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피바라기-198화 (198/223)

< --  2-6. 망자의 도시  -- >

나직하지만 힘 있는 음성이다. 검은 구체가 조금씩 뭉치더니 형상을 이뤄 마침내 사람의 모습이 된다.

"다이달로스?"

투기를 가다듬고도 갑작스러운 상황 변화에 어정쩡하게 서 있던 김형준이다. 트루 블러드와 블라가 사이에 얽힌 일을 듣고 있다가 돌입할 타이밍을 놓쳤던 것이 지금에 이르렀는데, 뜻밖의 인물이 등장하자 경악하고 말았다.

"오랜만이라고 하기에는 시간이 얼마 흐르지 않았소."

꽤나 멀찍이 떨어져서 내뱉은 말이건만, 다이달로스는 바로 곁에서 들은 것처럼 대꾸했다.

"당신이 왜..."

의문이 가득 담긴 김형준의 질문에 다이달로스는 가볍게 고개를 내젓더니 블라가를 향해 달려들었던 트루 블러드 여인에게 시선을 돌렸다.

"물러나시오. 어둠을 이해할 줄 아는 일족을 해치고 싶지는 않소."

자그마치 1등급 몬스터인 블라가를 홀로 처치하기 위해 나선 여인이다. 그런 그녀를 어린아이 다루듯 하는 다이달로스의 모습이 지극히 오만했지만, 여인은 그저 눈썹을 한번 꿈틀거리고는 걸음을 옮겼다.

그녀가 다시 가장 존귀한 트루 블러드의 뒤에 시립했다. 뜻밖의 인물이 등장하자 놀란 것은 김형준을 비롯한 인간들 뿐이었던가. 트루 블러드와 하얀 갈기 일족은 일말의 놀라움조차 보이지 않았다.

"그대였던가?"

가장 선두에 있던 트루 블러드가 입을 열었다.

"가장 오래 되고 가장 존귀한 진조의 왕이시여. 미천한 어둠의 파편이 드라카 드 오르테아누를 영접하오."

선두에 있던 트루 블러드, 드라카 드 오르테아누의 말에 다이달로스가 고풍스러운 인사말을 건넸다.

꽤나 거창한 인사였지만 인사를 받는 드라카 드 오르테아누도 곁에 있던 누구

도 그 것을 이상하게 생각하지 않았다.

그는 그럴 자격이 있는 존재였으니까.

어둠 속에서 흘러내린 신의 피가 생명을 얻었으니 그것이 최초의 어둠이요, 모든 뱀파이어들의 어버이였다. 그렇게 태어난 어둠이 새롭게 두 종족을 창조했으니, 그것이 바로 뱀파이어와 늑대인간의 시조였다.

그리고 지금 이 자리에 선 드라카 드 오르테아누는 시조가 거둬들인 닷 여선뿐인 진혈을 가진 진조 뱀파이어였다. 수 많은 트루 블러드들조차 감히 올려다보지 못하는 지고한 존재 드라카 드 오르테아누는 수만의 일족을 거느린 왕과도 같은 존재.

다이달로스의 인사에 거부감을 느낄 리가 없었다. 오히려 그는 다이달로스의 예가 부족하다고 느끼던 차였다.

"내 질문에 아직 답하지 않았다. 그대였냐고 물었다."

드라카 드 오르테아누가 무심하게 다시 입을 열었다.

"묻고자 하는 것이 블라가를 도운 이가 맞느냐는 확인이시라면 맞다고 대답하

겠습니다."

다이달로스가 대답하자 드라카 드 오르테아누가 한발 앞으로 나섰다.

"과연 그대였군."

마치 선문답과도 같은 그들의 대화에 김형준은 얼굴을 찡그리고 있었다. 대화를 들어보니 마치 처음부터 서로의 존재를 알고 있었던 듯 했다.

루마니아에 들어선 이후부터는 예측할 수 없는 일들 투성이라, 상황이 좀체로 정리돼지 않던 원정대의 인물들이었다.

그런데 정작 트루 블러드는 모든 사실을 알고 있었던 듯 하지 않은가.

"어찌 하시겠습니까. 저는 블라가를 데려가려고 합니다만, 부디 허락해주시길 바라겠습니다."

다이달로스가 갑작스러운 등장이 무색하게도 몸을 빼겠다는 의사를 밝혔다. 곁에 서서 얼이 빠진 표정을 짓고 있던 블라가가 뒤늦게 정신을 차리고는 광분했다.

"무슨 소리야! 약속이 다르잖아! 나를 왕으로 만들어준다며!"

거짓된 위엄도 이제 온데간데없고 그 자리에 남은 것은 어린아이처럼 칭얼거리는 하찮은 존재뿐이었다. 블라가의 말에 다이달로스가 고개를 저었다.

"그대의 왕국은 끝났소. 단 얼마 돼지 않는 시간이었지만, 그대는 군림하였으니 나는 약속을 지킨 것과 다름이 없소."

둘 사이에 계약이 오고 간 모양이었다. 다이달로스가 당당하게 자신의 뜻을 밝히자 블라가는 다시 억지를 쓰기 시작했다.

"내가 왕인데! 내 말을 듣지 않는 저들은! 내가 가장 존귀하고 권위 있는 왕이잖아!"

투정을 부리는 모습이 어린아이들의 그것과 한치의 차이도 없다.

"그대의 백성들에게 시켜보시구랴. 용맹스러운 장군들에게 저들을 격퇴하라 이르고, 충성스러운 신하에게 저들을 꾸짖으라 말해보시구랴."

말투야 정중했지만 그 어조에 담긴 것은 명백한 조롱이었다. 블라가도 뒤늦게 다이달로스의 태도가 그가 처음 만났을 때와는 다른 것을 느끼고는 몸을 움찔

거렸다.

그저 전령에 불과한 존재인 줄 알았다. 누군가의 심부름이나 할 존재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런 존재가 내뿜는 기운은 자신이 선망하고 두려워마지 않았던 트루 블러드의 시조들과도 비슷한 압도적인 기운이다.

"더 이상 보아줄 수가 없구나. 어둠의 권속으로 태어나 이미 그 오롯한 자존심을 잃은 사생아나, 그 사생아를 부추겨 무언가를 도모하려는 자나."

드라카 드 오르테아누가 촌극과도 같은 모습을 보이는 블라가와 다이달로스를 향해 한 걸음 다가섰다.

"정체를 알 수 없는 이여. 그대의 청은 이루어지지 않았다."

드라카 드 오르테아누 주변의 어둠이 아우성 치기 시작했다. 아무 것도 없는 허공에서 속삭임과도 같은 무언가가 소란을 떤다. 그리고 검은 장막이 펼쳐지듯 그를 중심으로 어둠이 내려앉았다.

블라가가 만들어낸 어둠과는 비교도 할 수 없는 진정한 어둠이다. 어둠 속에서도 가장 깊은 곳의 어둠이 드라카 드 오르테아누를 휘감았다.

그리고 그를 둘러싼 어둠이 일순간 주춤하는가 싶더니, 갑작스럽게 몸을 뻗기 시작했다. 소리도 없이 달려드는 어둠을 바라보던 블라가는 절망했다.

자신이 아무리 왕이네, 뭐네 떠들어봐야 시조의 여섯 아들, 딸들과는 비교도 할 수 없는 존재였다. 그런데 그 여섯 아들, 딸 중에서도 가장 강한 편에 속한다는 드라카 드 오르테아누의 힘을 어찌 막을까.

결국 자신이 이루고자 하는 바람이 모두 부질없었음을 깨달았는지 블라가의 흉물스러운 눈자위에 체념의 빛이 어렸다.

"가장 어둡고도 어두운 곳에 존재하는 이들의 왕이시여."

지척에 달려든 어둠이 다이달로스와 블라가를 집어 삼켰다. 하지만 그 어둠 속에서 흘러나온 한줄기 음성은 평온하기만 했다.

"진정 저희를 보내지 못하신 다는 말씀이십니까."

자신이 내뻗은 어둠 속에서도 평온한 다이달로스의 음성에 당황할만도 하건만, 어디선가 흘러나온 드라카 드 오르테아누의 음성은 평온했다.

"이것은 일족의 사생아가 벌인 것에 대한 단호한 엄벌, 나의 의지이자 하나뿐

인 그분의 의지이시다."

그 담담한 어조 속에 담긴 뜻이 어찌나 확고하던지, 다이달로스도 설득을 포기해야 했다.

"저 역시 지고한 분의 의지를 따르고 있습니다. 하지만 서로 받드는 존재의 뜻이 이리도 다르니 어쩔 수 없군요."

그 말과 동시에 그를 둘러싸고 있던 어둠이 흩어졌다. 마치 무저갱에서 흘러나온 절규와도 같은 단발마가 온 사방을 울려댔다.

심지가 약한 사람들은 듣는 것만으로도 단번에 절명할 정도로 끔찍한 죽음의 기운이 담긴 비명이다. 수백, 수천의 원혼이 내지르는 듯한 절규가 어둠을 찢어발겼다.

"제가 모시는 분의 의지를 세워야 하나, 미천한 종의 능력이 닿지 않음이니 오늘은 그대의 뜻대로 물러가겠나이다."

다이달로스가 고개를 숙이며 몸을 물리자, 곁에 있던 블라가가 발작적인 비명을 내질렀다.

"무.. 슨 소리야! 나도 데려가야지!"

온통 적의뿐인 곳에 홀로남기가 이제 와서 두려워졌는지, 블라가가 체통도 잊고 추태를 부렸다.

가만히 그들의 대화를 들으며 사태를 관망하고 있던 김형준이 나선 것도 이때였다.

아무런 낌새도 기미도 없었다.

소리없이 뻗어나간 고요한 아우성이 블라가와 다이달로스를 향해 나아갔다. 마치 스쳐가는 바람처럼, 초저녁에 내리는 마지막 노을빛처럼 은근하게 뻗어나간 김형준의 기운이 이내 다이달로스와 블라가를 감쌌다.

블라가의 추태에 고개를 저으며 몸을 뺄 준비를 하던 다이달로스가 이상징후를 느낀 것도 그 순간이었다.

몸이 움직이지 않았다. 아바타에 불과한 몸이었지만, 그 일신의 기운은 미노타우르스조차 반항할 엄두를 내지 못할 정도의 힘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의 몸이 옴짝 달싹하지 못했다.

"나도 약속을 지켰으니까! 너도 지키라고!"

블라가는 멍청하게도 아무런 낌새를 차리지 못한 모양인지, 고래 고래 악을 쓰고 있었다.

"나는 수백만의 목숨을 그대에게 대가로 지불했어! 당신도 그럼 약속을 지켜야 하잖아! 나를 절대자로 만들어준다는 약속을 지키라고!"

추악하게 미련을 버리지 못하는 블라가의 모습에 다이달로스가 처음으로 소리 쳤다.

"닥쳐! 쓰레기와도 같은 놈을 왕좌에 올려줬더니, 제 주제를 모르고 주절거리느냐! 그리고 네놈은 지금의 상황이 파악이 안 돼느냐!"

이미 정중하고 고풍스러웠던 태도는 온데간데없었다. 그저 시정잡배의 사나움만이 남은 다이달로스의 진면목에 블라가가 눈을 치뜨다가 뒤늦게 자신의 사지가 움직이지 않는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도저히 못 들어주겠군."

그때 김형준이 한걸음 앞으로 나섰다. 순식간에 모든 이들의 시선이 그에게 쏠

렸다.

의아한 눈으로 자신을 바라보는 전지현의 시선을 무시한 채, 김형준은 한발 한발 블라가와 다이달로스를 향해 걸어나갔다.

"그깟 같지도 않은 바람 때문에 그랬나?"

그가 걸음을 내딛을 때마다 그의 발치에 검붉은 줄기가 솟아나와 꽃을 피웠다가 이내 시들어 고개를 꺾는다.

"고작 그런 이유 때문에 수백만의 시민이 억울하게 죽어야 했나!"

김형준의 포효와도 같은 외침이 온 천지를 진동시켰다. 그 기세가 어찌나 압도적이었는지, 이 자리에 모인 무수한 강자들조차도 일순간 몸을 떨어야했다.

그 강대한 드라카 오르테아누 마저도 말이다.

모두가 경악한 표정으로 눈을 크게 떠는데, 김형준은 계속해서 발을 내딛었다. 발치에 피어오르는 혈화가 점점 빠르게 피었다가 시들고, 더욱 그 영역을 넓혀간다.

"네깟 새끼들때문에!"

이제껏 눌러왔던 분노가 뒤늦게 폭발했다. 감염자가 되어 자신에게 달려들던 수많은 민간인들. 이미 되돌릴 방법이 없다고 스스로에게 되뇌며 수 없이 많은 이들을 쓰러트려야 했다.

나약한 정신이 붕괴될 저도로 만신창이가 되었었다. 그리고 그때 새겨진 상흔이 그 깊고 깊은 골만큼이나 거대한 분노가 되어 터져 나왔다.

한걸음 한걸음 내딛는 김형준의 등가로 무언가가 솟아올랐다. 화악 하는 소리와 함께 펼쳐진 그것은 거대하고 거대한 날개 한쌍. 온몸을 감싼 피바라기 역시 요동을 치며 변화한다. 날카로운 견갑에 돌기가 돋아나고 더욱 흉험하게 바뀌고, 평평한 흉갑이 삐죽하게 솟아올랐다. 관절마다 돋아난 거대한 날이 날카롭게 빛을 낸다.

변화에 변화를 거듭하던 김형준이 블라가와 다이달로스의 지척에 도착했을 때, 그는 이제까지의 김형준과는 완전히 다른 존재가 되어 있었다.

기괴하다 싶을 정도로 울퉁불퉁한 갑주로 온몸이 감싸여있다. 괴수의 그것처럼 사납게 생긴 투구에는 두 개의 뿔이 솟아있었다. 넓게 펼쳐진 한쌍의 혈익과 그 아래에 존재한 채찍과도 같은 꼬리.

온몸이 붉다. 흘러내리는 피의 그것처럼 온통 붉은 붉은 빛을 한 김형준이 제 자리에 멈춰섰다.

존재만으로 사위를 압도하는 압도적인 존재가 그 자리에 있었다. 숨조차 크게 들이킬 수 없는 압도적인 존재감에 온 세상이 숨을 죽였다.

드라카 드 오르테아누가 신음처럼 한마디를 내뱉었다.

"데몬..."

============================ 작품 후기 형준몬 진화! 제목 바꾼 뒤로 순위가 올랐네요. 데헷. 감사감사합니다.

이제 슬슬 마무리를 향해 달려가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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