥주를 발견했다. 거의 2km에 가까운 거리가 떨어져있음에도 불구하고 활을 쏘는 박진희나, 이리 저리 몸을 날리는 전지현이나 그 거리에 구애를 받지 않았다.

이미 인간의 경지를 초월한지 오래인 초인들의 전투에 애꿎은 하늘만 울어댔다.

귀를 찢을듯한 파공음이 쉬지 않고 터져 나왔다. 이미 전지현과 상당한 거리를 벌린 허준영은 느긋하게 진언을 외우기 시작했다. 그의 본신 능력을 생각하면 저렇게까지 진언을 오래 외운다는 것이 불안해진 전지현이다.

몇 번이나 박진희의 화살을 피해 거리를 좁히려 했지만, 박진희는 검후에게도 쉬운 상대가 아니었다.

예로부터 궁에 매진해온 우리 민족의 특성상 궁맥의 비기들은 검맥의 검도에 못지않았다. 게다가 그저 오의만을 전해온 검맥과는 달리 궁맥에는 신궁이라 불리는 유물이 있었으니, 전지현이 화살을 허투루 대하지 못하는 이유가 바로 거기에 있었다.

잠시라도 방심하면 허공중에서 몸을 틀어 달려드는 애깃살에 그녀는 꽤나 고전을 했다. 가뜩이나 작고 가는 애깃살이다. 교묘하게 그녀의 회피동작에 맞춰 사각으로 찔러오는 화살들을 발견하기조차 쉽지 않았다.

전지현이 박진희의 활을 피해 정신이 없는 사이, 허준영의 술법이 슬슬 마무리가 되어간다. 그의 주변을 어지럽게 맴돌던 빛무리들이 이제는 더 이상 보이지 않았다. 그렇게 사라진 빛무리들이 그의 양손바닥에 모여들기라도 한 것일까.

천천히 하늘을 향해 치켜든 그의 손에서 섬광이 이글거렸다.

"네 이놈들! 천벌이 무섭지도 않느냐!"

허준영의 술법이 이미 완성된 것을 느낀 전지현이 사납게 호통 쳤다. 그로써는 이렇게 된 이상 시간을 끌어 김형준을 기다리는 수밖에 없었다.

그런 그녀의 내심을 눈치 챘는지, 허준영이 이죽거렸다.

"혹시 김형준씨를 기다리십니까? 그에게도 특별한 분이 마중을 나갔는데, 아마 이야기가 길어지지 않을까, 하는데."

그의 말에 전지현이 눈을 부릅떴다. 이미 도맥과 궁맥이 배신을 했다는 사실을 확인 한 상황이다. 이제 와서 하나가 더 배신을 한다고 하여도 이상하지 않았다.

"비맥 마저..."

그녀의 입에서 탄식과도 같은 한마디가 새어 나왔다.

"비맥은 저도 기대를 하지 않았는데 말이죠. 그치들이야 검맥보다 더한 독불장군 아닙니까?"

역시나 그녀의 불길한 예감은 맞아떨어졌다. 단지 사자들의 공격이라면 김형준 혼자서도 얼마든지 격퇴해낼 수 있다. 지금의 그는 몇 번의 탈피와 변이를 통해 감히 그녀로써도 가늠할 수 없는 강자가 되었으니까.

하지만 비맥이라면 이야기가 달랐다.

다른 맥들과는 다르게 알려진 것이 거의 없는 그들에 대해 그녀가 아는 것이라고는 단 하나였다. 암살자.

모든 맥이 도를 추구할 때, 오로지 실리만을 염두에 두고 수천년을 이어온 맥이다. 그들에 의해서 위정자들이 비명에 간 것이 대체 얼마며, 대한민국의 역사가 바뀐 적이 얼마인가.

게다가 그들의 손에 명을 달리한 것은 권력뿐인 위정자들만이 아니었다. 몇 번이나 타국의 강자들을 암살해온 그들이다. 개중에는 전지현 그녀로써도 승패를 가늠할 수 없는 인물이 몇이나 있었다.

암살의 프로페셔널.

그들이 비맥의 전승자들이다. 아무리 김형준이 강하다고 해도, 어둠에서 찔러오는 비수에 심장이 꿰뚫려서야 살아남을 리가 없었다.

차라리 궁맥과 도맥이 김형준을 공격했다면 마음이 편할 것을, 뒤늦게 그녀의 얼굴에 다급함이 서렸다.

허준영이 그런 그녀의 표정을 보며 비열한 미소를 지었다.

"천하의 검후도 그런 표정을 짓는군요. 늦게 배운 도둑질에 해 뜨는 줄 모른다더니, 검후가 딱 그짝입니다."

명백한 조롱이었지만 전지현은 반박하지 못했다. 그녀의 몸이 멈춰설 기미가 보이자 갑작스레 기세를 올린 화살들이 날아든 탓이다.

방금 전과 마찬가지로 몸을 날리려던 그녀가 다시 걸음을 멈췄다. 그녀의 동선을 염두에 두고 날렸던 화살들이 그녀를 스쳐간다.

"내가 너무 안일했구나."

그녀가 멈춰서기가 무섭게 화살 세례가 더욱 거세어진다. 전과는 다르게 그녀가 아주 작은 동작만으로 화살을 피해대는데, 스치지도 않은 화살이 단지 지나간 것만으로도 그녀의 몸에 생채기를 낸다.

금세 온몸에 시뻘건 선혈이 흘러내리며 그녀의 의복이 넝마가 됐다.

"그만 주절거리고 끝내!"

저 산봉우리 너머에서 들려오는 박진희의 사자후에 허준영이 고개를 저었다. 검후를 견제하기 위해 포섭한 궁맥의 맥주였지만, 역시 그녀 하나로는 검후를 감당할 수 없었던 모양이다.

"당신이 그러니까, 평생 검맥의 전인들을 못 넘어서는 겁니다."

조그맣게 중얼거린 허준영이 양손에 그러쥔 섬광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새하얗게 작렬하는 섬광이 마치 태양처럼 손에서 이글거렸다. 이제 그 손을 앞으로 내뻗기만 하면, 전지현은 이 세상에 흔적조차 남기지 못할 것이다. 특별히 그녀를 상대하기 위해 수십년을 고련해온 술법이니까.

허준영의 시선이 양손을 떠나 전지현에게 향했다. 피투성이가 되어 무언가를 읊조리는 것이 검도의 지고한 지경을 사용하기라도 할 모양이었다. 박진희의 화살을 본능적으로 피하고 있었지만 기세에 이미 넝마가 된 모습이 처참했다.

그녀가 세상에 출도하고 난 이후, 이렇게까지 낭패를 보았던 적이 있을까.

하지만 허준영은 역설적으로 그가 보았던 어떤 모습보다 지금의 검후가 아름답다고 생각했다. 넝마가 된 옷 사이로 드러난 속살이 아름다운 것이 아니었다. 피에 젖어 그

대로 드러난 굴곡이 그의 감탄을 자아낸 것도 아니었다.

온몸에 피를 흘리면서도 반드시 상대를 격살하겠다는 의지, 바로 눈 앞에서 어마어마한 기운이 휘몰아치는데도 꿈쩍도 하지 않는 배짱, 그리고 모든 것을 아울러 반드시 성공시킬 수 있다는 자신감.

그 모든 것이 허준영의 눈에는 너무도 아름답게 보였다. 이제 와서 그녀를 지워버리기가 아까워질 지경이었지만, 그는 고개를 저었다.

어차피 모든 것이 끝난 자리에 인간이 설 자리는 없었다. 그녀 역시 인간이었고 자신 역시 인간이었다. 종내에는 모두 무로 돌아갈 존재들, 이제 와서 의미를 두어 무엇하랴.

허준영의 손이 앞으로 내밀어졌다. 그러쥐고 있던 섬광을 살며시 풀어놓는 그의 손동작이 탄금을 하듯 우아했다. 기이할 정도로 느린 그 손동작에 웅크리고 있던 섬광이 몸을 떨어댄다.

그리고 이내는 우리에서 뛰쳐나가는 맹호처럼 그의 손을 벗어나 허공에서 작열했다.

그 마지막 순간까지도 흐트러짐 없이 무언가를 읊조리고 있던 전지현을 보며 허준영

은 조금은 허탈한 미소를 지었다. 이제 곧 그녀는 이 세상에서 흔적도 없이 사라질 것이므로.

소리도 없었다. 아무런 파동도 없었다. 그저 세상의 한부분을 지우개로 지우기라도 한 것처럼 방금 전까지 그들이 서 있었던 산봉우리가 그대로 사라졌다. 도저히 인간이 벌인 일이라고는 생각할 수도 없을 정도로 광경이라 오히려 섬뜩해보일 지경이었다.

인간이 산 하나를 들어 엎는 다면 이렇게 놀라울까. 아니다. 지금의 놀라움에는 미치지 못할 것이다. 허준영은 산 하나를 아무런 소란 없이 그대로 지워낸 것이다.

유를 무로 돌리는 권능.

도맥에서 그토록이나 그에게 매달릴 수밖에 없던 권능이었다. 비록 선인들의 금제로 인해 이제는 수발이 자유롭지 않아 술식과 진언의 힘을 빌려야 했으나, 그것만으로도 그는 엄청난 이적을 보였다.

도맥의 전인들이 차마 허준영의 도기가 깨어졌음을 알고도 내치지 못한 이유가 바로 저것이다. 하지만 그들이 그토록이나 기대했던 도인으로써의 허준영은 진즉에 사라졌고, 그 자리에 남은 것은 파천과 역천을 꿈꾸는 마선이 있었을 뿐이다.

"곧 그대의 가족들도 보내드릴 테니 편히 쉬시구랴."

보이지 않는 무언가를 딛고 있는 듯, 단단히 허공을 딛고 선 허준영이 조금은 씁쓸하게 중얼거렸다.

"누구 맘대로!"

고개를 저으며 돌아서려는 허준영의 귀에 누군가의 음성이 들려왔다. 이 곳에서 들려선 안될 음성이라 허준영이 크게 놀라 몸을 돌리는데 번쩍 하며 빛이 그를 스쳐갔다.

빛이 스쳐간 자리에는 아무것도 남지 않았다. 마치 방금 전 허준영의 술법을 축소해놓은 듯한 광경이었는데, 이번에 사라진 것은 산봉우리가 아닌 허준영의 육신이었다.

가슴을 기준으로 그 아래의 육신이 그대로 사라진 허준영이 고통보다는 경악이 컸는지 입을 뻐끔거렸다.

그의 시선이 향한 곳에는 방금 전까지만 해도 없었던 붉은 갑주의 인물과 전지현이 있었다.

"어.. 어떻게..."

얼이 빠진 허준영의 질문에 붉은 갑주의 인물, 김형준이 심드렁하게 대답했다.

"글세. 어떻게 일까."

아무렇지도 않게 허준영에게 대꾸하는 그였지만, 거대하게 펼쳐진 날개가 온전치 않았다. 한쪽 날개가 완전히 사라져버린 그는 반대편의 날개만을 이용해서 간신히 허공을 딛고 서 있는 중이었다.

모든 물질을 무로 돌리는 어마어마한 권능이었지만, 김형준은 그저 날개 하나만을 잃은 모양이다.

"마중나온 분이 워낙에 좋은 분이라. 이곳까지 친절하게 안내 해주셨거든."

김형준이 어깨를 으쓱해보이더니 먼 곳을 바라보는 시늉을 했다. 손을 눈 위에 올리고 경치라도 구경하는 듯한 모습이었는데, 허준영이 눈동자만을 굴려 간신히 그의 시선을 쫓는다.

그들의 시선이 향한 곳에는 이쪽의 상황을 파악하기 위해 안간힘을 쓰는 박진희가 보였다. 눈을 크게 뜨고 이쪽을 보며 뭐라 입을 오물거리는데 아무래도 욕지거리인 듯

했다.

허준영의 눈동자가 더욱 커졌다. 박진희의 뒤에서 솟아난 검은 그림자를 발견한 탓이다. 등 뒤에서 나탄 그림자가 어찌나 은밀했던지 박진희는 여전히 갈피를 못 잡고 입만 오물거리고 있을 뿐이었다.

검은 그림자가 잠시 움찔거리다가 넓게 펼쳐졌다. 그리고는 그대로 박진희를 집어삼켜버렸다. 잠시 그림자 속에서 무언가 요동을 치듯 그림자의 표면이 출렁거렸지만, 이내 잠잠해졌다. 그리고 그 자리에 나타난 사내가 이쪽을 보며 손을 흔들었다.

"비맥 맥주 구형찬..."

사람 하나를 통째로 집어삼킨 검은 그림자의 주인이 누구인지를 깨달은 허준영이 허탈하게 중얼거렸다.

그의 머리가 빠르게 회전하며 사태를 파악했다.

"그런가. 그는 애초부터 우리와 함께 할 생각이 없었던 모양이구나."

한마디 한마디에 담긴 감정이 허탈하고 씁쓸함뿐이다.

"당신이 예상한대로지. 그는 처음부터 당신과 일당을 감시하기 위해 그대들에게 접근했던 모양이야. 비맥의 맥주다운 행동이랄까. 난 그 덕분에 아무런 상처 없이 이 자리까지 올라올 수 있었고."

김형준이 허준영을 사납게 노려보며 말했다. 뒤늦은 분노가 그의 얼굴에 차올랐는데, 까딱 잘못했으면 아내를 잃을 뻔 했으니 그의 입장에서는 화가 날만도 했다.

비맥의 맥주가 아니었다면 틀리없이 그리 됐을 것이다. 방금 전 서둘러 올라와보니 허준영의 술법이 여간 살벌했던 게 아니라 김형준은 진땀을 흘렸다.

"오실 줄 알고 있었습니다."

어쩌면 막무가내일지도 모를 믿음이지만, 섬광에 휩쌓이는 그 마지막 순간까지 자신의 검도를 읊조리며 반격을 준비하던 그녀였다. 김형준은 부리나케 그녀를 감싸안고는 전력을 다해 공간을 비틀었다.

그리고 다행스럽게도 날개 하나를 바치고 자신들은 무사할 수 있었다.

============================ 작품 후기 ============================으아아아. 본업이 바빠서 업뎃이 좀 늦어졌습니다. 양해 부탁드립니다.

그리고 지난 화 코멘트에 도에 대한 말씀이 있는데, 미리 알려드립니다. 이 소설에 나오는 술법이나 도에 대한 구절, 기술등등은 한자로 쓰인 도경이나 기타 서적들을 한글로 그대로 풀어 적은 것이오니 오해 없으시기를 바라겠습니다.

교포라서 그런지 저는 한글을 무척 사랑하거든요. 같지도 않은 영어를 굳이 끼워 넣거나 한글로 할 수 있는데 한자를 남발하는 건 제 취향에 맞지 않답니다.

여튼 항상 읽어주시는 독자님들 감사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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