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2-6. 망자의 도시 -- >
따뜻하다.
온몸을 감싸는 따뜻한 감촉에 이루 말할 수 없는 포근함과 안락함을 느꼈다.
나른하다.
충만하게 차오르는 듯한 무언가에 손 하나 까딱하지 않아도 기분 좋은 나른함이 느껴졌다.
마치 봄날의 볕에 누워 햇살을 받는 듯한 느낌이기도 했고, 또 기억은 나지 않지만 어머니의 뱃속에 있는 듯한 느낌이기도 했다.
빈틈없이 온몸을 감싸오는 물컹물컹한 감촉에 갑갑해지기는커녕 도리어 평화로움을 느낀다.
하지만 지금도 느끼고 있다. 그 평화로움 너머로 전해져오는 악의와 살의. 그 거칠고 광폭한, 또 음습하고 끈적끈적한 기운이 자신을 둘러싸듯 포진해 있다는 것을.
김형준은 더욱 몸을 웅크렸다. 마치 양수 속을 부유하는 태아와도 같은 모습을 한 그의 표정이 더할 수 없이 평온했다.
이대로 잠이 들고 싶다. 그간 걸어온 고난의 길은 지금의 김형준에게만큼은 아무 가치도 없는 것이었다. 그저 이대로 편안하게 잠을 자고 싶다는 기분만이 그의 마음을 지배했다.
전지현의 미소와 연아의 방긋거리는 얼굴이 그의 머릿속을 스쳐갔지만, 그저 기분 좋은 꿈과도 같이 그대로 스러져버렸다.
쉬고 싶어.
그의 몸이 더욱 움츠러들었다. 수많은 생각과 사념들이 희미하게 스러져간다. 평생을 겪어온 격전과 그 격전으로 인해 단단해진 정신도 각오도 그 안에서 사라진다.
그 모든 것을 잊고 나서야 얻은 완전한 숙면, 그 더할 데 없는 휴식은 영원히 이어질 것만 같았다.
만약 그를 감싼 양수와도 같은 액체가 요동을 치지 않았다면 말이다.
그렇게 염원하던 휴식을 얻었음에도 그 순간은 지극히 찰나였을 뿐이다. 그를 이리 저리 밀치고 당기는 액체의 흐름에 김형준은 억지로 눈을 뜰 수밖에 없었다.
자신을 빈틈없이 에워싼 말캉말캉한 액체, 그리고 그 주변을 완벽하게 감싼 단단한 껍질. 그 무엇도 변한 것은 없었다. 갑작스러운 액체의 흐름에 침잠되어 있던 의식이 깨어나자 어리둥절하기만 하다.
따뜻하다. 포근하다. 나른하다.
그 공통된 감정 사이로 불쑥 이물질이 끼어들었다. 앞선 감정과는 정반대인 활력과, 생동감, 그리고 온몸을 들썩이게 만드는 생명력.
평화로운 감정은 금세 사라지고 그 자리를 대신해 갑갑함이 차오르기 시작했다. 어디선가 끊임없이 공급되어지는 생명력의 파도에, 그가 간신히 얻어낸 안락한 요람이 붕괴하기 시작했다.
요동치는 양수가 뜨거워진다. 아니, 뜨거움을 넘어 마치 끓는 것과도 같이 부글거리기 시작했다. 그리고 단단하게 주변을 감싸고 있던 껍질이 잘게 갈라지며, 그나마의 양수를 어딘가로 내쏟기 시작했다.
김형준은 그렇게 요람에서 내쳐졌다.
고치를 이루고 있던 검붉은 실타래가 한올 한올 허공중에 스러져간다. 단단해보이던 껍질이 얇아지고 얇아지다가 결국 이곳 저곳에 구멍이 난다. 그리고 그 틈을 통해 쏟아지는 붉고 투명한 액체의 줄기가 조금씩 늘어간다.
그리고 마침내 껍질을 이룬 실타래가 올올이 풀려 이제까지와는 비교도 되지 않을 정도로 많은 양의 액체를 토해낸다.
꿀꺽누군가 마른침을 삼키는 소리가 들려온다. 모두가 숨을 죽이고 있다. 한결같은 기대와 두려움을 떠올린 이 자리의 모든 존재가 눈을 부릅떴다.
"아아."
누군가가 찬탄과도 같은 신음을 내뱉었다. 그리고 그 뒤를 이어 동일한 감정의 파도가 이 자리를 함께한 모두에게 휘몰아쳤다.
"드디어 껍질을 깨고 나왔구나. 이제까지 없었고, 앞으로도 없을 유일무이한 존재의 탄생이니 지켜보는 우리 모두의 눈이 영광될 지어다."
트루 블러드가 노래하듯 읊조렸다. 목적을 알 수 없는 존재의 말이었지만, 지금 이 순간만큼은 모두가 고개를 끄덕였다.
새로운 존재의 탄생.
원정대의 입장에서야 알 수 없는 일이었지만, 왜인지 모르게 벅찬 감동이 밀려왔다. 눈물이 흘러내리고 심장이 미친 듯이 방망이질 쳤다.
그것은 비단 고치를 깨고 나온 김형준을 둘러싼 장엄한 휘광 때문만은 아니었다. 이제까지 없었고, 앞으로도 없을 유일무이한 존재의 탄생을 지켜보고 있다는 본능적인 예감이 그들을 감정의 호수속으로 침잠시켰다.
껍질 속에서 나타난 김형준은 이제까지와 크게 다른 점이 없는 모습이었다. 다만 더욱 매끈해진 피부와 광채라도 날 것 같은 검은 머릿결이 신비해보일 뿐이랄까.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의 존재는 이 자리에 모인 존재들을 압도하는 무언가가 있었다.
"아..."
김형준의 입이 열리고 나온 첫마디는 탄식과도 같은 안타까움의 단발마. 무언가 중요한 것을 잃어버린 듯, 상실감 가득한 그 음성에 모두의 마음에 안타까움이 차올랐다.
그리고 굳게 닫혀있던 눈꺼풀이 문을 열었다. 그리고 그 틈으로 드러난 영롱한 눈동자는 루비와도 같은 붉은 빛, 단지 눈을 뜬 것 하나만으로 온 세상이 밝아지는 느낌이다.
모두의 뺨에 감동의 눈물이 흘러내렸다. 트루 블러드는 물론 추악하게 생긴 블라가마저 눈을 크게 뜨고 몸을 떨었다. 사자와도 같은 존재들, 이미 말라버린 눈물을 흘리진 못했지만 그들은 온몸을 떨며 감정의 파도를 외부로 표출했다.
그리고 그런 시선의 중심에는 김형준이 있었다. 감동과 선망, 그리고 기대와 알 수 없는 질시가 담긴 모든 이들의 시선을 받으며 그는 정신을 차렸다.
다른 이들이 감동을 하거나 말거나 김형준이 처음 느낀 감정은 지독스러울 정도의 상실감, 태중에서 강제로 빼내어진 신생의 기분이 이러할까. 자신의 주변을 둘러싸고 있던 평화로움이 단번에 사라진 느낌이라 그는 극심한 상실감에 한동안 아무 생각도 할 수 없었다.
그러나 어떤 감정이든 영원할 수는 없는 법, 상실감이 옅어지고 그 자리를 대신 하여 활력이 가득 차올랐다. 지금이라면 산을 옮기고 하늘을 가를 수 있을 것 같은 막대한 기운이 전신의 구서구석에 흐르고 있었다.
주먹을 쥔다. 다리를 떨친다. 몸을 돌린다. 그 단순한 동작에도 느껴지는 막대한 에너지의 태동이 차라리 당황스러울 지경이었다. 한참이나 몸을 움직이고 있다보니 조금은 의식이 맑아진다.
마치 꿈에서 깨어난 것처럼 천천히 현실감이 돌아온다. 평화로웠던 방금 전의 감정도, 영원한 휴식에 대한 열망조차도 이제는 흔적조차 남지 않게 된 순간 김형준은 입을 크게 벌렸다.
"어라?"
모든 이들이 자신을 주목하고 있었다. 원정대의 생존자들은 물론, 블라가와 하얀 갈기 일족. 그리조 정체를 알 수 없는 일단의 무리들까지.
뒤늦게 의식을 잃기 전의 상황을 떠올린 김형준이 때늦게 투지를 끌어올렸다.
이곳은 전장, 생과 사가 오고 가는 곳이다. 헤이해졌던 정신이 단박에 쇳덩이
처럼 단단해지고, 긴장과 활력으로 이완되었던 근육이 조여졌다. 그리고 자연스럽게 이를 따르는 막대한 기운이 그의 주변을 에워쌌다.
붉은 빛이 그의 발끝을 감싼다. 단단하면서 유연한 무언가가 가슴깨에 차오른다. 불끈 쥔 주먹에 번쩍이는 섬광이 떠오른다. 전신의 어느 곳이라 할 것도 없이, 붉고 영롱한 빛이 터져 나왔다. 빛무리가 산란하듯 그의 주변을 감싸고 요동치던 섬광이 한참만에야 사라진다.
일전에 김형준이 발현하던 갑주 피바라기와도 같지만, 검붉은 빛이라기보다는 붉은 보석과도 같은 빛을 뿜어내는, 차라리 루비로 이루어진 조각상이라고 해도 좋을 갑주가 그의 전신을 둘러싼다.
그리고 그 자리에 나타난 것은 지극히 아름다운 무언가. 존재 자체를 정의할 수 없는 극상의 아름다움이 있었다.
하지만 그 지극한 아름다움은 곧 이어 온 천지가 진동할 정도로 막강한 파괴의 기운이 되어 사방으로 퍼져나갔다.
짝짝짝
그 엄청난 기운의 폭풍 속에서 모든 존재가 휘청이고 있을 때, 누군가가 박수를 치기 시작했다.
트루 블러드 중 나타난 순간부터 블라가를 아이 취급하던 존재였다. 그는 감명 받았다는 표정으로 박수를 치며 환호했다.
"거듭남을 축하드리오. 굳이 이 더러운 곳까지 찾아온 보람이 있어 다행이오."
그의 말과 동시에 사방을 광포하게 진동시키던 기운이 사라졌다. 그리고 사방에 가득하던 탄생의 장엄함도, 활홀한 감정의 파도도 거짓말처럼 사라졌다. 그 자리를 대신 해 차오르기 현실감에 사람들의 정신이 깨어나기 시작했다. 감동에 눈물이 흘러내리던 눈동자가 이내 차갑게 굳더니 의문과 경악의 빛이 떠올랐다.
"거듭나?"
김형준이 얼빠진 음성으로 그의 말을 곱씹었다. 모든 이들이 집단 최면과도 같은 상황에서 깨어날 때, 그 역시 갈 곳이 없어진 투기를 거둬들이며 의문어린 표정을 지었다.
"그렇소. 마스터 킴. 그간의 일이 기억이 날까 모르겠소."
트루 블러드의 정중한 말에 김형준의 표정이 굳었다. 그리고 떠오른 기억들이 빠르게 그의 머릿속을 스쳐갔다.
전투 중 원정대의 이능력자들을 구하기 위해 육편들을 향해 찔레 가시의 권능전투 중 원정대의 이능력자들을 구하기 위해 육편들을 향해 찔레 가시의 권능을 발휘했다. 그리고 이어진 육편들과의 힘겨루기에서 어쩔 수 없이 흡혈을 시도했다. 그리고 온몸을 파고드는 음습하고도 끈적끈적한 기운에... 그의 눈이 크게 뜨이고 입이 벌어졌다.
"기억하시나 보오. 축하하오. 인류 최초로 인류 이상의 존재로 거듭난 그대에게 축하드리오. 또한 이 기리고 기려야 할 순간 가장 먼저 축하를 건네는 것이 나라니, 실로 영광이로소이다."
고고한 트루 블러드가 고개까지 숙여가며 축하의 말을 건네지만, 김형준은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다.
마치 꿈과도 같았던 일들이 현실이었다.
"새로운 우리 일족의 탄생을 기리기 위해 이 자리에 왔으나, 이제껏 한번도 보
지 못한 경이를 봤으니 일족의 탄생과 진배없는 감동이요."
그 와중에도 끊임없이 지껄여대는 트루 블러드의 매끈한 혀가 차라리 원망스러울 지경이었다.
막연하게 실감나기 시작하는 변이의 순간과 지금의 상황에 몸이 떨려오려 한다.
그때 갑작스러운 온기가 느껴졌다. 단단한 붉은 빛의 갑주를 초월해 느껴지는 온기, 품 안에 쏙 들어온 따뜻한 무언가에 정신을 차린 김형준이 눈을 크게 떴다. 전지현이 눈물이 그렁그렁한 얼굴로 자신을 올려다보고 있었던 탓이다.
"걱정했습니다."
단 한마디였지만 그 안에 담긴 노심초사가 어찌 작을까. 이제는 완전히 기억나버린 고치 속에서의 기억에 그는 쓴웃음을 지었다. 그녀의 얼굴과 연아를 봤음에도 쉬고 싶다고 생각했다. 포기와도 같았던 감정에 새삼 미안함이 떠올랐다.
"미안해요."
간신히 한마디 꺼낸다는 것이 이토록이나 멋대가리 없는 한마디다. 스스로의 입이 저주스러울 김형준이었지만, 전지현은 그 한마디에 모든 것을 잊고 환한 미소를 지었다.
전지현의 등장과 함께 그의 가슴을 짓눌렀던 압박감이 사라졌다. 새로운 존재의 탄생을 축하한다며 추켜세우는 트루 블러드의 태도도 부질없이 느껴졌다.
비록 그 무거움이 완전히 사라지지는 않았지만, 김형준은 간신히 현실 세계로 의식을 되돌릴 수 있었다. 떨리던 몸이 진정을 되찾고, 흐릿했던 눈동자가 영민하게 빛을 발하기 시작했다.
그의 눈이 빠르게 사방을 훑어갔다.
자신이 흡수한 육편은 이미 부스러질 대로 부서져 흔적도 찾아볼 수 없었고, 그토록이나 강대하게 느껴졌던 블라가는 입을 벌리고 자신을 바라보고 있었다. 왕좌에 앉아있음에도 불구하고 초라하게만 보이는 블라가의 모습에 그는 의아함을 느꼈지만 처음의 목적을 떠올렸다.
영롱한 빛을 발하던 붉은 눈동자에 금세 서릿발 같은 위엄이 들어섰다. 루마니아에 들어서고부터 보아온 수백만의 희생자, 그들의 죽음이 떠올라 그의 눈가
에 서린 적의와 투지가 단호해진다.
"이 괴물!"
하지만 그의 그런 투지는 금세 사그라들어야 했다. 투지를 불살라야 할 존재가 눈 앞에 있음에도 불구하고 자신을 노려보는 원정대의 누군가를 발견한 탓이다.
갑작스러운 그의 행동에 당황한 김형준이 시선을 이리저리 돌렸다. 이제는 현실감을 완전히 되찾은 이능력자들의 얼굴에 떠오른 것은 두려움과 경의, 그리고 상반된 경멸의 빛이다.
한명 한명 이능력자들과 시선을 마주한 김형준의 시선이 민영모에게 닿았을 무렵에는 차라리 혼란스럽다고 해도 좋을 감정이 눈동자 가득 떠올라 있었다.
"형준아..."
어찌 된 일인지, 민영모의 시선에는 안타까운 빛이 숨김 없이 떠올라 있었다.
============================ 작품 후기
많은 분들이 피바라기라는 제목을 추천해주시네요. 쇳뿔도 단김에 빼랬다고 오는 자정을 기해 제목 바꿉니다. 부디 혼동 없으시길 바라겠습니다.
그리고 복귀할 때는 언제나 연참으로. 이런 식으로나마 독자님들께 사죄의 뜻을 표합니다.
는 자정을 기해 제목 바꿉니다. 부디 혼동 없으시길 바라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