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피바라기-185화 (185/223)

< --  2-6. 망자의 도시  -- >

그 모습이 워낙에 자연스러워 김형준을 바라보고 있던 수많은 이능력자들 중 이변을 눈치 챈이는 아무도 없었다. 그저 편안한 자세로 수천의 뱀파이어들을 격살하고 있는 경이로운 존재, 그것이 이능력자들의 눈에 비친 김형준이었다.

하지만 정작 김형준은 죽을 맛이었다.

가슴을 조여오는 통증도 어마어마했지만, 온몸의 혈관이 터져나갈 듯 불끈거리고 사지가 부들부들 떨린다. 이제는 그의 상징처럼 되어버린 피의 갑주, 피바라기가 팽창과 수축을 반복하며 변형된다.

잔뜩 부풀어 오른 붉은 갑주에 기괴한 돌기가 솟아올랐다가 사라지기를 수차례, 등가가 불로 지져진 것 같은 통증이 지속되다가 무언가 터져나간다.

붉은 투구 아래 가려진 그의 이가 쉴새없이 부딪치며 딱딱거리는 소리를 낸다. 식은땀에 흥건하게 젖은 몸이 덜컥거리며 멋대로 뒤틀렸다.

어느세 사지가 뻗뻗하게 굳어 펴지고, 몸이 조금씩 떠올랐다. 김형준은 그 격렬한 통증을 느끼면서도 필사적으로 정신을 유지하려고 노력했다.

"어? 어?"

바로 근방에 있던 이능력자 한명이 입을 쩍 벌렸다.

지척에 있었던지라 김형준이 신음을 내뱉을 때부터 지켜봐온 그는 뭔가 상황이 잘못되어 가나 싶어 발을 동동 구르다가, 갑작스레 붉은 갑주가 변형되자 연신 뒷걸음질을 쳤다.

날카로운 가시가 잔뜩 돋아나 흡사 고슴도치처럼 변해버린 김형준의 모습탓에 혹시 휘말릴까 겁을 집어먹은 탓이다.

침착함을 유지하려 애쓰던 그였지만 김형준의 등가에서 검붉은 날개가 돋아나왔을 때는 도저히 참지 못하고 기함을 내지를 수밖에 없었다.

마취 박쥐의 그것처럼 검붉은 피막에 둘러싸인 날개가 점점 거대해져가다 김형준의 몸을 허공으로 띄어올린다.

붉은 날개를 펼치고 전투를 하던 모습이야 세간에 공개된 영상으로 익히 보아왔던 그였지만, 지금 김형준의 등에 돋아난 날개는 그때의 영상과는 또 달랐다.

새의 그것처럼 굳세보였던 이전의 날개와는 다르게 마치 박쥐의 그것처럼 얇고 앙상한 날개,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압도적인 크기로 인해 약해 보인다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엄청나군."

이름 모를 이능력자가 전투중이라는 것도 잊고 품안의 휴대폰을 꺼내들어 영상을 찍기 시작했다. 그렇게 다른 이들이 속도 모르고 감탄하고 있을 때, 김형준은 온몸으로 진땀을 흘리고 있었다.

무언가가 변하고 있다.

그 시작도 그 끝도 알 수 없었지만, 자신의 몸 안에서 무언가가 변화하고 있다는 것은 깨달은 김형준이다. 그것이 생명력과는 다른 뱀파이어의 기운을 흡수한 탓인지, 또는 원래부터 예정되어진 변화였었는지 도저히 판단이 들지 않았다.

혹시 잠식되는 것인가 하는 생각까지 들었지만, 1등급 이능력자가 되며 잠식의

공포에서 해방된 스스로를 떠올리고는 고개를 저었다.

여전히 온몸을 짓누른 고통 탓에 제대로 생각이 돌아가지를 않는다. 그는 이를 악물었다. 이대로 지켜볼 것인가. 아니면 수를 내어 이 변화를 멈춰야 하는 것일까. 또 멈추려고 한다면 멈출 방법은 있는 것인가.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어지는 생각에 김형준은 머릿속이 뒤죽박죽이 되어 버렸다.

그가 필사적으로 머리를 굴리고 있을 때에도 변화는 계속되고 있었다. 붉기만 하던 피의 갑주가 조금씩 색이 탁해진다 싶더니, 어느 틈에 새까맣게 물들어 있었다.

평소 김형준의 이런모습을 보지 못했던 민용모나 전지현은 그제야 사태가 심각함을 깨닫고는 김형준의 주변으로 다가섰다.

"사기에 먹혀버렸어..."

좀처럼 평정심을 잃지 않던 전지현마저 눈을 크게 뜰 수밖에 없었다. 성가대

탓인지 기감이 무뎌진 상황이다. 지척까지 다가간 김형준의 온 몸에서는 평소의 생명력이 아닌 음습하고 기괴한 기운이 뿜어져 나오고 있었다.

그 기운이 얼마나 압도적이고 불길했는지, 주변에 있던 이능력자들이 저도 모르게 뒷걸음 질 칠 정도였는데, 그걸 지척에서 느끼고 있던 전지현의 표정이 어두워졌다.

"형준이는 어떻게 되는 겁니까?"

민용모 역시 느껴지는 음습한 기운에 걱정스러운 기색이 역력해졌다. 어떻게 보면 이런 어두운 기운은 그에게 더욱 익숙한 것, 어둠의 이종들이 원천으로 삼는 기운이다.

이능과는 다른 음습하고 어두운 것, 생명력과는 다르게 불길하고 차가운 것.

자신의 몸 안에서 흐르고 있는 근원 역시 저와 다르지 않을진데 그가 어찌 어둠을 몰라보겠는가.

"흡혈의 부작용이다. 전부터 우려하던 상황이었거늘."

전지현이 침중하게 대답했다. 흡혈을 이능으로 삼는 김형준의 본신능력에 대한

우려가 얼마나 컸던가. 그 탓에 소질도 보이지 않는 검술과 술법까지 전수하고 전투방식을 바꿔보려 했지만, 그 뒤로 만나온 상대가 워낙에 강대했던지라 본신능력을 버리지 못한 그다.

결국은 그 부작용이 하필이면 오늘 나타난 것이다.

그것이 어둠을 근원으로 하는 뱀파이어의 피를 흡혈한 탓인지, 아니면 때가 이르렀던 탓인지는 모르겠으나 그녀는 자신이 할 수 있는 것이 아무것도 없음을 깨닫고 입술을 깨물었다.

"호법을 서야겠다. 어떤 식으로든 결과가 나올 때까지 그 누구의 접근도 허용치 말라."

하지만 전지현은 그저 걱정에 발만 동동 구르는 여인이 아니다. 수백년 수련 끝에 자력으로 1등급 이능력자의 반열에 오른 그녀는 철의 여인이자 검후라 불리는 여인.

날카로운 눈으로 사방을 쏘아보며 기세를 해방시켜 사방을 압도하기 시작했다. 그 압도적인 기세에 온 천지가 몸을 떨며 숨을 죽인다.

민용모 역시 본신의 모습을 해방시켜 거대한 늑대의 모습으로 김형준의 주변을

서서히 돌았다.

"무언가 이변이 생긴 것 같습니다."

한국어와 영어에 능통한 일본의 이능력자 아야나미 로유미가 김형준이 있는 곳을 바라보다가 한마디 했다. 쟈베트를 비롯한 다른 이능력자들이 어느 사이엔가 그녀의 주변에 몰려들어 있었는데 저마다 한마디씩 내뱉었다.

"아무거나 주워 먹으니 체하지."

카탈리나 에란쵸가 이죽이자 자베트 샹피뉴가 눈을 치켜뜨며 면박한다.

"지금 상황이 농담 할 때입니까? 비록 며칠이지만 전장을 함께 한 전우입니다."

그 칼 같은 기세에 어지간한 카탈리나 에란쵸도 어깨를 으쓱이며 무안한 표정을 지어보였다.

"뭔가 잘못된 것 같기는 한데... 지금은 마스터 킴보다 저쪽이 문제군요."

아야나미 로유미의 말에 다른 이들이 표정을 바로 한다.

트루 블러드. 성가대의 주변을 맴돌던 트루 블러드들이 어쩐 일인지 김형준이 있는 쪽으로 접근하고 있었다.

"저쪽은 딱히 도와줄 생각도 없어보이고."

이미 전장이 정리되어가는 와중인지라 성가대는 여력이 있는 듯 했지만 트루 블러드를 저지하거나 하진 않을 기색이다.

"애초부터 속을 알 수 없는 인간들이었어. 그냥 우리 힘으로 해결해야 하겠지."

잠시 김형준에 대해 이죽거렸던 카탈리나 에란쵸였지만 그녀라고 김형준의 상태가 신경쓰이지 않는 것은 아니었나 보다. 허리에 차인 곡도를 뽑아든 그녀가 트루 블러드와 김형준의 사이를 가로 막았다.

"저쪽은 다섯이고, 이쪽은 어디 보자. 숫자는 얼추 맞을 것 같은데."

압도적인 불길함을 내뿜으며 다가오는 트루블러드들을 일별한 카탈리나 에란쵸가 장난스럽게 말하자 어느새 다가왔는지 아야나미 로유미가 고개를 끄덕였다.

"기세를 보니 뒤에 있는 검후 혼자서도 상대는 가능할 것 같은데... 그래도 전우로써 돕긴 해야겠지요?"

여성스러운 선을 지닌 얼굴에 위험스러운 미소가 떠오른다. 그녀의 말에 쟈베트 샹피뉴 역시 무기를 곧추세웠다.

"결계 탓에 애도 한번 먹었겠다. 이번에는 복수전인가요?"

루마니아 중심에서 결계로 인해 본신의 힘이 제한되었을 무렵, 트루 블러드를 상대로 고전했던 기억이 떠오른 모양이다.

그녀의 말에 모두가 하나 같이 날카로운 미소를 지어 보였다.

"이런 이런. 적대 행위를 하러 온 것이 아닙니다."

대열의 선두에 서 있던 귀족스러운 외모의 트루 블러드가 양손을 휘저으며 말했다.

"너희 놈들은 수백 수천이 죽어 나자빠진 다음에 그런 소리를 하나 보지?"

카탈리나 에란쵸가 날카롭게 대꾸했다. 주변에 널린 이능력자들의 시체와 뱀파이어들의 잔해들이 아직도 짙은 혈향을 게워내고 있는 마당에 트루 블러드란 존재가 던진 한마디가 심사를 뒤튼 듯 하다.

"그저 간단한 인사치례였는데, 바티칸의 개들이 하도 역겨운 냄새를 피워내는 통에 좀 인사가 과해진 건 인정 합니다."

부드러운 미소 뒤에 숨겨진 날카로운 살의를 숨기지도 않은 트루 블러드가 고개를 잠시 성가대 쪽을 노려보았다.

셀 수 없이 긴 세월을 대립해왔다니 그 적대감이 뼛속까지 사무친 모양이다.

"그럼 저쪽에서 볼일이나 마저 보시지 이쪽은 뭐 주워 먹을 게 있다고 기어오셨나?"

계속되는 이죽거림에 기분이 상할 만도 하지만 트루 블러드는 여전히 화사한 미소를 지우지 않았다.

"저쪽의 일이야 언제든 해결 할 수 있지만, 이쪽은 좀처럼 보기 힘든 광경이라서요."

그가 김형준이 있는 곳을 잠시 바라보다가 다시 고개를 돌렸다.

"저 사람이 피바라기라는 이름으로 불리는 이능력자?"

뱀파이어들 사이에서도 김형준의 유명세는 마찬가지였나보다. 휘파람을 불며 감탄하는 모양새가 그 매끈한 얼굴과 제법 어울리는 트루 블러드다.

"관심 끄시지. 저쪽은 무서운 언니가 있어서 가까이 가면 꼬집힌다고."

카탈리나 에란쵸가 어깨를 으쓱이며 말했다.

그녀의 말마따나 전지현이 삼엄한 기세를 내뿜으며 이쪽을 노려보고 있었다. 그 밀도 높은 기세에 어지간한 트루 블러드도 질렸다는 듯이 고개를 저었다.

"뭐, 가까이 가는 건 무리겠지만. 저 친구 우리들 사이에서도 제법 유명한 친구라."

트루 블러드의 말에 카탈리나 에란쵸를 비롯한 이능력자들이 귀를 쫑긋 세웠다.

"우리 일족도 아니면서 흡혈은 한다지요? 게다가 배포도 크게 그렌델과 미노타

우르스도 흡수했다지요?"

김형준이 그렌델에게서 갈취한 생명력은 아서 팬드래건의 치료에 사용했고, 미노타우르스는 흡수하지도 못했다. 하지만 그런 자세한 내막까지 알 리 없는 트루 블러드가 감탄했다는 표정을 과장되게 지어보였다.

"그런데 아무도 이야기 해주지 않았나 봅니다?"

트루 블러드의 새빨간 입술이 잔뜩 치켜 올라갔다.

"우리 일족의 피는 함부로 흡수해서는 안 된다고 말입니다."

의도적으로 크게 내뱉은 한마디에 멀리 있던 전지현이 눈을 크게 떴다.

"자세히 말해보아라."

언제 다가섰을까. 김형준의 지척에 있던 전지현이 순식간에 카탈리나 에란쵸의 곁에서 나타나 트루 블러드에게 물었다.1등급 이능력자들 중 어느 누구도 그녀의 접근을 깨닫지 못했던 터라, 다들 대경한 표정이다. 내심 이름값을 제외하면 자신들중 어느 누구도 김형준 내외에

못지 않다고 생각하던 차였는데 그 생각이 깨어진 것이다.

전지현은 그들이 무슨 생각을 하거나 말거나 트루 블러드의 대답을 기다릴 뿐이다.

"휴우. 먼저 소드엠프레스를 만나뵙게 되어 영광이라고 해야 할까요?"

트루 블러드 역시 전지현의 접근에 꽤나 놀란 기색이었지만 금방 표정을 수습하고는 처음의 느긋한 태도로 돌아갔다.

"쓸데없는 소리 말고. 하던 말이나 계속 하거라."

전지현의 말에 트루 블러드가 잠시 김형준을 바라본다. 모두의 시선이 그의 입가에 집중하고 있다.

"저희가 왜 왔는지 물어봤던가요?"

의도적인지 느릿느릿하게 말을 이어가는 그의 말에 모두가 숨을 죽였다.

"저희는 새로운 일족의 탄생에 축하를 해주러 온 것이랍니다. 킥."

============================ 작품 후기 한편 더 올렸습니다. 이따가 또 올리도록 하겠습니다!

사죄의 뜻으로 조절 없이 비축분 시간 나는대로 풀겠습니다!

한편 더 올렸습니다. 이따가 또 올리도록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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