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2-6. 망자의 도시 -- >
사위를 압도하는 거대한 존재감을 내뿜으며 우뚝 선 김형준의 모습이 장엄하기까지 하다.
그의 앞에 선 블라가도, 다이달로스도 기세에 눌려 그저 입만 달싹일 뿐이다.
"불쌍한 블라가. 시궁창을 전전하는 가엾은 스트리고이여. 나는 너를 이해하지도 동정하지도 않겠다. 네놈의 좌절이 얼마나 깊고 오래 된 것인지 상관치 않겠다."
김형준이 천천히 오른손을 치켜들었다.
"나는 차라리 너를 죽여, 수백만 루마니아 시민의 영혼을 위로하는 위령제를 지내겠다."
이제는 차갑게 가라앉은 어조로 김형준이 말하는 순간, 이 자리에 모인 모두의 머릿속에는 흔적도 없이 존재가 지워질 블라가의 모습이 선명하게 떠올랐다.
실로 기이한 경험이었다. 타인의 의지가 이토록이나 명확하게 느껴진 적이 있었던가.
그의 한마디가 강력한 의지가 되어 온 세상을 지배했다. 그가 그렇게 말한 순간 그의 말은 의지가 되어 블라가의 죽음을 선언했다.
높게 치켜들었던 김형준의 오른 손이 천천히 내려간다.
"끄으윽..."
블라가의 몸이 천천히 내려앉는다. 마치 보이지 않는 무언가에 찍어눌리기라도 하듯, 그의 몸이 내려앉고 내려앉아 끝에 가셔서는 납작 바닥에 엎드려 사지를 꿈틀댄다.
그 모습이 꼭 무언가를 경배하는 것처럼 보여 지켜보는 모든 이의 가슴에 선명하게 각인되었다.
"맘춰주시오."
하지만 모든 이가 그 모습을 감상만 하고 있는 것은 아니었던 모양이다. 김형준의 모습을 보며 데몬이라는 단어를 되뇌던 드라카 드 오르테아누가 김형준의 앞에 나타났다.
처음부터 그 자리에 있었던 듯 나타난 그가 김형준을 만류했다.
"블라가가 저지른 일이 그대들에게는 너무도 큰 잘못이었다는 것을 아오만, 그는 사생아일지언정 일족의 일원. 부디 우리에게 그 마무리를 맡겨주실 수는 없으시겠소?"
가장 존귀한 진조이자, 여섯 혈족으로 갈라진 뱀파이어의 당당한 군주라고는 생각할 수조차 없는 정중한 요청이다.
과격하기가 혈족 중 으뜸이라 인간을 적대하고 포식하는 난폭한 뱀파이어로는 보이지 않는 태도, 하지만 김형준의 루비빛 눈동자는 무심하게 번뜩일 뿐이다.
"그대들이 납득할 수 있는 결과를 반드시 보여드리리다."
드라카 드 오르테아누가 간곡하게 요청하자, 김형준이 대꾸했다.
"내가 그래야만 하는 이유는?"
이제는 완연한 절대자의 기세가 몸에서 뿜어져나오는 김형준의 한마디다. 그 한마디에 담긴 증오와 살의가 가벼울 리가 없다.
드라카 드 오르테아누는 처음 되뇌었던 '데몬'이라는 단어를 다시금 떠올렸다.
"이 교활하고 추악한 놈은 수백만명의 인간을 학살한 악마요. 그러니 우리 손에서 해
결하는 것이 정당하다고 생각하지 않습니까?"
물러설 기미를 보이지 않는 김형준의 태도에 드라카 드 오르테아누는 고민했다. 일족의 모든 힘을 총 동원해 블라가를 탈취하는 것은 힘든 일이 아니겠지만, 그 와중에 치러질 격전에서 얼마나 많은 일족이 사라질지 몰랐다.
"드라카 드 오르테아누여. 그의 말대로 하는 것이 좋을 것이다. 이번 일은 엄연히 인간의 일, 블라가가 루마니아를 자신의 영토로 선포한 순간, 이미 그대들을 손을 떠난 일이다. 먼저 율법을 어긴 것은 블라가니 일족의 행사라 하지 마시게."
이제껏 침묵을 지키고 있었던 하얀갈기 일족의 장로 바람갈기가 한걸음 앞으로 나섰다. 그의 의지를 함께하는 수백의 늑대인간들이 이를 드러내며 적의를 보였다.
인간들만 해도 쉽지 않은 상대이건만, 늑대인간들 중에서도 가장 투쟁심이 강한 하얀 갈기일족마저도 이 자리에 모여있다.
"어쩔 수 없군. 그대의 뜻대로 하시오. 다만."
결국 상황이 여의치 않음을 깨달은 드라카 드 오르테아누가 포기하고 물러섰다.
"블라가의 육신을 가급적 훼손시키지 않기를 바라오. 그 비루한 육신이라도 있어야
이 자리에 모인 수만 일족들의 불만을 잠재울 수 있으니."
다만 물러나면서도 이 자리에 모인 뱀파이어의 수가 수만이 넘음을 나타내는 것이 마지막 요청마저 들어주지 않는다면 일전을 불사하겠다는 명백한 협박이었다.
"불가! 나는 이 자리에서 수백만 시민을 학살한 블라가를 갈기갈기 찢어 그들의 영혼을 위로할 것입니다. 이 일에는 그 어떤 간섭도 타협도 받아들이지 않겠습니다."
이제껏 강자에게 짓눌리고 거대 세력에게 휘둘려왔던 김형준의 의지가 처음으로 세상에 세워졌다. 그 조용한 포효에 모두가 숨을 죽였다.
"진정 그래야만 하오?"
드라카 드 오르테아누가 고개를 저으며 처음의 자리로 물러섰다. 그의 얼굴에는 난감한 기색이 떠올라 있었는데, 그것은 그저 곤란하게 되었다라는 표정이었을 뿐, 그 어디에도 김형준의 기세와 의지에 눌린 기미는 보이지 않았다.
그도 그럴 것이 그는 가장 존귀하고 강대한 진조 중의 진조 뱀파이어다. 지금은 세가 맞지 않아 물러나지만 그것 자체를 치욕이라고 생각할 정도로 소심한 존재가 아니었다.
그리고 사실 그가 이 자리에 온 것은 블라가의 처리보다 더욱 중요한 사안 때문이었으니, 블라가의 배후에 도사린 이에 대한 수탐이었다. 거기에 한가지 더 중요한 보고 사항이 생겼다.
데몬족의 출현.
그것이 그 하나만의 변이일지, 아니면 세상의 의지가 새로운 종족의 출현을 원하는 것인지. 자신을 보낸 어머니에게 보고하고 사태를 지켜볼 필요가 있었다. 게다가 종족의 탄생에는 필연적으로 과도한 에너지의 집중이 일어나기 마련, 시간이 지나면 그 에너지 중 태반이 사라지겠지만 적어도 지금은 아니었다. 굳이 가장 강대한 시기의 적과 부딪칠 필요는 없었다.
"그렇다면 우리 오르테아누 일족은 그대의 행사를 더는 막지 않겠소. '데몬'족의 탄생을 축하하는 의미로 드린 예물이라 생각하겠소."
'데몬'이라는 단어가 거슬렸지만 김형준은 그가 납득한 듯 보이자 바로 고개를 돌렸다. 그의 앞에는 여전히 굴욕적인 자세로 버르적거리는 블라가가 있었다.
"피어라."
김형준이 나직하게 읊조렸다. 짤막한 한마디였지만 그 한마디에 블라가의 미래는 정해졌다.
꾸물꾸물바닥에서 검은 줄기가 피어 올랐다. 찔레가시의 그것과도 비슷했지만, 더욱 검고 번들거리는 줄기가 바닥에 엎드린 블라가의 몸을 덮기 시작했다.
한 가닥, 두가닥... 이내 수백가닥의 줄기가 되어 블라가의 몸이 완전히 가려진 순간 앞으로 내밀어진 김형준의 손이 주먹을 쥐었다.
수백송이의 검붉은 꽃이 피어났다. 이제까지 찔레가시가 피워냈던 혈화와는 다르게 선명한 밤의 빛을 띤 꽃송이들이 만개했다.
그리고 그것으로 끝이었다. 비록 김형준의 기세에 억눌리긴 했으나, 강대했던 블라가의 기운이 그대로 사라져버렸다.
모든 이들은 블라가가 이제 세상에 없음을 깨달았고, 그 허무한 종말에 탄식과도 같은 한숨을 내쉬었다.
수백만 루마니아 시민들과 수백의 이능력자를 죽음으로 내몬 루마니아의 1등급 몬스터 블라가는 끝을 맞이했다.
그 야심찬 포부에 비하면, 그 동기는 실로 비루했던 존재. 그는 그렇게 세상에서 사라졌다.
블라가가 지워졌지만 긴장은 사라지지 않았다. 어쩐 일인지 여전히 자리를 지키고 있는 트루 블러드 일족과 하얀 갈기 부족이 미동도 없다.
그런 그들의 기미를 눈치 채고 있던 김형준이었지만, 굳이 그런 사실을 내색하지 않았다.
수백만의 영혼을 원령으로 만든 블라가가 너무 편한 죽음을 맞이한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지만 그의 본능은 그가 결코 쉽게 끝난 것이 아니라는 것을 속삭였다. 그 짧은 순간 그가 받았을 고통이 끔찍했을 거란 사실이 막연하게 그를 지배했다.
아직도 생생하게 자태를 자랑하는 검은 꽃송이들을 바라보니 조금은 마음이 편해진다.
"완전히 변해버렸군."
상념에 빠져있던 김형준이 고개를 돌렸다. 그 곳에는 블라가와 마찬가지로 보이지 않는 거미줄에 걸린 듯 꼼짝도 하지 못하고 있는 다이달로스가 있었다.
"그렇군. 가장 중요한 네가 남았었어. 내가 너무 일찍 감상에 빠져버린 모양이야."
김형준의 투구가 사납게 웃었다. 마치 살아있는 것처럼 입매 부분이 치켜 올라가는 모습이 여간 섬뜩한 게 아니다.
다이달로스 역시 그 모습에 조금은 질렸는지 입매를 떨었다.
"너는 쉽게 죽지 못할 거야."
김형준이 잔인하게 선포했다. 이미 미노타우르스를 통해 다이달로스라는 존재가 본신이 아닌 아바타에 불과할 뿐이라는 사실을 들었다. 하지만 그러면 어떤가. 지금은 왜인지 도망도 치지 못하고 자신의 처분을 기다리는
존재인 것을.
"그렇지. 데몬의 손아귀에 떨어졌으니 영혼조차 편치 못할 것임은 이미 알고 있지."
다이달로스의 입가에 비열한 미소가 매달렸다. 어쩐 일인지 본신으로 돌아가지지 않는 아바타의 현신에 내심 당황하고 있었던 그였지만, 어차피 아바타야 잘 못 돼면 본신으로 돌아가면 되는 것이다.
그는 차라리 김형준이 자신을 빨리 죽여주길 바라고 있었다. 본신으로 귀환이 안돼는 지금의 상황에서는 그것만이 유일한 방법이었으니까.
"데몬이 뭐지?"
김형준은 자꾸만 자신의 신경을 건드리는 데몬이라는 단어에 의문을 표했다.
"데몬이 나에게 데몬이 뭐냐고 묻는다라. 이번 데몬은 계승이 이뤄지지 않은 모양이외다. 재미있군. 재미있어."
본신으로 돌아갈 생각을 하자 다시 여유를 되찾은 다이달로스의 말투가 다시 예전의 그것처럼 고풍스럽게 변했다.
"반편이 데몬이라. 내가 그것을 말해줄 이유는 없지 않소?"
역시나 순순히 말해줄 모양은 아니었다.
"정 궁금하면 저기 오르테아누 일족의 군주에게나 물어보시구랴. 하지만 블라가를 빼앗긴 그가 당신의 의문에 순순히 대답을 해줄지 모르겠소. 아마 당신은 그들에게 있어 피의 의식이 어떤 것인지 모르는 모양이오만."
말 끝에 가서는 조롱의 빛이 역력해진 다이달로스의 이죽거림이었다.
"그렇군. 사실 내가 네놈에게 알고 싶은 것은 그런 시시껄렁한 말이 아니거든."
김형준이 고개를 저으며 한발자국 앞으로 나섰다.
"내 입에서 듣고 싶은 말이 무엇인지는 짐작하나, 아마 영영 듣지 못 할 것이요."
다이달로스가 한쪽 입꼬리를 치켜올렸다. 조롱이나 다름이 없었지만 김형준은 개의치 않았다.
"그래?"
그리고 그의 손이 양손이 앞으로 불쑥 튀어나왔다. 그리고는 허공에서 무언가를 움켜잡듯이 손을 꿈틀대다가 그대로 양쪽으로 갈라버렸다.
"끄아아악!"
다이달로스가 비명을 질렀다. 난생 처음 겪어보는 극심한 고통에 그의 얼굴이 일그러다이달로스가 비명을 질렀다. 난생 처음 겪어보는 극심한 고통에 그의 얼굴이 일그러지고 비명이 길게 터져 나왔다.
"어차피 나는 너희들의 원대한 계획에 관심이 없어. 어쩌면 그게 이 세상의 변화와 관련이 있을지도 모르겠지만, 지금 나는 별로 궁금하지 않아."
이번에는 김형준이 다이달로스를 조롱했다.
"어차피 네놈은 입을 열지 않을 테니까. 그냥 네놈에게 고통을 주는 것으로 만족하지."
김형준은 그렇게 말하며 다시 손을 비틀었다.
"카아악!"
다이달로스가 눈을 까뒤집었다. 이미 뜯겨나간 왼팔은 둘째 치고, 꺽여선 안될 방향
으로 꺽여진 다리에서 전해지는 고통이 지독했던 탓이다.
김형준이 다시 잔인한 미소를 지었다.
"네놈을 같은 인간이라고 생각하지 않겠다. 몬스터라면 웃으면서 포를 뜨고, 뼈를 발라낼 수 있는 나다."
김형준은 처음부터 다이달로스의 입을 열겠다는 생각조차 하지 않았다. 그렇게 쉽게 입을 열 정도로 다이달로스가 만만해 보이지도 않았고, 이미 그들의 계획이 무엇이건 간에 분쇄해버릴 수 있다는 자신감이 생긴 탓이었다.
다이달로스의 육신이 뜯겨지고 비틀린다. 김형준의 손이 움직일 때마다 처참하게 변해가는 육신이지만 피 한방울 흘러나오지 않는 기괴한 몸이기도 했다.
마치 피를 빼낸 고깃덩어리와도 같은 그 모습이 김형준의 마음에 있던 일말의 찝찝함마저 날려버렸다. 그의 손이 더욱 바쁘게 움직이고 비명소리가 커졌다.
"그대의 여흥을 망치고 싶지는 않지만, 그 자를 우리에게 넘기지 않겠는가."
만약 드라카 드 오르테아누의 음성이 끼어들지 않았다면, 다이달로스는 더욱 처참한 꼴이 되었을 것이다.
김형준이 손을 멈추고 다시 나타난 진조 뱀파이어를 바라봤다.
"그는 이번 일의 원흉이오. 그렇게 여흥거리로 버리기에는 꽤나 중요한 비밀을 간직하고 있는 인물이 아닐까 하오만."
드라카 드 오르테아누의 말에 김형준은 고개를 끄덕였지만 납득하진 못했다.
"이 자가 그렇게 쉽게 입을 열것 같진 않습니다만..."
그의 말에 저 멀리 있던 트루 블러드 여인이 다가왔다.
"이 아이라면 그 입을 열 수 있을지도 모르지. 일족 중에는 꽤나 기이한 재주를 지닌 아이들도 많이 있다오."
============================ 작품 후기 ============================제목을 바꿨더니 신작으로 착각하셨을까요. 노블 투베 1위네요.
일일 조회수가 10만을 넘어본 건 처음입니다. ㅎㄷㄷ
간간히 제목을 바꾼 것을 낚시질로 생각하시는 독자님들이 계시지만, 그래도 거부감이 있던 전제목보다 지금이 더 낫다는 분들이 계시네요. 전작은 뭔가 중2력 돋는 느낌이었죠. 좀. ㅋㅋㅋㅋ항상 읽어주시고 응원해주시는 독자님들께 감사드립니다. 이제 이번 에피소드도 마무리단계고 다음 에피소드가 최종장이 될 예정입니다.
끝까지 힘내서 저희 함께 해요. ㅋㅋㅋㅋ *그리고 플라스마님의 우려처럼 신들의 전쟁이니, 갑작스레 말도 안돼는 존재가 끼어들 일은 없을 겁니다. 어쩌면 식상할지 모르지만 이미 만들어진 판 안에서 마무리를 짓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