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피바라기-193화 (193/223)

< --  2-6. 망자의 도시  -- >

"드디어 만났구나."

여상스러운 어투였지만 그 음성에 담긴 불길함이 어찌나 지독한지 듣는 것만으로도 이능력자들의 온몸에 소름이 돋아버렸다. 김형준은 저도 모르게 몸을 움찔 거리고는 음성이 들려온 곳을 찾아 시선을 돌렸다.

언제부터였을까.

좀 전까지만 해도 보이지 않던 무언가가 이쪽을 바라보고 있었다. 흉물스럽고 기괴한 풍경 사이로 솟아난 마치 왕좌와도 같은 돌기 위에 앉아 있는 존재의 존재감이 김형준의 어깨를 내리 눌렀다.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은 사내, 김형준은 직감적으로 그가 자신들이 목표했던 루마니아재앙의 원흉이자 시궁창의 왕이라 불리우는 블라가라는 것을 깨달았다.

"기다리고 기다려도 오지 않아 내 친히 그대들을 찾아 나섰노라."

음습한 음성 뒤로 숨겨진 기이한 흥분감에 김형준은 스스로도 모르는 사이에 힘을 끌어올렸다. 불길하다.

스트리고이-블라가를 본 이능력자들은 모두 같은 감정을 느끼고 있었다. 일견 평범해보이는 얼굴을 한 블라가의 얼굴이 기괴하게 실룩이다가 제 자리를 찾았다. 웃는 것도 우는 것도 아닌 기이한 표정을 한 그가 왕좌와도 같은 자리에 앉아 이능력자들을 내려다보다 시선을 돌렸다.

"오랜만이라고 해야 하나."

어느 틈엔가 모여들어 자신을 둘러싸고 있는 하얀 갈기 일족의 늑대인간들을 바라보며 블라가가 중얼거렸다.

"꽤나 고상을 떨고 있구나. 시궁창을 뒤지는 쥐새끼 같은 네 모습이 아직도 생생하거늘."

하얀 갈기 일족의 장로 바람갈기가 느긋하게 블라가의 말을 받았다. 일순간 그

녀의 말에 표정을 굳힌 블라가였지만 이내 처음의 기이한 표정으로 돌아가 입을 열었다.

"오랜만에 본 것 치고는 꽤나 언사가 곱지 않구나."

블라가와 바람갈기가 나누는 대화를 들으며 김형준은 그들 사이에 사연이 많음을 눈치 챘지만, 지금은 그저 듣고만 있을 뿐이었다.

끼어들기에는 블라가라는 존재에 대한 정보가 지나칠 정도로 부족했던 탓이다.

"쓸데없는 말은 이제 집어 치우지. 그렇게 고상 떨어봐야 네 본질은 그저 하수구를 전전하는 쓰레기와도 같은 존재. 힘을 얻었다고 그 본질이 변하지는 않지."

온화한 얼굴로 독설을 내뱉는 바람갈기의 말에 블라가의 눈동자에 어렸던 흥분이 금세 분노로 바뀐다.

"이쪽은 우리가 맡겠소. 그대들은 그쪽을 맡아주시오."

그런 블라가는 신경도 쓰지 않는 듯한 모양새로 바람갈기가 김형준을 향해 말했다. 뭔가 처음의 계획과는 많이 달라진 상황이지만 김형준은 하얀 갈기 일족

의 적극적인 조력에 오히려 감사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이제부터 묶은 빛을 청산해야겠군."

바람갈기가 한마디를 내뱉고는 금세 몸을 늑대화시켰다. 붉은 빛 일색인 주변의 모습과는 대조적으로 잡티 하나 없이 빛나는 은빛을 자랑하는 늑대가 길게 포효했다.

"아들들아. 갈기 갈기 찢어 삼켜, 흔적도 남기지 말거라."

살벌한 그녀의 한마디에 주변을 둘러싸고 있던 수백의 늑대인간들이 긴 포효로 화답했다.

그렇게 블라가와 하얀 갈기 일족이 전투를 시작했을 때, 원정대의 이능력자들도 전투를 준비하고 있었다.

흉물스럽게 꿈틀거리던 거대한 장막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처음 보았을 때의 밤하늘과도 같은 자태는 온데간데 없고 그저 욕지기가 나오는 그로테스크한 거체를 한 괴수가 움직이기 시작했다.

"이쪽은 잡몹 처린가."

누군가의 한마디에 긴장으로 조여졌던 이능력자들이 조금이지만 풀어졌다. 수백 성가대를 집어삼킨 정체불명의 괴수였지만, 어둠이 사방에 자욱하던 그때와 지금은 달랐다.

눈 앞에 명확하게 보이는 적 앞에서 이능력자들은 투지를 일깨우며 이능을 발현시켰다. 거대한 장막이 그대를 덮쳐온다.

폭우가 쏟아지는 듯한 소리가 또 한번 그들의 귀청을 파고들고, 뒤를 이은 굉음이 온 천지를 진동시킨다.

"그럼 나서볼까. 우리도."

카탈리나 에란쵸가 앞으로 나서자, 아야나미 로유미, 쟈베트 샹피뉴가 고개를 끄덕이며 그녀를 따라 앞으로 나섰다.

"부탁드립니다."

마지막까지 힘을 비축하다가 결정적인 순간에만 나서라는 캐더린 우즈의 통신

을 떠올린 김형준이 그녀들에게 건투를 기원했다.

김형준의 말에 고개를 끄덕여 보인 그녀들이 거대한 장막을 향해 몸을 날렸다. 솟구치는 화염과 얼음, 섬광을 가로 지르며 장막을 향해 날아오른 그녀들을 바라보던 김형준이 시선을 돌렸다.

이제는 애검이 되어버린 엑스칼리버를 손에 쥔 전지현이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럼 저도 다녀오겠습니다."

짤막한 한마디에 심사가 복잡해진 김형준이었지만 내색치 않고 미소로 화답했다.

"다치지 않게 조심해요."

차분한 미소로 대답을 대신한 그녀가 이내 몸을 날려 전장으로 향했다.

걱정스러운 눈으로 전지현을 바라보고 있던 김형준이 고개를 저었다. 본신의 능력과 경험, 그 어떤 걸 비교해도 자신보다 월등한 그녀다. 단지 여자라는 이유로 그녀를 걱정한다면 오히려 그녀에 대한 실례가 될 것이다.

한차례 고개를 저어 걱정을 접으려던 그였지만, 어디 사내의 마음이라는 것이 그렇게 될까. 자신의 여자에 대한 걱정으로 저도 모르게 미간이 찌푸려진 그가 애써 시선을 돌려 전장을 살펴보았다.

당장에라도 달려들어 블라가를 물고 뜯고 할 듯 보였던 하얀 갈기 일족은 어찌 된 일인지 블라가를 에워싼채 주위를 맴돌 뿐이었다. 왕좌와도 같은 그곳에서 몸을 일으킨 블라가는 그런 하얀 갈기 일족을 무심하게 노려만 보고 있었는데, 그 기세가 심상치 않았다.

보기에는 잠잠해보이지만 늑대인간들이 풍기는 투기가 그들 주변을 감싸고 이글거리고, 블라가가 마주 내쏜 살기가 날카롭게 날이 서 있다.

하지만 당장 서로를 어떻게 할 수는 없는 모양인지, 대치가 꽤나 길게 이어지던 터라 김형준은 다시 시선을 돌려 원정대의 이능력자들과 1등급 이능력자들을 살펴보았다.

수십의 이능력자들이 섬광을 번뜩이며 온갖 공격을 쏘아올리고, 그 사이를 누비는 1등급 이능력자들의 검광이 허공을 수놓는다. 당장에라도 이능력자들을 집어 삼킬 듯 달려들었던 장막은 그런 이능력자들의 공격에 몸을 비틀며 괴성을 질러댄다.

마치 유부에서 올라오는 듯한 괴성이 끔찍하기만 했지만, 언제 누가 쳤는지 모를 희뿌연 막이 원정대의 정신이 흔들리지 않도록 돕고 있다.

맹렬하게 공격을 퍼붓고는 있지만, 원정대 쪽 역시 당장 승부가 날 것 같진 않아 보였다.

김형준은 잠시 여유를 두고 캐더린과의 통신을 떠올렸다.

그녀는 왜인지, 자신의 힘을 마지막까지 비축하라고 했다. 그녀가 말해준 정보를 토대로 추리를 해보자면 블라가는 단순한 이능력자들의 힘으로는 죽일 수 없는 불사의 괴물이었다.

그런 불사의 괴물을 죽일 수 있는 능력이 자신에게 있는지 판단이 서지 않은 김형준이지만, 생명력을 매개체로 발현하는 자신의 이능 '피바라기'라면 가능성이 있지 싶기도 했다.

무의식중에 손에 그러모은 생명력이 미약했다. 습관적으로 생명력을 내돌리던 김형준은 아무리 머리를 굴려봐야 결론이 나오지 않자, 블라가를 관찰하기로 했다.

결론을 내기에는 블라가에 대한 정보가 턱 없이 부족했다. 무조건 부딪쳐 해결해나갔던 전의 1등급 몬스터들과는 다르게 블라가는 특별한 존재감이 있었다.

차라리 작다고 해야 할 체구에서 뿜어져 나오는 음침한 살기와, 그 눈매 뒤에 숨겨진 섬뜩한 광기. 그 모든 것이 어우러져 죽음과도 같은 불길함을 뿜어내는 눈 앞의 존재는 그저 힘만 강할 뿐인 몬스터들과는 달랐다.

힘만 앞세우는 존재였다면, 주변을 둘러싼 억세고 거친 늑대인간들에게 진즉에 찢어발겨졌으리라.

가만히 블라가를 바라보고 있던 김형준은 문득 기이한 감각을 느꼈다.

죽음과도 같은 기운을 사방에 흩뿌리고 있는 블라가의 기운 속에 숨겨진 또 다른 기운. 그 기이한 감각에 저절로 얼굴이 굳었다.

무엇인가 알 듯 말 듯한 애매모호한 감각 속에서 그의 눈살이 찌푸려졌다.

무얼까. 자신이 놓치고 있는 무언가를 떠올리기 위해 필사적으로 머리를 굴리던 김형준은 갑작스러운 폭음에 생각의 고리를 놓치고 말았다.

콰아아앙.

이번에 터져 나온 폭음은 그 전의 소리들과 비교도 할 수 없는 엄청난 굉음이었다. 하늘이 갈라지고 땅이 무너지는 듯한 그 강렬한 폭음을 따라 대기가 찢겨나가는 소리가 터져 나왔다.

허공을 가득 채우는 수백자루의 검, 그 뒤를 이은 한자루 날카로운 반월형의 섬광. 불꽃과 얼음이 사방을 가득 매우고, 거대한 장막을 향해 내달리기 시작했다.

맹렬하게 날아드는 공격에 담긴 심상치 않은 기운을 느낀 것일까. 거대한 장막이 이리 저리 몸을 비틀어 공격을 피해보려 하지만 거대한 몸통에 비해 전장은 너무도 비좁았다.

결국 피하지 못하고 검에 직격당하고 말았다.

처음에 장막에 닿은 공격은 수백자루의 검들 중 한자루였다. 커다랗다고는 해도 장막에 비할 수 없는 크기의 검이었지만, 충돌의 순간 터져 나온 굉음은 어마어마했다. 충격 역시 꽤나 컸는지 장막이 온몸을 꾸물거리며 비명을 질러댔다.

망자가 내지르는 듯한 끔찍한 비명소리였지만, 이내 또 다른 폭음에 묻혀버리

고 만다. 이제 수백자루의 검들 중 몇자루만이 충돌했을 뿐인데도 장막은 꽤나 큰 고통을 느끼는 듯 했다.

연달아 이어지는 폭음과 비명의 간격이 점차 짧아지다가 이내 수백자루의 검이 단번에 장막을 직격했다. 온 천지가 찢어져라 비명을 내지르던 장막을 스치고 지나가는 단 하나의 섬광, 그 뒤를 이어 다시 불꽃과 얼음이 장막을 두들겨댔다.

그 어마어마한 광경에 넋 놓고 있던 원정대가 이어진 충격파에 몸을 휘청거린다. 금방 끝날 것 같은 충격파가 끝이 날 기미가 보이지 않자, 이능력자들은 필사적으로 몸을 지탱하느라 진땀을 흘렸다.

그러면서도 시선으로는 요동치는 장막을 놓치지 않았는데, 원정대의 눈에 만신창이가 된 장막의 모습이 보였다.

"해치웠나?"

누군가의 조그만 중얼거림에 모두가 기대가 가득한 표정을 지었다.

압도적인 존재감의 거대한 장막이었지만, 이번 공격은 그만큼이나 강력해 보였

던 탓이다.

게다가 수백자루의 검에 꿰뚫리고 반월형 섬광에 베인 장막의 모습은 불꽃에 그을리고 얼음에 얼어버린 처참한 꼴이었다.

누구라도 장막의 최후를 기대할만한 광경이었다.

끄아아아아아아한참이나 끔찍한 비명을 지르며 온몸을 요동치던 장막의 움직임이 서서히 멎어간다. 거대한 몸에 꽃힌 수백자루의 검날에서 시작된 균열이 서로 이어지다 이어져 반월형의 섬광에 베인 거대한 상흔에 닿자, 마침내 장막이 수백 수천 갈래로 갈라져 버린다.

숨죽이고 그 광경을 지켜보고 있던 원정대들의 얼굴에 화색이 돌았다. 당장에라도 환호를 할 것 같은 얼굴로 장막의 조각들이 허공중에 흩날리는 것을 바라보던 이능력자들이 주먹을 불끈 쥐었다.

"아직 안 끝났어!"

그 순간 들려온 날카로운 고함소리, 서로 다른 언어를 사용하는 원정대였지만

이번만큼은 그 의미를 단번에 알아들을 수 있었다.

그만큼 고함소리에 담긴 기세가 다급했던 탓이다.

수천조각으로 갈라져 허공을 흩날리던 장막의 파편들, 마치 수천의 육편들이 허공에서 너풀거리는 듯한 모습이다.

그 모습만으로도 충분히 끔찍하거늘, 육편들이 꿈틀거리며 허공에 날아오르기 시작했다.

한조각, 두조각, 세조각.

그리고 뒤를 이어 수천조각이 일제히 허공 중으로 날아올랐다.

너무나도 기괴한 광경이라 이를 바라보는 원정대가 공격을 할 시기를 놓치고 있을 때, 또 다시 수백자루의 검이 허공에 나타나 일렬로 늘어서기 시작했다.

하지만 한번 당해본 탓일까.

수천조각의 육편들은 그 자리에 머물지 않았다. 꿀렁거리며 허공을 부유한 육편들이 저 높은 곳으로 솟아 올랐다.

마치 메뚜기때처럼 일제히 날아오르는 그 광경이 어찌나 섬뜩하던지, 바라보고 있던 이능력자들이 몸을 떨었다.

하지만 원정대가 몸을 떨던 말던, 육편들은 그저 허공으로 치솟기 바쁠 뿐이다.

그리고 마침내 육편들이 목표한 곳에 도달했을 때, 원정대는 비명을 질렀다.

육편들이 도달한 곳에는 여전히 핏물을 뚝뚝 떨구고 있는 성가대원들이 있었다. 육편을 꿰뚫을 듯이 허공에 떠올랐던 수백자루의 검들도 성가대원의 지척에 도달한 육편들을 보고는 멈춰섰다. 만약 그대로 수백자루의 검이 허공을 날았다면, 성가대원들 역시 사이 좋게 육편과 함께 꿰뚫리고 말았으리라.

원정대가 비명을 지르는 사이에 성가대원들에게 도달한 육편들이 성가대원의 만신창이가 된 육신에 달라붙었다.

한명당 수십 수백 조각이 들러붙더니, 이내 꿀렁거리며 무언가를 하기 시작하는데 하늘에서 떨어져 내리던 피의 비가 순식간에 멈춰버렸다.

그리고 그와 동시에 성가대원들의 몸이 바짝 말라가는 것이 눈으로 확연하게 보이기 시작했다.

단번에 상황을 파악한 원정대였지만 손을 쓸 방법이 없어 발만 동동 구를 뿐이다.

성가대원들에게 달라붙은 육편들이 흉물스러운 표피를 꿀렁거리며 게걸스럽게 성가대원들을 빨아먹었다. 불에 그을리고 검에 찢어진 육편들이 금세 붉게 달아올랐다가 온전한 모습으로 되돌아온다.

아니, 본래의 모습으로 돌아오는 것은 둘째치고 그렇게 성가대원의 몸에서 떨어져 나온 육편들은 처음의 크기보다 몇배는 커진 모습이다.

그 비현실적인 광경을 바라보고 있던 원정대들 틈에서 김형준 역시 침음을 내뱉었다.

============================ 작품 후기 슬슬 막바지에 다다르고 있습니다. 그간 던졌던 떡밥도 회수하고, 결말을 향해 치닫고 있습죠.

항상 읽어주시는 독자님들께 감사의 말씀을 드립니다.

*연참을 위해 무던히도 노력하고 있지만, 하루 하나 연재가 고작인 현실입니다. 양해 바랍니다. ㅠ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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