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피바라기-188화 (188/223)

< --  2-6. 망자의 도시  -- >

원정대의 기척을 느낀 것은 그만이 아니었는지 걸음을 옮기던 이들이 멈춰섰다. 막 생각에서 깨어난 김형준은 자신에게 다가오는 바람갈기 장로를 발견할 수 있었다.

"그대의 의견에 따르겠소. 이대로 돌입할지, 아니면 계속해서 거리를 유지할지."

아무래도 자신들과 함께하는 모습을 바티칸에게 보여 좋을 것이 없다 생각했는지 김형준의 입장을 제법 배려하는 태도였다.

성가대와 성가대를 이끄는 바오로를 잠시 떠올려본 김형준은 입을 열었다.

"어차피 그들이 저를 좋게 볼 것 같지는 않군요. 저야 상관없습니다. 하얀 갈기 일족이야말로 바티칸과 썩 사이가 좋다고 하진 않던데, 편한대로 하십시오."

도리어 그들의 입장을 생각해 결정권을 넘긴 김형준의 모습에 바람갈기 장로의 입가에 진한 미소가 떠올랐다.

"바티칸과 투닥거리는 거야 하루 이틀도 아니고, 다들 몸이 근질근질하다니 이

대로 돌입하도록 합시다."

바람갈기의 말에 주변에 늘어선 남녀들의 표정이 밝아졌다. 마치 장난감을 뺏길까 두려워 전전긍긍하는 아이와 같은 모습이 순식간에 사라지고 작은 환호마저도 주변에서 터져 나왔다.

"그럼 갑시다."

그 시원시원한 태도에 김형준이 감탄을 할 틈도 없이 수백의 늑대인간이 늑대화를 이룬다. 순식간에 사방을 가득 채운 거구의 늑대들이 그대로 길게 울부짖으며 뛰어가는데 그 모습이 꽤나 장관이었다.

"이건 뭐... 시원하다고 해야 할지."

무리의 선두에서 내달리다 이내 늑대화를 이루는 바람갈기 장로를 바라보던 김형준이 끝내 한마디를 내뱉자, 민용모가 어깨를 으쓱해보였다.

"저분들에게 전투는 축제와 다를 바 없어. 근데 은둔 생활을 하느라 한동안 손발을 못 놀렸을테니 얼마나 갑갑하겠어."

길게 이어지는 늑대인간들의 하울링에 투지보다는 유쾌함이 가득한 이유가 그

것이었던가. 김형준이 고개를 절래절래 저었다.

"저희도 뒤따르지요. 저렇게 앞서 가다가 바티칸과 충돌이라도 할까봐 걱정됩니다."

전지현의 말에 고개를 끄덕인 일행들이 이미 지평선 너머로 사라진 하얀 갈기 일족을 따라 몸을 날렸다.

아야나미 로유미의 고운 미간이 찡그려졌다. 손에 감아쥔 태도의 감촉이야 평소와 다를 바가 없었지만 손맛이 좋지를 않았다.

실체를 베어도 나무토막을 베어내듯 둔탁하기만 한 감촉, 그나마 안개라도 베듯 아무런 감촉이 없는 경우보단 지금이 나았다.

"키익!"

막 손톱을 바짝 세우고 자신에게 달려들던 뱀파이어를 그대로 양단해버린다.

이번만큼은 꽤나 묵직한 감촉이 손 끝에 전해져 왔다. 비로소 무언가와 싸우고 있다는 실감이 난다. 잠시 펴졌던 미간의 주름이 이내 다시 좁혀진다.

"정말 듣기 거북하군."

처음의 온화한 음성은 어디 갔는지 뾰족하게 날이 선 어조로 혼잣말을 내뱉은 그녀가 잠시나마 전장에서 시선을 떼어냈다.

그 시선 끝에 기도하는 자세로 무언가를 끊임없이 중얼거리고 있는 성가대원들이 보였다. 하얀 망토를 붉게 물들인 채 뱀파이어들을 막아서는 이들과 그 중심에서 합창을 하는 성가대원들의 모습은 지독스럽게 이질적이었다.

절도라고는 하나 없는 동작으로 뱀파이어들을 맞아 싸우는 모습도, 또 그 무기력해보이기까지 하는 공격에 어이없이 쓸려나가는 뱀파이어들도. 그 뒤에서 전투는 아랑곳하지 않고 무릎을 꿇은 채 기도하는 이들까지.

정말 저들이 자신과 같은 일행인가까지 생각이 들 지경이다.

하지만 스스로도 그들이 없었다면 결계 탓에 지금과 같은 힘을 발휘하진 못했을 것이라는 사실을 알 고 있는 그녀였다. 다만 속을 알 수 없는 바오로의 태도와 무인이라고 부르기도 뭐한 성가대원들의 모습이 못내 마음에 들지 않을 뿐

이다.

게다가 한군데 뭉쳐 싸우면 더욱 수월할 것을 굳이 각개전투를 고집한 탓에 대열이 늘어져 더욱 피곤한 전투가 되고 있었다.

말이야 전투 방식이 달라 서로 간에 발목을 붙잡을까 걱정되어서라지만, 지금 와서 보니 성가대 특유의 기운을 자신들에게만 사용하기 위해서가 아닌가.

성가대원이 몰린 지역에만 펼쳐진 얇은 막의 모습에 아야나미 로유미가 혀를 찼다. 지금 와서 저들을 탓해봤자지.

잠시 숨을 돌린 그녀가 또다른 먹이를 찾아 몸을 날린다.

그렇게 전투가 지지부진하게 혼전의 양상으로 흘러가자 죽어나가는 것은 일반 이능력자들이였다.

그들에게는 1등급 이능력자의 초감각도 없었고, 성가대원들의 결계도 없었다. 은밀하게 접근하는 뱀파이어들의 공격을 막아내는 일이 수월할 턱이 없었다.

덕분에 혼전의 양상이 짙어져갈수록 일반 이능력자들의 피로는 배가 되어갔다. 이미 수십의 이능력자들이 쓰러졌고, 앞으로 또 얼마나 희생자가 생길지 모른다.

그나마 1등급 이능력자들 몇몇이 부지런히 주변을 돌아다니며 그들을 돕고 있지만, 고작 몇 명의 1등급 이능력자들이 전장을 전부 커버하기에는 대열이 턱 없이 길었다.

자신 있게 루마니아로 들어섰지만 불과 얼마 지나지 않아 자신들이 얼마나 무모했는지를 깨달은 이능력자들은 이를 악물었다.

끝도 없이 밀려드는 뱀파이어들을 상대하기 위해서는 그렇게 이가 바스라져라 싸워야 했다. 한계의 한계까지 스스로를 몰아붙인 이능력자들이 점점 이능의 피드백으로 몸이 무거워진다.

사방에 흩어진 1등급 이능력자들이 그런 일반 이능력자들을 돕기 위해 범위 공격을 해보지만 교활한 뱀파이어들은 안개로 변해 사방으로 흩어지고 모이기를 반복하며 몸을 피한다.

"이대로 가다가 저치들과 우리들만 남겠는데."

카탈리나 에란쵸가 바닥에 침을 뱉어내며 말했다. 저 멀리 보이는 바티칸의 성가대와는 다르게 이쪽의 원정대는 빠르게 수가 줄고 있었으니, 전투가 끝나지 않는다면 정말 그녀의 말처럼 될 것이다.

"얄미운 새끼들."

평온한 표정으로 이쪽을 살펴보는 바오로를 바라보던 카탈리나 에란쵸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어디선가 늑대 울음소리가 들렸던 탓이다. 온 사방에 넘치는 것이 피와 육편이었던지라 냄새라도 맡고 늑대들이 몰려드나 싶었지만, 지금 이 순간에도 터져 나오는 폭음과 에너지의 폭풍에 고개를 저었다.

"어라?"

그녀의 얼굴에 의아함이 짙어진다.

희미하게 들려왔던 늑대 울음소리가 이제는 연달아 들려온 탓이다. 게다가 지축을 뒤흔드는 이 진동은 비단 전장의 격렬함 때문만은 아니었다.

무언가 거대한 것들이 다가온다. 게다가 하나가 아닌 여럿이.

아우우우우우우우소리와 진동으로 방향을 가늠해보던 카탈리나 에란쵸의 고개가 돌아갔다. 그곳에는 언제 다가왔는지 모를 거대한 은빛 늑대 한 마리가 전장을 주시하고 있었다.

"하얀 갈기 일족이다!"

늑대의 정체는 이능력자들이 아닌 뱀파이어들이 먼저 알아챘다. 죽어도 죽어도 끝도 없이 이능력자들을 몰아붙이던 뱀파이어들의 대열이 술렁대기 시작했다.

"하얀 갈기?"

누군가 의문에 찬 한마디를 내뱉는 순간 은빛 늑대의 뒤편으로 수십의 늑대가 쏟아져 나온다.

처음에는 하나 둘씩 이어지던 늑대의 행렬이 순식간에 수십 수백을 넘더니 날카로운 창이 되어 뱀파이어들의 뒤편을 꿰뚫어간다.

크와아아아앙

사나운 울부짖음과 함께 난입한 거대늑대들은 어물쩡거리고 있던 뱀파이어들을 그대로 씹어 삼키고 찢어발겼다. 지척에 다가선 거대한 늑대의 위용에 압도된 이능력자 한명이 미약한 불꽃을 피워 쏘아내려 할 때 전장에 낭랑한 음성이 퍼져 나간다.

'피에 미친 흡혈귀 일족을 처단하기 위해 온 하얀 갈기 부족이다. 그대들을 도와 전장을 정리 할테니 피아 식별을 확실히 하라.'

그 말에 이능력자들이 주변을 둘러보니 과연 늑대들이 공격하는 방향에는 오직 뱀파이어들만이 있었다.

"지원군이다!"

누군가의 외침에 전장의 이곳저곳에서 환호가 터져 나왔다. 정작 자신들조차도 원정대를 지원하기 위한 지원병력이면서 그간의 전투로 그 사실을 까맣게 잊은 모양이다.

"호오. 그대들이라면 우리와 신성한 서약을 하지 않았던가?"

성가대의 중심에서 꿈쩍도 안하던 바오로가 은빛늑대-바람갈기 장로에게 다가섰다.

'계약을 어긴 적은 없어.'

저 너머를 바라보느라 바오로는 쳐다보지도 않으며 바람갈기 장로가 대꾸했다.

"분명히 그대들은 일정 수 이상 모일 수가 없을 텐데?"

바오로가 비열한 미소를 지으며 이죽거렸지만 바람갈기는 요지부동이었다.

'그래. 한번 세어 봐. 우리는 삼백이 넘지 않았거든.'

아무래도 하얀 갈기 일족과 바티칸 간의 남들이 모르는 사정이 있는 듯 했다. 그 내용이 어떤 것이든지간에 바람갈기는 그것을 달가워하지 않는 듯 했는데, 바오로는 집요하게 이를 물고 늘어졌다.

"너희 일족의 어린 놈들이 어떻게 되든간에 상관이 없다는 것인가?"

바오로의 말에 바람갈기가 처음으로 눈동자를 돌려 그를 마주 본다. 신비로운 은빛 눈동자가 깊이를 알 수 없는 빛을 뿜어낸다.

아무 말도 없이 그저 자신을 바라볼 뿐인 바람갈기의 시선에 바오로는 뜨끔한 표정으로 고개를 돌렸다. 바티칸의 위세를 빌어 잠시 말을 섞긴 했지만, 눈 앞의 존재는 고대부터 존재해온 신화 속의 존재와도 마찬가지다.1등급 몬스터니, 능력자니 해도 바람갈기의 앞에서는 어린아이와 같은 존재, 다만 계약으로 묶인 탓에 세상에 알려지지 않은 존재다.

바오로가 식은땀을 흘리며 딴청을 피우자 바람갈기가 무심한 시선을 다시 돌려 전장을 주시했다.

조금 늦은 감이 있었다.

자신들도 뱀파이어들과 격전을 벌이며 이곳에 도달한 것이지만, 흡혈도 못하는 늑대 일족보다는 인간들을 향해 더 많은 뱀파이어들이 몰려든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헤아릴 수도 없는 뱀파이어들을 맞아 싸운 이능력자들은 분투한 듯 보였지만, 민용모를 통해 들은 수와는 비교도 되지 않을 정도로 적었다.

살아남은 인원이라고 해봐야 고작 백이 될까 말까 하다. 하나 하나가 일당백으

로 추리고 추린 이들인텐데 뱀파이어들의 수가 너무 많았던 모양이다.

늦었지만 안타깝진 않다.

수 많은 희생자를 보았지만 바람갈기의 눈은 고요했다. 전사의 일족으로 태어나 전장에서 헤아릴 수 없는 세월을 살아온 그녀에게 있어 이런 정도의 전장은 오히려 점잖은 편에 속한다.

그 안에서 얼마나 많은 이들이 희생되었는지도 중요치 않았다. 그저 그녀에게 중요한 것은 수천년간을 대립해온 뱀파이어들과 결착을 낼 수 있는 순간이 왔다는 것과, 피에 굶주린 일족들이 마음껏 만찬을 즐길 수 있는 장소가 이곳이라는 것 뿐이다.

'아들들아! 마음껏 날뛰어라!'

그녀가 주둥이를 하늘로 곧추 세우고 길게 울부짖었다. 굳건하게 뱀파이어들을 밀어내던 성가대의 막도 일순간에 깨어지고 하늘을 날아다니던 뱀파이어들이 바닥을 나뒹군다.

단순히 울부짖었을 뿐인 그녀의 행동에 전장이 얼어붙었다. 그 안에서 날뛰는 것들은 근원을 같이 하는 늑대 일족들뿐이다.

바람갈기의 긴 울부짖음에 무력하게 바닥을 버르적거리는 뱀파이어들이 순식간에 찢겨지고 삼켜진다. 새하얀 털을 새빨갛게 물들인 거대 늑대들이 온 사방을 뛰어다니며 난동을 부리자 원정대도 뱀파이어도 자연스럽게 멀어질 수 밖에 없었다.

다만 의도적인 것인지 하얀갈기 일족이 뱀파이어들을 내모는 방향에 성가대원들이 있어 그들만이 좀 전보다 격렬한 전투를 하고 있다.

바오로가 그 사실을 눈치 채고는 바람갈기를 노려보다가 이내 성가대를 향해 몸을 날렸다.

"휴우. 장관이네."

뒤늦게 도착한 김형준은 또다시 벌어진 늑대인간들과 뱀파이어의 전투에 휘파람을 불었다. 이제 막 바람갈기의 포효로 인한 영향에서 벗어난 뱀파이어들이 맹렬하게 늑대인간들을 공격하고 있을 무렵에 도착한 그는 잠시 감탄성을 내뱉고는 빠르게 걸음을 옮겼다.

============================ 작품 후기

오늘은 인쇄 승인 바로 전 단계인 오타 검수 작업을 하느라 업뎃이 늦었습니다. 오타 하나에 수십 수백 수천의 손해가 생길 수도 있는 작업이라 잠시 집중했더랬죠.

늦었지만 이번편 올리고 또 한편 근무시간 끝나는 대로 올리겠습니다!

다. 오타 하나에 수십 수백 수천의 손해가 생길 수도 있는 작업이라 잠시 집중했더랬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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