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2-6. 망자의 도시 -- >
새하얀 은발 머리에 신비로운 눈동자도 마찬가지도 은빛이다. 하늘하늘한 몸매는 길게 쭉 뻗어 마치 모델을 보는 듯 맵시가 있었다. 여느 거리에서 만났다면 그 어떤 사내라도 한번쯤은 뒤돌아보게 만들 만큼 매력적인 외모다. 입가에 덕지 덕지 뭍은 핏자국만 빼면 말이다.
"그대가 피바라기요?"
가벼운 마음으로 그녀의 접근을 바라보고 있던 김형준의 온몸이 굳었다. 그저 간단한 한마디였을 뿐이건만 영혼을 뒤흔들만큼 거대한 힘이 느껴졌다.
마치 그가 전지현과 허준영을 처음 보았을 때만큼이나 거대한 존재감, 저도 모르게 자세를 바로 한 김형준은 마주 대답했다.
"제가 김형준입니다."
전지현이 그런 그의 태도변화를 유심히 바라보다가 슬쩍 미소를 지었다. 거대
한 힘과 존재감에 긴장은 하되 압도되지는 않았다. 게다가 스스로는 모르는 듯 하지만 그 자신도 눈 앞의 존재에 못지 않은 존재감을 내뿜는다.
당당하지만 도발적이지는 않은 자세, 그 위풍당당한 모습에 전지현이 저도 모르게 뿌듯함을 느꼈다. 이제는 정말로 맥의 주인이라고 해도 태가 나지 않는가.
전지현이 자신을 보며 미소를 짓고 있는 것도 눈치 채지 못한 채 김형준은 눈 앞의 존재에게 집중했다.
"우리 일족의 장로님이셔."
언제 늑대화를 푼 것인지 민용모가 곁에서 여인의 정체를 밝혔다.
불과 20대 중후반으로밖에 보이지 않는 여인이 유서 깊은 하얀 갈기 일족의 장로라니, 김형준은 저도 모르게 전지현과 그녀를 번갈아 바라보다가 가볍게 목례를 해 보였다.
아무래도 실제 나이와 어울리지 않는 외모를 한 존재들 탓에 머리가 지끈 거리는지 표정이 왠지 모르게 부자연스러운 김형준이다.
"반갑습니다. 대한민국의 검맥의 맥주 김형준입니다."
속으로야 무슨 생각을 하건 간에 마주 인사를 하는 그의 태도는 흠 잡을 곳 하나 없었다. 다만 어디까지나 연장자에 대한 예우 차원에서 했다는 것이 표가 나는 인사에 장로가 흥미롭다는 표정을 지어 보였을 뿐이다.
피바라기, 피바라기. 귀에 못이 박히도록 들었던 존재다. 눈 앞에서 보니 과연 그 명성이 거짓이 아니라는 사실을 깨닫고 흡족한 미소가 지어졌다.
일족의 전도유망한 아이와 같이 있는 존재라니 장로의 입장에서는 조금 더 유심히 보게 되는 모양이다. 그녀의 입가에 걸친 미소가 더욱 진해졌다.
"반갑소. 하얀 갈기 일족을 이끌고 있는 바람갈기요."
마주 내민 손을 잡는 둘의 눈빛이 허공에서 교차했다.
변고가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흔들림 하나 없는 김형준의 태도에 바람갈기가 잠시 감탄하는 사이에 김형준은 속으로 조금은 엉뚱한 생각을 하고 있었다.
입가에 피칠을 한 미녀가 건네는 인사라니, 황당하고도 괴기스럽다. 대화에 집중하기 위해서라면 저 입가에 피부터 닦아야 하지 않나 생각하고 있던 김형준
이 헛기침을 하며 민용모에게 눈짓을 보냈다.
과연 커다란 덩치와는 다르게 여우 같은 눈치를 지닌 민용모가 품 안에서 붕대 꾸러미를 꺼내 바람갈기에게 건넸다.
의문어린 시선을 던지는 그녀에게 민용모가 입가를 닦는 시늉을 해보이니 그녀가 가녀린 외모와는 어울리지 않는 털털한 동작으로 이마를 쳐 보였다.
"아하. 첫 대면이라고 할 수 있는데 꼴이 너무 흉했군. 본의는 아니었으니 양해 바라오."
어쩐지 그 모습이 전지현과도 겹쳐 보여 김형준이 저도 모르게 미소를 지었다.
민용모라면 김형준에게 둘도 없는 친우다. 그런 그의 일족이라니 첫 대면부터 호감이 생기지 않을래야 안 생길 수가 없었다.
"일단은 자리를 옮기시지요. 원정대와 너무 떨어졌습니다."
전지현이 조용히 김형준에게 조언했다. 과연 그 말을 듣고 보니 자신 탓에 일행에서 떨어져 나온 것이라 그는 군소리 없이 이동을 시작했다.
하얀 갈기 일족은 진즉부터 루마니아를 주시하고 있었다. 다만 세간의 이목이 신경쓰여 은밀하게 루마니아를 살피던 차였는데 루마니아 중심에 피의 제단이 세워지자 바로 일족을 모아 돌입한 것이다.
그 와중에 민용모가 은밀하게 그들과 연락을 주고 받았음은 당연한 것이고, 덕분에 성가대와의 충돌하지 않고 거리를 유지할 수 있었던 것이다.
일개 성가대와의 충돌이 두려웠던 것은 아니나 그 뒤에 도사리고 있는 바티칸이 꺼려진 그들은 한시간 이상의 거리를 유지하며 성가대의 흔적을 따라 왔는데, 마침 원정대에서 낙오된 김형준 일행을 발견하고 합류할 수 있었다.
민용모는 이러한 상황들이 전화위복이 된 것이라며 오히려 기뻐했다. 괜히 속을 알 수 없는 바티칸의 인물들과 함께 길을 가는 것보다는 자신의 일족이 더욱 믿음직스러운 게 당연한 일이었다.
"그쪽에 잔존한 1등급 이능력자 전력이 아쉽긴 하지만."
김형준이 조그맣게 중얼거린 말에 민용모가 기겁을 하며 입을 막았다.
"야. 장로님들 들을까 무섭다. 저분들 앞에서 1등급 이능력자 어쩌구 저쩌구 하는 소리 지껄이다간 큰일 난다고."
그의 말에 김형준이 장로 바람갈기를 떠올리곤 무심코 납득해버렸다. 이제는 1등급의 반열에 올라 적수가 없다고 생각했던 스스로가 몸이 굳을 정도로 압도적인 존재감을 지닌 그녀, 듣기로는 그녀와 같은 장로들이 여럿 있다니 저쪽의 전력이 이제 와서 아쉽다는 것은 이치에 맞지 않았다.
"최소한 저와 동급, 아니면 그 이상입니다."
전지현이 단호한 태도로 말을 보태자 김형준도 더는 그 일에 대해 언급하지 않았다.
"트루 블러드라는 것들도 그렇더니, 세상에 우리만 있는냥 날뛰었던 것이 부끄러울 지경이다."
김형준이 그리 말하자 민용모가 머리를 긁적였다.
"뭐, 우리 쪽 세계는 정말 어지간하지 않으면 인간들하고 얽히고 싶어하지 않으니까. 인간하고 얽혀서 끝이 좋았던 적이 없거든."
그렇게 이야기를 나누는 사이에도 젊은 남녀들이 수시로 오가며 김형준을 살펴보다가 돌아갔는데 그때마다 민용모의 머리통을 후려치는 이들이 태반이었다.
민용모는 그저 어색한 미소를 지은 채 그들에게 연신 비굴한 웃음을 보였는데, 김형준이 이유를 묻자 꺼림칙한 얼굴로 대꾸를 해준다.
"일족과 함께 지낼 수 있는 이들은 전부 성체들뿐이야. 나 같은 어린 개체는 이곳 저곳을 떠돌며 세상을 배워야 하지. 무슨 말인지 알아들어? 여기 계신 분들은 전부 수백년은 묶은 노괴물들이란 말이지."
끝에 가서는 은밀하게 속삭이다시피 하는 민용모의 말에 고개를 끄덕이던 김형준이 순간 걸음을 멈췄다.
어라?
"성체? 어린 개체?"
아무 생각 없이 말을 하던 민용모가 영문을 모르겠다는 듯이 오히려 의문 어린 표정을 지어 보였다.
"어. 왜?"
김형준의 시선이 주변을 에워싼 하얀갈기 일족을 스쳐갔다. 어느 누구 하나 나이 들어 보이는 이가 없는 선남선녀들이다. 그들과 대조적으로 거대한 덩치에 노숙한 얼굴을 한 민용모의 얼굴이 눈에 박힐 듯 들어왔다.
"아니다. 말을 말자."
어차피 그들의 나이 계산법이야 알 수 없는 입장이니 차라리 입을 닫아버린 김형준이다. 하지만 그러면서도 한마디 하는 것을 잊지 않았다.
"이런 미성년자 새끼."
"...."
그 말에 민용모가 뜨악한 얼굴로 있다가 황급하게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바람갈기, 하얀이빨, 굽은 등, 갈퀴손, 웃는 눈... 하나 같이 이상한 이름을 대며 자신을 소개해오는 장로들 덕에 김형준은 어색한 웃음을 지었다. 당장에라도 연예계에 진출해도 인기몰이를 할법한 선남선녀들이,
'나 굽은 등이요. 반갑소.'
하고 인사할 때마다 웃음이 터져 나올 것 같아 김형준은 필사적으로 표정을 관리했다. 그저 은둔하여 살아오던 이들이 새로운 인물을 만나 반가움을 표하는 것이 전부였는지 장로들은 간단한 인사만을 남기고 대열의 어디론가 흩어져 버렸다.
"야. 미성년자. 넌 본명이 뭐야."
김형준이 민용모를 보며 이죽거렸다. 하나 같이 인디언의 그것과 비슷한 이름을 지닌 하얀갈기 일족을 보다 보니 민용모 역시 다른 이름이 있을 거란 생각이 든 탓이다.
미성년자라는 말에 민용모가 험악한 얼굴을 해보였다가 이내 한숨을 내쉬었다.
"그건 또 왜."
그다지 알려주고 싶은 생각이 있어보이진 않았지만 김형준은 끈질기게 물었다. 결국 참다 못한 민용모가 어색한 표정으로 자신의 이름을 밝혔다.
"여우 눈..."
그 거대한 덩치와는 어울리지 않는 진명에 김형준이 황당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시뻘개진 얼굴로 숨을 몰아쉬는 그를 바라보던 김형준은 그의 성정이 눈치가 빠르고 계산에 밝다는 것을 떠올리고는 납득해버렸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도 커다란 덩치와 험악한 얼굴과 그 이름이 매치가 되는 것은 아니었지만.
그렇게 그들이 평화롭게 담소를 나누며 원정대를 뒤따르고 있었지만, 다른 이들까지 편했던 것은 아니다.
산발적으로 나타나 달려드는 뱀파이어 무리들과의 전투가 끊이지 않았음은 물론이요, 간간히 트루 블러드들도 출몰해 김형준을 긴장시켰다.
하지만 하얀갈기 일족의 인물들은 대수롭지 않다는 듯이 뱀파이어들을 찢어발기고 오히려 트루 블러드들에게 사나운 기세를 내쏘았는데, 어찌 된 일인지 트루 블러드들마저도 그들을 피해 다른 방향으로 가 버렸다.
"아. 일족의 원로들이 이렇게나 모여 있는데 트루 블러드들 몇 따위가 뭘 할 수 있겠어."
민용모의 자부심 가득한 설명에 김형준이 내심 경탄했다. 성체가 아니라던 민용모마저도 1등급과 2등급의 사이에 걸친 인세의 강자다. 그런데 성체에 이른 늑대인간들이 얼마나 강력할지 상상만으로 든든해진 김형준이다.
"성체가 되면 바뀌는 점? 없어. 그냥 더 커지고. 더 강해지는 거지 뭐."
뭔가 색다른 것을 기대했던 김형준이 민용모의 대답에 실망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
"가던 길이나 가셔."
그 말에 고개를 끄덕인 김형준이 고개를 숙이는데 방금 전과는 다르게 웃음기가 하나 없는 표정이 심각해보이기만 했다.
겉으로야 웃고 떠드는 모습을 보인다지만 내심 자신에게 일어났던 변이과정을 떠올리느라 정신이 없었다. 다만 전지현이 걱정을 할까봐 내색을 못할 뿐, 그의 머리는 맹렬하게 회전 중이었다.
생각에 생각을 거듭한 결과, 그는 가설을 세울 수 있었다.
찔레가시 꽃의 정령 소희뱀파이어의 근원흡혈 이능 본연의 부작용이 세가지가 스스로 생각해낸 변이의 이유였다.
찔레가시 꽃의 정령, 소희는 늘 자신에게 흡혈이 유물의 권능이 아닌 본신의 힘이라고 누차 강조했다. 흡혈의 이능을 가진 존재가 자신 이전에 없었다고 하니, 그 부작용이 어떨지는 아무도 모르는 것이 당연했다. 게다가 생명력이 아닌 어둠을 근원으로 한 뱀파이어들의 근원을 흡수했으니 자신의 몸에 이상이 생기지 않는 것이 이상할 지경이다.
왜곡과 뒤틀림에 의해 생겼다고는 하나 엄연히 생명체인 몬스터들의 것과는 경우가 달랐다.
지금 와서는 자신이 너무 경솔했음을 자책하고 싶은 심정이다.
하지만 이제 와서 후회해봐야 변하는 것은 없었다. 지금은 알 수 없는 자신의 변이가 다만 긍정적인 방향으로 이루어지기를 바랄 뿐이다.
그렇게 생각하니 변이의 끄트머리에 들려왔던 심장 소리가 떠올랐다. 처음의
박동이야 별다를 것이 없었지만, 그 너머에서 느껴지던 조그만 박동 소리가 그의 마음에 걸렸다.
괜스레 일전에 흡수한 미노타우르스의 심장이 떠오른다. 김형준은 고개를 저었다. 아직은 알 수 없다. 변이의 이유도. 그 박동 소리의 정체도. 무언가 변화가 생겼다면 어차피 알게 될 일이다. 잡념을 털어버린 그의 기감에 멀지않은 곳에서 격전을 벌이고 있는 원정대의 기척이 잡혔다.
============================ 작품 후기 한편 더 올립니다. 아마 당분간은 꾸준히 일일 2~3편 이상씩 올리지 싶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