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피바라기-182화 (182/223)

< --  2-6. 망자의 도시  -- >

바티칸의 성가대가 움직였다는 말에 김형준이 의문을 표했다. 바티칸이 뱀파이어를 비롯한 이면의 세계를 조율하는 이들이라는 것은 알았지만, 뜬금없이 성가대라니.

통신기 너머의 상대가 그런 김형준의 의문을 친절하게 풀어준다.

양지라고 하기엔 뭐하지만 왜곡된 지역을 관장하고 세계의 이면에서 암약해온 이능력자들의 세계가 있다면, 인류의 그림자에 숨어 사는 이종의 활동을 억제해온 바티칸의 세계 또한 엄밀하게 관리되고 있었다.

뱀파이어, 늑대인간을 비롯한 수많은 이종들을 억제하며 인류를 수호해온 이면의 존재들, 어떻게 보면 이능력자들보다 더욱 신비로운 단체가 바로 바티칸이었다.

최소한 이능력자들이 사회의 이런저런 곳에서 네트워크를 유지하며 살아왔다면, 바티칸의 이들은 외따로 떨어진 곳에서 은밀함을 유지해왔으니까.

상대의 설명에 김형준이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괴수에 이어 베일에 가려진 1등급 이능력자들이 전면에 나선다 했더니 이번엔 또 엉뚱한 존재들이 튀어나왔다. 나름 세계의 이면에 대해 잘 알고 있다고 생각해왔던 김형준 입장에서는 허탈해질 지경이었다.

'어쨌건 바티칸의 성가대가 결계를 알아서 해체할 테니, 때가 되면 지원병력을 이끌고 다시 돌입해주시기를 요청드립니다. 추가 정보에 관해서는 민용모님에게 물으면 대답해줄 겁니다.'

민용모라면 늑대인간이니 자신이 모르는 정보에 대해 조금 더 알고 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한 김형준이 납득하고 통신을 종료하려는데, 상대가 다시 한마디를 덧붙였다.

'보안코드 BX-071124가 오늘부로 해제되었다는 사실을 먼저 알리도록 하세요. 그러기 전에는 두분이 아무리 가까운 사이라도 함부로 언급할 사안이 아니니.'

상황이 닥칠때마다 찔끔 찔끔 정보를 흘리는 민용모의 태도가 조금은 의아했던 김형준이 고개를 끄덕였다. 보안사항이라면 아무리 그와 자신의 사이라도 함부로 입밖에 낼 사안이 아니었을 것이다.

통신을 종료한 김형준이 막사를 나서자 2등급 이능력자들을 어딘가에 두고 온

민용모가 마침 그에게 다가서고 있다.

상황을 설명하니 민용모가 무거운 표정을 지은채 고개를 가로 젓는다.

"일이 점점 커지는군. 저쪽과 이쪽이 이렇게 겹쳐진 경우는 이제껏 없었는데 말이지."

말이 나온 김에 김형준이 보안이 해제되었음을 알리고 설명을 요하자 민용모가 정색을 했다. 좀처럼 보이지 않던 진지한 모습이라 김형준도 덩달아 정색을 하고 그의 이야기를 경청했다.

"바티칸이 전면에 나서기로 했다면 어쩌면 괴수의 등장보다 더욱 시끄러운 일이 생길 거야."

괴수의 등장과 함께 수십개의 도시가 초토화됐고 복구불능의 피해를 입었다. 루마니아만 하더라도 인근 국가가 기능을 상실하고 전에 없던 초유의 작전이 벌어질 판이다. 그런데 그것보다 더욱 큰 일이 벌어질 것이라는 말에 김형준의 표정이 딱딱하게 굳었다.

"한마디로 이야기 하자면 인간을 제외한 이종들은 인정하지 않는다는 정신 나간 집단이지. 너도 이번에 마주치면 알게 될 테지만 절대 말이 통하지 않는 이

들이니 주의하도록 해."

민용모의 잇새로 빠드득 거리는 소리가 새어나왔다.

"너희 인간 입장에서야 인류의 수호자니 뭐니 그럴싸하게 포장할 수 있겠지만, 바티칸은 절대 수호자라는 말이 어울리지 않는 단체야."

인간에게 우호적이고 아니고를 떠나서 그들은 단지 존재자체로 모든 이종들을 악으로 규정해온 것이다. 그리고 그들에게 천적이라고 할 수 있는 힘을 내세워 핍박하고 박해해온 바티칸 탓에 수천년간 인류와 공존해온 셀 수도 없는 이종족들이 멸족되었다. 인간이 아닌 라이칸슬로프의 혈통인 민용모 입장에서는 좋은 소리가 나올래야 나올 수가 없는게 당연했다.

"그들이 한번 움직이면 그 주변은 초토화돼지. 그들은 효율과 실리를 지독스러울 정도로 따지는 놈들이거든. 애매한 구별과 갈등보다는 가장 손쉬운 소거를 선호해. 그게 무슨 말인지 알아?"

민용모가 날카로운 송곳니를 드러내며 웃어보였다.

"뱀파이어가 나타난 지역에 그들이 나타나면 그 인근지역이 쑥대밭이 된다는 소리야. 그들이 휩쓸고 간 자리에 생존자는 남지 않아. 감염되었는지 어땠는지 모를 일반인들을 위험요소로 두느니 전부 제거하는 것이 그들의 방식이야."

뜻밖의 이야기에 김형준이 저도 모르게 인상을 찡그렸다. 이번 작전의 중요변수인 결계를 해체할 존재들이라 해서 우군인가 했는데, 민용모의 말을 들으니 그게 또 애매해져버렸다.

"하여튼 보안코드가 아무리 해제됐다고 해도 너무 많은 사실을 말할 수는 없으니까. 너도 직접 겪어보도록 해."

그의 말에 고개를 끄덕인 김형준이 다른 일행들을 살펴보려 걸음을 옮기는데 민용모가 한마디 덧붙였다.

"이건 극비지만, 그들은 이능력자들도 인간으로 규정하지 않아."

난데없는 말에 김형준이 걸음을 멈추고 고개를 돌리는데 민용모는 지나가듯 한마디를 던지고는 자리를 떴을 뿐이다.

"너도 같은 인간이라고 너무 신뢰하지 않는 것이 좋아."

"반갑습니다. 성가대의 단장을 맞고 있는 바오로입니다."

민용모에게 들었던 이야기 탓일까. 인상 좋게 미소를 지은채 손을 내미는 바티칸 성가대 단장 바오로의 인사가 꺼림칙했던 것은.

김형준은 애써 표정을 태연하게 하며 손을 마주 내밀었지만, 눈가가 미세하게 떨리는 것까지는 막을 수가 없었다. 그런 김형준의 심정을 아는지 모르는지 바오로가 과장된 손짓으로 일행들에게 하나 하나 인사를 한다.

아야나미 로유미, 카탈리나 에란쵸, 쟈베트 샹피뉴. 각국을 대표하는 이능력자들이 그의 인사에 조금은 당혹스러운 표정을 지어 보였다.

그들 역시 바로 전에 들은 바티칸이라는 존재가 마냥 편한 것은 아닌 모양이다. 아니, 어쩌면 예상 도착시간보다 훌쩍 먼저 도착한 그들의 등장이 너무 갑작스러웠던 탓일 수도 있고.

이능력자 지원보다 두시간은 늦을 거라던 바티칸의 성가대가 오히려 두시간을

일찍 도착했다. 덕분에 휴식을 취하던 이능력자들이 이렇게 준비도 하지 못한 채 바티칸의 인물들을 맞아야 했다.

"예상보다 인원이 적군요."

일행을 둘러본 바오로의 말에 김형준이 쓴웃음을 지으며 간략한 상황을 설명했다. 사정이야 이미 다른 쪽에서 들었을텐데도 모르는 척 하는 모습이 마냥 사람 좋아보이진 않았다.

바오로는 일행들과의 인사를 간략하게 마치고 자신을 따라온 성가대의 인원들을 배치했다. 하얀 망토를 머리에서 발끝까지 두른 채 남자인지 여자인지조차 모호한 수백의 인물들이 유령처럼 이동하며 쉴 곳을 마련한다.

김형준은 그들의 음산한 분위기를 보며 다시 한번 민용모의 말을 떠올렸다.

'그들은 이능력자들도 인간으로 규정하지 않아.'

분명 성가대라는 인물들에게서도 일반인과 다른 기운이 느껴진다. 하지만 그 기운이 이능력자들의 그것과는 확연하게 달라 이질적인 느낌이 무겁게 그의 가

슴을 내리 눌렀다.

지금은 루마니아를 되돌리는 것에만 신경쓰자.

너무 많은 정보를 들은 탓인지 혼란스러워지는 머리를 부여잡고 김형준은 성가대가 움직이는 것을 가만히 지켜보았다.

"자. 그럼 형제들이여. 시간이 얼마 없으니 바로 그분의 의지를 사역하세!"

쉴곳을 마련하나 싶었던 성가대의 인원들이 바오로의 한마디에 일사분란하게 원을 그린다. 그 사이에 무언가를 준비해온 그들의 손에 하나같이 기이한 것들이 쥐어져 있었다.

어떤 이는 잔뜩 낡은 인형을 손에 쥐고 있었고, 어떤 이는 보기만 해도 감탄이 나오는 아름다운 지팡이를 쥐고 있었다. 또 어떤 이는 십자가를 손에 쥐고 있는 가 하면 반대편의 어떤 이는 섬뜩한 모양의 심볼을 손에 움켜쥐고 있었다.

바오로 역시 품에서 짧은 지팡이를 꺼내 하늘 높이 손을 치켜올렸다.

아아아아아아

그의 손짓에 맞춰 수백의 성가대가 동시에 허밍을 한다. 성가대라고 하더니 지독스러울 정도로 조화롭지 않은 화음이다. 음치라도 수백 모아두고 합창을 시키는 듯한 모습에 김형준을 비롯한 이들이 실소를 지었다.

"킥. 못 들어주겠구만."

카탈리나 에란쵸가 대담하게도 대놓고 이죽거리다가 표정을 굳혔다. 듣기 좋고 괴롭고를 떠나 온 사방을 가득채운 그들의 허밍에 생소한 기운이 담기기 시작한 탓이었다. 그리고 때를 맞춰 그들의 손에 쥐어진 자질구레한 것들이 빛을 뿜어내기 시작했다. 농담으로라도 눈이 부시다고는 말할 수 없는 잔잔한 빛이 하나 둘 덩어리를 이뤄 하늘 높이 치솟아 오른다.

누르스름한 빛이 조금씩 진해지다가 끝에 가서는 황금빛으로 작열하기 시작했다.

처음의 미약했던 섬광을 멍하니 바라보고 있던 이능력자들이 순간 터져나온 황

금빛 섬광에 눈을 질끈 감으며 고개를 돌렸다.

아아아아아아아아귀를 찢을 듯한 허밍이 온 천지를 진동시키고, 하늘 높은 줄 모르고 솟구치던 황금빛 섬광이 어느 지점에 이르러 멈춰섰다.

뭉치고 뭉치기를 반복하던 황금빛 섬광이 더 이상 팽창하지 못할 정도로 몸을 불렸을 때, 황금빛이 북쪽 하늘을 향해 달려들기 시작했다.1등급 이능력자다운 회복력으로 시력을 회복한 일행들이 그 광경을 보고 입을 쩍 벌렸다.

마치 새벽의 아스라함에 밀려나는 어둠처럼 북녘의 붉은 하늘이 주춤거리며 뒤로 물러섰다. 그 지독스럽게 비현실적인 광경에 어지간한 이능력자들도 그만 놀라버렸다.

마치 성화에나 나올법한 광경이다. 바티칸, 바티칸 그러더니 과연 사기꾼은 아닌 모양이다.

김형준이 복잡한 심사로 빛을 뿜어내며 허밍을 하는 성가대와 북녘하늘을 번갈

아 바라보았다.

하지만 뭘까. 성스럽다고 느껴져야 할 저 황금빛 섬광이 이토록 마음을 불편하게 하는 것은. 그것은 신성하다기보다는 차라리 섬뜩하고 파괴적인 기운이었다.

마치 약에 취한 듯 몸을 휘청거리며 허밍을 하는데 열중인 성가대의 모습을 바라보던 김형준의 머리가 더욱 복잡해진다.

그렇게 이능력자들이 복잡한 시선으로 성가대와 북녘하늘을 바라보는 것도 지쳐, 각자의 숙소로 돌아가고 난 뒤에도 성가대의 의식은 계속되었다. 이제는 확연하게 보일 정도로 경계가 그어진 루마니아 중심의 하늘과 이쪽의 하늘이 황금빛과 붉은빛으로 어우러져 영역다툼을 하고 있다.

이능력자들의 지원부대가 도착했을 무렵에는 더 이상 경계선에서 보이는 하늘에는 붉은 기 하나 없이 사라지고 난 뒤였다.

시끄러운 엔진음이 아니어도 막대한 기운을 가진 이들의 등장을 진즉부터 느끼고 있던 김형준 일행이 지원부대를 맞이했다.

이미 이야기를 들은 모양인지, 성가대의 기이한 의식에도 그저 눈길을 한번 주는 것으로 끝낸 지원부대의 인솔자는 김형준을 보고 정중하게 예를 취했다.

"안녕하십니까. 마스터 킴. 이번에 서유럽 방면의 이능력자들을 인솔해온 포루투갈의 호나우도입니다."

마치 운동선수처럼 잘 빠진 몸매를 한 사내가 자신을 밝히자 김형준도 마주 인사를 나눴다.

"각국의 이능력자 총원 147명에 대한 통솔권을 이 자리에서 마스터 킴에게 이양합니다."

절도 있는 동작과 함께 뒤편의 이능력자들을 손으로 가리킨 그가 진지한 표정을 지우며, 갑작스레 장난스러운 표정을 지어 보였다.

"그리고 마스터 킴이 반길만한 분도 한분 모시고 왔습니다."

그의 말과 동시에 이능력자들 틈에서 눈에 확 뜨일 만큼 아름다운 여인이 김형준을 향해 다가선다.

============================ 작품 후기

결계의 실체는 조만간 밝혀질 예정입니다.

일단 한편 더 업뎃하고, 나갔다 온 후에 한편 더 업뎃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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