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2-6. 망자의 도시 -- >
호라시오 베니치가 뱀파이어들에게 둘러 싸여 곤욕을 치루고 있을 무렵 김형준 일행은 빠르게 루마니아를 이탈하고 있었다.
처음 일행들과 합류했던 오두막에 도착했을 무렵에는 하늘이 온통 핏빛으로 변해있었다. 당장이라도 핏물이 뚝뚝 떨어질 것 같은 붉은 하늘을 잠시 올려다보던 쟈베트 샹피뉴가 말했다.
"기운이 점점 강해지고 있어..."
그녀의 말에 김형준을 비롯한 이들이 이를 악물었다. 호라시오 베니치, 러셀 피터, 얀크스 뷔텐펠츠등이 이탈한 덕에 남은 이들의 어깨에 짊어진 2등급 이능력자들의 수가 늘어버렸다.
이제는 의식을 잃은 정도가 아니라 기식이 엄엄한 정도가 되어 이동이 조심스러울 수밖에 없었는데, 그 속도가 빠를 턱이 없었다.
"그래도 중심부를 벗어날수록 압박이 약해지는 것 같네요."
몇시간 전에 비하면 평정심이 많이 회복된 기색으로 아야나미 로유미가 대꾸했
다. 김형준이 그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피의 제단, 결계는 밤이 깊어갈수록 더욱 기운이 강해지고 있었다. 만약 일행이 여전히 결계의 중심부를 향해 갔다면 끔찍한 일이 벌어졌을 것이다. 그나마 외곽으로 갈수록 끈적끈적한 공기가 옅어지고 있으니 김형준의 결정이 틀린 것이 아니었던 것이다.
다들 안도의 한숨을 내쉬면서도 은연중에 자꾸만 뒤를 돌아본다. 아마도 일행을 이탈해간 능력자들이 염려된 탓이리라.
만약 결계의 중심에서 트루 블러드라도 만났다면, 그 안위를 장담하지 못할 것이다. 가뜩이나 어려운 상대인 트루 블러드인데 결계의 영향으로 평정심마저 잃은 그들이라면 필시 곤욕을 치를테니.
날카로운 눈빛이 많이 누그러진 카탈리나 에란쵸가 흥하고 코웃음을 쳤다. 그녀는 아직까지 도망치듯 쫓겨가는 지금의 상황이 마음에 들지 않는 듯 했다.
일행은 그녀의 행동에 불편한 심정이 되어 조금이나마 걸음을 서둘렀다.
그런 일행들의 머릿속에 뱀파이어 일족이 지닌 저력에 대한 경각심이 강하게 뿌리 내리고 있었다. 왜곡의 괴수들이야 그렇다고 치지만 인류 곁에서 버젓이
살아온 이들이 이렇게까지 강대한 존재였다니 그들 입장에서는 세상 밖의 세상을 본 듯한 기분이다.
게다가 트루 블러드라니, 하나 하나가 일등급 이능력자의 힘에 못지 않다. 비록 블라가의 수작질과 결계로 인해 본신의 힘이 완전치 않았다고 하나, 리옌제를 비롯한 이능력자들이 하나를 상대하는 것 조차도 힘겨워했다.
그런 이들이 수백이라니 기가 질리지 않을 수가 없는 일이다.
루마니아에 들어섰을 때보다 몇배는 무거워진 마음으로 일행이 걸음을 옮겼다. 이제 이대로 조금만 더 걸음을 서두르면 루마니아의 국경에 도달할 것이다.
각국에서 파견나온 이능력자들이 배치되어 있을 국경의 경계선이라면 한숨 돌릴 틈 정도는 벌 수 있으리라.
자연 시간이 갈수록 일행의 속도가 올라간다. 결계의 끈적끈적한 공기도 이제는 희미해져가고 기식이 엄엄했던 2등급 이능력자들의 숨소리도 정상으로 돌아오고 있었다.
"휴. 저기 보이는군요."
아야나미 로유미가 희미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그녀의 말에 고개를 든 이능력자들이 저 멀리 보이는 철책과 시설들을 발견하고는 속도를 올렸다.
밝아진 얼굴로 걸음을 서두르는 일행들을 보고 덩달아 미소를 짓고 있던 김형준의 얼굴이 순간적으로 굳었다.
"잠깐만요!"
일행의 걸음이 순식간에 멈췄다. 은연중에 일행의 리더 역할을 하던 김형준이다. 루마니아 안에서도 가장 많은 감염자들을 처치했고, 트루 블러드와의 전투에서도 아야나미 로유미와 더불어 수위의 전투력을 보여주었던 그다.
결계에서 우왕좌왕하던 이능력자들을 다독여 이곳까지 이끈 것 역시 김형준이었다. 그러다보니 갑작스러운 말에도 일행들은 반사적으로 걸음을 멈췄다.
"뭔가 이상합니다."
김형준이 미간을 좁히며 저 멀리 경계선을 바라보았다. 이능력자들의 시선이 김형준의 눈을 쫓았다.
"음?"
김형준 다음으로 의문을 가진 것은 아야나미 로유미였다.
"기운이 느껴지질 않는군요."
그녀의 말에 김형준이 고개를 끄덕였다.
원래대로라면 수십의 이능력자들과 그 몇배의 군인들이 배치된 경계선이다. 그런 경계선에 지금은 단 하나의 생명력 조차도 감지되지 않았다.
"제길. 여기까지 왔는데."
카탈리나 에란쵸 역시 뒤늦게 그 사실을 깨달은 것인지 와락 얼굴을 일그러트렸다.
잠시 일행이 소란을 떠는 사이에 김형준은 생명력을 가닥 가닥 흘려보내 주변을 탐지했다. 역시나 예상대로였다.
경계선의 외곽은 말할 것도 없고, 막사가 있는 지역에서조차 느껴지는 기운이 하나도 없었다. 결계의 중심을 벗어나던 무렵 마주쳤던 수많은 뱀파이어들을 떠올린 김형준이 이를 악물었다.
트루 블러드에는 미치지 못하지만 그 정도 수의 뱀파이어들이라면 경계선의 이능력자들로 감당하지 못했을 것이다. 게다가 루마니아를 향한 경계망은 반대편에서 들이닥친 뱀파이어들의 공격에 속수무책이었을 테지.
꾹 눌러두었던 분노가 다시 치밀어 올라 저도 모르게 인상이 구겨진 김형준이 눈을 크게 떴다.
"살아남은 사람이 있습니다!"
처음보다는 상태가 많이 호전된 2등급 이능력자들을 짊어진 채로 김형준이 몸을 날렸다. 그를 따라 다른 일행들 역시 몸을 날렸는데, 경계선의 인근에 도달한 이능력자들은 하나같이 인상을 찡그렸다.
피냄새가 자욱하다. 시체 하나 보이지 않지만 사방에 가득한 혈향이 이곳에서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를 말해준다.
일행들이 사방을 둘러보는 사이에 김형준은 똑바로 한방향을 향해 달려갔다. 조급한 그의 발걸음이 멈춘 곳은 임시 막사의 뒤편에 놓인 간이 화장실 앞.
혈향이 가득한 곳에서조차 뚜렷하게 느껴지는 악취에 인상을 찡그리는데 그 안
에 있던 생명력이 꿈틀거린다. 어깨 위의 일행을 내려놓은 김형준이 눈빛을 보내자 쟈베트 샹피뉴를 비롯한 이들이 바닥에 내려놓은 2등급 이능력자들 곁에 섰다.
다른 이들이 경계를 서는 것을 확인한 김형준이 고개를 돌려 화장실을 노려보았다. 다른 때 같았으면 단숨에 간이화장실을 거꾸로 들어서 안에 숨은 인물을 털어냈을 테지만, 지금의 그는 망설일 수밖에 없었다.
분명히 느껴지는 것은 평범한 인간의 생명력인데, 무슨 탓인지 그 기운이 무척 혼탁하기 그지없었다. 조심스럽게 손을 내뻗은 그의 손끝을 따라 붉은 줄기가 허공으로 쏘아져 나갔다. 꾸물거리며 허공을 가로지른 줄기가 간이 화장실에 닿았다. 김형준이 일행에 눈빛을 보내자 고개를 끄덕이는 것으로 다른 이들이 준비가 되었음을 알려준다.
"엽니다."
김형준의 나직한 한마디와 동시에 문짝이 통째로 뜯겨져 나갔다.
"오, 맙소사."
아야나미 로유미가 신음을 내뱉었다. 신음을 내뱉진 않았지만 다른 일행들 역시 하나 같이 인상을 찡그린 얼굴이었다.
붉은 색과 갈색의 얼룩이 가득한 화장실의 내부는 마치 거꾸로 뒤집어 칵테일 만들 듯이 몇 번이나 흔든 듯, 온통 엉망진창이었다. 그리고 그렇게 오물투성이가 된 화장실 내부에 몸을 웅크리고 있는 인물 하나가 일행들의 눈에 들어왔다.
피와 오물을 가득 뒤집어쓴 인물은 불가리아 정규군의 복장이었는데, 화장실 문짝이 뜯어져 나간 것도 모르고 고개를 쳐들 생각을 하지 못하고 있었다.
".... 이제 시작... 이제 시작..."
입으로는 알 수 없는 말을 끊임없이 중얼거리고 있는 군인의 모습이 마치 미친 사람같았다.
김형준이 군인을 한참이나 살펴보다가 조심스럽게 다가갔다. 가까이 갈수록 더욱 심해지는 악취가 코를 찔렀지만 그는 내색치 않고 걸음을 옮겼다.
마침내 그의 지척에 다가선 김형준이 완만한 동작으로 손을 들어 군인의 어깨
를 짚으려는데, 갑작스레 그가 고개를 들었다.
"카악!"
오물인지 핏물인지 모를 검붉은 것들을 뱉어낸 그가 핏발이 잔뜩 선 눈동자로 김형준을 노려보았다. 검은자와 흰자의 경계가 모호해진 그 섬뜩한 눈빛에 김형준이 흠칫하는데 그의 입에서 가래끓는 듯한 음성이 새어 나왔다.
"파티는 이제 시작이다. 이곳에 들어설 왕국은 오르테아누 일족의 왕국. 초대장이 없는 이들에게 주어질 것은 파티의 흥겨움이 아니라, 겁화에 타오르는 고통일지니. 드라카 드 오르테아누의 이름으로 경고하건데 더는 다가서지 말라."
인간의 성대를 통해 나왔다고 믿기에는 지나칠 정도로 끔찍한 음성이다. 몇 번이나 같은 말을 반복하던 그는 크악하고 피를 토하더니 고개를 꺾었다.
갑작스러운 사태에 모두가 생각에 잠겨있는데 민용모가 입을 열었다.
"골치 아픈 놈들이 왔군요."
역시나 오랜시간 뱀파이어와 항쟁해온 늑대의 일족답게 이번에도 뭔가를 아는 눈치였다.
"오르테아누 혈족이라면 뱀파이어들 사이에서도 터부시될 정도로 과격한 이들입니다. 다른 이들이 인간 사회에 스며들어 살아가고 있다면 이들은 인간을 지배하고 사육하고 결국에는 포식하는 악질 중에 악질인 놈들입니다."
민용모의 말에 모두가 트루 블러드와의 만남을 떠올렸다. 그는 분명 인간과 척을 질 생각은 없다고 했다. 그저 그들만의 행사가 있으니 완곡하게 자리를 물려달라는 말을 했을 뿐.
하지만 이 드라카 드 오르테아누라는 놈은 다른 모양이다. 굳이 죽어가는 인간을 매개체로 이런 적의어린 메시지를 남길 정도라면 민용모의 말대로 과격한 일족임에 분명했다.
"제길 갈수록 태산이군."
루마니아 전체를 잠식한 블라가만 하더라도 골치가 아프다. 거기에 더해 몇이나 될지 모르는 트루 블러드와 뱀파이어들이 몰려들었다. 그런데 이번에는 또 드라카 드 오르테아누라는 놈이라니.
김형준의 얼굴이 잔뜩 찡그려졌다.
"1등급 몬스터를 처리하면서 단 한번도 마음 먹은대로 된 적은 없지만 이렇게까지 일이 복잡해진 건 또 처음이군요."
허탈하게 중얼거리는 그의 말에 모두가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이제는 어떻게 하죠?"
원래의 목표였던 경계선이 초토화되었다. 경계선의 인물들과 만나 전력을 정비하고 다음을 대비하려고 했던 일행의 계획이 소용 없어진 것이다.
게다가 루마니아만을 대상으로 삼는 줄 알았던 결계가 이곳까지 영향을 미친다. 희미하지만 그 불쾌한 공기의 압박이 넌덜머리 나 모두 한시라도 빨리 이곳을 벗어나고 싶은 모양이다.
하지만 김형준은 고개를 저었다. 이대로 어디까지 물러선단 말인가. 의식을 잃은 이능력자들의 회복은 이곳에서도 충분하다. 괜히 멀리 이동하는 것 보다는 이곳에서 추가 부대의 합류를 기다리는 것이 나은 계획이다.
김형준의 의견에 모두가 마지못해 고개를 끄덕였다.
"이건 고맙다고 해야 하나."
분명 초토화가 된 경계선이지만 그것은 인간에 한정된 일, 시설물은 기이할 정도로 멀쩡했다. 그저 사방에 가득한 혈향이 그들의 신경을 자극할 뿐이었는데, 그 조차도 쟈베트 샹피뉴가 몇 번인가 손을 휘젓자 흔적조차 남지 않았다.
일행이 잠시 쉴 곳을 마련하는 동안 김형준은 통신기를 꺼내들었다. 마지막 통신 이후 어쩐 일인지 먹통이 되어버린 통신기를 물끄러미 바라보던 그가 주변을 뒤져 통신시설을 찾아냈다.
"AF-KOR, 블러드 써쓰터. 불가리아 북방 경계선에 도착했습니다."
짧게 통신을 하니 어디론가 연결이 되어 있던 통신기 너머에서 금세 응답이 들려왔다.
'AF-KOR, 블러드 써쓰터. 확인 되었습니다. 간단한 상황 설명 부탁드립니다.'
다짜고짜 상황설명을 부탁하는 태도가 꽤나 급했던 모양이지 하고 생각한 김형준이 정색을 하고 상황을 설명했다.
갑작스러운 뱀파이어들의 난입과 1등급 이능력자들의 이탈, 그리고 초토화된 경계선과 드라카 드 오르테아누의 등장까지.
상황을 모조리 설명하자 통신기 너머에서 침음이 흘러나온다.
"그쪽의 대응책은 어떻게 됩니까."
마지막 통신을 통해 인근 이능력자들의 소집을 요청했지만 어떻게 됐을지 알 수 없다. 아무리 1등급 이능력자라고 해도 김형준은 어디까지나 이방인의 입장이었느니 그 권한이 제대로 먹혀들었을지는 알 수 없는 일이다.
'마스터 킴의 요청으로 인근 국가의 이능력자들이 전부 소집되어 이동중입니다. 항공편을 통한 이동은 루마니아를 중심으로 형성된 기류 탓에 불가능하고 현재 차량을 이용해 8개국의 이능력자 타격대가 현지로 이동중입니다.'
하지만 통신기 너머에서 들려온 대답은 의외였다. 이렇게까지 기민한 움직이라니, 전혀 기대도 못했던 김형준이 황당할 지경이다.
김형준이 황당해 하거나 말거나 상대는 계속해서 상황을 설명한다.'루마니아를 향해 몰려드는 뱀파이어들 탓에 이동이 빠르진 않지만 여섯시간
내로 북과 남의 경계선으로 각 150여명의 이능력자들이 도착할 겁니다. 마스터 킴을 포함한 능력자분들게 경계선 시설의 사수를 부탁드려도 되겠습니까?
'역시나 군대와는 다른 방식의 지령이다. 의견을 타진해보는 상대의 태도에 김형준이 알았노라 하고 대답했다. 어차피 이제 와서 쉴 곳을 따로 마련할 수도 없으니 그렇게 하려던 차다.
"그보다 결계의 타개책은 있습니까?"
결계 안에서 보였던 1등급 이능력자들의 폭금함과 2등급 이능력자들의 무력함은 왜곡의 중심에 비할 바가 아니었다. 아무리 많은 이능력자들이 몰려와봐야 결계에 대한 해결책을 찾아내지 못하면 멀리서 발을 동동 구를 수밖에 없었다.
염려 가득한 김형준의 질문에 상대가 단호하게 대답했다.'
바티칸의 성가대가 움직였습니다.'============================ 작품 후기 잊지 않고 찾아주신 독자님들께 감사와 사죄를 드립니다. 오늘 비축분 좀 풀겠습니다.
새벽에서 저녁 사이에 몇편 더 올리겠습니다.
*영화관련 쪽 일에 종사하는 사람이 아니라 저는 디자인-광고 회사를 운영중입니다. 이번에 영화제 행사가 있어 총괄지휘하다보니 업무가 바빠서 그간 업뎃을 못했답니다!