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2-6. 망자의 도시 -- >
그렇게 몇 명인가의 늑대인간들이 시체조차 온전히 남기지 못하고 스러져갔다. 안개 속이라 한치 앞도 분간할 수 없는 상황이었지만 하얀 갈기 일족의 늑대인간들은 느끼고 있었다.
이제 갓 성체로 인정받은 늑대인간 전사들이 블라가의 표적이 되어 지금 이 순간에도 위기에 처해 있다는 것을.
지금 이 순간만큼은 하얀갈기 일족과 블라가의 힘 겨루기는 블라가에게 기우는 듯 보였다. 적어도 하얀갈기 일족의 늑대인간들이 기이한 가르릉거림을 시작하기 전까지는 말이다.
마치 고양이의 그것과도 같은 낮은 울림이 수백의 늑대인간들을 통해 안개를 진동시켰다. 이때만큼은 블라가도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는데, 블라가는 이미 늑대인간들이 무얼 하는지 알고 있었던 탓이었다.
집단의지.
수백의 늑대인간들의 정신이 이어지고, 공명하여 수백의 육체가 하나가 되는 과정이다. 가장 구석진 곳에 웅크린 늑대인간의 시선이 가장 중앙의 늑대인간
의 시선과 연결되고 전장을 잇는다.
하나이며 열인, 열이며 하나인 하얀 갈기 일족이 가진 태초의 의지다.
늑대인간들이 블라가를 하나의 대적으로 인식하여 펼친 그들만의 고유의 전투법, 태초부터 지금에 이르기까지 이 의식의 공명을 통해 얼마나 많은 대적들을 물리쳐왔었던가.
지금 이 순간 하얀갈기 일족의 어느 누구도 블라가가 곧 찢어발겨질 것을 의심하지 않았다.
낮은 울림이 조금씩 높아진다. 처음에는 목울대를 떠는 가벼운 소리였던 것이 나중에 가서는 장대한 포효가 되었다. 그 끝없이 솟구치는 압도적인 포효에 블라가가 만들어낸 어둠과 안개가 일제히 걷혀진다.
"쯧쯧. 내가 이래서 너희 늑대인간들이랑 상종하기가 싫었지."
간신히 시야가 정리되자 가장 먼저 보인 것은 언제 올라갔는지 원래의 권좌와도 같은 자리에 앉아 혀를 차는 블라가의 모습이다.
벌써 몇 명인가 늑대인간의 피로 목을 축인 블라가 시뻘겋게 물든 입가를 일그
러트렸다. 그 모습에 하얀갈기 일족 전체가 분노를 보였다. 전장에서 죽는 것은 그들의 숙명, 하지만 더럽고 추악한 흡혈귀의 배를 채워주는 것은 일족의 수치다. 안타깝게 스러져간 어린 늑대인간들의 존재가 그들 전체의 의지를 분노로 공명시켰다.
그리고 그들의 하나된 의지이며 분노가 곁에서 중요한 시기를 맞고 있던 김형준의 의식을 건드렸다.
분노와 맹렬한 적개심, 오랜 시간을 이어온 뿌리 깊은 이종을 향한 증오가 깊게 침잠되어가던 김형준의 정신을 일깨웠다.
질끈 감겼던 눈이 번쩍 뜨이고, 시뻘겋게 변해버린 눈동자가 드러났다. 그리고 개안과 동시에 퍼져나온 끈적끈적한 기운이 하얀 갈기 일족과 블라가의 시선을 끌었다.
"마스터 킴?"
누군가가 김형준을 불러보았지만. 그는 기괴한 동작으로 몸을 덜덜거릴뿐 대답하지 않았다. 그 덜컥거리는 움직임이 어찌나 괴기스럽던지 마치 관절이 고장
난 인형이 몸을 비트는 것과도 같은 모습이다.
"크윽.."
신음을 내뱉는 그의 입가가 기이하게 비틀려 있었다. 한쪽만 치켜 올라간 입매 탓인지 마치 코를 중심으로 한쪽은 웃는 듯한 표정이고 반대쪽은 우는 듯한 표정이다.
"무... 물..."
간신히 꺼낸 그 한마디에 모두의 이목이 쏠렸다. 몇 번이나 푸들거리며 도로 닫히던 김형준의 입이 간신히 열리고 고통에 찬 신음이 비져나왔다.
"물러서!"
그 짤막한 한마디에 모든 이들이 영문을 몰라 고개를 갸우뚱 거렸다. 블라가만이 뭔가를 눈치 챘는지 왕좌에서 벌떡 몸을 일으켰다.
"보라! 인세에 다시 없을 진풍경이로다!"
블라가의 음성에 담긴 들뜬 기색이 모두를 어리둥절하게 만들었는데, 하얀갈기
일족의 장로 바람갈기가 눈을 크게 치떴다.
"물러서!"
그 안에 담긴 위기감과 놀라움이 집단의지의 공명을 통해 일족에게 전해졌다. 전광석화처럼 몸을 물리는 늑대인간들의 머릿속으로 바람갈기 장로의 사념이 파고들었다.
지나친 흡혈로 인한 변이, 그 존재의 강대함으로 말미암은 종 자체의 변화. 그리고 뒤이어 나타날 어마어마한 피드백.
어느 순간에도 두려움 없이 달려들던 하얀 갈기 일족의 전사들이 그 깊고 깊은 사념에 몸을 떨며 물러섰다.
"제.. 제발..."
이제는 주변에 남은 이라고는 간신히 살아남은 원정대의 인원들 뿐이다. 김형준이 뻑뻑한 동작으로 고개를 비틀며 간신히 한마디를 내뱉는다.
"일단 물러서..."
전지현이 무거운 음성으로 모두에게 말했다. 갑작스러운 김형준의 돌발행동에 모두가 우물쭈물 거릴 때 전지현을 비롯한 몇몇 인물들이 인원을 뒤로 물렸다.
"물러서라니까."
김형준으로 인해 목숨을 구원받은 수많은 이능력자들이 떨어지지 않는 발걸음 떼어내고 그에게서 물러서기 시작했다.
모두 하나같이 김형준과 전지현을 번갈아 바라보는 시선이었는데 그 안에 안타까움이 가득했다. 구명받은 목숨에 대한 감정이 이리도 자신들의 발걸음을 붙잡는데 그런 남편의 모습을 보는 아내의 심정이 오죽 하겠는가.
"크윽... 고.. 고마... 워요..."
전지현을 향해 보낸 김형준의 시선도 이때만큼은 안타까움이 가득했다. 하지만 그것도 찰나의 순간일 뿐, 붉게 물든 눈동자가 금세 살기로 번들거리고 넘실거리는 안광을 뿜어내기 시작했다.
"으하하하하하. 보았는가! 비록 씨앗이 더럽고 추악할 지라도 태어나는 것은 고귀한 한떨기 혈화! 콧대만 높은 트루 블러드를이여! 그대들이 이 순간 이 자리에 없는 것이 안타까울 뿐이로다!"
무엇에 그렇게 흥분했는지, 광소를 터트리며 고함을 지르는 블라가의 모습이 흡사 미친 자와도 같았다.
"안타까워할 필요 없어. 우린 아까부터 이 자리에 있었으니까."
그 순간 블라가의 광소 사이로 끼어드는 차분한 음성이 있었다. 작고 나직한 음성임에도 불구하고 온 사방을 울리는 블라가의 웃음소리를 압도하는 힘이 있는 음성이었다.
블라가의 광포한 웃음이 순식간에 멈춰버렸다. 그리고 소리가 들려온 쪽으로 고개를 쳐드는데 천장에 주렁주렁 매달린 성가대의 한켠에서 일단의 그림자가 움직였다.
"숨어드는 것은 취향에 맞지 않지만, 워낙 중요한 사안이라서 말이지."
처참하게 말라버린 성가대원의 육신의 뒤에서 일어난 그림자가 이윽고 완전히 모습을 드러냈다.
창백하게 질린 얼굴이지만 얼굴에 서린 기품은 마치 어딘가의 왕족 같고, 고풍스러운 느낌의 의상은 차분하지만 고귀하기만 하다. 하지만 그 모든 매력에도
불구하고 그들 주변을 감도는 어두운 분위기는 숨길 수가 없었는데, 온통 무채색의 느낌을 뿜어내는 그들의 새빨간 입술만이 생동감을 느끼게 해준다.
"트.. 트루 블러드!"
당황한 기색이 역력한 블라가가 주춤거리다가 왕좌에 주저앉았다. 고귀한 왕좌에 앉은 볼품없는 왕의 모습이, 방금 모습을 드러낸 이들의 고귀함과 극명하게 대비된다.
"시궁창의 지배자여. 실로 오랜만이구나."
갑작스레 나타난 트루 블러드들 중에서도 가장 빼어난 미남자가 블라가를 마치 아이 부르듯 불렀다.
"그리고 하얀 갈기의 용맹한 전사들도 오랜만이요. 바람갈기 장로의 자태는 200년 전 본 이래로 변함이 없는 것 같소이다."
블라가가 주춤하는 사이에 그가 하얀 갈기 일족의 늑대인간들과 바람갈기 장로를 향해 아는 척을 한다.
"오랜만이군. 그대야말로 시간의 축복 속에서 빗겨간 존재. 단 한치도 변함이
없는 모습이구나."
집단의지 공명을 통해 일족의 의지를 대신하게 된 바람갈기 일족이 웅혼한 음성으로 마주 인사를 받아주었다.
"그대들이 대체 왜..."
사건의 중심에 서 있다가 이때만큼은 소외되었던 블라가가 뒤늦게 정신을 차리고 의문을 표했다.
"이런 같지도 않은 결계를 세상의 창조랍시고 거들먹거리는 그대를 비웃기 위해서 온 것은 아니니 걱정하지 말거라."
압도적인 죽음의 기운을 뿜어내던 블라가도 미남자를 포함한 트루 블러드들 앞에서는 한낯 시체의 사기만도 못한 존재가 되었다.
"그보다 실로 장엄하구나."
트루 블러드들의 시선이 일제히 돌아갔다. 그들의 시선을 따라 다른 이들이 고개를 돌리는데 그 곳에는 검붉은 핏줄로 뒤덮힌 김형준이 있었다.
여기 저기에서 경호성이 터져나왔다. 아까 전까지만 해도 피바라기의 기형적인 변이 속에 가려져 있던 그의 본신이 그대로 드러나자 보인 것은 끔찍스러운 핏줄이 가득한 알몸이었다.
그 모습의 어디가 장엄하냐고 물을법도 하건만, 기괴하지만 전신에서 뿜어져 나오는 압도적인 기운이 그 말 외에는 다른 표현할 방법을 찾지 못하게 해주었다.
"비록 씨앗은 블라가가 소화하다 버린 생명력의 파편일지라도, 그 받아들인 자의 기운이 범상치 않으니 이런 광경을 보게 되는구나."
트루 블러드가 감탄했다는 듯이 되뇌는데 기괴한 모습으로 몸을 떨던 김형준의 몸이 일순간 멈춰버렸다.
그가 사지를 움츠리고 움츠려 마치 양수 속을 떠다니는 태아와도 같은 모습을 한다. 그리고 그의 주변을 떠다니던 기운들이 유형화되어 몸을 불리기 시작했다.
한올 한올. 마치 실타래와도 같은 기운들이 휘감기고 엉키더니 종내에는 거대한 고치와도 같은 무언가를 이루었다. 그때쯤에는 김형준의 모습이 완전히 고치 속으로 감춰진 후라, 전지현이 뒤늦게 비명과도 같은 신음을 내뱉으며 몸을
날렸다.
"검의 절대자여. 물러나시오."
그런 그녀 앞에 연기처럼 솟아난 존재가 공손하게 고개를 숙여보이며 그녀를 가로 막았다. 갑작스레 고치 속에 삼켜진 김형준 탓에 평정을 잃었던 그녀였지만, 그 정중한 태도에 뭔가 내막이 있음을 짐작하고는 평정심을 되찾았다.
고개를 숙이고 있던 존재, 트루 블러드 일족의 한명이 조금은 감탄한 기색으로 다시 입을 열었다.
"그는 지금 새롭게 태어나기 위해 잠시 몸을 숨긴 것이요. 이 곳에 넘쳐나는 적의와 살의 그리고 강대한 기운들로부터 스스로를 보호하기 위해서 말이요."
그의 설명에 전지현이 입술을 짓씹었다. 새롭게 태어난다는 그의 말이 왜 그렇게 그녀의 마음을 짓누를까. 알 수 없는 불안감에 다시 걸음을 옮기려는데 또다른 트루 블러드가 그녀의 앞길을 막았다.
"물러나시지요. 그가 깨어난 후 슬퍼하는 모습을 바라지 않으신다면."
알 수 없는 말을 지껄이는 그의 태도에 전지현이 품 안의 검을 뽑을까 말까 고
민하는데, 허공에 오롯이 서 있던 트루 블러드가 입을 열었다.
"그가 비록 블라가가 루마니아에서 얻은 생명력의 잔재중 상당수를 흡수했다고 하나, 아직은 기운이 부족하오. 이대로 둔다면 몇십년이고 기운이 모일 때까지 저 상태를 유지할 것이나, 새로운 존재의 탄생을 축하하는 의미로 선물을 준비했소."
그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뭔가가 바닥에 내던져졌다. 털썩하는 소리와 함께 몇바퀴인가를 구른 그 무언가는 피투성이가 된 인간의 육신이었다.
가만히 이를 지켜보고 있던 이능력자중 누군가가 비명처럼 외쳤다.
"호라시오경!"
바닥을 나뒹구는 이는 놀랍게도 이탈리아의 1등급 이능력자인 호라시오 베니치였다. 뱀파이어들의 유인에 넘어가 모습을 감췄던 그가 지금 나타난 것이다. 그것도 사지가 덜렁거리는 처참한 몰골로.
"러셀 피터경!"
누군가가 다시 외쳤다. 호라시오 베니치의 곁에 떨어져 내린 볼품없는 육신이
러셀 피터의 그것임을 알아본 탓이다. 그리고 뒤를 이어 뱀파이어들의 유인에 사라졌던 이능력자들이 처참한 꼴로 바닥을 나뒹굴었다.
"무.. 무슨..."
갑작스러운 상황의 변화에 혼란스러운 머리를 부여잡고 있던 이능력자들은 김형준을 집어삼킨 고치가 요동치는 것을 발견하고는 비명을 내질렀다.
고치를 단단하게 조이고 있던 붉은 실타래가 풀리더니 스물스물거리며 호라시오 베니치를 포함한 이능력자들을 향해 다가서기 시작했다. 누구 하나 명확하게 상황을 정리하고 있지 못하는 와중에 민용모가 소리쳤다.
"멈춰!"
김형준과 함께 무수한 사선을 넘은 민용모는 그 붉은 실타래가 찔레가시의 탐욕스러운 줄기라는 것을 알고 비명과도 같은 고함을 내질렀다.
============================ 작품 후기 죄송합니다. 비축분이 들어있는 컴퓨터가 돌아오지를 않네요. 게으르고 느린 남미에 살고 있다는 사실을 망각하고 있었습니다. 게다가 흥청대는 연말과 연
초를 감안하지 못했었으니 제 불찰입니다.
그냥 비축분 써둔 것은 잊고 새롭게 써서 완결하겠습니다. 다시 한번 사죄의 말씀을 드립니다.
*제목을 바꿀까 생각중입니다. 제목때문에 모작품 아류작 취급 받는 것도 한두번이 아니라, 조금 늦었지만 완결 전에라도 제목을 바꿀까 생각중인데. 혹시 독자님들이 안 좋아하실까봐 망설이는 중입니다.
게다가 조아라랑 이북 계약도 곧 맺을 예정이라, 출판 전에는 확실하게 제목을 바꾸려고 합니다. 아, 이북이지만 조아라랑 계약이라 연재글 사라지거나 할 일은 없으니 걱정 마시기를.
제목 후보는 '어빌리티맨'입니다. 혹시 좋은 의견 있으신 분들은 댓글로 부탁드립니다!
은 없으니 걱정 마시기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