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2-6. 망자의 도시 -- >
격렬한 전투에 힘이 다한 모양인지 이능 하나 발현시키지 못하고 주저앉아있는 원정대의 모습이 처량하다. 몇몇이 김형준을 알아보고 반가운 기색을 보이지만 기운이 없어 그저 눈인사만 보내온다.
"고생들 하셨습니다."
이름도 모를 타국의 이능력자들이지만, 자신의 요청에 의해 소집된 이들이다. 그런 이들이 태반이 전사하고 남은 이들마저도 성치 않은 모습이자 김형준의 마음이 무거워졌다.
"다행이 별일은 없었나봐요."
피 한점 묻지 않은 태도를 갈무리하며 아야나미로 로유미가 말했다. 맑은 빛을 뿌리는 태도의 검날과는 다르게 온 몸에 피칠갑을 한 모습이 썩 좋아보이진 않아 김형준은 침중하게 대꾸했다.
"저보다 원정대가 큰일이군요."
그의 말대로 처음의 위풍당당한 모습은 온데간데 없는 원정대의 모습에 아야나
미 로유미 역시 쓴 웃음을 지었다.
온 전장을 날뛰며 힘을 써보았지만, 대인전투에 특화된 그녀로써는 모든 이를 지키는 일은 역부족이었다. 그나마 카탈리나 에란쵸와 쟈베트 샹피뉴가 광역적인 공격을 퍼부으면서 이 정도 수라도 지킬 수 있었던 것이다.
경지에 올라선 이후로 어려움을 몰랐던 그녀였건만, 루마니아에서는 좀처럼 풀리는 일이 없다. 은연중에 침울한 표정이 드러난 그녀를 잠시 바라보던 김형준이 모르는 척 다른 이들을 살펴본다.
카탈리나 에란쵸는 하얀갈기 일족의 전투에 끼어 뱀파이어들을 쓸어가는 중이고, 쟈베트 샹피뉴는 원정대의 인원들을 하나 하나 살펴보고 있다.
"트루 블러드는 다행스럽게 보이지 않는군요."
일반 뱀파이어들만으로도 이 정도 고전을 한 원정대다. 트루 블러드가 나타났다면 이 정도 결과로 끝나지 않았을 것이다.
김형준의 말에 민용모가 대꾸했다.
"이제부터는 정말 피의 의식이 벌어지는 한 가운데나 마찬가지라고 볼 수 있
어. 잘 차려진 만찬이 있는데 우리 같은 불량식품을 먹고 싶은 놈은 없겠지. 먹다가 탈 난다고."
그 어이없는 비유에 피식 웃음을 지은 아야나미 로유미가 고개를 끄덕이며 맞장구를 쳤다.
"괜히 우리와 충돌해서 만찬에 참석하지 못할지도 모르니까요."
일전에는 그냥 돌려보냈지만 이번만큼은 반드시 격살하겠다는 다짐이 숨어있는 그녀의 한마디에 김형준이 건성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슬슬 정리가 되어가는데요?"
그의 말대로 끝이 보이지 않던 뱀파이어들이 어느 사이엔가 많이 줄어 있었다. 실질적으로 하얀갈기 일족에게 살해당한 뱀파이어들보다는 바람갈기의 포효에 꽁무니를 뺀 뱀파이어들이 많았지만, 전투는 눈에 뜨일 정도로 정리되어 가고 있었다.
이제는 성가대와 하얀갈기 일족의 사이에 낀 뱀파이어들만이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필사적으로 활로를 찾고 있을 뿐이다.
"개새끼들. 저렇게 잘 싸우면서."
김형준의 입에서 욕지거리가 튀어 나왔다. 인간과 늑대인간, 그 사이에 낀 뱀파이어들은 전부라고 해도 좋을 정도로 성가대를 향해 공격을 퍼붓고 있었는데 성가대원들은 수월하게 그들을 막고 있었다.
지금 보이는 정도의 힘만 보탰어도 이능력자들의 희생이 줄었었을 것이라는 것은 자명한 사실이다.
김형준의 말에 아야나미 로유미의 표정이 무거워졌다.
바티칸의 성가대가 어둠의 이종들과 벌이는 전투에 더욱 특화되어 있긴 하지만, 어이 없을 정도로 쉽게 희생되어버린 이능력자들의 존재가 너무도 안타까웠다.
"키에에엑!"
마지막 뱀파이어가 기이한 비명을 지르며 사지가 분리되었다. 성가대원들이 펼친 합격에 휩쓸린 탓인지 시체가 끔찍하기 그지없었다.
"나중에 시체 치우려면 고생이겠군."
김형준이 무심코 지껄인 말에 민용모가 고개를 저었다.
"피의 의식이 끝나고 아침이 찾아오면 저 시체들도 전부 사라질 거야. 애초에 시체도 남지 않는 존재들인데 결계가 저들의 생명력을 흡수하고 있는 거지."
뱀파이어들의 시체가 사라진다니 그나마 다행이지만, 이능력자들의 시체도 꽤나 많은 수였다. 한창 작전중이니 시체를 수습할 상황이 아니다. 작전이 성공적으로 끝나면 그때쯤이나 저들의 시체를 수습할 수 있을 것이지만, 앞으로 또 어떤 일이 벌어질지 모르니 마음이 무거워지는 원정대였다.
"저쪽도 아예 피해가 없는 건 아닌가보네요."
이전의 모습을 떠올리면, 벌써 대열을 갖추고 떠날 준비를 했어야 할 성가대원들이 분주하게 움직이며 전사자들을 찾는다. 대부분이 전투 말미에 생긴 희생자들인지 대열의 한쪽에 희생자들이 몰려 있다.
"어?"
그들이 전우의 시체를 수습하는 것을 지켜보던 김형준이 입을 쩍 벌렸다. 시체를 수습한다고 생각했던 성가대원들이 찾는 것은 전우의 시체가 아니었다. 그들이 죽으면서까지 꼭 그러쥐고 있던 성구들, 그 기괴한 무구들을 챙겨든 성가대원들이 동료의 시체는 거들떠도 보지 않고 떠날 채비를 한다.
"저런 인간 같지도 않은 새끼들."
이능력자들 중 누군가가 욕설을 내뱉었다. 자신들 또한 상황이 되지 않는 터라 동료의 시체를 수습하진 못했지만, 잔해를 모아두어 나중에라도 수습할 수 있도록 조처했다. 하지만 성가대원들은 그런 최소한의 조치도 없이 그저 성구만을 챙겨 대열을 꾸리고 있었다.
망토를 머리 끝까지 뒤집어 쓴 그들의 모습이 지독할 정도로 이질적이다. 어느 정도 기력을 차린 이능력자들이 하나같이 질렸다는 표정으로 그들을 바라보고 있다.
김형준 역시 그들의 행동이 마음에 들지 않은 것은 매한가지였으나, 굳이 내색하지 않았다. 그의 입장에서는 전투가 마무리 된 시점부터 왠지 모르게 긴장감을 유지하는
하얀갈기 일족들과 성가대의 대치가 여간 신경이 쓰이는 것이 아니었다.
어느사이엔가 늑대에서 인간의 모습으로 화한 하얀 갈기 일족들이 바람갈기를 중심으로 성가대와 대치하고 있다. 마주 선 성가대원들은 당장에라도 성구를 뽑아들 기세였는데, 그에 반해 늑대인간들은 콧노내를 부르거나 딴청을 피우는 모습이 영 긴장감 없는 모습이다.
"대열은 마찬가지다. 형제들이여 후미로 붙으시게."
그런 성가대원들 사이로 바오로의 음성이 흘러나왔다. 몇몇 성가대원들이 몸을 움찔거리며 반발을 하려다가 바오로의 눈짓에 고개를 숙였다.
"뭐야. 내가 생각했던 것이랑 좀 다른데?"
하얀 갈기 일족이 성가대를 못 잡아 먹어 안달일 거라 생각했는데, 그와는 반대로 하얀갈기 일족은 태평스럽기 그지없었다.
"바티칸과 우리 일족이 맺은 계약은 쌍방 협조지 일방적인 구속이 아니야. 저들이 우리를 적대한다면 우리 입장에서야 그대로 쓸어버리면 돼. 바티칸도 그런 상황에서까지 우리에게 책임을 물을 수는 없어."
루마니아에 들어오면서 처음 듣는 사실들이 부쩍 많아진 김형준이 흥미롭다는 눈으로 성가대와 대치중인 하얀갈기 일족을 살펴봤다.
과연 민용모의 말처럼 늑대인간들은 딴청을 피우는 듯 하지만, 모두가 하나같이 시선을 성가대에게 고정한체 온몸의 근육을 팽팽하게 긴장시키고 있었다. 이렇게 보니 오히려 저쪽에서 시비를 걸기를 바라는 모양새라고 해야 할까. 김형준이 무심한 표정으로 바오로를 바라보고 있는 바람갈기 장로를 살펴보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힘으로도 명분으로도 꿇릴 일이 없다는 건가.
잠시 상황을 살펴보던 김형준이 뒤늦게 자신의 역할을 떠올리고는 원정대에게 지시를 내리기 시작했다.
지금은 그가 루마니아 원정대의 총 지휘책임자였다. 변이로 인해 한번 낙오되긴 했지만 그 권한이 어디 가는 것은 아니라 김형준의 지시에 이능력자들이 빠르게 상황을 보고하기 시작했다.
"총원 147명중 74명이 전사, 현재 인원 73명 부상자는 없습니다."
루마니아에 들어선지 불과 몇시간만에 반수가 전사해버렸다. 지금의 상황만 보면 이번 작전은 명백한 실패였다.
공명을 신경쓰진 않았으나 애초에 루마니아에 들어선 목적을 잊지 않은 김형준이 대열을 정리해 출발할 준비를 서둘렀다.
가장 선두에는 자신과 1등급 이능력자들이 나서고, 그 뒤를 일반 이능력자들이 따른다. 독자적인 행보를 보이는 성가대를 사이에 두고 그 뒤로는 하얀 갈기 일족을 배치했다.
얼핏 보기에는 성가대를 보호하는 대열로도 보이지만 실상을 따져보면, 돌발행동을 보일 시에는 앞 뒤로 성가대를 치겠다는 김형준의 의지였다.
바오로 역시 그 사실을 눈치 챘는지 불편한 얼굴을 해보였지만, 지금의 책임자는 김형준이다.
"그럼 출발한다!"
김형준의 작은 외침에 몇몇이 복창을 하며 길디 긴 대열이 출발했다.
"현재 원정대는 전투를 마치고 다시 루마니아 중심을 향해 이동을 시작했습니다. 전후 상황을 따져 보았을 때, 아홉시간 내로는 스트리고이와 조우할 것으로 보입니다."
절도 있는 자세로 보고를 해보이는 남성의 흠 잡을데 없는 태도에도 캐더린 우즈의 표정은 풀리지 않았다.
"그럼 이동중인 인원은 성가대와 반토막난 원정대, 그리고 하얀갈기 일족인가?"
미간을 지긋이 누르며 묻는 태도가 어찌나 언짢아 보이는지 보고를 하던 남자가 바짝 긴장을 했다.
"현재까지 파악된 바로는 그렇습니다!"
남자의 바짝 군기가 든 대답에도 캐더린은 인상을 잔뜩 찡그린 채다.
"그럼 언제까지 나머지 인원도 파악할 건데?"
아무렇지도 않게 물어오는 어조지만 남자는 순간적으로 얼어버렸다. 캐더린 우즈는 평소에는 온화하고 배려있는 상사지만 한번 수틀리면 누구보다도 무서운 여인이었다.
"빠른 시간 내로 파악하겠습니다!"
목청이 터져라 대답해보지만 캐더린은 그를 놓아주지 않았다.
"그러니까 언제까지."
그녀의 말에 사내가 재빠르게 머리를 굴렸다. 괜히 지키지도 못할 말을 내뱉었다가는 뒷일을 감당할 수 없다. 그렇다고 무한정 시간을 달라고 했다가는 뒷일이 아니라 지금 이 자리에서 험한 꼴을 볼 수도 있다.
"한시간 내로 파악하겠습니다."
결국 짧지도 길지도 않은 애매한 시간을 약속한 사내에게 캐더린이 고개를 저어 보였다.
"아니, 30분 내로 알아와. 만약 늦거나 정보가 부족할 경우에는..."
말끝을 흐리는 그녀의 태도에 남자가 식은땀을 흘리다가 이내 떨어진 축객령에 집무실을 빠져 나갔다.
남자가 나간 집무실에 홀로 남은 캐더린은 입술을 짓씹으며 생각에 잠겼다.
그녀가 보고를 받은 현시각 원정대는 온전치 못한 전력으로 스트리고이를 향해 이동하고 있었다. 비록 하얀갈기 부족이라는 예상치 못한 세력이 따라붙었다고 하나, 그녀가 분석한 루마니아의 중심은 그 정도 전력으로는 장담할 수가 없었다.
처음부터 모든 사실을 알았다면, 인원선발에 더욱 열을 올렸을 텐데 하는 아쉬움이 남았지만, 뱀파이어들이 지금 이 시점에서 피의 의식을 벌일 줄 누구인들 예상했겠는가.
이미 실종된 1등급 이능력자들이 셋이고 무력화된 1등급 이능력자가 하나다. 2등급 이능력자들은 무력화되거나 전사하여 반수도 남지 않은 상황이고, 성가대는 무슨 꿍꿍이인지 알 수가 없다.
그런 상황을 조금 더 안정화시키기 위해 무리하게 미국과 우방국의 이능력자들을 후발대로 보냈건만 정작 그 후발대의 행방이 사라져버렸다.
"필립 핸리 셰이던... 무슨 생각이지?"
후발대의 지휘를 맏긴 필립 핸리 셰이던이 다른 이능력자들과 함께 자취를 감춘 탓이다. 후발대만 합류해도 조금은 안심이 될 텐데하고 생각한 그녀가 이번 작전의 인선은 명백한 실수였다고 후회했다.
하지만 위원회에서 정한 인선을 바꿀 힘을 지닌 사람은 극히 드물었고, 적어도 그녀는 그 안에 속하지 않았다.
인종차별주의자에 위험한 사상을 갖고 있는 필립 헨리 셰이던이지만 작전능력과 본신의 능력만큼은 탁월하여 한가닥 기대를 걸고 있었는데 그 모든 것이 허사로 돌아갔다.
가만히 탁자를 두들기던 캐더린 우즈가 수화기를 들어 어디론가 연락을 했다.
"..... 네. 스트리고이와 결전을 하기 전까지는 AF-KOR, 블러드 써쓰터의 힘을 절대적으로 아껴두어야 합니다."
다른 1등급 이능력자들이 전부 트루 블러드와 상잔하는 수가 있어도 절대적으로 김형준의 힘은 아껴두어야만 했다.
"스트리고이의 정체가 시궁창의 왕 블라가로 밝혀진 지금으로썬 그 방법 밖에 없습니다."
몇 번이나 같은 말을 반복하던 캐더린이 수화기를 내려놓는데 집무실의 문이 벌컥 열렸다.
갑작스러운 상황에 캐더린이 인상을 찡그리며 방문자를 노려보았다. 좀 전까지 집무실에서 그녀에게 보고를 하고 있던 남자는 사나운 그녀의 눈빛은 신경쓰지도 않고 외쳤다.
"비상 통신입니다! 스트리고이가 둥지를 떠났습니다!"
============================ 작품 후기 오늘은 여기까지 올리고 내일 또 연참하겠습니다!!!
그리고 카드홀더 작가님의 더 바이블 - (The Bible... of Mutopia)
추천합니다. 아직 편수가 얼마 없긴 하지만 노블 중에 기대작이네요. 처녀작인 거 같은데 이대로만 쭉 가줬으면 하는 바람이 있네요.
*뜰에 제가 키우는 도고 아르헨티노 사진 있으니 구경들 하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