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2-7. 최종 결전. -- >
1등급 몬스터 스트리고이는 이제 이 세상에 없다. 수백만 루마니아 시민을 학살하고, 전 유럽을 지배하려 했던 블라가의 야심은 김형준을 비롯한 원정대와 이종족 연합에 의해 분쇄되었다.
이전 같았으면 김형준의 또 다른 성공에 대해 세계가 열광했겠지만, 이번만큼은 그럴 기미가 전혀 보이지 않았다.
각 국가의 정부 수반들을 비롯하여 이능력자 연합단체의 장들이 이번 사건을 덮어버린 탓이었다.
수백만이 넘는 루마니아 시민이 희생되고, 루마니아 전 국토는 회생 불가 지역이 되어버렸다. 거기에 더해 수백의 이능력자들이 덧없이 쓰러졌으며, 무수한 1등급 이능력자들이 생을 달리했다.
세간에 공개하기엔 그 희생이 너무 컸다.
희생자의 수도 수거니와 루마니아라는 국가가 붕괴되어 더 이상 국가로써의 구실을 하지 못하게 되었고, 참전했던 이능력자들의 전력도 극심한 피해를 받았다. 이대로 공개 했다가는 사회적 혼란만 조성될 뿐이었다.
거기에 한술 더 떠 블라가의 소멸에도 불구하고 사건은 마무리되지 않았다. 이미 오르테아누 일족의 도움으로 다이달로스의 입을 열어 상당수 비밀을 밝혀내는 데 성공했다. 하지만 모두는 아직도 드러난 것보다는 가려진 것이 많다는 사실을 직감하고 있었다.
이미 다이달로스의 입을 통해서 나온 이야기들만 해도 세계가 혼란에 빠질 지경인데, 그보다 더한 비밀이라니. 승리의 기쁨보다는 앞으로 닥쳐올 고난에 대한 우려가 앞서는 게 당연했다.
하지만 김형준은 그 모든 의문을 뒤로 한 채, 대한민국으로 돌아와야 했다. 다이달로스의 입을 통해 밝혀진 사실들 중 가장 시급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였다.
은밀하게 인천공항에 입국한 김형준은 전지현과 함께 안가로 향했다. 그를 따라 루마니아로 갔던 민용모를 비롯한 비맥과 궁맥의 인문들은 진즉에 귀국해 있었는데, 그들 조차도 두 내외의 귀국을 알지 못할 정도로 은밀한 움직임이었다.
"오늘은 쉬고, 내일 바로 움직이죠."
어둠 속에 녹아든 건물을 바라보던 김형준이 무거운 어조로 말했다. 이미 루마니아에서의 일로 그는 이능을 발현하지 않을 때조차 범상치 않은 기운을 뿜어냈는데, 이런 밤이 되면 그 기운이 더욱 도드라지곤 했다.
마치 어둠이 그를 품고 있다고 해야 할까. 검은 장막에 가려진 듯 언뜻 언뜻 희미해보이는 그의 존재감에 전지현의 얼굴이 어두웠다.
루마니아에서의 마지막이 그녀의 뇌리 속에 떠올랐다.
블라가의 말과는 달리 드라카 드 오르테아누는 속이 좁은 존재가 아니었다. 비록 블라가를 빼앗긴 탓에 피의 의식이 난항을 겪었지만, 그는 냉정하게도 트루 블러드 일족의 하나를 골라내 블라가를 대신한 제물로 올렸다.
이에 루마니아에 모인 수만의 뱀파이어들이 제물의 피를 나누어 마시고, 살점을 뜯어먹었다. 고고한 기품을 지닌 존재들 답지 않은 그 광란의 파티를 그들은 지켜봐야 했는데, 그것이 블라가를 복수심으로 처리한 김형준의 책임이라 하였다.
이미 다이달로스의 배후가 어느 정도 밝혀짐에 따라, 이종족들 간에 연합을 하기로 결정한 상황이었다. 거부감이 드는 이벤트였지만, 김형준으로써는 감수해야만 하는 일이었다.
밤이 다 지나도록 펼쳐진 광란의 파티가 끝나고, 드라카 드 오르테아누는 수만의 뱀파이어들 앞에서 선언했다.
앞으로 닥쳐올 고난 앞에서 인류와 연합하기로 했으며, 이에 그 어떤 적대행위도 용납지 않는다는 것이 주된 골자였다. 그 자리에는 수천년이 넘도록 뱀파이어와 반목해온 늑대인간들마저 함께 했으니, 의식의 여운에 취해있던 뱀파이어들이 아연해질만한 선언이었다.
하지만 서로를 존중하는 하얀 갈기 일족과 다르게, 오르테아누 혈족은 철저한 상명하복관계였다. 드라카 드 오르테아누스가 군주다운 카리스마로 모두를 찍어눌러 다행스럽게도 연합의 선언부터 유혈사태가 일어나는 일은 벌어지지 않았다.
모든 일이 마무리 되고 김형준과 전지현은 드라카 드 오르테아누를 자리를 마련했다.
앞으로의 일에 대한 조율이 주된 대화였으나, 사실 그날의 대화중 전지현이 가장 크게 받아들인 것은 김형준의 변이였다.
데몬그 단어가 못내 그녀의 마음에 걸린 탓이었다.
그에 대한 드라카 드 오르테아누의 답변은 마치 전설이라도 읊조리는 듯 했다.
데몬은 태고부터 존재해왔던 존재이며, 하나의 개체라고 할 수도 종족이라고 할 수도 없는 존재였다.
탄생 자체가 베일에 가려져 있었으며, 그나마 그렇게 탄생한 데몬들도 그 수가 워낙 적어 이들이 같은 종인지조차 알 수 없었다.
수 없이 긴 시간을 거슬러 올라 보아도, 데몬이라 불린 존재의 수는 열을 넘지 않았다. 알려진 것보다는 알려지지 않은 것이 많은 존재가 데몬이었는데 드라카 드 오르테아누는 어째서 김형준을 데몬이라 확신했으며, 다이달로스 역시 마찬가지였을까.
김형준이 변이했을 당시의 모습이 드라카 드 오르테아누가 일전에 보았던 데몬 족들과 똑같은 형상이었다는 것이 그 이유였다.
외형적인 부분은 말할 것도 없거니와, 블라가를 처리할 당시에 보여준 기세와 권능은 그들만의 트레이드 마크와도 같은 것이라고 하니, 그들이 믿지 않을 도리가 없었다.
공간의 완전한 지배와 죽음마저 권능으로 사역하는 존재, 그것이 드라카 드 오르테아누가 말하는 데몬의 권능이었다. 당시 김형준이 피워낸 검은 꽃송이와 블라가의 완전
한 소멸이 그 증거였다. 다이달로스가 말했던 기억의 전승에 관한 부분은 드라카 드 오르테아누도 잘 모르는 눈치였다. 결국 강대한 힘을 손에 얻은 것은 고무적인 일이나, 그 연원을 알 수 없는 힘이니 그들의 시름이 깊어질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당면한 상황이 상황인지라 그들은 차후 더 많은 정보를 주겠다는 트루 블러드 일족의 약속을 위안삼고 귀국해야 했다.
"그럼, 내일은 많은 일이 있을테니 어서 자죠."
불조차 켜지지 않은 침실에 들어선 김형준이 그대로 잠이 들었다. 전지현이 깊게 잠이 든 김형준의 얼굴을 빤히 바라본다.
변한 것은 없다. 그는 여전히 그녀의 남편이고, 하나뿐인 딸 연아의 아비였다.
스스로에게 몇 번이나 되뇐 전지현이 그의 곁에 몸을 눕혔다.
다음날 날이 밝자 김형준과 전지현은 도맥으로 향했다. 일체의 교통수단조차 이용하지 않은 채, 본신의 힘만으로 도맥을 향해 내달리는 그들의 표정이 무겁기만 하다.
그렇게 한참을 내달리다 보니 어느새 익히 보아왔던 도맥이 위치한 산맥이 보였다. 도맥의 비전이 그대로 담긴 진법과 결계의 경계선에 사람 그림자가 어른거린다.
"어라?"
그림자가 얼빠진 표정으로 그들을 향해 돌아서자, 그제서야 속도를 줄이며 멈춰선 김형준과 전지현이었다.
"언제 들어왔어?"
김도연이 그들의 등장에 놀랐는지, 다소나마 맹한 얼굴로 물었다.
"일이 있어서, 조금 일찍 들어왔어."
김형준이 그녀의 질문에 대답을 하는데 그 표정이 자못 매서웠다. 김도연 역시 그런 기색을 눈치 채고는 고개를 갸우뚱거렸다.
"근데 신기하네."
김도연의 뜬금없는 말에 이번에는 김형준이 의문어린 표정을 지었다.
"뭐가?"
김형준의 말에 김도연이 들뜬 음성으로 대답했다.
"아. 허준영 도맥주 말이야. 그냥반이 나보러 내려가 보라고 했거든. 손님이 올 거라고. 그냥반 몰랐는데 예지력도 있었나?"
그녀는 허준영의 선견지명에 마냥 신기한 모양이었지만, 김형준과 전지현은 도리어 얼굴을 굳혔다.
"그래? 다른 말은 없었어? 누가 올 거라든지."
여전히 자신만의 생각에 잠겨있던 김도연이 뒤늦게 정신을 차리고 그의 말에 대꾸했다.
"어. 그냥 누가 올 거고. 중요한 손님이니 올려 보내라고 했거든. 그리고 나보러 오늘 하산해서 다시 올라오지 말라고 했어."
오랜만에 만난 김형준이 반가운지 그녀의 입이 수다스럽게 움직였다.
"그리고 그거 알아? 지금 산에 아무도 없다? 왜인지 모르겠는데 허준영 도맥주가 죄다 내보냈어."
그녀의 말에 점점 굳어가는 김형준과 전지현의 표정이었지만, 김도연은 눈치 채지 못했는지 혼자서 주절주절 말이 많았다.
"마침 잘 됐어. 나도 오랜만에 나가서 아르바이트나 할 예정이었는데, 손님이 늦게 오면 허탕 칠뻔 했거든. 요즘 들어 이 근방에 악귀가 많이 출몰한다고 해서, 아르바이트 삼아서 몇건 처리하기로 했어."
신이 나서 떠들어대던 김도연이 뒤늦게 자신만이 혼자 떠들고 있었음을 깨달았다. 그리고 살펴본 상대의 표정이 전에 없이 어두워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왜 그래? 무슨 일 있어?"
때 늦은 질문이었지만 김형준은 그저 고개를 저었을 뿐이다.
"이미 알고 있는 것 같으니 그냥 올라가지요."
곁에서 전지현이 그를 재촉했다. 김도연은 영문도 모르고 그들이 하는 꼴을 보고 있었는데 김형준이 그녀의 어깨를 두들겨 준다.
"고생했어. 일 보러 가보고, 오늘은 허준영 도맥주 말처럼 산으로 올라오지 않는 것이 좋겠다."
허준영 도맥주와 마찬가지 말을 하는 김형준의 태도가 의아했지만, 그녀는 원래 단순한 성격이다. 만나기로 한 이와의 약속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음을 확인하고는 알았노라 하고 산을 내려간다.
"알고 있는 거 같죠?"
그녀가 내려가는 것을 바라보던 김형준이 묻자 전지현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의 능력은 저조차 제대로 알 수 없습니다. 지닌바 본신의 힘이야 모르겠지만, 신비함으로 따지면 맥중 으뜸이 도맥이라지요. 그가 우리의 방문을 알고 있었다고 해도 신기한 일이 아닙니다."
그녀의 말에 김형준이 한숨을 내쉬었다.
"이미 눈치 채고 있다면 그냥 당당하게 들어가지요. 애초에 숨어들어갈 생각도 없었
지만."
김형준의 말에 전지현이 고개를 끄덕이고는 몸을 날렸다. 그들이 도맥의 산문 안으로 들어서고 나서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산 주변을 감싸고 있던 안개가 더욱 짙어지더니 한치 앞을 분간할 수조차 없게 되었다. 하지만 이미 안으로 들어선 김형준과 전지현은 그 사실을 알지도 못한 채 산을 오르고 있었다.
"정말이네요. 아무도 보이지 않아요."
원래대로라면 수련생들과 이능력자들로 북적거렸어야 할 도맥의 내부는 쥐 죽은 듯이 고요했다. 싱그럽게 지저귀던 산새들도, 풀벌레들도 종적조차 찾아볼 수 없다.
마치 수백년은 그대로 존재해왔을 유적지와도 같은 모습이 차라리 을씨년스러울 지경이었다.
"그가 알고 있었다면, 이미 내보냈겠지요."
전지현 역시 기감을 끌어올려 주변을 살펴보다가 주변에 아무런 기척이 잡히지 않자 고개를 저었다. 사람은 커녕, 흔한 동물조차 그녀의 기감 안에는 존재하지 않았다.
기이한 일이었지만, 그녀는 이미 짐작하고 있던 터라 놀라지 않았다.
"우리 입장에서야 더 좋은 거 아닌가요. 좋은 게 좋은 거라고. 가죠. 저 위에서 그가 기다리고 있는 것 같으니."
미세하게 느껴지는 기운, 청량하면서도 장엄한 기운이 산맥의 끝자락에서 흘러나오고 있었다. 그들이 찾아갈 존재가 평소 취해왔던 있는 듯 없는 듯한 기세와는 완전히 다른 기세였다.
마치 그 넘실거리는 기운이 자신들을 부르는 것 같아, 그들의 표정이 더욱 어두워졌다.
"가죠."
김형준이 몸을 날리자 전지현이 따라서 몸을 날렸다. 그리고 그들이 자리를 뜨고 난 자리에 산문의 입구를 감싸고 있던 안개가 스물스물 기어올라오고 있었다. 마치 야금야금 산을 잡아먹듯 올라오는 안개의 모습이 흉물스럽기만 하다.
그런 사실도 모르고 산에 오른 그들은 마침내 단촐한 초옥 앞에 도착할 수 있었다.
마치 미려한 그림 속에서 빠져나온 초옥의 모습이 아름답기만 했지만, 김형준도 전지현의 표정은 돌처럼 딱딱하게 굳어있었다.
"왔으면 들어오시지, 밖에서 뭐 하세요."
때마침 들려오는 장난기 어린 음성, 허준영 도맥주의 목소리다.
"이미 알고 있다면 그리 의뭉스럽게 굴지 않아도 될 터, 밖으로 나오라."
전지현이 전에 없이 날카로운 어조로 대꾸했다. 평소라면 서로를 마땅찮아 하더라도 존중은 하던 둘의 관계였는데, 오늘만큼은 전지현은 필생의 대적이라도 대하는 듯 했다.
"이야. 역시 검후께서는 예나 지금이나 단호하시다니까."
장난스러운 투정과 함께 허준영이 초옥에서 몸을 드러냈다. 평소라면 간편한 캐쥬얼 차림이었을 그가 오늘은 왠 일인지 도복을 정갈하게 차려 입고 있었다.
"인간을 배신하고 괴물들과 작당한 놈과 말을 섞을 이유는 없다!"
전지현이 날카로운 기세를 뿜어내며 자신의 애검을 뽑아들었다.
============================ 작품 후기 ============================뚜둥! 이제 최종 에피소드 진행합니다.
그간 던졌던 모든 떡밥이 회수 됩니다! 그간 질책해오셨던 에피소드들 중에서도 왜 그런 일이 벌어졌는지가, 밝혀질 테니 기대해주십셩!
오! 그러고보니 200화네요! 미리 축하해주실 독자님들께 감사드립니다. 축하는 마음으로만 하시지 말고, 추천과 코멘트 쿠폰 3종 세트로다가 ㅋㅋㅋㅋㅋ항상 읽어주시는 독자님들 감사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