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피바라기-202화 (202/223)

< --  2-7. 최종 결전.  -- >

김형준에게 사자들을 맡기고 홀로 산봉우리에 오른 전지현은 이내 도맥이 위치한 산맥의 가장 높은 곳에 도달할 수 있었다.

서둘러 허준영의 뒤를 쫓아왔는데 분위기가 심상치 않자 그녀의 고운 미간이 찌푸려졌다.

이곳이 깊고 깊은 산속 끝자락도 아닐 텐데, 봉우리 끝이 협소한게 마치 칼을 대지에 박아둔 모양새였다. 원래 이곳이 이랬었나 싶을 정도로 생경한 모습이라 그녀가 조심스럽게 애검을 뽑아들었다.

사방에 들어찬 불길함이 스물스물 그녀의 몸을 잡아 눌렀지만, 그녀는 검을 한번 떨치는 것으로 속박에서 벗어났다.

"이 곳이 그대가 정한 무덤인가?"

차갑게 내던지는 한마디에 허준영이 모습을 드러냈다.

"글쎄요. 그대와 그대의 낭군이 잠들 곳이라면 맞습니다. 제가 준비한 그대들의 무덤입니다."

여전한 얼굴로 지껄이는 모습이 수백, 수천 사자를 농락한 이답지 않게 맑은 기운이 가득했다. 그 모습에 그녀는 다시 한숨을 내쉴 수밖에 없었다.

"무엇이 그대를 이렇게 만들었는지 알 수 없으나, 부디 미몽에서 깨어나거라."

위엄을 담아 호통을 쳐보지만 허준영은 미동도 하지 않았다. 그저 평소와 같은 미소 띤 얼굴로 그녀를 바라볼 뿐이다.

"미몽이라..."

그 짧은 한마디에 헤아릴 수 없이 많은 감정들이 얽혀있었다. 자신의 애검을 진즉에 뽑아든 전지현이었지만, 그녀는 섣부르게 움직이지 않았다. 오히려 검을 자연스럽게 늘어트리고 허준영이 입을 열기를 기다렸다.

"무엇이 미몽입니까?"

조금은 공허한 듯이 던진 질문은 굳이 대답을 원하지 않는 그런 종류의 것이었다.

"도맥의 가르침 중에 이런 것이 있지요. 금침에서 자고, 은수저로 찬을 들고, 금실로 짠 옷을 입어도 부질없다 했죠. 세상살이 누려도 못 누려도 긴 꿈과도 같은 것. 도인

은 꿈에서 깨어나야 한다고 말하더군요."

이제껏 벌여왔던 일들과는 별개로 그의 말에 현기마저 서려 있었다. 평범한 한마디 한마디에 담긴 그의 깊은 깨달음이 듣는 이에게 절로 귀를 기울이게 만든다.

"꿈에서 깨어나야 도인이라. 세상살이가 꿈과도 같다고 했습니다. 그렇다면 삶 자체가 꿈인 것을 꿈에서 깨어나면 그것이 산 사람입니까?"

지극히 비틀린 해석이었다. 그저 인간의 칠정 오욕에서 벗어나 흐림 없는 눈으로 세상을 관조할 수 있는 도인의 눈이, 그에게는 그저 죽은 자의 눈과도 다름없이 느껴졌던 모양이다.

"꿈을 꾸는 사람들 사이에 홀로 깨어 도인이 할 수 있는 것이 무엇이랍니까. 꿈을 꾸는 이를 깨워서도 안 되고, 그 꿈에 끼어들지조차 못하는데."

지독한 회한이 느껴지는 말이었다. 그녀가 뭐라 반박하려 해도 그의 어조에 묻어나오는 깊고 깊은 감정의 골에 차마 입을 열 수가 없었다.

"아까도 말했지요. 저는 사람이 좋습니다. 논두렁에 앉아 탁주를 마시며 한가락 멋들어지게 뽑는 촌로의 모습도 좋고, 바쁘게 우물가를 오고가는 물동을 인 아낙의 모습도 좋습니다. 세상 근심 없이 내달리는 어린아이들도 좋지요."

허준영의 눈이 아득한 과거를 되짚듯 아련해진다.

"제가 살던 산 아랫마을에는 그렇게 좋은 사람들이 많았습니다. 그런데 말입니다."

아련하게 빛나던 눈동자에 천천히 독기가 서렸다.

"그런 이들의 삶이라는 거, 정말 가치 없더군요. 같지도 않은 나랏님의 말 한마디에 무더기로 죽고, 조금만 덜 무지해도 예방할 수 있는 전염병으로도 죽고, 나중에는 말 한마디 안 통하는 외적들에게 죽더군요."

허준영의 눈 앞에는 그날의 일이 생생하게 보이는 모양이다. 원망과 증오가 소용돌이치는 눈빛 뒤에 숨겨진 씁쓸한 감정들이 그대로 드러났다.

"저는 스승님들에게 물었지요. 왜, 우리는 그들을 도울 힘이 있는데 손 놓고 보고만 있냐고! 저 패악을 일삼은 나랏님도 바꿔버릴 수 있는 힘이 있고, 전염병에서 그들을 구제할 선단도 있지 않냐고. 저 가련한 민초들을 유린하는 외적들을 일거에 쓸어버릴 힘도 있지 않느냐고!"

당시로 돌아간 듯한 허준영이 피를 토하는 음성으로 절규했다.

"그런데 스승님들은 고개를 젓더이다. 그들의 명이 그러한 것을 우리가 끼어들어 천기를 거스를 수는 없다고 하더이다."

스승들에 대해 말하는 그의 어조에는 증오가 가득찼다.

"그래도 전 몰래 내려갔지요. 스승님들이 숨겨둔 선단을 들고, 그리고 그토록이나 조심스럽게 다루던 벼락 맞은 대추나무 목검을 들고 내려갔습니다."

허준영의 손이 무언가를 쥘 듯 앞으로 내밀어진다.

"행복했습니다. 산에서 수련을 해온 그 어떤 시간보다 더 귀하고 귀한 시간이었습니다. 멀리서 바라만 보던 민초들과 어울려 살고, 선단으로 그들을 구제하며 정말 귀하고 귀한 시간을 보냈지요. 이따금씩 몰려오는 외적들도 단매에 쳐죽였죠. 그런데 말입니다."

내밀어진 그의 손이 부들부들 떨린다.

"스승님들이 내려왔습니다. 도인이란 작자들이 선단을 아까워하고, 벼락 맞은 대추나무에 피가 묻었음을 알고 분노하더군요."

거기까지 말한 허준영이 소리내어 웃었다. 그 웃음에 담긴 처절한 감정이 전지현을

섬뜩하게 만들었다. 그녀가 저도 모르게 기세를 올리는데 허준영은 그것도 모르는지 이야기를 계속했다.

"생명을 구하는 것보다 더 가치 있는 쓰임이 어디 있다고, 남아있는 선단을 전부 회수하더군요. 피가 묻은 목검은 그대로 분질러버렸고, 저 역시 치도곤을 당했습니다. 그래도 저는 뿌듯했습니다. 적어도 함께 웃고 울던 민초들이 제게 돌을 던지기 전에는 말이죠."

전지현이 질끈 눈을 감았다. 허준영이 무슨 꼴을 당했을지 눈에 선했다.

"신선들의 물건을 흠쳐온 저는 도둑놈이라더이다. 천벌을 받을 거라더이다. 자신들이 말하는 신선들이 얼마나 자신들을 하찮게 보는지도 모르고, 내게 돌을 던지더란 말입니다."

당시의 민초들에게 도인과 무인은 정말 신선과도 같은 존재들로 받아들여졌다. 산에서 이따금씩 수행을 하다 밖으로 나가보면 그들은 자신의 그림자라도 밟을까 두려워 다가오지도 못했었다.

그런 그들이니만큼 갑작스레 몰려온 도맥의 스승들에게 겁을 집어먹고 그간 정리를 나누었던 허준영에게 돌을 던졌으리라. 그들에게 있어 도맥의 스승들은 신선과 다름이 없었으며, 신선의 분노를 받는 다는 것은 천벌을 받아 대가 끊겨 마땅한 일이라고

여겼을테니.

눈을 질끈 감은 그녀의 귓가로 허준영의 자조적인 목소리가 들린다.

"흠씬 두들겨 맞고, 그간 쌓아온 도력이 흩어졌습니다. 하지만 제 재능이 아까웠는지 차마 산 밖으로 쫓지는 못하더군요. 미안하다 말하며 무던히도 저를 달래주던 노인네들의 꼴이라니. 웃음밖에 안 나오더군요."

이제는 스승을 노인이라 칭하기를 꺼리지 않는 그였다.

"그래서 뉘우치는 척 하고 그들에게 엎드렸습니다. 그들이 바라는데로 이 악물고 수련만 했지요. 지옥 같은 시간이었습니다. 그런데 우습게도 그렇게 수련을 하다보니 그들의 가르침이 귀에 들어오더군요."

전지현은 눈을 떴다. 회한이 가득했던 허준영의 음성에 음산한 기운이 서리기 시작했기 때문이었다. 귀기라고 해도 좋을 정도로 어둡고 끈적끈적한 기운에 살의가 피어오른다.

"다 부질 없더이다! 사람이고 뭐고 다 부질 없더란 말이더이다! 그래서 전 생각했습니다! 어차피 살아도 꿈과 같고, 다 부질 없는 것이라면 이쯤에서 끝내자고!"

맑은 빛을 띠고 있던 그의 눈동자에 귀기와 광기가 휘몰아쳤다. 전지현은 자세를 낮추고 발검자세를 취했다.

"근데 때마침 저에게 접근하는 이가 있었습니다. 음지에서 양지로 올라가자고. 힘에 걸맞는 삶을 누리자고 말입니다."

자세를 낮춘 전지현이 눈을 가늘게 떴다. 지금 허준영이 흥분해서 떠드는 이야기야말로 이 모든 일의 배후에 대한 것들. 자세를 풀지 않으면서도 기세를 갈무리한 그녀는 허준영이 하는 말에 더욱 귀를 기울였다.

"저는 당연히 수락했지요. 물론 그들과 저는 목적이 달랐지만, 어차피 저는 원하는 것만 얻으면 되니 그들을 따르는 척 했지요. 그들은 고맙게도 세상에 흩어진 고대의 씨앗들을 가지고 있더군요."

고대의 씨앗이라니. 전지현으로써는 금시초문이었다.

"그들은 그 씨앗을 세계에 골고루 뿌렸습니다. 적당히 혼란만 주고 스스로가 자연스럽게 드러날 기회를 잡으려 한 것이죠. 하지만 그래서야 재미가 없지 않겠습니까?"

그녀의 눈에 의혹이 피어올랐다. 말을 들어보니 고대의 씨앗이라는 것과 1등급 몬스터들이 관련되어 있는 모양인데, 허준영의 태도에 불길한 예감이 피어올랐다.

그리고 그녀의 예상은 혹시나에서 역시나로 바뀌었다.

"제가 손을 썼지요. 그들이 솎아낸 씨앗을 다시 추려, 더욱 꽉찬 놈들로 바꾸어 심었지요. 뭐 그렇다고 해도 우리나라에 나타난 천개의 눈동자나, 미국의 금룡, 일본의 야마타노 오로치등은 의외였습니다. 그렇게나 대단한 존재들이 그런 씨앗에 있었을 줄 제가 어떻게 알았겠습니까."

허준영이 속한 단체야말로 모슨 사건의 원흉이었다는 사실이 밝혀지는 순간이었다. 그들은 세계의 권력을 잡는다는 우스꽝스러운 목적으로 모였던 모양인데, 벌인 일은 전혀 우습지 않았다.

어디서 구했는지 모를 몬스터의 씨앗을 모아, 세계에 뿌린 것이다. 그 씨앗이 발아하여 천개의 눈동자가 되었고, 또 그 씨앗이 발아하여 그렌델이 되었다. 수없이 많은 몬스터들이 그들이 뿌린 씨앗에서 태어나 세상을 어지럽혔다.

아무 것도 모르고 죽어간 이들이 수천만이요, 가족을 잃고 눈물을 흘린 이들이 수억이다. 단순히 개인의 비틀린 욕망 때문에 벌인 일이라고 하기에는 그 여파가 너무도 컸다.

자연스럽게 전지현의 눈꼬리가 치켜 올라가고, 갈무리했던 기운이 폭발적으로 터져

나왔다.

"그만! 더 이상 미친자의 허황된 넋두리를 들어줄 생각은 없다!"

한참 자신의 감정에 취해 지껄여대던 허준영이 눈을 크게 떴다. 그녀의 반응이 의외인지 눈을 크게 뜬 모습이, 그녀가 자신을 이해해줄 거라고 생각이라도 했던 모양이다. 하지만 이내 그녀가 뿜어내는 기세에 담긴 살의가 진짜임을 깨닫고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당신이라면 제 마음을 이해해줄 거라고 생각했는데, 역시나 당신도 그 위선자들과 마찬가지였군요."

어찌 저렇게 비틀렸다는 말인가. 전지현은 허준영의 태도에 더욱 날카로운 기세를 뿜어냈다.

"어린아이처럼 한번 넘어졌다고 징징대는 그대의 푸념을 들어줄 이유는 없다. 하물며 그 어린애 같은 투정에 수천만의 생목숨이 사라진 마당에야."

그녀의 말 한마디 한마디에 날이 섰다.

"차라리 원대한 꿈을 가진 효웅이 벌인 일이었다면 마음이 편했을까. 그 가진 이상과

꿈이 소인의 그것만도 못하니, 이미 죽어간 생목숨들이 원통해서 어찌할꼬."

그 통렬한 비난에 허준영의 표정이 악귀처럼 변했다. 이제껏 한번도 보여주지 않는 그 모습에 전지현이 다시 한번 칼과 같은 말을 내던졌다.

"가치 없다! 그대와 나눈 대화는 내 기억조차 하지 않으리!"

추상같은 한마디를 터뜨린 그녀가 검을 높게 치켜 올렸다.

"불쌍해서 어찌할꼬. 불쌍해서 어찌할꼬. 덧 없이 죽어간 생목숨들이 가엾고 가엾구나. 내 그대의 목을 베어 그들의 혼을 위로하리!"

높게 들려 있던 그녀의 검이 태산을 가르듯 허공을 베었다. 허공에 잔상조차 남기지 않고 휘둘러진 검에서 터져 나온 기세가 산 전체를 진동시켰다.

이야기에 취해있던 허준영은 그 갑작스러운 일격에 입만 벌리고 있었는데, 당장에 반동강이 나도 이상하지 않을 모습이었다.

같은 1등급 이능력자로 구분되지만 애초부터 그녀와 그의 힘은 명백하게 차이가 있었다. 검맥의 정수를 온전하게 이은 전지현은 검후라는 이름도 모자랄 경지의 인물, 아무리 도맥의 전수자라고 해도 처음부터 투쟁을 위해 가다듬어져온 검객에 비할 수

는 없었다.

아무리 허준영이 준비를 철저하게 하고, 암수를 부린다고 해도 그녀는 그 모든 것을 이겨내고 허준영을 제압할 자신이 있엇던 것이다.

그리고 그녀의 생각은 어느 정도 맞을 듯 보였다. 이대로 허공에서 검이 내려쳐지기만 하면 허준영의 육신은 양단된 채 불귀의 객이 되고 말 테니까.

하지만 그녀가 내려찍듯 휘두른 검은 목적을 이루지 못했다. 어디선가 날아온 정체불명의 물체가 그녀의 검신을 때린 탓이다.

검이 허준영의 머리를 가르지 못하자 전지현의 눈이 빠르게 그 원인을 찾았다. 조그마한 꼬챙이와도 같은 물체가 바닥을 나뒹굴고 있었다.

검게 옻을 칠해 쇳덩이처럼 보이지만 나무결이 간간히 보이는 짧은 막대기, 그녀의 검세에 휘말려 반동강이 나긴 했으나 강력한 검격을 막은 물체다.

왜인지 낯이 익은 모습이라 잠시 생각을 하던 그녀가 눈을 크게 뜨고 신음을 내뱉었다.

"애깃살?"

그녀가 경악하여 내뱉은 말에 허준영이 빙그레 웃음을 지었다. 언제 몸을 물렸는지 이미 멀찌감치 물러난 그가 입가를 비틀며 대꾸했다.

"검맥의 힘은 다른 모든 맥의 힘을 합친 것보다 강력한 것. 원망하시려면 그 지고한 힘을 원망하시지요."

허준영의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그녀는 갑작스레 자신에게 날아드는 화살 세례에 황급히 몸을 날렸다.

그녀가 있던 자리를 향해 수십대의 화살이 날아들고, 뒤늦은 파공음이 대지를 찢어발긴다.

============================ 작품 후기 ============================뚜둥! 배신의 계절입니다. 껄껄.

독자님들, 노블 읽을 거리가 부족하지 않으십니까. 취향을 좀 타긴 하지만 '도살자 - 이토록 멋진 세상'은 어떠십니까. 정의롭거나 호구 주인공에 지치신 분들께 추천합니다.

절대로 제 작품이라서 그런 게 아니라 재미있다능! 껄껄!

그리고 제가 트위터를 시작했습니다. 아직 방법을 잘 몰라서 만지막거리기만 하는데, 혹시 트위터 하시는 독자님들이 계시면 @chungdolgun 으로 팔로잉 부탁드립니다! 으헣헛!

항상 읽어주시는 독자님들께 감사드리며, 애석하게도 본 글은 230~250편 내로 마무리가 될 것임을 알려드립니다. 미제로 남을 이야기도 많이 있지만 그저 독자님들의 상상으로 남길 예정입니다.

마지막까지 변함없는 응원과 코멘트 부탁드리겠습니다. 데헷!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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