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피바라기-183화 (183/223)

< --  2-6. 망자의 도시  -- >

"여보!"

김형준이 여인을 보고 반색을 하자 이능력자들 틈에서 모습을 드러낸 그녀, 전지현이 환한 미소로 그를 반겼다.

"너무 늦게 온 게 아닌지요."

그녀가 풍기는 차분한 분위기가 너무나도 편안했던 탓에 이제껏 내내 긴장하고 있던 김형준의 피로가 단번에 사라진다.

"그럼 저희는 잠시 쉴 곳을 마련해 전력을 재정비하도록 하겠습니다."

호나우도가 김형준과 전지현을 번갈아 바라보다가 사람좋은 미소를 지으며 물러났다. 알았노라 하고 고개를 끄덕여준 김형준이 전지현의 손을 잡아 이끌었다.

"이쪽은 일본에서 온 아야나미 로유미씨고, 저쪽은 프랑스에서 온 쟈베트 샹피뉴씨에요. 그리고 여기 계신 분은 스페인의 카탈리나 에란쵸씨."

그래도 루마니아에서 생사를 함께 한 전우라고, 김형준이 1등급 이능력자들을 소개해준다.

"반갑습니다. 이분의 내자 되는 전지현입니다."

한국말로 한 인사였던 탓에 한국어에 능숙한 아야나미 로유미를 제외한 이들은 그녀의 말을 알아들을 수가 없었다. 하지만 김형준의 말과 그녀의 태도로 미루어 보아 분위기를 파악하고는 그녀에게 마주 인사를 했다.

그런데 그녀들의 인사를 마주 받는 전지현의 표정이 묘하다.

"원래는 더 있었는데 작전 중에 낙오하는 바람에 지금은 여기 있는 인원이 전부네요."

루마니아에 남은 호라시오 베니치를 비롯한 1등급 이능력자들의 부재가 안타까웠던 김형준이 그렇게 말하다가 지현의 눈치를 본다.

"왜 그래요? 뭐 마음에 걸리는 거라도 있어요?"

김형준이 그렇게 묻자, 전지현이 여전히 알 수 없는 표정으로 고개를 저었다. 그들이 그렇게 재회의 정을 나누는 동안 아야나미 로유미와 카탈리나 에란쵸가

전지현을 주의깊게 살피고 있다.

대한민국을 대표하는 이능력자는 김형준이지만, 그에 못지 않게 유명한 것이 그의 아내 전지현이다. 검후라는 이름은 물론이거니와 일전에 영국에서 있었던 템플러와의 불화는 이미 퍼질 대로 퍼져 모르는 이들이 없을 정도였다. 단번에 고위 이능력자들의 사지를 부러트리고, 세계에서 인정받는 강자인 아서 팬드래건에게 사과를 받은 일화.

알게 모르게 그녀의 명성은 김형준만큼이나 드높아져 있는 상태였다. 그렇게 그녀들이 전지현에 대해 호기심을 갖거나 말거나 전지현은 평소와는 다르게 어물거리는 모습으로 김형준과 대화를 하고 있었을 뿐이다.

"그런데 전부 여자로군요."

한참 대화를 나누는 도중에 뜬금없이 꺼낸 그녀의 한마디에 김형준이 그제야 그녀가 보였던 태도가 이해가 가는지 헛웃음을 쳤다.

늘상 차분하고 어진 모습을 보였던 그녀에게 이런 모습이 있었던가. 왠지 이런

인간적인 모습이야말로 그녀의 진짜 매력이라고 생각한 김형준이 사람들이 보거나 말거나 그녀를 덥석 끌어안았다.

"뭐... 뭐하시는 겝니까! 사... 사람들이 봅니다!"

덕분에 부끄러워 하는 기색이 역력한 전지현이 발을 동동 구르는 해프닝이 있었지만, 루마니아로 들어섰던 선발대와 후발대, 그리고 지원병력 일체가 모인 날은 평화롭게 지나갔다.

약 세시간에 가까운 재정비 시간을 가진 이능력자 원정대는 다시 루마니아를 향해 출발했다. 백 오십에 이르는 이능력자들과 삼백여명에 달하는 바티칸의 성가대가 포함된 대행렬이었는데 그 위용이 남달랐다.

덕분에 루마니아 전역에 바글바글하게 몰려들었던 뱀파이어들도 섣부르게 달려들지 못하고, 눈에 보이지도 않을 정도로 먼 발치에서 그들을 지켜볼 뿐이었다.

성가대 덕분에 결계가 중화된 탓인지, 원래의 범위를 회복한 기감에 걸려드는 수많은 뱀파이어들의 기척에 김형준의 얼굴이 조금이지만 밝아졌다.

사방을 둘러보니 2등급 이능력자들 위주로 만들어진 150명의 이능력자들 중 어느 누구도 압박감을 호소하지 않는다.

자연 김형준의 시선이 성가대를 쫓게 된다. 간신히 턱 아래만 드러날 정도로 온몸을 망토로 감은 수백의 성가대원들은 기이할 정도로 조용하게 걸음을 옮겼다. 이능력자들의 빠른 이동속도에도 뒤처지지 않게 따라오는 그들의 모습이 범상치 않았는데, 망토 역시 평범한 재질은 아닌 듯 바람에 펄럭이는 소리 하나 나지 않았다.

마치 유령처럼 스산한 그들의 행렬에 김형준은 가슴이 갑갑할 지경이었다.

한참 성가대를 살펴보던 김형준은 바오로와 눈이 마주쳤다. 바오로가 그를 보고 환한 미소를 지으며 아는 척을 하자 김형준 역시 어색한 표정으로나마 웃는 낯을 해보였다.

오십대에 가까운 얼굴을 한 바오로 단장은 여느 곳에서나 볼 수 있는 평범한 인상의 노인이었는데 민용모에게 이야기를 들은 탓인지, 자꾸만 그 얼굴이 가면처럼 느껴져 불편한 김형준이다.

최대한 내색치 않으려고 하지만 표정이 어색한 것까지는 어쩔 수가 없었다. 바오로는 그런 그의 태도에도 불구하고 한결 같이 사람 좋은 미소를 보이는데 그게 오히려 불편해진 김형준은 차라리 고개를 돌려버렸다.

경계선을 한참 지난 탓인지, 이제는 붉게 변한 밤하늘이 조금씩 모습을 드러낸다. 성가대가 결계를 중화시킨 영역이 슬슬 끝나가는 모양이다.

다. 성가대가 결계를 중화시킨 영역이 슬슬 끝나가는 모양이다.

이제 다시 시작인가.

김형준이 표정을 바로 하고 사방을 살펴보았다. 루마니아의 외곽에서 느껴지던 기척과는 비교 할수도 없을 정도로 많은 기척들이 사방에 느껴진다. 이제는 수십 수백이 아닌 수천이 넘는 기척들 탓에 정신이 어지러울 정도다.

모습이 보이지 않는 곳에서 이쪽을 살펴봤던 아까와는 다르게, 지금은 몇몇 뱀파이어들이 멀지 않은 곳에서 일행을 따르는 것이 보일 정도다.

결계의 영향 탓일까. 조금씩 대범해지는 뱀파이어들의 모습에 김형준이 바짝 긴장했다. 비록 온전치 않았다고 하나 1등급 이능력자들의 이목을 속이고 접근할 정도로 은밀했던 뱀파이어들의 습격이었다.

인원이 많다고 해도 안심할 수 없었다.

"지현. 이제부터는 조심하도록 해요."

김형준은 스스로도 쓸데없는 말이라는 것은 알지만, 전지현에게 한마디 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전지현이 그런 그의 심정을 짐작한다는 듯이 차분한 미소로 대답을 대신 했다.

그녀의 입장에서는 루마니아로 늦게 온 것이 얼마나 후회됐는지 몰랐다.

김형준이 지원병력을 요청했다는 사실을 전해 듣고, 또 그들이 하룻밤 사이에 얼마나 험한 일들을 겪었는지 들었을 때는 차라리 울고 싶은 심정이었다. 그 마음 여린 남편이 수만의 생목숨을 짓밟아가며 걸어간 길이라니.

전지현이 김형준의 손을 슬며시 잡고는 슬며시 힘을 주었다. 그 손짓에 담긴 의지가 그녀의 가슴을 가득 채웠다.

김형준은 굳은 얼굴로 전방을 주시하고 있다가 갑작스러운 감촉에 그녀를 바라보고는 바보 같을 정도로 천진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그래. 아무리 힘든 일을 겪으셨어도 이렇게 미소를 지을 수 있다면 된 것이다.

전지현의 얼굴에 다부진 각오가 서렸다.

원정대가 루마니아에 들어선지 어느새 세시간이란 시간이 흘렀다. 이제는 성가대가 중화시킨 결계의 영역을 넘어서 붉은 밤하늘 아래로 들어섰는데, 보보마다 채이는 것이 감염자들의 시체요, 피웅덩이라 마치 지옥이라도 펼쳐진 듯한 모습이다.

그 끔찍한 모습에 간혹가다 들려왔던 원정대의 대화소리도 완전히 사라져버리고, 무거운 침묵 속에서 발걸음 소리만이 가득하다.

김형준 역시 자신이 벌인 참사에 눈을 질끈 감고 싶은 심정이 되었지만, 오히려 눈을 부릅뜨고 어깨를 폈다. 죄책감과 후회 대신에 블라가에 대한 적의를 키워 가슴 속에 깊이 간직했다. 멀지 않을 시간에 만날 악마와의 대면을 기다리며 김형준은 이를 악물었다.

아아아아아아침묵 속에서 갑작스레 피어난 한줄기 청아한 음성. 이능력자들이 무심코 고개를 돌리니 성가대의 몇몇 인물들이 노래를 하고 있었다.

경계선에서 들을 수 있었던 지독스러운 불협화음이 아닌 아름다운 그들의 하모니에 불안감에 가득찼던 가슴이 다시 후련해진다.

"결계의 영향력이 강해지고 있습니다. 이미 중화시킨 지역을 넘어섰으니 임시방편으로나마 결계를 흩트리며 가도록 하겠습니다."

바오로의 설명에 이능력자들이 고개를 끄덕였다.

가뜩이나 지옥 같은 풍경이 펼쳐진 탓에 마음이 무거웠는데, 결계의 압박감까지 슬슬 그들을 성가시게 하고 있었다.

다른 누구들보다 결계의 폐해를 잘 알고 있던 김형준을 비롯한 1등급 이능력자들이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지금은 그저 불편할 정도지만 시간이 지나면 마치 늪에 빠진 듯 암담한 기분을 느끼게 되리라. 그나마 성가대가 제몫을 해주고 있어서 다행이라고 생각한 김형준이 사방을 살피며 기척을 감지한다.

성가대원들은 누가 정해준 것도 아닌데 돌아가며 허밍을 한다. 전체가 내질렀을 때는 불협화음이었던 것이 열명정도씩 짝을 지어 노래하니 그렇게 듣기 좋

을 수가 없다. 게다가 노래소리를 듣고 있노라면 마음이 편안해지는 것이 결계의 중화 말고도 여러 가지 작용을 하는 듯하다.

그런 기분을 느끼는 것은 김형준뿐만이 아닌 듯 원정대의 이능력자들이 적지에 있는 것이라고는 생각할 수 없을 정도로 편안한 표정이다.

다만 그 중에서도 민용모의 경우는 달랐다. 어느사이엔가 김형준의 곁에 다가선 그가 인상을 찡그리며 말을 건넸다.

"내 입장에서는 차라리 결계의 압박이 편할 지경이야."

그 투덜거림에 김형준은 다시 한번 친우의 정체를 떠올렸다. 라이칸슬로프, 하얀갈기족의 전사. 비록 지금은 인간과 함께지만 인간이 아닌 존재다. 이면의 주민이라고 할 수 있는 그에게는 성가대의 노래가 영 거슬리는 모양이다.

"그래도 저게 없으면 당장에 원정대 전체가 쓰러질 거라고."

김형준이 나름 다독여준다고 다독여주지만 민용모의 얼굴은 펴질 줄 몰랐다.

"중심부에 도착하기도 전에 이런데 나중에 어떨지 끔찍하군."

처음엔 둘, 셋으로 시작했던 성가대의 노래가 어느새 열명이 부르는 노래가 되었다. 그리고 그 수는 결계의 중심에 다가설수록 많아질 것이다.

그럴수록 민용모가 느끼는 압박감이 더욱 커질 것은 자명한 사실. 김형준의 얼굴에 안쓰러운 기색이 떠올랐다.

바티칸의 인원들을 불편해 하는 민용모의 모습에 작전에서 빠질 것을 권유했던 김형준이었다. 그런데 민용모는 무슨 이유에선지 부득불 함께하겠다고 용을 썼는데, 지금 와서 보니 차라리 돌아가는 것이 나을 판이다.

"마음에 걸리는 것이 있어서 그래."

김형준이 굳이 무리해서까지 원정대에 참가하는 이유를 묻자 민용모가 슬쩍 바티칸을 바라보며 대꾸했다.

그 대답에 고개를 절레절레 저은 김형준이 다시 전방으로 시선을 바로 했을 때, 상황이 급변하기 시작했다.

수천이 넘는 뱀파이어의 기척들, 단지 원정대의 좌우로 갈라져 그들을 따르던

뱀파이어들의 기척이 별안간 소란스러워지다가 일행들의 사방을 포위하기 시작한 것이다.

게다가 무리의 중간 중간에 느껴지는 음습하고 불길한 기운이 벌써 다섯.

"제길! 트루 블러드다!"

김형준이 소리 높여 고함을 치며 일행들에게 경고했다. 그리고 그 순간 온 사방에서 뱀이 쉭쉭거리는 것 같은 소리가 터져 나왔다.

왜 이제껏 느끼지 못했던 거지?

트루 블러드의 불길한 기척을 뒤늦게 느낀 자신을 자책하던 김형준은 문득 머리를 스쳐가는 생각에 고개를 들었다.

설마?

그의 시선 끝에 걸려 있는 성가대원들이 원진을 만들고 있다. 갑작스러운 뱀파이어의 공격에도 소름끼치도록 침착한 모습으로 대열을 정리하는 그들의 모습을 바라보던 김형준이 이를 악물었다.

성가대의 노래는 양날의 검이다!

적지라고는 생각할 수 없는 마음의 평정을 주고, 결계를 중화시키는 중요한 역할을 하지만 반대로 둔감하게 만들어버린다.

비록 확인되지 않은 사실이지만 김형준은 확신했다. 게다가 뱀파이어들의 갑작스러운 공격에도 침착하게 대응하는 성가대의 모습은 처음부터 그들의 습격을 예상했다는 모습이었다.

마치 알고 있었다는 듯한 그 태도에 김형준이 이를 갈았다.

저치들 분명 알고도 말해주지 않은 거야.

그들을 너무 신뢰하지 말라는 민용모의 말이 떠오른 김형준은 성가대를 한번 노려보고는 고개를 돌려 뱀파이어와의 충돌을 대비했다.

김형준이 막 양손에 생명력을 그러모으는 그 순간 대열의 외곽에 붉은 안개가 피어올랐다.

============================ 작품 후기 과연 김형준이 이번에도 뱀파이어떼에 빨대를 꽃고 쪽 빨 수 있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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