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2-6. 망자의 도시 -- >
그 눈빛에 이유도 모를 불안감이 김형준의 어깨를 짓눌렀다.
"왜? 대체... 왜?"
그저 불안감이라고 하기에는 민용모의 시선에 담긴 그것이 너무도 무겁고 날카로워 김형준은 저도 모르게 몸을 떨었다.
"당신이 호라시오경을... 호라시오경을!"
그때 어디선가 터져 나온 절규와도 같은 외침, 숨김없이 드러난 혐오와 경멸의 감정에 김형준이 크게 눈을 떴다.
김형준의 시선이 빠르게 이곳 저곳을 훑어갔다. 자신의 전신을 짓누르고 가슴을 후벼파는 알 수 없는 불안감의 원인을 찾기 위해 그의 눈에 담긴 빛이 필사적이기만 했다.
그리고 마침내 시선이 전장의 한켠에 닿았을 때, 그는 절망해야 했다. 미이라처럼 바삭바삭하게 말라버린 육신이 처참하게 바닥을 나뒹굴고 있다. 아
직까지 몸에 휘감긴 가느다란 줄기와 그 끝에 피어난 혈화 한송이, 처참한 광경에 어울리지 않는 선명한 붉은 빛이다.
이제껏 수없이도 보아왔던 그 모습에 김형준의 몸이 휘청거렸다.
왜 모르겠는가. 찔레가시에 당했던 몬스터들이 딱 저랬던 것을. 흡혈귀에게 당한 것과는 또 다른 그 몰골에 김형준은 상황을 파악할 수 있었다.
자신이 어떤 식으로든 그들의 생명력을 갈취했을 거라고.
당장에라도 쓰러질 듯 비틀거리는 김형준은 자신을 받쳐주는 작은 손길에 간신히 몸을 지탱할 수 있었다.
"불가항력이었습니다."
자신의 사랑스러운 아내가 안타까운 시선으로 고개를 내젓는다.
"이미 흡혈귀로 변이중인 이들이었습니다. 당신이 아니었더라도 그들은..."
말끝을 흐리는 그녀의 표정을 차마 마주 보기가 무서워 그는 차라리 눈을 감아버렸다.
마음이 복잡했다. 알 수 없는 감정이 가슴을 휘젓는다. 죄책감 같기도 하고, 대상을 알 수 없는 원망 같기도 한 감정이 폭풍처럼 그를 밀고 당긴다.
"헛소리! 방법을 찾아보면 있었을 거라고!"
이제는 하나 둘 목소리를 올리기 시작한 원정대의 이능력자들이다. 그들 역시 지금의 상황에서 내분을 일으키는 것은 자살행위와도 다름이 없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지만, 감정을 억누르기에는 눈 앞에서 본 광경이 너무도 처참했다.
고통에 몸을 떨며 바싹 말라가던 이들의 모습은 그들이 존경했고, 자신의 나라가 자랑했던 그 강대한 1등급 능력자의 모습이 아니었다. 그렇게 허무하게 또 비참하게 스러져 갈 이들이 아니었음에도 그들의 최후는 끔찍할 정도로 처참했다.
이성이 스스로의 행동을 질책하지만, 원정대의 생존자들은 감정을 다스릴 수 없었다.
호라시오 베니치, 러셀 피터, 얀크스 비텐펠츠. 각기 이탈리아와 인도, 독일을 대표하는 이들이다. 그들이 공을 세우고 생환할 것을 기대하는 국민들의 수가 수백, 수천만은 될 터. 이제 돌아가서 뭐라고 그들에게 설명한다는 말인가.
"어리석고 어리석구나. 인간들이야 애초부터 그렇다는 것을 알고 있었지만, 가진 힘에 맞지 않게 고귀하지 않은 자들이로다."
뜻밖에도 이 상황에서 김형준의 편을 들어 그들을 질책한 것은 원정대의 동료도, 하얀 갈기 일족의 전사들도 아니었다.
"내가 던져준 육신의 주인들은 이미 일족의 피를 받아들여 인간이 아니게 된 이들, 지닌 바 본신의 힘이 거대하여 변이의 과정에서 끼칠 패악이 지대하여 내가 제압하였노라. 이지를 상실하고 과거의 기억을 잃었을 그들이 과연 그대들이 알던 이들이란 말인가."
고풍스럽고도 위엄서린 질책이 조용한 전장에 천둥처럼 울려댔다. 모두의 시선이 목소리의 주인을 찾았다.
트루 블러드, 그 중에서도 가장 존귀하고 강대한 존재가 눈빛으로 그들을 나무란다.
"나 역시 안타깝도다. 평시라면 강대한 힘을 가진 일족의 탄생에 어찌 기꺼워하지 않을쏜가. 허나 지금은 시기가 좋지 않음이니, 실로 얄궂은 운명의 안배라고 할 수 있겠노라."
원정대의 생존자들이 자랑스러워 하던 1등급 이능력자들을, 트루 블러드는 자신의 일족이라 칭하고 있었다. 그 안에 담긴 의지와 사념이 듣는 이의 가슴에 파고들었다.
"새로운 이종의 시초여. 그대가 그들의 피를 취했다고 하나, 그건 인간들의 기준대로 생각하면 몬스터의 생혈과도 같은 것. 다른 이들의 질책을 들을 필요도 마음에 담아둘 필요가 없을 것이요."
지금 이 순간만큼은 피아가 뒤바뀌어 버렸다. 누가 적이고 누가 아군인지조차 애매모호한 상황이라 김형준은 혼란스러운 감정에 한숨을 내쉬었다.
"애초에 이분이 그런 일을 당한 것은 당신들을 구명하기 위해서였음을 어찌 모르는가! 그대들이 아니었다면 애시당초 저 추악한 살덩어리들의 생명력을 받아들이지 않았을 것, 그랬다면 그대들은 지금 이 자리에 없었겠지. 그러나 이분 또한 이런 번뇌에 시달리지 않았을 것임을 왜 모르는가!"
전지현이 김형준의 품에서 빠져나오며 추상같은 질책을 퍼부었다. 아직도 눈물자국이 선명한 얼굴이지만, 그 맑고 깊은 눈빛에 담긴 위엄이 한마디 한마디 더욱 날카롭게 날을 세웠다.
"피와 살을 걸고 전투를 해왔던 적조차 아는 사실을 모르다니, 실로 갑갑하구나."
그녀의 말이 길어질수록 목소리를 높였던 원정대의 생존자들이 고개를 숙였다. 트루 블러드가 말할 때는 적의 말따위는 듣지 않아도 된다는 생각으로 합리화를 했다. 모르는 척 감정의 폭주에 편승하여 김형준을 몰아붙였지만, 명성 높은 소드 엠프레스의 질책을 듣자 정신이 맑아지는 기분이었다.
그녀의 사자후는 애초부터 파사의 기운을 담은 것. 삿되고 그릇된 것을 몰아내는 힘이 있었다.
아이러니하게도 그녀의 이 사자후가 쓰인 곳은 적을 향한 호통이 아니라 아군을 질책하기 위해서라니. 그녀는 이 상황이 안타깝고 또 안타까웠다.
또 다시 어깨에 짐을 짊어맨 김형준의 상황이, 그리고 현실을 받아들이지 못하는 원정대의 아집이 너무도 안타까웠다.
"이 자리에서 고하니, 인간임을 포기한 이들의 최후에 대해 왈가왈부 하는 이들은 나 검후의 이름으로 징치하겠노라."
서슬퍼런 경고에 원정대 생존자들의 입이 다물어졌다.
그들이라고 왜 모르겠는가. 김형준이 처한 상황은 오히려 자신들이 위로해줘야 한다는 것을. 하지만 이성은 그리 말해도, 우상과도 같은 이를 잃은 감정이 평정을 잃게 만들었다.
"됐어요..."
전지현이 다시 입을 열려는데 김형준의 음성이 불쑥 끼어들었다. 그 어조에 담긴 씁쓸함과 죄책감 탓에 그녀는 눈물이 왈칵 쏟아질 것만 같았지만, 꾹 눌러참았다.
김형준의 음성이 마냥 씁쓸한 것만은 아니었던 탓이다. 이전이었다면 죄책감에 몸부림쳤을 그의 음성에 한줄기 강한 의지가 담겨있었다.
"상황은 이해했습니다. 만약 이 일에 제 과오가 있다면 어떤 식으로든 대가를 받겠습니다."
처음에는 전지현에게 향했던 말이 끝에 가서는 이 자리에 선 모두를 향했다. 감겼던 그의 눈이 뜨이고 단호한 의지가 번뜩였다.
"하지만 지금은 우리의 임무를 잊지 말아요."
김형준은 말을 끝맺기가 무섭게 기세를 폭발시켰다.
천지가 진동을 한다. 블라가가 야심만만하게 만들어낸 이 추악한 세계에 금이 간다. 흉물스러운 바닥이 흡사 지진이라도 난 듯 흔들리고 물컹물컹한 벽이 딱딱하게 굳어 쩍쩍 갈라지는 소리를 토해냈다.
진동과 쩍쩍거리는 소음이 점점 커진다. 이제는 무너질 듯 요동치는 세상이 어느 순간 고요함을 찾았다.
더 이상 그들을 압박하던 흉물스러운 벽도, 질척거리는 바닥도 이 자리에는 더 이상 존재하지 않았다.
그들이 마지막으로 보았던 붉게 물든 하늘과 단단한 대지가 그들을 반겼다.
"이제 본 게임으로 넘어가지요."
그 안에서 홀로 우뚝 선 김형준이 단호하게 한마디를 내뱉었다.
김형준의 선포와도 같은 한마디에 세상의 시간이 다시 흘러가기 시작했다. 혼란에 빠져들었던 원정대의 생존자들도 평정심을 되찾고 투기를 피어 올렸다. 하얀 갈기 일족은 그저 짧은 포효를 한번 하는 것으로 전투의 준비를 끝마쳤다.
"네... 네깟 놈이... 감히..."
블라가가 온몸을 부들부들 떨었다. 그가 앉아있던 고풍스러운 왕좌는 이미 온데간데없었고 그저 시체더미를 쌓아올린 추례한 둔덕이 하나 있었을 뿐이다.
저 높은 왕좌에서 바닥까지 추락한 블라가는 분노로 몸을 떨었다.
"블라가여. 블라가여. 시궁창의 쓰레기 더미에 앉아 홀로 세상을 우러러보던 백성 없는 왕이여."
분노로 몸을 떨던 블라가가 그 말에 움직임을 멈췄다. 마치 노래하듯 속삭이는 음성은 이제껏 가장 존귀한 트루 블러드의 뒤에 시립해 있기만 했던 여인의 입에서 흘러나온 것이다.
"그대는 시간이 흘러도 변하는 것이 없구나."
그 말에 퍼뜩 정신이 든 블라가가 눈을 크게 떴다. 하지만 왜인지 블라가의 눈꺼풀조차 없는 추악한 눈에 서린 빛은 분노도 증오도 아니었다.
"가엾구나. 실로 가엾구나. 그대가 우리 일족에게 인정받기 위해 한 노력들은 가상하나, 애초에 그대와 우리의 태생이 다른 것을 어찌 그대만 모르는가."
열등감. 자격지심. 그리고 가장 크게 일렁이는 선망의 빛.
블라가의 얼굴에 떠오른 빛은 원정대가 생각한 것과는 전혀 다른 종류의 그것이었다.
"하지만 당신도 지금 나를 왕이라고 불렀지 않은가. 비록 영지가 시궁차창이어도! 비록 다스림 받는 백성이 하나도 없어도! 당신도 나를 왕이라고 불렀지 않은가!"
음산하고 끈적끈적한 기운이 가득한 음성이었지만, 뜻밖에도 어린아이의 투정과도 같은 어조가 섞여있었다.
여인이 고개를 저었다.
"그래. 그 왕이라는 칭호가 그대에게는 그렇게도 중요하던가. 그렇다면 그대는
이미 왕이다. 무엇을 더 바라는가."
일순간 말문이 막힌 블라가는 입을 몇 번인가 열었다 닫았다.
"하지만 그대가 왕자에 앉아 세상을 내려보아도, 만명의 일족이 그대를 왕이라 칭송한다 해도, 그대의 열망은 이루어질 수 없는 것. 그대는 우리 트루 블러드와 함께 할 수 없다."
여인의 말에 블라가가 이를 악물고 몸을 떨었다.
"너희들은... 너희들은 뭐가 그렇게 잘났길래! 뭐가 그렇게 잘나고 고귀해서!"
블라가의 절규에 담긴 감정의 골이 이루 말할 수 없이 깊었다. 하지만 그 깊고 깊음이 어린아이의 열등감과 자격지심에서 기인한 것임에야. 여인의 얼굴에 처음으로 표정이라고 할만한 것이 떠올랐다. 아름다운 얼굴에 내걸린 서릿발 같은 위엄에 안타깝다는 빛이 어른거린다.
"그대는 평생을 알 수 없으리라. 그것은 누가 정하는 것이 아니라 탄생하는 순간부터 주어지는 숙명과도 같은 것. 그대와 우리의 갈 길이 다른 것을 왜 그리도 이루어지지 않을 것을 염원하고 염원하는가."
여인의 단호한 대답에 블라가는 몸을 휘청거렸다. 지저분한 시체더미 위에 앉은 그가 망연한 눈빛으로 주변을 둘러본다.
그 시선과 마주친 김형준은 어쩐지 이번 사건에 얽힌 이야기를 알 수 있을 것 같았다.
척 보아도 트루 블러드들과 블라가는 비교조차 안 되는 존재다. 한쪽은 존귀함을 온몸에 두른 이들이고 한쪽은 추례하고 비루한 몰골이다. 또한 흡혈귀라고는 생각할 수 없을 정도로 깊은 눈빛을 한 트루 블러드들은 마치 현자와도 같은 모습이었다.
강대한 힘만을 제외하면 오히려 추례하다 말할 수 있는 블라가라는 존재가 왜 이런 일을 벌였는지 알 것 같았다.
열등감과 자격지심. 단순한 감정이다. 그 사소한 감정으로 이런 어마어마한 일을 벌였다는 것이 놀라웠지만, 블라가는 어디까지나 인간이 아닌 스트리고이다. 자신들의 잣대로 그를 평가할 수는 없었다.
"그래. 너희들은 처음부터 그랬어. 마치 날 때부터 높은 곳에서 내려다보는 듯한..."
허탈하게 중얼거리는 블라가의 말이 그의 생각을 확신으로 바꾸어준다.
김형준은 이를 악물었다. 동정따위 전혀 생각도 하지 않았다. 사소한 감정놀음에 수백만의 생목숨을 희생시키고 농락한 블라가의 감정따위 그에게는 오히려 분노를 부추길 뿐이었다.
"그대가 우리와 함께 할 수 없음을 알고 있었지만, 그대를 인정하는 면도 있었다."
여인의 말투가 조금 부드러워졌지만, 이는 찰나의 순간에 불과했다.
"하지만 그대가 벌인 패악은 우리가 수천년을 지켜온 율법을 송두리째 부숴버린 것, 이제는 동정도 인정도 없다. 남은 것은 그대가 치러야 할 대가뿐!"
말이 끝나갈 무렵에는 여인의 모습이 흐릿해졌다. 실의에 빠져있던 블라가는 당황하여 사방을 두리번 거리지만 여인은 이미 그의 등뒤로 이동한 후였다.
블라가가 당황하는 모습을 잠시 지켜보던 여인이 오른손을 불쑥 내밀었다. 그
녀의 고운 손가락 끝에 매달린 손톱이 날카롭게 날을 세우고 블라가를 찔러간다.
모두가 블라가의 최후를 생각하고 있을 때, 검은 물체가 갑작스레 여인을 감쌌다. 마치 어둠과도 같은 그 물체는 트루 블러드 여인을 천천히 밀어냈다.
블라가의 심장어림에 닿아가던 그녀의 손톱도 더 이상 전진을 못 하고, 오히려 뒤로 밀려나기 바빴다. 갑작스러운 상황변화에 모두가 눈을 크게 뜨고 있는데, 허공 중에서 기묘한 음성이 흘러나왔다.
"거기까집니다."
또 다시 상황은 급변하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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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견 감사드리고, 완결까지 힘내서 달려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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