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2-6. 망자의 도시 -- >
트루 블러드가 던진 말이 너무나 뜻밖이었던 탓일까. 서슬 퍼런 기세를 내뿜고 있던 이능력자들이 일순간 턱 벌어졌다.
그런 그들의 표정이 재미가 있는지 트루 블러드의 입가에 더욱 진한 미소가 지어졌다.
"흡혈을 통해 생을 이어나가는 존재, 그것이 우리 일족이 아니라면 무엇이지요?"
전장의 소음도 격렬함도 없었다. 이 순간만큼은 모두가 트루 블러드의 말에 귀를 기울일 뿐이다.
"게다가 겁도 없이 우리 일족의 피를 그렇게나 들이마셨으니, 그나마 남아있던 인간의 피가 얼마나 남아있을까요."
그 말에 이능력자들 중 일부가 사방을 둘러보며 전장을 살폈다.
기괴한 신음소리를 내뱉으며 바짝 말라가는 뱀파이어들. 김형준이 변이를 시작하며 흡혈의 기세는 줄어든 듯 하지만 여전히 줄기에 꿰뚫린 채 고통에 몸부림
치고 있다.
수백을 넘어 수천에 달하는 뱀파이어들의 모습을 바라보던 이능력자들이 침음을 내뱉었다.
"웃기는 소리. 만약 흡혈을 통해 존재가 바뀐다면 진즉에 마수로 변했을 분이다. 지금 이 자리에 모인 뱀파이어들의 몇배를 다시 모은다고 해도 저분이 이제껏 겪어온 마수들의 수에는 턱도 없이 모자라."
전지현이 단호하게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그녀의 말마따나 김형준이 그간 흡혈의 이능을 통해 흡수해온 몬스터들의 수는 고작 이 정도의 뱀파이어들과는 비교도 되지 않을 숫자다.
그때마다 변화가 일어났다면 이미 김형준은 괴물이 됐어야 한다.
그녀의 말에 여기 저기서 고개를 끄덕이는 이능력자들이 늘기 시작했다. 트루 블러드는 그런 이들을 바라보다가 소리내어 웃기 시작했다.
"검은 피막의 날개에 저토록 음습한 어둠. 동질감이 이렇게나 느껴지는데 제가 이상한 걸까요?"
트루 블러드의 말에 전지현이 미간을 좁혔다.
뭐라고 반박해야 할지 마땅한 말이 떠오르지 않은 탓이다. 마음에 걸리는 것이 한두가지가 아니었으나 그 모든 정황에도 불구하고 판단을 내릴 수가 없었다.
가장 마음에 걸리는 것이라면, 찔레가시 꽃에 도사리고 있을 악령. 몇 번이나 김형준을 잠식하려 했던 존재다. 자신이 심어둔 선기 탓에 요즘은 잠잠한 모양이지만 언제 어느때고 수작을 부려도 부릴 존재다.
비단 뱀파이어의 피가 아니라도 김형준은 늘 시한폭탄과도 같은 위험을 떠안고 있었던 것이다.
"꺼져라. 더 이상의 헛소리를 들어주고 싶은 생각이 없으니."
속으로야 무슨 생각을 하던간에 전지현은 칼날같은 어조로 트루 블러드들을 쫓았다. 그저 말뿐이 아니라 방금 전까지 잠잠해졌던 기운이 다시 폭풍처럼 휘몰아치며 그녀의 주변을 맴돌기 시작했다.
"어차피 가는 방향이 같으니 다시 만나게 되겠지요. 지금은 이쯤에서 물러나겠습니다."
너무도 순순히 고개를 끄덕이는 트루 블러드의 모습에 카탈리나 에란쵸를 비롯한 이들이 인상을 찡그렸다.
결계의 영향 탓에 온전치 못했었다지만 1등급 이능력자들과 막상 막하로 싸웠던 이들이다. 그런 이들이 두 번이나 물러나려 한다.
트루 블러드라는 존재들이 정말 자신들이 주장하는대로 인간과의 충돌을 원치 않는 이들일까 하는 생각이 들었지만, 수려한 눈동자 뒤에 숨겨진 폭급함에 스스로 고개를 젓게 된다.
"너."
결국 참지 못한 카탈리나 에란쵸가 군도를 뽑아 트루 블러드를 겨눴다. 천천히 발걸음을 물리던 트루 블러드가 파란 눈동자로 그녀를 응시한다.
"대체 무슨 생각이냐."
그녀의 질문에 잠시 미소를 지어보인 트루 블러드가 그저 짤막한 한마디를 남기고는 어둠에 융화되어간다.
"곧 다시 만나게 될 겁니다. 그때쯤이면 싫어도 알게 되겠지요."
말이 끝나갈 무렵에는 완전히 어둠에 녹아든 트루 블러드들이 흔적도 없이 사라져 버렸다.
"이런 개 같은 경우를 봤나!"
두 번이나 눈 앞에서 트루 블러드를 돌려보낸 카탈리나 에란쵸가 고함을 치며 바닥을 걷어찼다.
원체 호전적인 성격의 그녀라지만 무슨 일이 벌어질지 모르는 루마니아라는 무대가 못내 마음에 걸려 두 번이나 적을 살려 보낸 것이다. 이성적인 판단을 떠나 분노가 치미는 지 그녀가 몇 번이나 고함을 지르며 분을 삭힌다.
아야나미 로유미 역시 태도를 다시 갈무리 하며 시선을 돌렸다. 언제 제 자리로 돌아간 것인지 김형준의 주변에 검을 꽂아놓고는 사방을 경계하는 전지현의 모습이 그녀의 눈에 박힐 듯 들어왔다.
검후, 검후 하더니 과연 명불허전이군.
방금 전에 보였던 그 신속한 움직임을 떠올린 아야나미 로유미의 눈가에 호승
심이 들끓었다.
모든 이들의 이목이 김형준을 호위하는 전지현에게 쏠려 있을 무렵, 성가대원들은 다시 평소의 모습으로 돌아가 묵묵히 전장을 정리하고 있었다.
"과연 성하께서 주시하라는 인물답군."
바오로가 음험하게 눈을 빛내며 김형준을 살펴보다가 이내 표정을 바로 했다. 언제나처럼 사람 좋은 얼굴을 한 그가 성가대원 몇을 손짓으로 불러 몇마디 지시를 내렸다. 바오로의 말을 듣는 동안 몇 번이나 김형준이 있는 곳을 바라보던 성가대들이 사방으로 흩어져 성가대의 대열에 녹아들었다.
'크윽.'
그 순간 김형준은 주변에서 벌어진 소란을 눈치 채기는커녕 자신의 몸을 수습하는데에 여념이 없었다.
끔찍한 통증이야 이제 많이 가라앉았다지만 온 몸에 느껴지는 이물감에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다. 혈관이 터질 듯 부풀어 오른 기묘한 느낌에 몸 안을 타고 도는 생소한 기운.
필사적으로 상황을 수습하려 해보지만, 애초에 원인도 알 수 없는 상황을 무슨 수로 수습한다는 말인가.
그저 몸 안에 넘치는 이질적인 기운을 억누르고 억누를 뿐이다. 그것만으로도 정신이 혼미해질 정도로 힘에 부치는데 다른 생각을 할 겨를이 있을 리가 없다.
그렇게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온몸에 느껴지던 이물감과 기이한 기운이 조금씩 희미해져간다. 그 대신 터질 듯이 뛰어대는 심장이 존재감을 키워간다.
두근 두근마치 천둥이라도 치듯 머리를 울리는 박동 소리에 김형준은 식은땀을 흘렸다. 불끈거리며 요동치는 관자놀이가 당장에라도 터져나갈 것 같다.
두근 두근기운을 억누르는 것과는 다르다. 그저 뛰어댈 뿐인 심장을 무슨 수로 억누른 다는 말인가. 의식적으로 심호흡을 해봐도 변하는 것은 없었다.
진땀을 흘리며 호흡을 가다듬던 김형준은 문득 기묘한 감각을 느꼈다. 머릿속이 터져라 울려대는 심장박동 소리 너머로 희미한 박동이 느껴진 탓이다.
머리를 울려대는 심장 박동 소리에 비하면 너무나 초라하지만 그래서인지 더욱 필사적이고 끈질긴 조그만 박동 소리. 마치 심장이 두 개로 나뉜 듯한 기분이 들었다.
그렇게 또다른 박동 소리에 신경을 집중하다 보니 금방이라도 터질 것 같았던 심장소리가 조금씩 잦아들기 시작했다.
온몸에 느껴지던 부유감과 기이한 감각도 사라져 간다.
"음?"
마침내 평소와 다름 없는 상태로 돌아온 그가 눈을 뜨자마자 보인 것은 온 사방에 가득한 피안개였다.
아우우우우우늑대가 울부짖는 소리가 허공을 찢어발기고 날카로운 쇳소리와 폭음이 연달아
터져 나왔다. 비명과 고함소리가 연신 교차하는 와중에 정신을 차린 김형준은 눈을 크게 떴다.
수백자루의 검이 허공을 떠다니며 자신의 주변을 맴돌고 있다. 몇 번인가 보았던 광경이라 그가 재빠르게 주변을 훑었다.
"정신이 드셨습니까."
눈가에 그렁그렁하게 눈물을 머금은 전지현이 그를 향해 다가선다.
"어떻게 된 거에요?"
사방을 에워싼 채 달려드는 뱀파이어들의 모습이야 별 다를 것 없었지만, 그녀와 자신의 주위를 맴돌며 뱀파이어들을 격퇴해나가는 수백마리의 늑대들은 무엇이란 말인가.
게다가 색은 제각각이어도 거대한 덩치만큼은 민용모가 늑대화를 이룬 것과 진배없다.
"원정대는 두시간 전에 이미 길을 떠났습니다."
자신이 몸을 수습하는데 걸린 시간이 벌써 그렇게나 된 것일까. 김형준이 마지막 상황을 떠올리며 고개를 갸웃 거리는데 익숙한 모습을 한 거대한 늑대가 그에게 다가왔다.
"성가대와 이능력자 부대는 벌써 떠났어. 우리는 네가 정신을 차릴 때까지 남아있기로 한거고."
그 우리라는 말이 묘하게 신경쓰인 김형준이 턱짓으로 주변의 늑대들을 가리키자 민용모가 눈매를 휘어 보이며 대답했다.
"우리 일족이다."
어쩐지 묘하게 민용모와 비슷한 느낌이라고 생각했던 김형준이 고개를 끄덕이는데 전지현이 그에게 다가왔다.
"어? 당신?"
다짜고짜 그의 손목을 잡아챈 그녀가 청아한 기운 한줄기를 그의 몸안으로 쏘아보냈다. 갑작스레 몸을 파고 드는 기운이었지만 그 본질이 맑고 깨끗하여 김형준은 별다른 거부감 없이 손을 맞기고 있었다.
애초에 그녀가 심어둔 선기가 김형준의 몸속에서 발아하여 지금에 이른 김형준이다. 게다가 그녀가 무엇을 하려는지 진즉부터 깨닫고 있던 그였던지라 오히려 미소를 지어 보였다.
"멀쩡하죠?"
스스로도 믿어지지 않을만큼 완벽하게 안정이 된 몸상태, 전지현이 몇 번이나 기운을 내돌리며 그의 상태를 확인하고도 못내 마음에 걸리는 표정을 지어 보였다.
"하지만..."
말 끝을 흐리는 그녀의 모습에 김형준이 그녀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저도 무슨 일이 벌어진 건지는 모르겠어요. 하지만 지금 전 이렇게 멀쩡하잖아요?"
김형준의 말에도 전지현은 여전히 무거운 표정을 짓고 있을 뿐이다.
"뭐, 제가 보기에도 아까와 같은 기운은 보이지 않으니 너무 걱정 마세요. 만약 다시 변화가 생긴다면 제가 먼저 알아챌 겁니다."
민용모가 그 거대한 주둥이로 김형준의 등을 슬쩍 밀며 끼어들었다. 그의 말대로 어둠을 근원으로 하는 늑대인간인 그라면 이후의 변화에 대해서는 기민하게 알아챌 수 있을 것이다.
"그보다 이게 대체 몇 명이야. 아니 몇 마리냐고 해야 하나?"
대화를 나누는 와중에도 주변에 차곡 차곡 쌓이는 뱀파이어들의 잔해를 바라보던 김형준이 그렇게 말하자 민용모가 콧가를 찡그렸다.
"실례라고. 이중에 원로들도 꽤 많이 와 있어. 앞에서는 절대 그런 농담 하지 말아라."
하얀 갈기 일족이라는 소리만 들었지 그의 일족에 대해 아는바가 하나도 없던 김형준은 그제야 주변에 가득한 늑대들 중 태반이 하얗거나 은빛이거나 하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잘도 싸우는구만.
안개로 변하면 변한대로, 박쥐로 변하면 변한대로. 그대로 찢어발기고 삼켜버린다. 집채만한 늑대 수백마리가 온 천지를 날뛰며 뱀파이어들을 쓸어버리니
보는 사람도 정신이 없을 지경이다.
그 안에 휩쓸려 이리 치이고 저리 치이는 뱀파이어들이 차라리 불쌍해 보일 지경이었는데 그런 뱀파이어들조차 수가 줄어들더니 전투가 조금씩 마무리 되어 간다.
온 사방을 뛰어다니던 늑대인간들이 하나 둘 자리에 멈춰서더니 이내 인간으로 변한다.
더 이상 상대를 찾을 수 없으니 늑대화를 푼 모양이다. 그렇게 하나 둘씩 변하기 시작한 민용모의 일족들중 결국 한명도 늑대화 상태를 유지하는 이들이 남아있지 않았을 때, 김형준은 무심코 한마디를 내뱉고야 말았다.
"가서 입이라도 닦아드려라."
늑대 인간들의 주된 무기가 송곳니와 발톱이다 보니 인간으로 변한 그들 중 태반이 입가에 피칠갑을 하고 양손에 살점이 잔뜩 끼어 있었다.
마치 공포 영화에서 튀어나온 식인귀와도 같은 모습을 한 이들이 수백이니 김형준이 황당하여 한마디를 내뱉은 것이다.
민용모가 민망한 표정으로 헛기침을 하는데, 개 중에서도 가장 피칠갑을 심하게 한 여인 한명이 그들에게 다가오기 시작했다.
============================ 작품 후기 잦은 휴재에도 불구하고 계속 기다려주신 독자님들께 감사와 사죄의 말씀을 함께 드립니다. ㅠㅠ오늘도 한편 더 올리겠습니다!
*조아라에 엄청난 사건이 벌어졌습니다. 고자계의 원탑이었던 민영모 작가님이 드디어 탈고자를 하셨더군요. 레이븐이라는 신작으로 자신이 고자가 아님을 증명했습니다. 껄껄 노블레스란의 희소식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