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2-6. 망자의 도시 -- >
그렇게 성가대원들의 생혈을 게걸스럽게 빨아먹은 육편들 조각이 어느 순간 몸을 부르르 떨더니 느닷없이 원정대를 향해 달려들었다. 워낙에 갑작스러운 육편들의 움직임었던지라 원정대의 태반이 그저 엇 하며 몸을 떨었을 뿐이다.
그래도 그 중에 몇몇은 미리 대비를 하고 있었었는지, 섬광이 번뜩이며 달려들던 육편 몇 조각이 허공중에서 부스러진다.
전지현을 비롯한 1등급 이능력자들도 재빠르게 육편을 향해 달려들었지만, 수가 너무 많았다.
몇몇 이능력자들에 의해 저지당한 육편은 일부일 뿐, 수천이 넘는 육편들이 원정대를 향해 달려들었다.
"제기랄!"
전투에 적극적으로 참여하지 않은 탓에, 상황의 변화를 진즉부터 감지하고 있던 김형준은 이를 악물었다.
힘을 비축하라는 캐더린의 말이 떠올라 잠시 망설여졌지만 그는 어금니가 바스
라져라 악 다물고는 양손을 내뻗었다.
양손을 통해 뻗어나간 몇가닥 검붉은 줄기가 순식간에 수백 수천가닥으로 늘어나 허공을 가득 채웠다. 원정대를 향해 달려들던 육편들은 원정대의 앞을 막은 줄기들 따위는 아랑곳 하지 않고 달려들었지만, 이내 돋아난 가시따위에 온몸에 꿰이고 얽혀 몸부림을 쳤다.
김형준은 순간적이지만 갈등했다.
이미 뱀파이어들을 흡혈하면서 이변을 겪었던 그였다. 지금 당장 찔레가시의 줄기에 꿰인 육편의 수만 해도 수천이 넘는다.
정체를 알 수 없다고는 하나, 스트리고이와 연관이 있는 무언가일 게 분명한 육편의 조각들을 다시 흡수한다면 무슨 일이 벌어질지 몰랐다.
"크윽!"
잠시 수를 강구하려던 그의 잇새로 신음성이 새어 나왔다. 그저 몸부림을 칠 뿐이던 육편들이 어느 사이엔가 줄기에 달라붙어 게걸스럽게 몸을 꿀럭였다.
이제 와서 보기에는 찔레가시에 꿰인 것이 아니라, 반대로 육편들이 찔레가시
에 달라붙은 모양새가 되어 버렸다.
그리고 썰물처럼 빠져나가기 시작한 생명력에 순식간에 온몸이 무거워졌다.
그대로 있으면 허공에 매달린 성가대원들처럼 참혹한 꼴이 날 것이 분명했다.
원정대의 이능력자들을 구원하기 위해 너무 경솔하게 움직였음을 깨달았지만, 그 상황에서는 방법이 없었다. 눈 앞에서 수십의 이능력자들이 처참하게 쓰러지는 것 따위, 이제 다시는 보고 싶지 않았다.
김형준은 질끈 눈을 감았다. 이제는 정말 다른 수가 없었다. 결국 결단을 내린 그의 눈이 뜨이며 안광이 번뜩였다. 검은 눈동자가 순식간에 붉게 변하며 양손에 검붉은 핏줄이 돋아났다.
동시에 탐욕스럽게 입을 축이던 육편들이 일순간 멈칫 하더니 발버둥을 치기 시작했다. 살이 통통하게 올랐던 육편들이 금세 바짝 마르고 퍼석퍼석하게 변해간다.
"제길."
역시나 그의 예상대로 찔레가시의 줄기를 따라 오는 것은 충만한 생명력이 아닌 괴이한 어떤 것, 음습하고 차가운 기운이 물 밀 듯이 그의 전신으로 흘러들었다.
또다시 심장이 뛰어대고 온몸이 덜컥거렸지만, 그는 이를 악물고 버텨냈다. 하지만 저도 모르게 잇새가 벌어지고 그 사이로 침이 흘러내린다.
새빨갛게 변한 눈동자가 이제는 검은자, 흰자의 구분할 것 없이 붉기만 하다. 의지와는 상관없이 발현되어 기괴하게 변형되기를 반복하는 '피바라기'를 느끼면서도 그는 흡수를 멈출 수 없었다.
완전한 말살이 아니라면 도리어 이쪽의 생명력이 흡수당할 판이다. 그 끝에 무엇이 나오더라도 끝장을 내야 한다.
달갑지 않은 상황 속에서 김형준은 최선을 다해 육편들을 정리하기 시작했다. 그렇게 김형준을 포함한 원정대가 정체불명의 장막, 원래는 스트리고이라고 생각했던 존재를 상대하고 있을 무렵. 하얀 갈기 일족은 미동도 없이 블라가를 노려보고 있었다.
당장에라도 서로를 향해 이를 드러낼 것 같은 이들이었지만, 수천년간의 원한
은 서로를 조심스럽게 만든 모양이다.
일촉즉발의 대치상태가 이어진다.
"흠..."
그런 대치 상태를 먼저 깬 것은 블라가였다. 뜻밖에도 블라가는 죽음의 기운을 뭉개 뭉개 피어 올리면서도 여유가 있어 보였다.
"이것이 태고부터 존재해온 하얀 갈기 일족의 힘인가."
마치 하얀갈기 일족의 투기를 음미하듯 입맛을 다신 블라가가 그중 가장 거대한 늑대에게 시선을 돌렸다.
"사시사철 푸르르던 초원의 후예들이여."
기괴한 외양에 어울리지 않는 고풍스러운 말투로 입을 연 블라가가 잠시 주위를 살펴보고는 다시 말을 이어갔다.
"이제는 숨겨왔던 힘을 보여도 될 터, 만약 숨겨둔 힘이 없다면."
미세하게 그의 주변에 풍겨오던 기운이 점차 유형화 되어가며, 범위를 넓히기 시작했다. 마치 붉은 안개와도 같은 모습을 한 그것은 끔찍스러울 정도로 불길하고 음습했다.
"이 자리에서 그 맥이 끊어지리라."
말이 끝남과 동시에 그의 주변을 둘러싸고 있던 붉은 안개가 사방으로 퍼져나가기 시작했다. 얼핏 보기에도 그 안개와 닿으면 좋지 않은 일이 벌어지리란 예감에 바람갈기 장로가 다른 일족들에게 외쳤다.
"하얀 갈기의 아들들아! 본신을 드러내고 전력을 다 하라!"
바람갈기 장로의 외침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사방을 둘러싼 늑대들의 몸에서 빛이 쏟아져 나왔다. 수백마리의 늑대가 그 찬란한 섬광속으로 몸을 감추고, 이내 그 자리에 남은 것은 작열하는 빛뿐이었다.
뭉클거리며 사방으로 퍼져나가던 안개와 수백의 빛무리가 금세 지척에 닿았다. 거칠 것 없이 퍼져 나가던 안개였지만 빛무리에 담긴 힘이 범상치 않았는지, 주춤거리며 몸을 움츠린다.
"그래. 그렇게 나와야지."
붉은 안개의 중심에 선 블라가가 그런 늑대인간들을 살펴보다가 한마디를 내뱉었다.
아우우우우우우수백의 늑대울음소리가 빛무리속에서 터져 나오고, 조금씩 빛이 사그라들어 갔다.
후욱. 후욱.
그렇게 사라진 빛무리 속에서 드러난 것들은 늑대도 인간도 아닌 기묘한 것들, 마치 사람과 늑대를 반씩 합쳐놓은 듯한 기괴한 모습을 한 존재들이 일제히 거친 숨을 몰아쉰다.
노오란 안광을 번뜩이며 몸을 웅크린 수백의 늑대인간들이 단번에 몸을 날렸다. 그 강인한 육체가 향하는 곳은 안개의 중심, 블라가가 서 있는 그 곳이다.
날아오른 늑대인간들의 그림자가 안개를 뒤덮었다. 그런 그림자에 가려진 블라가가 기묘한 표정을 지어 보이더니 이내 안개로 화해 사라졌다.
"안개가 놈의 본신이자 분신이다. 안개에 닿은 자들은 조심하라!"
하얀 갈기 일족의 또다른 장로 굽은 등이 날카롭게 외치고, 허공에 뛰어올랐던 늑대인간들이 하나 둘 안개로 내려섰다.
겉에서 보았을 때와는 다르게 한치 앞도 분간할 수 없는 안개였지만, 늑대인간들은 불안한 기색도 없이 안광을 번뜩였다.
크아아앙안개 속의 어딘가에서 늑대인간의 흉폭한 포효가 터져 나오고 이내 무언가 날카로운 것이 대기를 찢어발기는 소음이 들려왔다. 안개 속에 넓게 포진한 늑대인간들은 시야조차 제대로 잡히지 않는 안개 속에서 이를 드러낸 채 정신을 집중했다.
그런 일족들의 기운을 온몸으로 느끼며 일족의 장로 굽은 등은 길다랗게 발톱을 뽑아냈다. 일견 안개 속으로 뛰어든 일족의 행동이 멍청해 보이나, 실체를 접하지 않고서 블라가를 잡을 수는 없는 법이다. 하지만 일족의 안전을 염려한 굽은 등은 안개 속에서 요동치는 기운을 하나 하나 잡아내며 전황을 파악하려 노력했다.
멀리서 일족 하나의 기운이 흉폭하게 달아올랐다가 이내 차게 식는 것이 느껴졌다. 강대하기만 한 일족의 전사 하나가 금세 당한 것이다.
어차피 희생 없이 블라가를 잡을 수 있다고 생각한 적은 없는 하얀갈기 일족이다. 게다가 전사가 전장에서 죽는 것은 그들에게 있어 영예로운 일이니, 안개 속에 뛰어든 일족의 어느 누구 하나 투기가 날카롭지 않은 이가 없었다.
"찾았다."
흉폭하고도 웅혼한 수백개의 기세 중에 섞여든 음험하고 불길한 기운 하나, 꼭 같은 기운을 가진 안개가 사방에 만연했던 탓에 구별해내는 것이 쉽지 않았지만 결국은 잡고야 말았다.
굽은 등 장로는 길지도 짧지도 않은 포효를 한번 내뱉었다. 자신들만이 알아들을 수 있는 일족의 언어로 블라가의 위치를 알린 그는 조용히 일족의 움직임에 귀를 기울였다.
가장 근처에 있던 일족 몇을 시작으로 가장 멀리 있는 일족들까지 서서히 몸을 틀며, 블라가의 기운이 있는 곳으로 접근했다.
블라가의 기운을 감지해낼 만큼의 능력을 지닌 일족의 장로들이 여기 저기서 짧거나 길게 포효하며 블라가의 움직임을 알려온다.
이리 저리 몸을 비틀며 그 사이를 빠져나가려고 시도하던 음습한 기운이 이내 막다른 곳에 몰렸다. 회심의 미소를 짓던 굽은등은 블라가의 기운이 느껴지는 곳과 가장 먼 곳에 있던 일족의 기운이 순식간에 사그라드는 것을 느끼고는 얼굴을 굳혔다.
일족의 다른 장로들 역시 그것을 느꼈는지 심상치 않은 포효가 여기 저기서 터져 나오며 일족의 기운이 금세 어지러워진다.
또 하나의 일족이 내뿜던 투기가 사라진다.
이번에는 방금 전과는 또 다른 위치의 일족이다. 그제야 블라가 역시 만만치 않음을 깨달은 굽은 등이 하얗게 이를 드러냈다.
자신이 블라가의 기운을 감지해낼 수 있다면, 이 안개는 블라가 자체이리라. 일거수 일투족을 파악하지 못한다면 왕이라는 칭호가 울고 갈 것이다.
어렴풋이나마 했던 짐작이 확신으로 바뀌고, 일족 셋의 희생으로 늑대인간들의
기세가 한층 더 흉포해진다.
사삭.
어수선한 일족의 포효소리 뒤로 가려진 희미한 소음 하나가 굽은 등의 귓가를 파고 들었다. 쫑긋 솟아오른 그의 귀가 움찔거려보지만 더 이상의 소음은 들리지 않았다.
겉으로는 아무렇지도 않은 모습을 한 굽은 등이었지만, 속으로는 긴장의 끈을 바짝 조였다. 팽팽하게 당겨진 감각 사이로 이질적인 기운이 접근하는 것이 느껴졌다.
겉으로는 표가 나지 않도록 조심하며 굽은 등의 양 손톱에 은밀한 투기가 모이기 시작했다. 스윽.
그리고 마침내 그 미세한 기척이 자신의 지척에 닿았을 때, 굽은 등 장로는 양손에 그러모은 투기를 폭발시키며 안개를 베어갔다.
횡으로 베어지는 붉은 안개 사이로 보이는 희미한 얼굴, 광망이 이글거리는 블
라가의 얼굴이다. 시뻘건 살기를 내뿜던 놈의 얼굴이 그대로 갈라지며 흩어져 간다. 굽은 등은 블라가의 실체를 베어내지 못했음을 깨달았지만 초조해 하지 않았다. 어차피 이번이 아니어도 놈의 실체를 벨 기회는 많았으니까.
게다가 일족 중에 자신만큼이나 강인한 전사는 수도 없이 많았다. 자신의 곁을 떠난 미세한 기운을 찾아내려 애쓰며 굽은 등 장로는 정신을 집중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모든 일족이 굽은 등처럼 다 노련한 전사였던 것은 아니었다. 일족 중에 고르고 고른 성체 늑대인간들이었지만, 이 중에 뱀파이어, 시궁창의 왕 블라가와의 전쟁을 겪었던 존재들은 그렇게 많지 않았다.
천성적인 투쟁심과 강인함이야 시간이 흐르며 날카롭게 날이 섰지만, 개중에는 성체가 된지 얼마 안된 존재도 있는 법.
하얀갈기 일족의 늑대인간 노란 발톱 역시 그런 류의 전사 중 하나였다. 능력과 투지는 나무랄 곳 없는 존재였으나 그 힘을 다듬을만한 실전경험이 없었다.
하급 몬스터와의 전투로는 그의 강인한 힘을 다듬을 수 없었으니, 사실상 그에게는 이번 전투가 강자와 치르는 첫 전투와 다름이 없었다.
노란 발톱은 몇몇 일족이 쓰러졌음을 느끼고는 더욱 흉포한 기세를 내뿜었다. 잇새로 거친 숨소리를 끊임 없이 내 뱉으며 양 손을 쉴 틈 없이 움찔거렸다.
미세한 기척에도 금방 반응하는 그의 온몸이 당장에라도 블라가의 목을 딸 듯 움찔댔다.
"하얀 갈기도 개체수가 많이 줄긴 줄었군."
그때 그의 귓가를 파고드는 음험한 음성 한줄기, 화들짝 놀란 노란 발톱이 양손을 거칠게 휘두르며 으르렁거렸다.
그런 자신의 기운을 느낀 것인지 일족 중의 누군가가 빠르게 다가서며 포효를 하지만, 일족의 접근보다는 속삭임이 더욱 가까웠다.
"이런 애송이를 전사라고 데려 온 것을 보니 말이야."
블라가의 것이라고 짐작되는 이죽임에 노란 발톱이 참지 못하고 포효했다. 그 거칠고 사나운 포효에 여기 저기 일족의 포효가 응답해왔다.
'침착해! 서두르지 마라!'
노란 발톱의 경험이 부족함을 알고 있는 일족의 다급한 포효에도 노란 발톱은 움츠러들지 않았다. 어디 숨어있는지도 모를 블라가를 찾아낼 생각도 못하고 그는 사방을 휘저었다. 안개가 갈라지고 희뿌연 광채가 번뜩였다. 그의 이름처럼 노랗게 바랜 발톱이 온 사방을 찢어발긴다.
미친 듯이 날뛰며 사방을 휘젓던 노란 발톱의 움직임이 일순간 멈춰버렸다. 강인한 육체를 부들부들 떨며 신음을 내뱉은 그의 주변에 이질적인 무언가가 희끗희끗하게 아른거렸다.
순식간에 온몸의 피가 다 빠져나간 듯 바짝 말라버린 노란 발톱의 거체가 일순간 먼지처럼 흩어져 버렸다.
블라가. 시궁창의 왕 블라가.
오직 인간의 피만을 탐하는 다른 뱀파이어와 다르게, 이종과 마수를 가리지 않는 식탐의 소유자. 블라가가 네 번째 늑대인간의 피를 흡혈하고는 다시 안개
속으로 흩어져 버렸다.
============================ 작품 후기 이번 에피소드는 약 네편정도 남았습니다. 그 뒤로는 최종 챕터 돌입합니다!
*으아아아. 노블 정액권이 끝났습니다. 정액권 끝나기 전에 보는 글들이 전부 폭참으로 올라오길 바랬으나 대부분이 휴재, 연말 지나고 다시 정액권을 끊어서 몰아봐야겠습니다요. ㅎㅎ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