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피바라기-201화 (201/223)

< --  2-7. 최종 결전.  -- >

전지현의 갑작스러운 적의에도 허준영은 태연했다. 검후라는 이름에 걸맞는 기세가 너무도 매서워 한발자국 뒤로 물러나긴 했지만, 그 어디에도 놀란 기색은 없었다.

"과연 그 죽지도 못하는 종놈이 입을 마음대로 놀려댔군요."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한숨을 내쉰 허준영의 모습이 지독스럽게도 뻔뻔했다.

김형준은 새삼 맹렬한 분노가 치밀어올랐다.

루마니아에서 수백만명의 민간인이 허무하게 죽어갔다. 영국의 그렌델이 나타났을 때는 런던이라는 도시 자체가 늪에 매장되어 헤아릴 수 없는 사람들이 생매장되었다.

아니, 멀리 갈 것도 없다. 당장 김형준의 모국인 대한민국만 해도, 지난 괴수의 등장과 몬스터의 습격으로 천만명에 가까운 희생자가 생겼고 앞으로 또 얼마가 될지 모르는 이들이 희생될지 몰랐다.

다이달로스를 통해 밝혀진 수 많은 비밀 중에 가장 충격적인 사실은 그 모든 사건에 인간이 연루되어 있다는 것이었다.

목적까지는 밝혀내지 못했지만 수 많은 능력자들과 정계의 고위 인사들이 그 모든 사건에 관련이 있다는 사실, 그리고 그 안에는 허준영의 이름도 존재했다.

"잘도. 속으로 비웃고 있었을 테지."

김형준이 분노하자 주변의 대기가 요동을 쳤다. 전지현이 뿜어낸 기세 탓에 날카롭게 날을 세웠던 공기가 무겁게 가라앉고 그 안에 끈적끈적한 죽음의 기운이 들어찼다.

"필사적으로 괴수를 향해 달려드는 우리를 보고 비웃었던가. 덧없이 스러져가는 그들의 모습에 조소했던가!"

뻔뻔하게도 지난 일산 괴수전에 참전하기까지 했던 허준영이었다. 당시에는 든든한 전우라고 생각했던 믿음이 이제 와서 김형준의 발등을 처참하게 내리찍었다.

당장에라도 달려들 듯 분노하는 김형준을 전지현이 차분한 태도로 가라앉혔다. 그녀 역시 처음에는 분노한 기색이 역력했지만, 곁에서 지나칠 정도로 흥분하는 그의 모습에 도리어 차분해진 모양이다.

"도대체 이유가 뭔가. 도맥의 비전을 전수받은 그대라면, 그 유지와 정신까지 이어받았을 텐데. 나는 지금도 그대가 인간을 등지고 이런 흉악한 일을 꾸민 원흉 중 하나라

는 사실이 믿겨지지 않는구나."

전지현이 김형준의 기세를 내리 누르며, 허준영에게 물었다. 그 눈빛에 떠오른 씁쓸한 기색은 김형준에 비할 바가 아니었는데, 어찌 아니 그러하랴. 수백년이 넘는 시간을 각기 검맥과 도맥의 전수자로 살아온 이들이었음에야.

살가운 친우는 되지 못했더라도 지금 이 시기에 남은 마지막 과거의 잔재와도 같은 스스로에 대한 동질감은 있으리라 믿었다.

하지만 그런 그녀의 안타까움에도 허준영은 그저 입가를 비틀어 올릴 뿐이었다.

"글쎄요. 지금 제가 이 자리에서 뭔가 울부짖으며 신파극이라도 찍어야 하나요?"

이제까지와 다르게 차갑게 가라앉은 그의 음성이 지독스러울 정도로 염세적인 빛을 띄고 있다. 능글맞고 장난스러운 그의 평소 얼굴은 온데간데없고, 얼음으로 만들어진 가면이라도 뒤집어 쓴 듯 비인간적인 표정의 모습.

"뭐, 그래도 그간의 정리가 있으니, 장단이라도 맞춰 드리죠."

어깨를 으쓱해 보이며 전지현을 향에 독설을 내뱉기 시작했다.

"검맥과 도맥의 전수라자라고 했던가요. 검맥의 하나뿐인 딸인 그대는 몰랐을 테죠. 비전을 전수받는다는 사실이 얼마나 고통스럽고 잔인한 일인지."

허준영이 대담하게도 김형준과 전지현에게서 등을 돌렸다. 그리고 양 손을 뻗어 올리고 과장된 동작으로 한바퀴 몸을 돌린다.

"세상 만사 다 무의미 하다고 하더군요. 오욕 칠정 그 중 하나라도 내비치는 날에는 아주 치도곤을 당했습니다. 그저 완전한 자연으로의 회귀, 동화. 내 것도 없고 니 것도 없고 천지간에 가질 수 있는 것이 아무 것도 없었단 말입니다."

도맥의 가르침이 세상 만사에 대해 초탈함으로 도를 얻는 것이라는 사실을 익히 알고 있던 전지현은 반박했다. 그녀 역시 그와 다르지 않은 도를 따라왔던 탓이다.

"인간의 욕망은 끝도 없거니와 더 없이 허무한 것. 그것을 초월하지 않고서야 어찌 도를 이룰수 있겠는가!"

추상같은 호통을 쳐보지만 허준영은 여전히 비웃음으로 대답을 대신했다.

"그렇습니까? 그러는 검후는 지금 어떠십니까?"

허준영이 갑작스럽게 묻자 그녀는 내심 당황했지만, 겉으로는 태연하게 대꾸했다.

"무엇이 말인가."

어떤 상황에서도 당당한 모습의 그녀다. 허준영은 그 모습이 못내 마음에 들지 않은지 차갑게 그녀를 비난했다.

"지금은 사랑하는 남편도 있고, 더 없이 소중한 딸도 있죠. 그 어디에 인간적이지 않은 것이 있단 말입니까."

그녀로서는 전혀 생각지도 못했던 질문이라 잠시 말문을 닫았다. 허준영의 말이 계속 됐다.

"지금처럼 풍족하게 인간사를 누린 적이 있으십니까? 끼니도 선단 하나로 때우며 하루 종일 검만 휘두르던 그대였거늘, 지금이 그때보다 멀리 돌아갔다고 생각합니까?"

전지현으로써는 도저히 대답할 수 없는 문제였다. 비록 악연으로 이어졌으나 지금은 더 없이 소중해진 김형준과 연아라는 존재, 하지만 그들과 만남으로서 지난 자신의 고련이 무색해진 것도 사실이었다. 섣부르게 대답을 하여 허준영을 자극할 생각은 없었던 고로 전지현은 침묵으로 일관했다.

"저는 말입니다. 인간이 너무 좋습니다. 사람들이 너무 좋아서 미치겠다는 말이라고요."

허준영이 양손을 널찍하게 벌리며 말했다.

"그런데 자꾸 그런 인간을 버리랍니다. 수 많은 외란과 혼란 속에서도 모든 것이 부질 없다고 했습니다. 덧 없이 스러져가는 생목숨이 안타까워 가슴이 찢어지는데 그런 마음조차 버려야 도맥을 이을 수 있답니다."

무언가 아픔이 느껴질만한 사연이 있을법 했지만, 그 어조는 놀랍도록 차가웠다.

"그래서 버렸습니다. 맥의 스승들이 원하는 대로 한 것이죠. 인간을 사랑하는 마음, 그들을 측은하게 여기는 마음. 모두 버렸습니다."

무언가 비틀린 대답이었다. 꼬이고 꼬인 실타래처럼 잔뜩 엉클어져 어디부터 꼬인 것인지 어떻게 풀어야 할지조차 가늠할 수 없는 문제였다.

"그것이 그대의 질문에 대한 대답이랍니다."

아이러니 한 일이었다. 흔들림 없이 인간과 더불어 살기 위해 내린 가르침이 오히려

인간을 등지게 만들었다. 온전치 못하게 받아들여 잔뜩 비틀린 깨달음이었지만, 그런 비틀린 깨달음으로나마 경지에 오른 허준영이었다.

아마 그 타고난 재능이 도맥의 사람들로 하여금 더욱 엄한 가르침을 내리게 만들었을 것이다.

오욕칠정을 탈피하여 흐림 없는 눈으로 세상을 둘러보기를 바랐던 도맥의 전대인물들은 알고나 있을까. 그들이 신선을 만들고자 노력했던 귀하디 귀한 제자가 인세를 어지럽히는 마선이 될 것이라는 것을.

아마 그 사실을 알았다면 억울해서 눈을 감지도 못했을 것이다.

"허황되구나. 어리석구나. 실로 가당치도 않은 해석이로다. 욕념을 넘어서 스스로를 관조할 수 있게 되었을 때에나 비로써 도의 끄트머리나마 잡을 수 있을 터, 스스로는 모든 것을 버렸다 하면서 오히려 증오를 가슴에 담았으니 도맥의 맥이 제대로 이어지지 않았음에 통탄하고 비탄할 뿐이다."

전지현이 진정으로 안타깝다는 듯이 탄식했다. 그런 전지현의 말에 기분이 상했는지 허준영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제대로 이어지지 않았다라, 과연 그럴까요?"

허준영이 입가를 비틀어 올리며 높이 들어올렸던 양손을 늘어트렸다.

"맥의 역사상 단 한번도 없었다지요."

마치 세상을 품기라도 할듯한 그 자세가 광오할 지경이었다.

"8도에 산재한 수백 영산의 모든 비전을 이어 받은 전수자는."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그의 주변으로 떠오르기 시작하는 수많은 빛무리들과 기이한 문양들, 허공에 그려지듯 사방을 빼곡하게 채우기 시작한 기이한 곡선이 뭉치고 뭉치며 몸을 불렸다.

"이름 높은 검후와 피바라기를 맞이하는데 준비 하나 안해서야 대접이 소흘하다 욕을 먹을 테지요. 보잘 것 없지만 대접을 즐겨 주시기를."

허준영의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사위에 가득하던 빛무리가 솟구치고 허공을 수놓았던 문자들이 점멸하기 시작했다.

산 전체를 덮을 듯 사방을 둘러싼 빛무리가 무섭게 회오리치다가 수천, 수만가닥으로 흩어져 바닥에 흩뿌려졌다.

그리고 그렇게 빛이 뿌려진 자리에서 검은 그림자가 꿈틀거리며 솟아올라왔는데 순식간에 단단한 형상을 맺었다.

눈앞에서 형체를 맺은 검은 그림자, 비록 그 빛깔이 어두웠으나 그가 알고 있는 얼굴이었다.

"이... 이호상..."

눈이 찢어질 듯 부릅뜬 김형준이 신음과도 같은 한마디를 내뱉었다. 놀랍게도 바닥에서 솟아난 검은 형상은 지난 일산 괴수전에서 유니온의 타격대를 진두지휘했던 2등급 이능력자 이호상이었다.

김형준이 직접 눈으로 죽음을 확인했던 존재이기도 하다.

"아..."

그의 입에서 다시 한번 신음이 내뱉어졌다. 이호상을 따라 일어선 검은 형상들이 한둘이 아니었다. 모두가 그가 한번씩은 얼굴을 맞댄 기억이 있는 얼굴들.

천개의 눈동자와 격전을 펼치는 도중에 전사한 대한민국의 이능력자들이었다. 뿐만

아니라 서울에서 미처 피난을 떠나지 못했던 수없이 많은 시민들로 보이는 존재들까지 검게 물든 형상으로 몸을 일으켰다.

"전에 꽤나 공을 들였죠. 배우긴 했으나 완벽하게 제 것으로 만든 술법은 아니었던지라, 꽤나 진언에 공을 들여야 했답니다. 검후께서 눈치를 챌까 싶어, 본신의 힘으로 눈가림을 하느라 고생했답니다."

허준영의 이죽거림에 지난 괴수전에서 그가 보여주었던 빛무리가 떠올랐다. 단숨에 수천의 몬스터를 흔적도 없이 지워버렸던 엄청난 광경, 김형준의 기억에 생생하게 각인된 장면이었다.

그런데 그 모든 것이 눈가림이었을 뿐, 사실은 오늘을 위한 준비라니. 그 사악하고도 치밀한 허준영의 수작에 이가 절로 악다물렸다.

"이놈! 생목숨을 수 없이 해한 것도 모자라 사자를 모독하려 하느냐! 천지간에 법이 존재하고 순리가 존재하거늘! 진정 천벌을 받아야 눈물을 보일 것이냐!"

전지현이 전에 없이 분노했다. 부들부들 떨리는 그녀의 온몸이 지금 그녀가 얼마나 큰 분노를 느끼고 있느냐를 보여줬는데, 눈가에 번뜩이던 맑은 빛이 마치 칼날처럼 번뜩였다.

"어차피 죽은 목숨인데 이렇게라도 유용하게 쓰이면 좋은 거 아닙니까."

자연의 도를 일평생 추구해온 이라고는 믿어지지 않는 말이다. 김형준 역시 그날의 처참했던 전투가 떠올라 몸을 떨었다.

"이놈!"

극심한 분노로 차마 말을 잇지 못한 전지현이 허준영에게 호통을 치는데, 정작 허준영은 태연한 신색으로 몸을 돌렸다. 마치 산보라도 가듯이 느긋한 걸음이었지만, 그의 몸은 순식간에 이동해 저 높은 산봉우리를 향해 사라졌다.

"일단 그놈들과 놀고 계시지요. 놀다가 싫증나면 이쪽으로 와보시구랴. 더 재미있는 것들이 많이 있으니. 아, 그리고 그대로 두고 올라오시면 그놈들은 그대로 산을 내려갈 겁니다."

단 한마디만을 남기고 사라진 그의 모습에 전지현과 김형준이 앗차 싶었지만, 이미 그는 사라지고 난 후였다.

그리고 그 순간 그들을 둘러싼 수많은 그림자들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불꽃이 솟구친다. 섬광이 터진다. 날카로운 얼음이 송곳처럼 날아든다. 번개와도 같

은 빛이 작렬하며 대지를 태운다.

생전에 갖고 있던 이능을 온전하게 발휘하며 그들을 압박하는 그림자들, 차라리 살아있을 당시보다 더욱 강력해진 모습이다.

김형준과 전지현은 매섭게 몰아치는 에너지의 폭풍 속에서 이를 악물었다. 전지현이 뽑아든 검에 맑고 청량한 기운이 서리고, 김형준을 전신에 단단한 갑주가 뭉친다.

"제길."

김형준의 입에서 욕지거리가 흘러나왔다. 당장 쓸어버리자니 생전의 모습이 생생하게 떠올라 사지를 무겁게 내리 눌렀다. 전지현 역시 안타까움이 가득한 눈빛으로 그들의 공격을 피하는데 주력하는 것이 죽어서까지 안식을 찾지 못하는 이들에게 손이 선뜻 나가지 않는 기색이었다.

"올라가요. 여긴 제가 맡을게요."

결국 김형준이 결심했는지 전지현의 등을 떠밀었다. 일순간이지만 그들에게 달려들던 수없이 많은 그림자들의 동작이 그대로 멈춰버렸다.

"저보다는 당신이 마무리를 짓는 게 맞을 거에요. 그러니 여긴 그대로 두고 올라가요."

그간의 시간을 돌이켜보면 정리가 적지는 않을 터, 김형준이 전지현의 등을 떠밀었다.

"금방 따라 올라갈게요."

김형준의 재촉에 전지현이 잠시 입술을 곱씹다가는 몸을 날렸다. 그녀가 산봉우리쪽으로 사라지는 모습을 본 김형준은 한숨을 내쉬었다.

"미안합니다. 허나 그대들의 복수는 반드시 해줄 테니 부디 좋은 곳으로 가세요."

사방에서 악귀처럼 으르렁대는 사자들의 모습을 바라보던 김형준은 고개를 숙여보였다.

============================ 작품 후기 ============================이번 에피소드는 아마 20~30편정도면 끝날 겁니다. 최종 장이니만큼 그간의 의문을 최대한 풀어놓고 마무리를 하려 합니다.

항상 응원해주시고 읽어주시는 독자님들 감사드립니다!

*투베 상위권에 올라가니 악플이 말도 못하게 늘었네요. 어제 불량이웃 등록하고 댓글 막은 독자만 다섯입니다. 차마 생각하기도 싫은 욕설에 인신공격까지. 마지막이라 생각하고 힘내서 완결까지는 견뎌봐야겠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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